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74)
74화
오래간만에 흥분한 조조는 아직 그 혈기가 가라앉질 않는지 푸르륵 거친 숨결을 내뿜으며 장건 옆으로 따라붙었다. 장건에게는 마치 같이 싸우겠다는 몸짓으로 보였다.
“물러서, 조조. 너 지쳤다.”
장건은 가까이 다가온 조조를 부드럽게 밀어냈지만, 녀석은 전신에서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자신은 아직 피에 굶주렸다는 듯 으르렁댔다. 하는 짓거리만 보면 말이 아니라 야수가 따로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장건은 피식 웃었다.
“지금 쉴 수 있을 때 쉬어라. 이따가 또 달리다가 힘들다고 징징대지 말고.”
조조는 그 말에 정신이 퍼뜩 돌아온다는 듯 벌써 한참 멀어진 양굉과 태평대 쪽을 바라보았다. 큰 굴곡 없이 쭉 펼쳐진 황야가 녀석의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쨍쨍 내리쬐기 시작한 태양이 합쳐지니 행군에 그리 적대적인 환경을 또 찾기도 힘들었다.
전신에서 꿈틀거리던 녀석의 근육에 쭉 힘이 빠졌다. 살기가 담겨 번들거리던 눈알은 대번에 뭔가 꾀를 부릴 방법이 없나 찾으며 데구루루 굴러다녔다. 녀석은 그렇게 장건의 말 몇 마디에 힘이 빠진 채 추욱 처져서 타박타박 멀찍이 떨어졌다.
장건은 그를 보며 고개를 살살 저었다. 그리고 무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사경은 불쑥 말했다.
“똑똑한 말이군.”
“그래. 웬만한 사람보다 영악한 녀석이지.”
백사경은 천천히 자세를 잡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보다? 그래도 한낱 짐승이 사람보다 똑똑할 수는 없는 법이지. 이성이 부족한 존재들은 오행의 흐름과 뜻을 이해하지 못하니, 그는 결국 도道를 깨칠 수 있는 존재가 사람뿐임을 말한다. 하늘과 오행, 그 상생과 상극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다.”
칼을 늘어뜨리고 있던 장건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검 손잡이를 붙잡고 자신의 몸쪽으로 웅크리며 그 검극만은 정확히 장건을 노린 극단적인 자세는 넘어갈 수 있었다. 도리어 진짜 사일검법을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리고 소림을 제외하고 그가 흔히 구파九派라고 알았던 존재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약간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자세와 별개로 백사경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뭔가 달랐다.
그는 키가 크고 덩치가 좋으면서도 날렵하다는 인상의 남자였다. 전날 신사천에서 창을 던지고 불을 지를 것이라 협박하던 그를 보며 장건은 호승심을 느꼈다. 겉으로 보이는 자세와 몸이 그의 무위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직접 칼을 나눠보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다른 시정잡배들처럼 어설픈 자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장건의 표정은 천천히 굳었다. 뭔가 이상했다.
“너···”
그때 백사경이 기습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마치 허공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활이 떠 있고, 그 활시위에 자신의 검을 걸어둔 채 양손으로 잡아 뒤로 크게 당긴 듯한 자세에서 마침내 그 시위의 힘이 그의 몸 전체를 집어 던졌다는 듯 날아갔다.
그는 앞으로 쭉 뻗어나가는 검 뒤에 몸을 숨기며 하나의 화살이 되었다. 직선적이지만 동시에 진짜 화살보다도 빠른 일격이었다.
챙-하는 소리가 한 번 울리고 백사경의 몸은 장건을 지나 멈춰 섰다. 그러나 그 몸 전체에 실린 힘이 너무 강했던 탓에 그는 멈춰서고도 쭉 앞으로 밀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를 등지게 되었다.
장건은 칼을 두 손으로 잡고 하단으로 내린 채였다. 그의 왼 어깨쯤 옷자락이 스륵 갈라졌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굳은 표정 그대로였다. 옷자락만 갈라진 것으로 보아 백사경의 일격은 막혔다.
잠시 윙윙 떨리는 검을 붙잡고 있던 백사경은 곧바로 몸을 돌리며 장건을 공격했다. 자신의 일격이 막혔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곧장 공세를 이어가는 자세는 그가 어설프게 무공을 익힌 어중이떠중이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곧고 길쭉한 백사경의 검은 섬광을 번쩍이며 장건을 노렸다. 장건도 재빨리 몸을 돌려 그의 공격을 막았다.
백사경은 주로 찌르기 공격을 했다. 한 손으로 검을 들고 찌르기를 하는 것은 그 검의 무게를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손목과 팔에 무리를 준다. 그를 감당하기 위해서인지 그의 오른 팔뚝이 평범한 이들보다 반 배쯤은 더 굵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찌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길쭉한 검은 찌르기를 큰 줄기로 유연하게 움직이며 장건을 베고, 때리고, 맞부딪친 칼날을 미끄러져 깊숙이 파고들었다. 백사경은 흔한 신대륙의 무인들처럼 단순히 빠른 것을 넘어 검 끝에 힘이 실린 것은 물론이고 놀랍도록 화려했다.
