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7)
7화
* * *
“아깐 걔가 죽은 줄 알았어요.”
먼 들판을 바라보며 느긋이 조조를 몰아가던 장건은 이환이 툭 던지다시피 한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햇빛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곤 등 뒤의 자기 아비와 함께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렇잖아요? 어떤 말이 그렇게 혀를 길게 빼물고 자요?”
장건은 피식 웃었다. 아까 아침에 일어났을 때, 조조가 바닥에 누워서 입을 쩍 벌리고 자던 걸 보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조조의 목덜미를 툭툭 건들며 말했다.
“좀 이상한 녀석이긴 하지. 가끔 나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아. 그래서 언젠가 팔아버리고 멀쩡한 말을 살 거다.”
조조는 장건의 말을 알아들은 듯 푸르륵 퉁명스레 투레질했다. 마치 자기도 질렸으니 얼른 팔아달라는 것 같았다. 이환은 고개를 돌려 그런 둘을 멀뚱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뒤로 젖혀 자기 아비에게 시선을 주었다.
“왠지 할아버지랑 군군이 생각나지 않아요?”
“군군? 그 황소?”
“네. 군군도 어딘가 사람처럼 구는 녀석이었잖아요? 할아버지는 걜 만날 구박했구.”
이윤은 아이의 기억력이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다섯 해가 넘었는데 그게 기억나니?”
“그럼요. 할아버지랑 군군이 얼마나 재밌었는데요. 그걸 어떻게 잊어버려요?”
“···그래. 그렇구나.”
어린 시절이 유독 길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른에겐 짧은 그 순간이 아이에겐 삶의 전부이기 때문이라 했던가. 장건은 이윤의 씁쓸한 웃음을 보며 그는 중원에서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는 걸 느꼈다. 어쩌면 중원에서 신대륙으로 온 사람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기억으로, 고통과 오욕의 과거를 잊어버리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장건도 거기서 벗어나진 못했다.
아이는 마치 어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듯 노인과 황소의 일화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윤은 가볍게 맞장구를 쳐주며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애써 잊으려 했고, 장건은 먼 언덕과 들판의 완만한 곡선에 눈을 두고 가만히 소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듣다 보니 재밌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군군이 제자리에 주저앉아선 할아버지를 보며 작작 좀 하라는 듯 길게 울었어요. 할아버지는 당장 매를 휘두를 것 같았고요. 난 그때 그 매가 너무 무서워서 군군이 맞으면 어떡하나 겁을 먹었어요. 그렇잖아요? 그 긴 회초리로 맞으면 아픈걸요. 군군이나 할아버지나 서로 봐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구는데···”
그때 장건이 조조의 고삐를 잡고 멈췄다. 이윤과 이환은 그가 멈춘 것도 모르고 앞으로 나아가다가 조조가 히히힝 길게 울자 그때서야 말을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마을까지는 아직 좀 더 가야 하는데요. 무슨 일이십니까?”
장건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뭔가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윤은 거기서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다시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장건이 훌쩍 말 아래로 내려 삿갓을 벗고 땅바닥에 귀를 가져다 대는 것이 더 빨랐다.
이환이 그걸 보고 중얼거렸다.
“귀에 흙먼지가 들어갈 텐데···”
장건은 다시 일어나 재빠르게 조조의 위에 올라타선 말했다.
“누군가 잔뜩 몰려오는데.”
짧게 말한 그는 이윤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달려 지나왔던 언덕을 향했다. 이윤도 깜짝 놀라서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주변보다 조금 높은 곳에 오른 장건은 두 눈을 찌푸리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윤은 그 옆에 따라붙어선 똑같이 눈살을 찌푸려가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의 눈에는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뭐가 몰려온다는···”
“저기요!”
어리둥절하던 이윤은 아들이 번쩍 손을 들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멀리 지평선에 걸쳐 꾸물거리는 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게··· 무슨··· 저기서 오는 소리를 들었다고요?”
장건은 이윤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두 눈에 내력을 집중했다. 조금 전보다 훨씬 또렷해진 시야에 우르르 말을 달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각자 손이나 등에 찬 흉악한 무기들과 제대로 씻질 않아 꼬질꼬질한 얼굴들, 잔뜩 화난 표정들로 보아하니 아무래도 좋은 뜻으로 달려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이윤이 덜컥 겁이 난다는 얼굴이 되었다.
“혹시, 어제 그 도적놈들 동료가 아닐까요? 그놈들이 전부가 아니었다면···”
장건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러면 저놈들이 이미 죽은 놈들을 포함해 마흔에 가까운 커다란 도적단이라는 말이긴 했다. 그렇게 덩치 큰 사파를 무림맹에서 가만 놔두고 볼 것 같지는 않았으나, 또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놈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 도적놈 중에는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저 새끼···”
코에 빙 둘러 붕대를 맨 놈. 장건이 지난 마을에서 바닥에 코를 갈아주었던 진양석이었다. 형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는데, 무능력해 보이던 동생이 어떻게 마을을 탈출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그 지부장이 풀어준 것일지도.
