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58)
58화
* * *
주 행수는 쓰러지는 서기들의 모습을 보고 멍한 표정을 짓다가 버럭 소리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오!”
“용의자 체포.”
장건은 붙잡은 서기의 입을 억지로 벌리며 짧게 대답했다. 주 행수는 그 소리를 듣고는 다시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주 행수. 이제 무림맹이 당신을 지켜줄 것이오.”
적세인은 서기를 머리통을 후려쳤던 검집을 다시 등에 메며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주 행수는 진정하지 않았다.
“그럼 내 딸은! 내 딸은 어떻게 하고!”
“딸?”
“이놈들이 내 딸을 납치했소!”
그의 외침을 들은 적세인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장건과 눈을 마주쳤다.
“···어떻게 된 건지 알겠군.”
마주 고개를 끄덕여준 장건은 붙잡고 있던 서기의 입에서 분리되는 어금니와 독단을 꺼내며 물었다.
“이 자들이 그쪽 딸을 납치하고 요구한 게 뭐요? 이 신사천을 뜨라는 것?”
주 행수는 불안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대답을 망설였다. 그런데 그때 상가의 일꾼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행수님!”
“괜찮으십니까, 행수님!”
일꾼들은 각자 몽둥이니, 빗자루니 하나씩 잡고 몰려왔다. 그래봐야 무공 한 자락 익힌 기색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열댓 명이 그렇게 몰려오니 위협적이었다. 적세인이 그 사람들을 보고 반사적으로 다시 등 뒤의 검을 천천히 붙잡아갔다.
일꾼들은 쓰러진 서기를 보고 웅성거렸다.
“엇! 왕 서기님은 머리에서 피가 나는데!”
“저 자식들! 어디서 갑자기 들어와서···”
“조용히들 해!”
하지만 그 웅성거림은 주 행수의 외침으로 조용해졌다. 그는 조금 전의 당황을 지우고 상회를 이끄는 행수의 얼굴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그가 일꾼들을 돌아보며 다시 말했다.
“다들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괜한 소란 일으키지 말고 다들 하던 이사 준비 계속해. 이분들은 무림맹 무사님들이니까 안심하고.”
일꾼들은 그 말에 자기들끼리 돌아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휘휘 손을 휘젓는 주 행수의 모습에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들이 되돌아간 것을 본 주 행수는 휘젓던 손으로 자기 이마를 감싸 쥐며 적세인과 장건을 돌아보았다.
“···무림맹에서 이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군. 아니, 안 것은 둘째치고 이렇게 당당히 찾아올 줄은 몰랐소. 혹 일꾼 중 누군가 신고하기라도 한 것이오?”
그 말에 적세인이 자기 입술을 핥고는 대답했다.
“그건 무림맹 극비사항이오. 그보다는 주 행수의 상황을 좀 이야기해 보시오. 딸아이가 납치된 것이오?”
“다 알고 온 거 아니오?”
“보고받은 것과 본인에게 제대로 설명받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소. 그러니 주 행수가 이 사건의 시작부터 직접 이야기해 보시오.”
장건은 그녀가 입술에 침 한번 바르고 주 행수에게 사기 치는 것을 보며 슬쩍 웃었다. 그리고 그의 손아귀에 자빠져 눈알만 굴리는 서기에게 빠른 손놀림으로 점혈을 가했다. 주 행수는 그 타다닥 하는 소리에 움찔 놀랐지만, 그 후 서기가 바싹 굳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그들에게 믿음이 간 듯 결국 입을 열었다.
“···난 원래 중원 장강에서 운송업을 하던 사람이었소. 그러다가 내 상회를 진짜 큰 상회로 키우려면 바다로 사업을 확장하고 중간 유통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 그래서 그 시작을 이 신사천으로 삼고 지점을 내려던 참이었소···”
이 주 행수라는 사람은 사업적 시야가 굉장히 넓은 사람인 듯했다. 장강의 길을 따라 운송을 하던 것에서, 신대륙과 중원, 그리고 더 먼 서쪽까지 이어지는 더 넓은 차원의 운송업을 떠올리고 사업을 확대한 야심가였던 것이다.