동시에 그의 발끝은 한 마리 매가 먹이를 채기 위해 순간 땅을 밟는 것처럼 가볍고 빠르게 땅을 딛으며 장건을 몰아붙였다. 그 형식이 뚜렷하진 않았으나 장건이 보기에 그것은 분명 보법의 일종이었다.
그는 맹호 교위처럼 빠르지 않았고, 마공을 일깨운 마인들처럼 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처럼 무지막지한 내력과 사악한 마기로 비인간적인 동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비록 완전히 정립되지는 않았으나 육신의 극한 활용에 한 줌 내공의 힘을 더해 그 한계를 넘어선 무예를 보여주고 있었다. 장건이 보기에 그것은 진짜 무공이었다.
그러나 백사경의 그 모든 공격은 단 한 번도 유효타를 내지 못했다.
번쩍 파고드는 찌르기는 장건의 칼날이 가볍게 걷어 밀어냈다. 백사경이 장건의 빈틈과 사각을 노리기 위해 그 보법 비슷한 걸음을 디디면 장건은 그보다 훨씬 기묘한 걸음으로 사각을 지우며 도리어 방위를 선점해 공간을 압박해왔다.
백사경이 오른손의 검으로 공격하는 동시에 바짝 붙어 왼손으로 잡기를 시도하면 역시 번쩍 칼날을 튕겨낸 장건은 발을 치켜들어 그의 접근을 밀어냈다.
백사경의 공격과 보법을 통한 공간 선점, 속임수, 나아가 모든 움직임은 장건에게 털끝 하나 상처를 낼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처음 옷깃을 가른 것조차 일부러 그리 내준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더 놀라운 것은 장건이 그 와중에 공격은커녕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때 백사경의 찌르기를 또 한 번 걷어낸 장건의 칼이 이전과는 다르게 번쩍 하얀 섬광을 그렸다. 백사경은 그걸 막아내기 마땅치 않다는 판단에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는 그렇게 물러난 동시에 다시 검을 치켜들며 공격할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장건이 휙휙 칼을 털며 입을 열었다.
“너 뭐 하는 놈이냐?”
백사경의 몸이 우뚝 굳었다. 갑자기 입을 연 장건의 얼굴은 차가웠다. 기이하게도 단순히 생사의 싸움 때문에 긴장한 얼굴이 아니라 뭔가에 약간 골이 난 듯한 표정이었다.
백사경은 자기도 모르게 이미 상대도 아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대답했다.
“난 백사경이다. 태평대의 대장이며 죽은 갈웅의-”
쿵-하고 장건의 발밑에서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두 눈을 의심하게 하는 것은 그가 발을 높이 들거나 세게 내려찍는 동작 하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도 소리가 울리며 장건의 오른발은 메마른 땅을 약간 파고 들어가 있었다.
정교한 힘 조절로 땅을 울려 백사경의 말을 끊은 장건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검법 수준이나 움직임을 보니 무림맹주가 잘 가르친 것 같긴 한데···”
백사경은 당황하지 않았다. 갈웅이 잡혀서 고문을 당했음을 확인한 순간부터 태평대의 배후를 들켰으리라는 것을 짐작했다. 어차피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설사 무림맹주를 정치적으로 공격할 생각에 갈웅을 살려서 증인으로 썼다고 하더라도 맹주는 그 혐의를 가볍게 부정했을 것이고, 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현재 무림맹에서 맹주의 지위는 확고하다. 그것은 갈웅처럼 신사천의 한구석에서 술이나 마시는 것으로 알려진 한량이 아무리 증언한다고 흔들릴 단상이 아니었다. 애초에 태평대의 인원이 신사천의 패배자들로 이루어진 이유가 그것이었고, 진짜 맹주의 손은 백사경과 주선뿐이었다. 만약 이번 일을 잘 해결했다면 갈웅도 그 손 중 하나가 될 수 있긴 했을 것이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내 스승님은 중원 태산에서 도를 깨우치신 선인이다. 무림맹 같은 속세의 일에는 관여하시지 않는다. 태평대는 다시 나에게 무공을 배웠고, 거기엔 이 땅의 양민들을 보살피고 마땅히 하늘의 뜻을 따르도록 이끌라는 가르침뿐이다.”
장건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처럼 털털 웃었다.
“거짓말은 잘하는 편이군. 그런데 왜 무공은 되다 말았냐?”
“···뭐?”
백사경은 자신의 발뺌을 규탄할 것이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무공이 되다 말았다고?
