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61)
61화
* * *
침대에 대자로 뻗어 자던 장건은 눈을 떴다.
잠시 꼼짝도 하지 않고 눈만 끔뻑거리던 그는 스르르 상체를 일으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으로 보이는 상회 별채의 마당에는 쨍한 아침 햇살이 앙상히 잎을 벗은 나뭇가지에 뭉덩뭉덩 갈라져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약간 잠이 덜 깬 얼굴로 멀뚱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건은 천천히 침대를 벗어났다.
어제 주가 상회의 소녀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그 역시 장가 상회로 돌아와 상처를 살핀 후 곧바로 잠들었다. 운기행공으로 피로를 풀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냥 잤다. 한숨 자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대낮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푹 잠만 잔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나보니 탁자에 씻을 물과 수건이 놓여있었다. 아마 형수가 준비해두고 나간 모양이었다. 장건은 가볍게 세안을 하고 밖으로 향했다.
내원에서는 장운 가족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삼촌!”
“삼촌이다!”
밥을 먹던 조카 장상, 장영이 제일 먼저 장건을 발견하고 불렀다. 옆에선 염 씨가 일어나며 손짓했다.
“일어났어요? 와서 앉아요. 식사해야지요.”
“아, 예.”
장건은 탁자로 다가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염 씨는 밥그릇을 챙기러 잠시 자리를 떴고, 두 남매는 밥을 오물거리며 초롱초롱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장운은 엄한 얼굴로 눈을 감고 밥을 씹고 있었다.
턱을 슬슬 긁적이고 있자니 염 씨가 밥과 수저를 챙겨왔다. 장건은 그걸 받아 식사를 시작했다. 남매가 신이 나서 그를 불렀던 것과는 다르게 밥 먹는 동안 식탁에선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아이들과 염 씨가 묵묵히 밥만 먹는 장운의 모습에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달그락대는 소리만 이어지길 한참, 눈치를 보던 염 씨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려는 순간에 장운이 탁하고 밥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두 눈을 떠 밥을 우물거리는 장건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괜한 일에 휩쓸렸구나.”
채소볶음을 집어 먹던 장건이 그 말에 엉?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장운은 그런 얼굴을 마주 볼 낯이 없다는 듯 눈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그 무림맹 무사와 네가 짐작 가는 일이 없느냐 물었을 때, 그때 곧바로 내가 받았던 협박 서신에 대하여 이야기했어야 했다. 그랬으면 무림맹에서 사건을 추격했을 테고, 네가 싸움을 벌일 일까진 없었겠지. 하지만 상회 사람들 아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유모와 똑같이 위장한 그들의 모습에 난 덜컥 겁이 났단다. 딱 봐도 위험한 자들에게 걸렸음을 느꼈지···”
장건은 장운을 바라보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집었던 채소볶음은 슬그머니 밥그릇에 가져와 천천히 입에 넣고 씹었다. 어제 돌아와 곧장 자느라 못 들었는데, 역시 장가 상회도 협박 서신을 받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사실 유모의 죽음을 핑계로 곧장 중원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단다.”
“여보···”
염 씨가 장운의 손을 잡았고, 남매도 젓가락을 멈추고는 가만히 아비의 눈치를 보았다. 장건만 반찬을 집어 먹고 우물거렸다. 장운은 떨궜던 고개를 들어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가족들을 중원의 본가에 데려다 놓고, 돌아와서 제대로 한판 해볼 생각이었지. 그래도 내가 호남 장가의 장남인데 겁먹은 쥐처럼 그냥 도망쳐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가는 김에 너도 데리고 갈 생각이었고.”
장건은 밥을 우물거리며 작게 웃었다. 완전히 싸움을 피한 것은 아니니 담대하다면 담대하고, 가족의 안위를 생각해 물러나니 소심하다면 소심하다 할 행동이었다. 씹던 것을 꿀꺽 삼킨 그가 말했다.
“상인답군요.”