거기에 그 연결고리를 모두 자신의 사업체로 이어서 운송에서 나오는 이익을 모조리 먹으려던 것까지 보면 욕심 넘치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그런 자신의 야심 찬 계획의 첫발로 배를 마련하고, 이후 말이 통하지 않는 서역보다 먼저 신대륙에 연결고리를 만들 생각으로 이 신사천에 상회를 냈다. 여기저기 돈이 많이 들어갔지만 그는 이미 장강의 사업체를 통해 든든한 자금줄을 가지고 있었기에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더 큰 성공은 단순히 시간문제일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풀릴 리 없었다.
“···내 생각이 짧았소. 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먼저 이 길을 선점한 자들이 그리 쉽게 자기들 자리를 내놓을 리 없다는 걸 더 깊이 생각했어야 했는데···”
처음 그를 견제하던 것은 이곳 신사천의 상행조합이었다. 처음엔 그저 새로운 사업자 정도로 생각했던 주 행수가 본래 가지고 있던 중원 장강 사업체와 이 신사천 사업체를 연결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를 운송독점이라 비난하며 방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 행수는 그 문제를 단순히 돈으로 해결하려 했다. 조합원들을 자신의 돈으로 매수하고 사업에 끌어들여서 도리어 조합 자체를 잡아먹겠다는 식으로 움직였다. 그때 진짜 문제가 생겼다.
“···서신이 온 것은 일주일 전이었소. 당장 신사천에서 사업을 접고 떠나지 않으면 나는 물론이고 내 딸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서신이었지. 기존의 상행조합에서 보내온 것이 분명한 내용이었소. 당연히 나는 떠날 생각이 없으니 경호원을 늘리고 조합을 잡아먹는 계획을 더 과격하게 밀어붙였소.”
그는 천천히 사업을 가르칠 생각으로 데려온 자신의 딸아이에게도 조심할 것을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말로만 듣던 신대륙의 도시에 온 열다섯 소녀에게 그건 너무 가혹한 간섭이자 과한 걱정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그녀는 당장에 주 행수를 붙잡고 투정을 부렸다.
결국 그것을 버티지 못한 그는 야시장 구경을 허락해주었다. 경호원들과 떨어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아무리 협박 쪽지를 보냈다고는 해도 많은 경호원과 함께한다면 안전하리라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당연히 그건 실수였다.
“···황금 수십 냥을 주고 고용한 경호무사들이 모조리 목이 잘려 머리만 배달되었소. 거기엔 내 딸아이의 새끼손가락도 함께였지.”
이야기를 들은 적세인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물었다.
“왜 무림맹에 신고할 생각은 하지 않았소?”
“그야 머리와 함께 도착한, 지금 여기 누워있는 감시원들 때문이지. 본래 저 얼굴의 장본인들은 어찌 된 것인지 알고 싶지도 않소. 그리고 무림맹에 신고한다고 해서 내 딸아이를 무사히 데려와 줄 것이라 믿기도 힘들었고···”
주 행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순간 동안 이야기를 풀어낸 그는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장건은 그를 보며 형 장운도 비슷한 서신을 받았을지를 생각해보았다. 장가 상회는 주 행수와 다르게 아직 무슨 사업을 하겠다 확정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하남 장가가 부유하기는 해도 지금 주 행수의 이야기처럼 대륙과 대륙을 연결하는 규모의 사업을 도모하기에는 조금 모자랐다. 거기에 이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려면 자금보다도 큰 야심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했다. 그의 가문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장건은 조금 더 이 일을, 상행조합이라는 곳을 파봐야 한다는 걸 느꼈다.
“···무슨 이야기가 더 필요하시오? 어젯밤 머리와 서신을 받고 지금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게 내 이야기의 끝이오. 이제 내 딸을 좀 구해주시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주 행수. 무림맹이 당신의 딸아이를 구해서 안전하게 데려와 주겠소. 그리고 상회를 보호할 무사들도 금방 보내주겠소.”
적세인은 그렇게 말하며 행수를 달래고 자신이 기절시킨 서기를 어깨에 들쳐멨다. 그리고 장건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맹으로 돌아갑시다. 이자들을 심문해야겠소.”
그러나 장건은 고개를 저었다. 장가 상회에서의 일만 있었다면 상관없으나 당장 주 행수의 딸이 납치되었다면, 이건 이제 시간 싸움이었다. 상행조합이든 암룡대든 누군가든 더 수작을 부릴 시간을 줄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이쪽이었다.
장건은 더 망설이지 않고 눈알을 굴리는 서기의 몸에 빠른 손놀림으로 점혈을 가했다.