“아, 아니. 어쩌면 그냥 가는 길이 같은 사람들일지도 모르죠. 너무 지레 겁먹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불안한 눈으로 먼 점들을 바라보던 이윤이 나름 희망적인 관측을 내놓았다. 장건은 그런 이윤을 이해했다. 당장 어제 도적들에게 털려 배에 구멍 하나를 뚫었던 그였다.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당연했다.
하지만 당장 곁에 있는 이환도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불안감을 느끼는지 장건과 아비를 흔들리는 눈으로 번갈아 보고 있었다.
장건은 그 똘망똘망한 눈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적어도 가는 길이 같은 길손은 아닌 것 같군. 창칼을 든 모양을 보니 말이야.”
“그, 그러면··· 저 사람들이 전부···!”
대충 봐도 꾸물거리는 점은 서른이 넘는 것으로 보였다. 이윤은 이제 확연히 불안해진 얼굴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가 도적 열댓 명을 해치웠다는 것을 알긴 했으나, 지금 몰려오는 숫자는 그 세 배였다.
“그럼 마을, 마을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 정도 숫자면 웬만큼 작은 마을은 그냥 쓸어버릴 텐데.”
“···그냥 얼른 도망갑시다. 거리가 이렇게 머니까 따돌릴 수 있을 겁니다.”
“그쪽이 그런 상태로? 말을 오래 달리면 상처가 터질걸. 멀쩡한 바늘이 없어서 제대로 꿰매지도 못했잖아. 거기서 다시 피가 흐르면 죽을 거야.”
부정적인 대답에 이윤의 얼굴에 절망스러움이 묻어나왔다. 장건이야 고수이니 저 도적들 틈에서 무사할 수도 있지만, 그와 이환은 어쩌다 눈먼 칼 한 번만 맞아도 목숨이 달아날 것이다. 자연히 가슴 속에서 절망이 솟아올랐다.
그 표정을 가만 보자니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참 변화가 잘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장건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슬 웃다가 말했다.
“당신들은 먼저 마을로 가. 내가 저놈들을 따돌리고 천천히 가지.”
“예? 혼자서요?”
“어제도 혼자였어. 먼저 가 있으라고.”
이윤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도, 그,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저렇게 많은데요?”
위험한 상황에서도 냉큼 도망치지 못하는 것은 그가 이제 막 중원에서 넘어온 사람이라 그런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중원에서도 양심이 없는 사람은 넘쳐나니까.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장건은 슬쩍 다시 삿갓을 쓰며 얼굴을 감추고 말했다.
“애나 챙겨서 조심히 가. 마을에 가면 의원을 찾아보고.”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머뭇거리던 이윤은 곁에 껴안은 이환을 보고는 결심한 듯 고삐를 잡아끌었다. 그는 상처 때문인지 느릿한 속도로 천천히 장건과 멀어져갔다. 하지만 이내 멈춰서 뒤돌며 물었다.
“왜 그냥 도망가시지 않습니까? 무사님은 멀쩡하니 그냥 말을 달려 도망가도 되지 않습니까?”
장건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데려다주면 돈 준다며? 자꾸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숙소와 식사도 준비할 테니 빨리 오셔야 합니다.”
머뭇거리던 이윤은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조금 전보다는 빠르게 멀어져갔다. 이환이 그의 옆구리 사이로 빼꼼 머리를 내밀고 언덕 위에 선 장건을 바라보았다. 푸르른 하늘과 흐릿한 새털구름 아래 말을 세워 선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환은 그 뒷모습에서 외로움과 굳건함을 동시에 느꼈다.
잠시 후 장건은 이윤 부자가 충분히 멀어지는 걸 느끼며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사이에 훌쩍 가까워진 도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험상궂은 얼굴로 말을 달리던 그들은 언덕 위에 선 장건을 발견하고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언덕 아래쪽에 말을 멈춘 그들 중에서 한 중년 남자가 앞장서 나와 장건을 바라보다가 외쳤다.
“안녕하신가!”
장건은 대답 없이 푸르륵거리는 조조의 고삐를 잡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남자가 다시 외쳤다.
“난 감상청이라고 하네! 뭣 좀 물어볼 게 있는데 괜찮겠나?”
그는 말과 달리 장건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우린 내 동생을 죽인 흉수의 흔적을 쫓아왔네! 딱 지금 자네가 서 있는 방향으로지!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나? 혹시 아는 게 있다면 당장 말하는 게 좋을 것이네!”
빠르게 외치는 목소리에는 그 중년 남자의 분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를 바라보던 장건이 불쑥 외쳤다.
