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62)
62화
* * *
“정말 연이 혼례식에도 안 가볼 생각이냐?”
다음날 아침 장가 상회 앞, 배웅을 위해 나온 장운이 그렇게 말했다. 조조에게 안장을 채우던 장건은 끈을 당기며 대답했다.
“내가 일가친척 다 모인 장소에 가면 좋은 꼴 보진 못할 겁니다.”
장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여동생 장연 본인은 기뻐하겠지만 어머니 양 부인과 가문의 어른들은 장건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안부나 전해주십시오.”
“···그래. 네가 잘살아있다고, 무공은 더 강해진 것 같다고 전하마.”
장건은 씨익 웃어주고 안장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를 배웅하러 나와준 장운의 가족들과 아침 일찍 훈장과 은전을 가져다준 적세인을 둘러보았다. 두 남매는 시무룩해 보였고, 염 씨도 아쉬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적세인은 다른 걱정거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장건과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굳이 무림맹과 더 얽히기 싫었던 장건은 더 묻지 않았다. 그냥 마주 끄덕여주고 남매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라비 장상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중에 또 놀러 올 거죠?”
“올 거죠?”
옆에 있던 장영이 오라비의 말을 따라 했다. 장건은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미소가 나왔다.
“그래, 나중에.”
삿갓을 쓰며 그리 대답한 장건은, 이후 삿갓 끝을 붙잡고 염 씨와 장운, 그리고 적세인에게 슬쩍 한 번 더 고개를 숙여주었다. 그리고는 툭툭 조조의 고삐를 당겼다. 며칠 놀고먹으며 빈둥거린 조조가 귀찮다는 듯 푸르륵거리며 슬렁슬렁 걷기 시작했다.
장건은 그렇게 자신을 배웅하는 장운 가족과 적세인을 뒤로 하고 장가 상회에서 멀어졌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장운 가족은 또다시 바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상회 안으로 들어갔다. 적세인만이 남아서 멀어지는 장건을 바라보았다. 견우영이 죽었음을 말해야 할까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그가 그렇게 완전히 멀어져서야 한숨을 내쉬며 맹으로 복귀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장운의 상회를 떠난 장건은 곧장 신사천을 뜨지 않았다.
그는 지난밤 장운과 염 씨가 내민 용돈과 무림맹 포상금, 거기에 주가 상회의 주월 행수가 어제 주고 간 사례금 등등 수중에 돈이 많았다. 평소라면 어디 술집이라도 하나 들어가 죽치고 시간을 죽였을 테지만, 지금은 일단 칼을 바꿔야 했다. 황군 교위와 싸우며 칼날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조조를 타고 가던 장건은 신사천 장인 거리에 이르러 안장에서 내려 고삐를 끌었다. 사람이 많이 다녀 말을 타기 좋지 않았다.
“···이거 순금인가?”
장건은 조조를 끌고 걸어가며 조금 전 아침에 적세인이 준 무림맹 훈장을 살펴보았다. 여섯 꼭짓점을 가진 별 모양의 황금색 훈장에는 검은 글씨로 무림武林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둘러보던 장건은 그냥 조조의 안장 가방에 대충 쑤셔 넣었다. 나중에 금전이 급하면 팔아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곧 검과 칼을 벼려주는 대장간 앞에 멈춰 섰다. 안쪽에서 아침부터 땡땡거리는 망치질 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보니 주변에 다른 대장간들에 비해 너무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또 너무 작지도 않아서 장건의 마음에 들었다.
조조를 세워놓고 가까이 다가가니 청소를 하던 청년이 그에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뭐 찾으십니까?”
가게 안을 스윽 둘러보니 여기저기 걸려있는 무기도 많았고, 그 외에도 농기구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슬쩍 청년 뒤에 있는 문 너머를 보니 벌건 가마의 빛과 그 앞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사람 둘이 보였다. 머리가 허연 노인과 그를 닮은 중년인이었다. 그들을 보고 눈앞에 청년을 보니 그도 다른 두 사람을 닮아있었다.
“하하. 제 아버지와 할아버지십니다.”
“3대가 모두 대장장이요?”
“아뇨, 전 아직 망치질도 제대로 못 해서요. 대장장이는 아닙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뭔가 뿌듯해 보이는 표정이 일에 큰 자부심을 가진 것 같았다. 장건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칼 하나 보고 싶은데.”
“주문이요?”
“아니, 만들어 둔 걸로.”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쪽에서 칼 몇 자루를 꺼내왔다. 장건이 보니 그냥저냥 괜찮은 날붙이들이었다. 하지만 잠시 그 칼을 둘러보던 장건은 그것을 내려놓고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주월 행수가 쥐여준 사례금이 들어있었다.
“이 금액에 맞춘 걸로 보고 싶은데.”
청년은 별생각 없이 주머니를 받아들었다가 화들짝 놀랐다. 은빛으로 빛나는 은전들 사이에 누런빛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이 금액에 맞춰서요?”
“없소?”
“···잠시 기다려주시죠.”