“장 무인! 지금 뭐 하는 것이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건 우리요. 빠르게 치고 들어가야 이들도 당황하고 허점을 드러낼 테지.”
“당장 여기서 심문하겠다는 것이오? 하지만···”
적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점혈을 받은 서기의 몸에서 우드득 하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적세인과 주 행수,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유일한 진짜 서기는 그 소리를 들으며 안색이 굳었다.
“이게 무슨···”
분근착골을 받은 서기의 두 눈이 뒤로 휙 돌아가 흰자를 드러냈다. 그의 몸에서는 우드득하고 과격한 소리가 나는데, 정작 움직이진 않고 그저 파르르 떨고만 있었다. 하지만 시뻘게진 얼굴과 닫힌 입을 뚫고 흘러나오는 거품을 보아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으리라는 점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장건은 그 입에서 흐르는 거품에 흐릿한 핏기가 보일 때쯤에야 다시 혈을 짚었다. 서기는 켈룩거리며 기침을 했다. 어찌나 고통스러웠는지 그의 눈가에선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만, 제발··· 사, 살려주시오···”
“이름.”
서기는 떨리는 눈으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가 망설이는 듯 보이자 장건은 다시 손을 들었다.
“자, 잠깐! 말하겠소! 임결! 내 이름은 임결이오!”
장건은 손을 내리지 않고 계속 물었다.
“암룡대 번호.”
암룡대의 이름이 나오자 임결의 눈가에 놀라움과 체념이 동시에 어렸다. 장건이 다 알고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십삼호, 암룡이십삼호요.”
“저 친구는?”
“이십이호···”
그가 순순히 대답하자 장건의 손도 내려갔다.
“왜 암룡대가 상행조합의 일에 끼어들었지?”
“···난 그저 임무를 부여받고 움직였을 뿐이오. 저 상인이 신사천을 떠나는 동안 별다른 행동이 없는지, 있다면 무슨 행동을 하는지 감시하고 보고하란 임무 말이오.”
“상황 자체는 모른다?”
“난 말단일 뿐이오. 위에서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는 거지.”
“네 위가 누군데?”
임결은 입술을 핥으며 망설였다. 그러다가 다시 올라오는 장건의 손을 보고는 픽 하고 웃어버렸다. 그의 입가에서 피 섞인 거품이 살짝 튀었다.
“제기랄··· 교육받을 때도 이런 고문은 없었는데···”
“고문에 대한 교육도 받았나?”
“···끔찍한 교육이었지. 고문에 대한 내성을 길러주는 게 아니라 거기에 겁을 먹고 붙잡혔을 때 독단을 씹게 만들기 위해서란 말이 있을 정도로. 인제 보니 그게 맞는 교육인 것 같군··· 독단을 더 준비했어야 했는데···”
“그럼 쉽게 가자. 네 위가 누군지 말해.”
그는 장건의 차분한 말투에 결국 두 눈을 꾹 감으며 대답했다.
“난 평소에 부두에 있는 창고에서 일꾼으로 있소. 짐 나르는 일을 하다가 임무가 떨어지면 오늘처럼 위장하고 작업을 하지. 임무는··· 보통 거기서 야간 창고지기를 하는 형 노인에게서 받소.”
“무슨 창고.”
“지금 부두에 정박한 범선 중 붉은 돛을 달고 있는 배가 하나 있소. 그리고 그 범선 앞에 십삼이라는 번호가 달린 창고가 있지. 그곳이오.”
장소를 알아낸 장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적세인을 돌아보았다.
“난 바로 그 창고를 찾아보겠소.”
“아, 아니 잠깐! 혼자 가겠다는 말이오? 위험하오! 어느 황, 아니, 고수를 만나게 될지 모를 일이지 않소! 우선 이들을 무림맹으로 압송하고, 순찰대의 지원을 받아 움직여야···”
“그렇게 시간이 많을 것 같지는 않군. 걱정하지 마시오. 상황이 나빠도 내 몸 정도는 뺄 수 있으니까. 게다가 지원을 받아 움직임이 커지면 행수의 딸아이가 위험할 수 있소.”
듣고 있던 주 행수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안 돼!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소!”
“아니, 그렇다고 무작정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이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시오. 애 찾아올 테니까.”