“하하하! 그럼! 그러니 내가 호남 장가의 첫째인 게지! 가문을 말아먹지 않고 운영하려면 마땅히 상인이 되어야지.”
장운은 옆에 둔 찻물을 가볍게 홀짝인 후 말을 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이 신사천에서의 일은 잘 풀릴 것 같다. 그 협박 서신 뒤에 신사천 조합이 있었다며? 아마 무림맹에서 그 조합을 해체할 거다. 그럼 이 신사천의 상계는 전국시대에 접어드는 것이지. 잘만 하면 새로운 상행조합의 중심에 장가 상회를 둘 수 있어.”
장건은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계속 밥을 먹었다. 그제 점심때 밥을 먹고 여태 아무것도 먹질 않아 배가 고팠다. 그 뒤 장운은 혼자 신이 나서 온갖 사업계획을 주절거렸고, 염 씨와 남매도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치고 하인이 다가와 접시를 치우고 차를 차렸다. 그리고 그때 장운은 일찍부터 상회를 찾아온 다른 신사천 상인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벌써 새로운 조합을 위한 물밑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장영이 꼬무락대며 차를 마시자 오빠 장상이 그걸 거들어주었다. 장건과 염 씨는 그걸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염 씨가 조용히 말했다.
“도련님, 사실은··· 저도 그 협박 서신을 보았어요. 그런데 그 이후에 유모가 갑자기 아프다 하고 나오질 않으니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장건은 피식 웃었다. 서신을 단순한 장난이나 허세 정도로 여겼던 장운과는 달리 염 씨는 진짜 불안함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와중 장건이 나타나니, 그가 무공을 좀 했다는 기억에 아이들 옆에 두었던 것이다.
“뭘요. 조카들을 지키는 일이었는데요.”
장건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대답했다. 만약 그날 오후에 그가 이 자리에 없어 저 남매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 그땐 장건부터가 자신에게 화가 났을 것이다.
“···고마워요, 도련님.”
염 씨는 살짝 눈물 맺힌 눈으로 그리 말했다. 어제 적세인에게 주가 상회의 딸이 손가락 잘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이 겁이 났던 모양이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남매도 그리될 수 있었으니까.
그 후 네 사람 모두 차를 마시며 잠시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장운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 뒤에 따라 들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장건!”
적세인은 손을 들어 장건에게 인사하고, 염 씨에겐 가볍게 포권을 쥐어 보였다. 편하게 하라니 진짜 그렇게 하는 모습이었다. 장건은 옅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어쩐 일이오?”
“아, 일이 어찌 정리되었는지 알려주려고 왔소. 이 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게 장 무인이지 않소?”
그녀의 말에 장운과 염 씨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두 남매는 다시 초롱초롱한 눈으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장건은 멋쩍은 표정으로 턱을 긁적이다가 다시 물었다.
“어째, 그 덩치는 잘 붙들려 있소?”
“덩치? 아, 그, 호랑이 복면 말이군. 잘 잡혀 있소. 나머지 상행조합 관계자들도 다 잡아들였지. 이제 위에서 알아서 할 일만 남았소.”
황군의 이름을 가리려 돌려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엉뚱하게 장운의 표정이 밝아졌다. 상행조합 관계자가 잡혀갔다는 말 때문인 듯했다.
“그리고 그쪽의 공적에 대한 일인데, 맹주님께서 직접 훈장을 내리실 것이오. 포상금도 꽤 많이 준비하고 있지. 원한다면 무림맹에 자리도 하나 마련해 줄 것이오. 어떻소?”
고개를 끄덕이던 장운과 염 씨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무림맹주는 중원에서도 유명한 대협이자 황제에게 공인받은 신대륙의 정의와 질서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특히 황제가 서신으로 황군 관직을 권했을 정도라는 이야기가 있어 장씨 세가에게는 더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장건은 뚱한 얼굴로 내원의 나무를 바라보며 찻잔을 홀짝거렸다. 적세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기쁘지 않소?”