고민하던 청년은 주머니를 돌려주고 뒤쪽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망치질 소리가 멈추고 노인이 앞장서 나왔다. 노인이 나오자 다시 망치질 소리가 이어졌다. 장건이 슬쩍 보니 청년이 노인 대신에 망치질하고 있었다.
“그래, 비싼 놈을 보고 싶으시다고?”
장건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를 다시 주머니를 내밀었다. 노인은 그걸 받아들고 금액을 확인했다.
“흠. 이 금액이면 한 자루 새로 하나 주문해도 될 텐데.”
“오늘 중으로 신사천을 떠날 생각이오.”
“그러신가? 뭐, 기다리는 게 좋지만은 않지. 그럼 그 칼 좀 줘보시게.”
“칼?”
“자네 허리에 그거.”
지금 차고 있는 칼을 줘보라는 것이었다. 무림인에게 당당히 주무기를 내달라 하는 모습에 장건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순순히 칼집째 꺼내 노인에게 내밀었다. 노인이 무공을 익힌 것 같지는 않았고, 뭔가 위험한 의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노인은 그 칼을 받아 천천히 뽑으며 말했다.
“사람이 자주 쓰는 물건에는 어떻게든 흔적이 남는 법이지. 그건 무인들도 마찬가지고, 그 흔적에 따라 최대한 손에 맞는 무기를 맞춰주는 게 진짜 실력 있는 대장장이네. 난 반백 년을 넘게 철을 만지며 그 실력 하나로 먹고산 놈이야. 시간이 많으면 내가 딱 맞춤으로 하나 마련해 주는데, 시간이 없다고 하니 그냥 있는 것 중에 최대한 맞는 놈으로 드리지.”
노인은 진중한 얼굴에 비해 수더분하게 떠들며 장건의 칼을 꺼내 보았다.
“어허. 험하게 쓰셨구먼. 대부분 최근에 난 흉이고···”
이리저리 칼을 둘러보던 노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이거 실력이 대단하신 분이었군. 그런 분이 어쩌다 이리 날을 버리셨나?”
장건은 칼만 보고 자신의 실력을 짐작하는 노인의 모습에 눈썹을 까딱이며 살짝 웃었다. 무림인들도 대부분 직접 칼을 맞대기 전에는 상대의 실력을 확신하지 못했다. 이 노인은 쇠를 만지고 만지다 뭔가에 통달하기라도 한 것일까?
“무식한 놈이랑 한판 했었소.”
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이내 칼을 내려놓고 말했다.
“잠깐 기다리게. 내 위층에 잠깐 갔다 올 테니.”
그는 장건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후다닥 옆에 있던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장건은 그 모습에 다시 웃고는 대장간 안을 구경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노인은 칼집과 손잡이 모두 화려한 칼 한 자루를 들고 내려왔다.
“자, 이거 한 번 잡아보시게.”
장건은 그 칼의 화려함에 살짝 질렸는데, 칼집에 잔뜩 붙어있는 보석과 금장은 그렇다 쳐도 손잡이에 오색으로 치렁거리는 수실은 끔찍할 정도였다. 제사나 행사에서나 쓸 화려함이었다. 장건은 노인의 얼굴을 봐서 그냥 한번 잡아보기로 했다.
“오.”
그러나 그는 칼집과 손잡이를 만지는 순간부터 뭔가 마음에 든다는 걸 느꼈다. 뭔가 손안에 깔끔하게 감아 붙는다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칼날을 뽑았을 때도 그 느낌은 마찬가지였다. 시퍼렇게 빛나는 칼날은 단순히 예리하다는 것을 넘어 묘한 마력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장건은 금방 칼을 집어넣고 다시 노인에게 내밀었다. 살짝 기대하던 노인이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왜? 마음에 안 드나?”
“장식이 너무 요란한 것 같소.”
“칼은? 칼 자체가 마음에 안 드나?”
“그건 마음에 들지만···”
“그럼 됐네. 잠깐만 기다리게.”
노인은 장건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가게 뒤편 대장간으로 넘어갔다. 장건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노인의 말대로 대장간이나 잠깐 둘러보며 기다리기로 했다. 칼 자체가 그만큼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뭐하셔요?”
“신경 쓰지 말고 그거나 해.”
“아, 예에. 덕문아, 계속 쳐라.”
“네.”
대장간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장건은 눈앞에 괭이를 보며 그 땅땅거리는 망치 소리와 대화를 들었다. 대를 이어가는 가업이라. 그에겐 어딘가 낯선 모습이었다. 현생엔 가문의 뜻에 반한 떠돌이 무인이 되었고, 전생엔 아비 얼굴도 몰랐으니까.
거무스름한 괭이에 하얗게 벼려진 부분이 장건의 얼굴을 반쯤 비췄다. 형 장운을 만났기 때문인지 장건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두루뭉술한 생각들이 피어올랐다. 그의 비밀을 알고도 그저 가문의 영광만 드높인다면 상관없다던 가주, 그를 자기 아들이라 받아들이지 못한 양 부인. 이어진 상념은 그보다 더 먼 과거로, 새로운 삶 이전으로 나아가 한 여인의 얼굴 앞에 도착했다. 젊지만 피로가 어린, 그러나 하나뿐인 아들을 향해선 그런 기색 하나 없이 웃어주던 그녀. 어머니.