장건은 더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허리에 맨 칼을 한번 추스르고 성큼성큼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자, 잠깐! 장 무인! 장, 장건! 그럼···”
주 행수를 달래던 적세인은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본인 어깨에 멘 놈과 땅바닥에 누워있는 암룡대원을 번갈아 보고는 발걸음을 멈칫했다. 그리고 그 잠깐 사이에 장건은 건물 어귀로 사라져버렸다.
“···그럼 이 둘을 나 혼자 업고 가라고···?”
누워있는 암룡대원 임결과 주 행수, 그리고 상회 서기 모두 혼자남은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적세인은 한숨을 푹 한번 내쉬고 어깨에 멘 놈을 추슬렀다. 간만에 땀을 좀 뺄 것 같았다.
* * *
장건은 빠르게 움직였다. 신사천 남행로에서 서쪽의 부두로 움직이며 꽤 많은 사람이 보였는데, 대부분 야시장이나 주루를 향하는 사람들이었다. 중간에는 아예 사람들끼리 어깨와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많은 사람이 고여있는 길도 있었다.
하지만 장건은 그 무수한 사람들 사이를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스쳐 금세 빠져나갔다. 누군가 그에게 주목하고 있었다면 두 눈을 비비며 귀신이 지나갔으리라 겁먹을만한 장면이었다.
어쨌든 빠르게 신사천 도심지를 횡단해 부둣가에 도착한 장건은 곧바로 정박한 범선들을 살펴보았다. 대부분 흰색이나 누런빛을 띠는 돛 중에 유난히 튀는 붉은 돛은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간단한 이유였다. 범선들은 정박하는 동안엔 돛을 펼쳐놓지 않았다.
“이런.”
결국 장건은 배 하나하나 노려보며 묶인 돛을 살펴야 했다. 흐린 하현달의 빛이 그나마 그를 도와 부두를 비춰주었다.
그래도 장건의 예민한 시야가 어디 가지는 않아서 금방 배를 찾을 수 있었다. 장건은 곧바로 그 주변에서 십삼 번 창고를 찾았다.
“거 뉘시오?”
창고 가까이 다가가자니 누군가 등불을 들고 다가왔다. 굽은 등과 볼품없이 자란 흰 수염이 너저분한 노인이었다. 장건은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물었다.
“형 노인?”
“형 노인? 난 우 씨인데?”
그러나 이미 그의 노인답지 않은 목 근육을 확인한 장건이 웅크린 손을 쭉 뻗고 있었다. 그 손가락이 칼날이라도 된 것처럼 스아악 공기를 갈랐다.
노인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뒤로 자빠질 듯 넘어가며 장건의 손을 피하고 오른발을 장건의 턱으로 올려 찼다. 장건이 왼손으로 발을 막았다. 노인은 그 발차기가 막히자 곧바로 반대쪽 발로 장건을 걷어찼다.
장건은 쭉 뻗어가던 손을 끌어당겨 공격을 막고 뒤로 두어 걸음 밀려났다. 장건을 밀어낸 노인은 휘리릭 낮은 제비를 돌며 몸을 바로 세웠다.
“···누구냐?”
“애 찾으러 온 사람.”
“애?”
노인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그리고 곧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무표정해졌다.
“···주월 행수가 악수를 뒀군. 시키는 대로나 할 것이지 사람을 고용하다니. 너 때문에 그 소녀는 죽을 것이다.”
“그 전에 너부터 뒈질 거야.”
장건의 대답에 노인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다가, 갑자기 뒤로 휙 도망치기 시작했다. 장건이 어이없이 바라보자니 그는 순식간에 삼 장은 훌쩍 넘는 창고 벽 이곳저곳을 붙잡고 올라 지붕 위에 섰다.
노인은 지붕 위에서 장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마치 네가 여기까지 따라올 수 있겠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창고 아래에 있던 장건은 그 표정을 보며 어깨 한번 으쓱인 다음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는 노인처럼 뭘 붙잡는 것도 없이 딱 두 번 벽을 차고 지붕 위로 올라섰다.
“아니···”
지붕 위에 있던 노인은 순식간에 다시 똑같아진 눈높이에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얼씨구.”