“글쎄. 내일쯤 신사천을 떠날 생각이었는데. 그 전에 주는 것이오?”
“그··· 맹주님의 일정이 비는 건 일주일은 지나야 하는데···”
장건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못 받겠군.”
적세인은 그 대답에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말문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장건의 눈을 바라보다가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훈장과 포상금은 내일 내가 가져오지. 그래도 주는 건데 받아야 하지 않겠소?”
장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세인은 이후 장운에게 며칠 안으로 무림맹에서 좋은 이야기를 가진 사무부원이 찾아올 것이란 이야기를 전하고 떠났다. 그녀가 떠나자 장운이 의자에 앉아 장건에게 물었다.
“아니, 무림맹원이 될 기회를 이렇게 차버리는 게냐? 잘하면 황군에 편입할 수도 있는 자리를?”
“여보, 그 황군 편입은 소문이잖아요.”
“아니, 그래도 지금처럼 떠돌아다니는 것보다야···”
그 말에도 장건은 대답 없이 내원을 보며 차만 마셨다. 장운은 그 모습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가 어떻게 살지는 네가 정하는 게지.”
하지만 그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그래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다시 말을 꺼내려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때 하인이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누구?”
“주가 상회의 주월 행수님입니다.”
장건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침부터 찾아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를 일이었다.
* * *
견우영은 어둑한 지하 감옥에서 목과 양 손목을 억죄는 칼을 차고 꿇어앉아 있었다. 그는 다른 암룡대원들과는 다르게 홀로 이곳에 수감 되어 있었고, 목에 찬 칼 외에도 단전과 등에 내공을 억제하는 장침이 박혀 있었다. 철창 앞에는 한 무사가 앉아서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지금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은 목에 찬 칼 윗부분, 얼굴뿐이었다.
그렇게 숨만 쉬는 그의 머릿속에서는 지금 장건과의 싸움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저 싸우고 죽이려 들 때는 느끼지 못했던 장건이 보여준 동작들과 기예들의 놀라움. 그리고 그 기예가 자신의 무공을 때려 부쉈다는 점. 그것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 감정은 오직 빠르고 강한 무공만을 익히던 무인이 그동안 살아가며 내면에 쌓았던 세계관이 파괴되며 오는 충격이자 사실 또 다른 세계가 있었음을, 무공의 새로운 지평이 있었음을 깨닫고 오는 환희의 소용돌이였다.
그렇게 어두운 지하에서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도 모를 시간을 보내던 어느 순간, 덜컹하며 감옥의 문이 열렸다. 자신의 상태도 잊고 장건의 무공을 되새기던 견우영은 눈알을 돌려 감옥으로 들어서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둘은 무림맹 무사였고, 나머지 한 명은 등이 잔뜩 굽은 추레한 노인이었다. 그리고 그 노인의 손에는 큼직한 접시가 있었는데, 그 접시 위에는 희미한 김이 올라오는 생선찜이 있었다.
“식사 시간이오. 그쪽 집에 요리사가 그쪽 건강이 걱정된다며 사식을 해왔소. 식을 수 있다며 보따리에 담아 꼭 끌어안고 왔지 뭐요. 맛있게 드시오.”
내려온 무림맹 무사가 철창을 열며 정중히 말했다. 이는 견우영의 죄는 둘째치고 일단 그가 황군이었기 때문에 존중한 것이다. 무림맹도 겉으론 황제의 뜻에 따르는 무력 단체였으니까.
철창이 열리자 두 무사는 그 철창문 옆에 서서 그를 감시했다. 혹시나 억제를 풀고 난동을 부리면 막기 위해서였다.
등이 굽은 노인은 추레한 노인은 역시 무림맹에서 잡일을 하는 강 노인으로, 견우영의 식사 때 손과 몸이 묶인 그 대신 음식을 입에 넣어주는 사람이었다. 그 노인은 느릿한 손으로 젓가락으로 생선찜을 약간 집어 견우영 입에 들이밀었다.