하지만 그는 금세 다시 입을 열었다.
“···견문이 좁은 자군. 내 무공이 대세와 다르다 하여 되다 말았다는 것은···”
“너, 지금 네가 하는 동작에 담긴 뜻을 모르지?”
백사경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장건은 그가 약간 당황했다는 걸 느꼈다.
장건의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분명 마주 보며 서로의 날붙이를 겨눈 상황임에도 백사경의 검에서 제대로 된 감정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사경은 분명 싸움을 시작하기 전 갈웅의 복수를 하고 스승에게 장건의 목을 가져다 바치겠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장건이 그를 직접 마주해 싸우며 느낀 것은 말과 달랐다. 백사경은 진짜 부하의 복수를 하겠다는 복수심이 없었다. 그리고 현재 이 시대와 신대륙의 상황에 비하면 정말 놀라운 무공을 익히고 있으면서도 그 칼끝엔 아무런 진의眞意가 담겨있지 않았다. 그런 자는 그냥 살아 움직이는 나무토막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신기한 놈이군. 다른 부하들은 다들 신대륙을 위한 대의랍시고 정신이 반쯤 나갔는데, 그 대장 놈은 속으론 별 감정 없이 그들을 이용만 하고 있다니.”
이제 장건의 얼굴엔 씁쓸한 웃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이런 식이면 사일검법이고 지랄이고 차라리 어디서 마인이라도 하나 찾아 싸우는 게 더 얻을 것이 많았을 것이다. 백사경은 분명 그가 여태까지 만났던 무림인 중에 제일 무공이라 할 만한 움직임을 보여줬으나, 동시에 그 정신은 덜된 놈이었다.
무공을 이루는 요소에는 동작과 내공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도 필요했다. 내공만을 추구하면 그게 마인이고, 동작만을 추구하면 지금 여기 있는 허수아비였다. 그러나 마인이나 신대륙의 다른 무인들에겐 상대를 최대한 빠르게 죽이겠다는 분명한 목적과 살의가 있었다.
“···무슨 헛소리지? 내가 동작에 담긴 뜻을 모른다고?”
장건은 저자가 무림맹주에게 무공을 배우고도 여기서 이러고 있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맹주에겐 갈웅이나 백사경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장건은 늘어뜨렸던 칼을 양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사일검법이라는 말에 너무 오래 끌었다. 그만 끝내자.”
백사경은 장건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 대답을 들으면 자신이 왜 다른 사형제들처럼 더 수련하지 않고 무림맹 밖으로 나와 이상한 비밀결사의 대장이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더는 황천이네 뭐네 헛소리를 하며 덜떨어진 한량들을 이끌 필요도, 그놈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냉철하면서도 열정적인 인물을 연기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백사경은 자신을 바라보는 장건의 눈빛을 보며 그 대답을 들을 수 없으리란 걸 느꼈다. 그는 다시 한번 처음의 자세를 잡았다. 보이지 않는 시위에 천천히 그의 몸 전체가 걸렸다.
그를 마주 보는 장건은 칼을 두 손으로 잡았으나 여전히 축 늘어뜨린 자세 그대로였다.
사일검법. 그 익숙한 이름과 이름 그대로 해를 꿰뚫어버리겠다는 듯 전신을 쏘아내는 모양. 솔직히 장건은 갈웅에게 그 검법의 이름을 듣고 상당한 기대를 했다. 단 한 번 찌르기 동작에 내 모든 것을 담아 찌르는 폭발적인 일격은 여타 다른 신대륙의 무공과 비슷해 보이나, 장건은 그 이름처럼 해를 향해 쏘아지는 강렬한 의지가 담긴 검법을 기대한 것이다.
검 한 자루로 저 하늘의 태양을 꿰어버리는 검법이라니, 그것은 결국 장건이 꿈꾸는 무공의 한 모습이었다. 한 인간의 의지만으로 이 세상 자체에 흔적을 남길 무공. 백사경에게서 그 시도의 흔적이라도 보길 원했던 장건은 작은 실망감을 느꼈다. 무림맹주였다면 달랐을까?
그러나 곧 그는 왠지 시야가 선명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삼 장 앞에 검을 끌어안다시피 한 채 몸은 있는 대로 뒤로 기울인 백사경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흙먼지 가득한 옷, 무표정으로 굳은 얼굴, 그의 자세, 잔뜩 웅크려 힘을 모으는 근육들.
선명해진 시야는 백사경에게만 집중되지 않았다. 장건은 그의 시야가 단순히 두 눈으로 보는 각도를 넘어 이 주변 전체를 읽어내고 있음을 느꼈다.