“그 동생 이름이 감순덕인가?”
언덕 아래 중년 남자, 감상청의 눈이 번쩍 뜨였다. 뒤에 선 도적들은 당장에 매고 있던 창칼을 뽑아 들며 장건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내 동생의 이름은 어떻게 알았나?”
장건은 조조의 안장에 묶어두었던 감순덕의 머리를 끌러 언덕 아래로 던졌다. 옷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머리가 데굴데굴 감상청의 앞까지 굴러왔다. 감상청은 그게 굴러오는 것을 부릅뜬 눈으로 바라보다가 훌쩍 말에서 뛰어내렸다. 이어 천 뭉치를 집어 든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천을 걷어보다가, 그 안에서 푸르딩딩해진 얼굴을 확인하고는 우뚝 멈췄다.
그는 잠깐 그렇게 멈춰서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뒤에 늘어서 있던 도적들은 그 시간이 길어지자 장건을 노려보던 눈을 돌려 자신들의 대장을 흘끔거렸다. 그중 한 남자가 조심스레 다가가서 감상청에게 말을 걸었다.
“···대형. 순덕이가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감상청은 아무런 대답 없이 자기 친동생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붕대로 코를 빙 둘러맨 자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저기, 형님들. 저놈 그놈인 것 같습니다. 제 형님을 기습한 놈이요.”
감상청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그 말을 듣고 장건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놈이 진청석을 한 수에 쓰러뜨린 놈이라고?”
“그, 기습이 아니었다면 형님도 그렇게 쉽게 쓰러지진 않았을 겁니다. 다 저놈이 비겁하게 기습을 해서···”
“진 건 진 거지. 그놈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던 거야.”
“아, 예. 뭐 그렇지요.”
진양석은 얌전히 찌그러졌다. 그는 형 진청석이 무림맹 지부장과 거래를 통해 겨우 탈출시킨 상태였다. 그 후 장건을 향한 복수와 무림맹 지부를 쓸어버리기 위해 평소에 기름칠해두었던 적사단을 찾은 것이다. 적사단은 그의 일을 해결해주기 위해 평소보다 빨리 집결했고, 그래서 빠르게 감순덕의 죽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때 감상청이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풀었던 천을 다시 감쌌다. 그리고는 그 머리를 품에 껴안으며 말했다.
“이호대장.”
“예, 대형.”
“저놈 죽이지 말고 내 앞에 끌고 와. 배후를 캐고 죽여달라는 말을 들어야겠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남자, 이호대장이 자기 검을 뽑아 들고 외쳤다.
“얘들아! 가자! 죽은 삼호대장과 동료들의 복수를 하자!”
“와아아!”
도적들은 곧바로 거칠게 말을 내달리며 고함을 지르고 손에 든 날붙이를 허공에 흔들어댔다. 제일 선두에서 이호대장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장검을 수평으로 뻗고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그 칼날이 안에 담긴 내력으로 시퍼렇게 반짝거렸다.
언덕 위에서 그걸 내려다보던 장건은 느릿한 동작으로 자신의 칼을 뽑아 들었다. 이어서 고삐를 당기자 말 조조가 앞발을 높이 들며 크게 울고는 언덕 아래를 향해 질주했다. 조조의 본래 달리기 속도와 언덕이라는 지형적 이점이 더해지자 둘은 마치 땅을 부술 듯 바닥을 찍으며 도적들을 향해 쏘아졌다.
제일 앞에서 내달리던 이호대장은 자신을 향해 마주 달려오는 장건을 보며 비죽 웃었다. 셋째를 해치웠다고 기고만장해 달려드는 것 같은데, 그는 그들 삼 단장 중 가장 약한 무사였다. 재능이 부족해서인지 마공의 성취가 가장 느렸던 것이다.
이호대장의 두 눈에서 검붉은 빛이 번들거렸다. 그는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어리석은 놈!”
두 사람이 서로를 스치는 순간 챙-하는 소음이 울렸다. 그리고 턱 끈이 풀린 장건의 삿갓과 잘려 나간 이호대장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말을 달리던 도적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의 눈동자에 이마 쪽 작은 상처 하나 입고 달려오는 장건과 머리를 잃고 스르륵 바닥에 떨어지는 이호대장의 모습이 담겼다. 그리고 그들이 뭘 어떻게 대처하기도 전에 장건이 도적들 틈을 통과해 반대편으로 빠져나갔다.
“···뭐? 뭐야?”
“저 새끼 어디가?”
도적들은 자신들을 통과한 장건이 그대로 달려 나가자 어리둥절해서 멈칫거렸다. 자기 동생 머리를 끌어안고 있던 감상청도 죽어 나자빠진 이호대장의 모습을 보며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그런 도적들의 모습을 보고 버럭 소리쳤다.
“이 병신들아! 저놈 쫓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