장건은 그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다가 쫓기 시작했다. 흐린 반달 아래서 신사천의 지붕을 내달리는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노인은 그 얼굴과 자세가 위장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거침없는 뜀박질로 부두의 지붕과 지붕을 뛰어넘었다. 많은 장애물과 떨어지면 위험할 틈새에도 그는 지상에서 달리는 웬만한 청년보다 빨랐다. 그리고 장건은 그 각종 장애물과 처마 등을 붙잡고 끌어당기며 달려가는 모습이 경공이라기보다는 그저 노인이 가진 민첩성과 내공의 결합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어쩌면 저 노인이 오래 살아서 지금의 달리기를 무리武理로 엮어낸다면 그때는 진짜 수많은 장애물을 뛰어넘고 달려가는 것에 특화한 경공이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장건이 속도를 높였다. 우다다 달리는 노인과 달리 그는 가볍고 표홀히 걸음을 디뎌가며 빠르게 거리를 줄여갔다.
지붕과 지붕을 달리는 두 사람 아래 신사천의 거리는 야시장과 기루들이 내건 등불로 환했다. 밤하늘은 흐린 반달과 별빛으로 어둑했기에 마치 검은 바위섬 옆으로 여러 갈래로 갈라진 빛의 강물이 흐르는 듯한 풍경이었다.
그 위를 달리던 노인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가 자신을 거의 다 따라잡은 장건의 모습에 흠칫 놀랐다. 혼자 잇소리를 낸 그는 지붕을 박차고 훌쩍 뛰어 건너편 건물로 올라섰다. 그 건물은 아직 다 지어진 것이 아닌 듯 대나무와 나무 기둥으로 비죽비죽 비계를 이룬 누각이었다.
장건은 그곳이 주가 상회로 가며 보았던 상행조합의 새로운 누각이라는 것을 기억했다. 아무래도 더 복잡하고 장애물이 많은 곳이 노인 자신에게 유리하리라는 생각에 올라간 듯했다.
마침 그를 어디서 붙잡을지 가늠하던 장건도 이 한밤에 공사 현장을 찾는 이는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그 뒤를 쫓았다. 그리고 벌어진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며 노인의 등짝을 걷어차 버렸다.
“억!”
노인은 짤막한 비명 한번 지르고 앞으로 나뒹굴었다. 누각에 아직 지붕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바닥을 구르는 그 위로 환하게 하늘이 열려 있었다. 데구르르 나가떨어진 노인은 숨을 헉헉 쉬며 그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끄응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그는 터덜터덜 다가오는 장건을 보며 물었다.
“···주 행수가 그 짧은 새에 어디서 너 같은 자를 구했는지 모르겠군. 아직 이 신사천에서의 인맥이 그리 넓지 못한 자였는뎈-!”
장건은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주지 않았다. 곧바로 그의 얼굴을 걷어차 바로 눕히고 점혈을 하려 손을 들었다. 노인은 코피를 줄줄 흘리며 버둥거렸다.
“자, 잠깐! 내,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아나? 나는 단순히 상행조합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자가 아니야! 내 뒤에는-”
“암룡대가 있지. 그보다 더 뒤에는 황제가 있고.”
노인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 그걸 어떻게···”
“근데 진짜 황제가 있는지는 모르겠군. 그랬다면 이런 식으로 졸렬하게 움직일 게 아니라 화끈하게 다 불태워버렸을 테니까.”
“뭐, 뭐? 그게 무슨···”
장건은 어깨를 으쓱하며 와락 노인의 턱을 움켜쥐었다. 독단을 깨물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세워 점혈을 하려 했다.
“···”
노인은 자신의 턱을 부수어버릴 듯 붙잡은 장건의 손아귀와 이제 곧 당하게 될 고문에 대한 두려움으로 벌벌 떨었다. 그런데 손을 들었던 장건이 아무런 움직임 없이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곧 의아한 기색으로 눈알을 굴렸다.
다음 순간 장건의 손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노인의 몸을 타혈했다. 지난번부터 잘 써먹고 있는 분근착골은 아니었다. 그저 몸을 경직시키는 점혈이었다.
그렇게 노인을 무력화시킨 장건은 몸을 바로 세워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흐린 달빛이 덜 지어진 누각 위로 내리쬐고 있었고, 덕분에 하늘 위로 비죽비죽 솟은 나무 기둥과 대나무, 판자 등등이 복잡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에 숨어있던 누군가는 장건의 시선에 스르르 느릿한 움직임으로 걸어 나왔다. 그자는 커다란 덩치에 검은 무복을 입고, 호랑이 입이 그려진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복면 위에 있는 눈은 마치 진짜 호랑이처럼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