“오호. 여기서 자네를 만나다니.”
흐린 눈으로 먼 과거를 더듬던 장건은 뜬금없이 들려온 말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멀대처럼 큰 키에 깔끔한 무복을 입은 남자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장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건은 눈살을 찌푸렸다. 일단 얼굴은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장건의 표정을 보고 떨떠름하게 물었다.
“···나 기억 안 나나?”
“기다려봐. 곧 기억날 것 같으니까.”
키 큰 남자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허 웃었다. 그리고 장건은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제운성?”
제운성은 뒷짐을 진 그대로 허리를 살짝 굽히며 인사했다.
“다시 만나 반갑군, 장건. 그 이후 잘 지냈나?”
그는 전날 한 여인 때문에 장건과 얽혔던 제씨 가문의 무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떠올린 장건은 과거의 언덕 저 멀리 던져 놓았던 그 여인도 같이 떠올리고 말았다.
“시발.”
“···뭐, 뭐? 갑자기?”
제운성은 대뜸 튀어나온 욕설에 당황해 버렸다. 장건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누가 있지는 않았다. 제운성뿐이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제씨 세가는 이곳 신사천에 장원을 두고 있네. 일부러 자네를 찾아오고 그런 게 아니야.”
“이 대장간을 찾아온 거다?”
제운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곳 솜씨가 꽤 좋아서 개인적으로 검을 맡겼지. 그러는 자네는 왜 여기 있나?”
그때 대장장이 노인이 걸어 나왔다.
“자, 이제 어떤가?”
장건이 보니 아까 그 화려한 칼에서 칼집을 바꾸고 손잡이의 알록달록한 장식과 수실을 모두 떼어버린 깔끔한 모습이었다. 장건은 그걸 받아들고 손잡이를 당겨 뽑았다. 장식은 사라졌으나 칼날은 그대로였다. 수실이 사라져 거추장스러운 것도 없는 것이 장건의 마음에 들었다.
“괜찮군.”
“그렇지?”
장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칼을 집어넣고 노인에게 가볍게 포권했다.
“잘 쓰겠소.”
“허허. 그거 주문받고 만든 지가 꽤 됐는데, 완성할 때쯤 주문이 취소되었거든. 이제라도 주인을 찾아서 다행이군.”
칼을 받고 인사를 한 장건은 곧장 몸을 돌려 대장간을 나섰다. 그가 그냥 그렇게 나가는 걸 본 제운성이 당황했다.
“자, 잠깐! 이보게! 이런, 내 다음에 오겠소!”
대장장이 노인에게 그리 말한 제운성은 장건의 뒤를 따라 나오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게, 이왕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 아닌가?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하지 않겠나?”
“이제 날이 밝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마음 맞는 무인끼리 만나서 술을 나누는데 시간이 무슨 상관인가?”
장건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지난번엔 서로 칼 뽑고 싸우던 사이였는데.”
“그야 그때는 우리 사이에 연가의 밀정이 끼어있었기 때문이지 않은가. 이 드넓은 강호무림에서 은원이란 항상 복잡한 법이지. 자네만 괜찮다면 우린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장건은 그를 뚱한 얼굴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를 붙잡을 생각에 아무 말이나 내뱉었던 제운성은 그 얼굴을 보고 장건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애써 웃음을 지으며 포권을 했다.
“이거 참. 반가운 마음에 실수한 것 같군. 귀찮게 해서 미안하네. 가는 길 무탈하시게.”
장건은 가볍게 마주 포권을 해주고 몸을 돌렸다. 그가 앞장서 툭툭 끄는 고삐에 조조가 느긋하게 뒤를 따랐다. 그를 바라보던 제운성은 입맛을 다시며 다시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새 칼을 마련하고 제운성을 떼어낸 장건은 조조의 고삐를 끌고 장인 거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점점 인적이 드문 쪽으로 나아갔다. 대낮임에도 어둑한 골목에 접어들자 조조는 이 양반이 왜 이러나 싶어 머리로 툭툭 고삐를 당겼다.
장건은 멈춰서서 녀석의 목덜미를 슬슬 쓰다듬어 주었다.
“따라오는 놈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장건이 뒤를 돌아보자 골목 어귀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는 자가 있었다. 그는 손으로 킁킁 코를 훑으며 씨익 웃고 있었다.
“헤헤, 역시 장 형이군. 예민한 감각이시오.”
장건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골목길 위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시퍼런 겨울 하늘이 좁은 골목길 건물 사이에 갇혀 있었다. 그는 그 좁은 하늘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또 뭐냐, 양굉.”
“흐흐, 내가 말한 거 기억 안 나쇼? 우리 또 큰 건 한 번 해야지. 이번엔 진짜 큰 건이거든. 장 형도 혹할 거요.”
양굉은 어딘가 묘하게 비굴하면서도 간사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래도 그 낯짝도 자꾸 보니 정이 드는 것 같아서, 장건도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