견우영의 눈이 그 생선찜을 향했다. 이미 생선의 여기저기를 조금씩 떼어먹은 흔적이 있었다. 혹시 독이 들지는 않았나 검사한 것이다. 견우영은 입을 벌렸고, 강 노인은 느릿하게 생선찜을 조금씩 떼어 그 입에 넣어주었다.
견우영은 생선을 우물거리며 의아함을 느꼈다. 그 의문은 이 생선찜을 해온 인물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가 최근 새로 고용한 요리사는 그에게 이런 생선찜을, 그러니까 보양식을 해줄 리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 요리사는 자신을 싫어할 테니까.
그렇다면 혹시 황군과 암룡대의 정보를 감추기 위해 독살하려는 것인가 싶어도 이미 감시원들이 생선을 먹어보고 독이 없음을 확인한 후였다.
그때 그의 눈이 강 노인과 마주쳤다.
“···”
우물거리던 견우영의 입이 멈췄다. 강 노인은 추레한 겉모습과 달리 주름져 가는 두 눈에서는 묘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견우영은 그 눈빛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강 노인이 다시 생선을 떠 그의 입에 들이밀었다. 잠시 굳어있던 견우영은, 다시 입을 벌려 그를 받아먹었다.
잠시 후 견우영은 그 큼직한 생선 한 마리를 거의 다 먹었다. 강 노인은 젓가락을 집어넣고 숟가락으로 남은 살점과 양념을 싹싹 그러모아, 접시로 밑을 받치며 견우영의 입에 가져갔다. 견우영은 강 노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숟가락을 받아먹었다.
그 후 우물대던 견우영은 입안의 매큼한 양념에 가벼운 기침을 했다. 덕분에 아주 순간이지만 두 무림맹 무사가 견우영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 시야와 강 노인의 등, 커다란 접시 때문에 감옥 안의 아무도 볼 수 없는 사각이 생겼다. 그리고 그 사각에서 강 노인의 손이 은밀히 움직였다.
아무도 그 칼날을 보지 못했다. 오직 손의 감각만으로 찔렀기 때문에 강 노인 본인조차도 칼날을 보진 못했다.
그렇게 접시 밑에 붙어있던 종이보다 얇은 칼날이 견우영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 칼날이 어찌나 예리한지 견우영의 옷에는 갈라진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후 강 노인은 접시와 수저를 들고 일어났고, 가벼운 기침을 한 견우영은 꿀꺽 입에 문 음식을 삼켰다. 그가 식사를 마치는 걸 확인한 무림맹 무사들은 다시 철창을 닫고 강 노인과 함께 지하 감옥을 나섰다.
견우영은 흐려지는 눈으로 올라가는 강 노인이 떠난 감옥 문을 바라보았다. 다른 암룡대원들은 모두 말단이라 아는 것이 없으니, 그만 이렇게 죽으면 황군은 암룡대에 대하여 오리발을 내밀 수 있었다. 어차피 서로 다 알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거리긴 해도 견우영이라는 증인이 있느냐 없느냐는 천지 차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마 저 암룡대원, 암룡삼호는 단순히 그런 이유 외에도 암룡대를 사적으로 좌지우지한 견우영 개인에게 징벌을 내린 것이기도 할 터였다.
긴 듯 짧은 듯한 상념 후 그는 눈앞이 점점 더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폐하··· 저는 그저···”
“뭐요?”
의자에 앉아있던 무림맹 무사가 그 중얼거림을 듣고 되물었다. 하지만 견우영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무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어나 철창에 다가갔다.
“···어, 어어?”
견우영의 가슴팍에서 이제야 스며 나온 핏물이 점점 웃옷을 물들이고 있었다. 무림맹 무사는 다급히 철창을 열고 들어가 그를 확인했지만, 이제야 쏟아져 나오는 피와는 달리 견우영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