메말라 부스러지는 붉은 흙바닥과 거기 섞여 뒹구는 작은 돌조각들, 물이라고는 한 모금 찾아보기 힘든 이 땅에서 기어코 줄기와 잎을 뻗어 올린 누런 풀, 그들은 희미한 바람에 부스럭 옅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저 멀리서 제가의 무사들과 암상의 무리가 죽어라 싸우는 것도 느껴졌다. 활을 쏘던 자들은 이제 길쭉한 칼이나 채찍, 창 등을 들고 제가와 싸우고 있었다. 전쟁이라도 벌어진 듯 우수수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 끔찍한 싸움터에서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 텁텁한 공기가 햇볕의 열기를 머금고 후끈거렸다. 그 열기는 그나마도 모자란 습기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 희미한 수증기 구름으로 뭉쳤다. 하지만 그건 빗줄기가 되어 내릴 정도로 무거워지진 않았다.
어느새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던 장건은 천천히 눈을 내려 백사경을 바라보았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백사경은 알 수 없는 위기감에 웅크려 모으던 힘을 폭발시켰다. 먼저 내력이 전신 혈도를 치달리며 근육 사이사이 신비한 거력을 선사했다. 잔뜩 오므려져 있던 근육들은 그 내공의 힘을 그대로 터뜨리며 쭉 몸을 폈다.
백사경이 다시 한번 화살이 되어 장건을 향해 쏘아졌다. 처음 도약 이후 발은 땅에 닿지도 않았다. 그는 앞으로 쭉 뻗어낸 검의 뒤에 몸을 숨기며 검 끝을 오직 장건의 심장을 향해서 고정했다. 그의 전신이 검광에 가려 검 하나로 보였다.
그 찰나의 세상에서 장건은 한발 늦게 움직였다.
그는 백사경처럼 거창한 준비 자세도, 폭발적인 돌진도 없었다. 그저 두 손으로 잡은 칼을 부드럽게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왼발 한 발 짝을 디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오는 사선베기를 했다.
백사경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장건은 너무 늦었다. 그의 사선베기보다 자신의 검이 그의 심장을 꿰뚫고 곧장 수비하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그는 장건의 디딤발과 칼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장건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백사경의 앞에는 오직 사선을 그리는 칼 한 자루만 보였다.
“···”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는 없었다.
저 멀리 고함과 비명을 지르며 싸우는 싸움터가 있건만 두 사람이 선 곳은 고요했다. 하늘로 치솟던 열기도, 매캐하게 일어나던 흙먼지도, 바람에 흔들리던 마른 풀도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이지만 그 일대의 소리와 움직임이 사라졌다.
백사경은 몸을 날린 추진력 그대로 장건을 지나쳐 주르르 옅은 고랑을 남기며 앞으로 조금 미끄러졌다. 그는 검을 앞으로 쭉 뻗은 채 굳었다. 반대로 그새 시간을 되찾은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흔들거렸다.
백사경이 말했다.
“···내 손에 들린 것과 나는 다르지 않으니, 내가 검이 되고자 하면 검이 될 것이다··· 웃기는군, 온몸을 검처럼 던지는 무공을 익히고도 남에게 이걸 배우다니. 스승님이 날 내칠 만도 하지··· 그걸 뭐라고 하지···?”
“신검합일身劍合一.”
“···신검···합···일···”
백사경은 그리 중얼거리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장건은 그가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칼을 털었다. 그 칼을 칼집에 집어넣은 그는 곧장 조조를 향해 걸어갔다.
가벼운 투레질을 하는 녀석을 가볍게 쓸어주며 말 위에 오른 장건은 그제야 앞으로 쓰러진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장건이 원했던 새로운 흔적이나 시도는 없었다. 그러나 사실 이미 장건의 내면에는 충분한 재료가 잔뜩 쌓여 있었다. 장건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들을 꺼내 잘 다듬어 자신의 것으로 승화하는 것뿐이었다. 아쉬워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품은 것들부터 잘 소화해야 하는 법이다.
“내가 배가 불렀지.”
짧게 중얼거린 장건은 고개를 돌려 아직 한창 싸우고 있는 제가와 암상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가 어느 한쪽을 위해 끼어들어 편을 들면 그쪽의 승률은 쭉 뛰어오를 것이다. 장건에겐 저기 있는 그 어떤 말보다 뛰어난 조조가 있으니까.
하지만 장건은 곧 양굉이 도망친 방향으로 조조의 머리를 돌렸다.
저 싸움에 그가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 아무래도 단순한 장보도 추적을 넘어선 음모가 있는 모양인데, 제가나 암상이 어떻게 될지는 장건이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물론 저 둘이 장건을 노린다면 그것이 실수임을 가르쳐줄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저들끼리 싸우느라 바쁘고, 양굉은 멀어지고 있으니 장건은 그를 쫓아야 했다.
장건은 양굉과 남은 태평대, 그리고 우회한 이연이 먼저 달렸을 동쪽으로 출발했다. 이제 양굉이 대가를 치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