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76)
76화
쇠 화살은 허공에 검은 선을 쭉쭉 그으며 날아왔다. 길쭉한 장대가 날아오는 것만 같았다.
장건은 그 날아오는 장대들을 가볍게 튕겨내며 달리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쉬운 장면은 아니었다. 그가 하는 것은 그저 강한 힘과 빠르기로 화살을 튕겨내는 것이 아니라 칼날 위로 부드럽게 흘려내는 것에 가까웠다.
그의 놀라운 동체시력과 손을 넘어 칼끝으로 발현된 태극권의 묘리가 이뤄낸 묘기였고, 그래서 그는 작은 창처럼 날아오는 쇳덩이들을 막아내면서도 피로감이 없었다. 하지만 검은 궁수들은 그런 장건의 기예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그저 견제를 위해서인지 계속 화살을 날렸다.
빠르게 달리는 말이 서로를 향해 달리며 장건과 궁수들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다섯 궁수는 그렇게 가까워지는 동안 각각 적어도 화살 네 대씩은 쏘았고, 장건은 그 화살들을 모조리 튕겨내며 상처하나 입지 않았다.
어느 정도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다섯 궁수는 둘과 셋으로 나뉘어 양옆으로 갈라졌다. 그들은 장건을 빙 둘러 달리면서 다시 화살을 재고 쏘았다. 장건이 가볍게 혀를 찼다.
“귀찮게 하는군.”
그들은 활쏘기에 대단히 숙달된 궁수들인지 좌우로 나뉘어 달리면서 그 방향에 맞게 활을 바꿔 잡기까지 했다. 오른쪽으로 가는 이들은 왼손에, 왼쪽으로 가는 이들은 오른손에 잡는 식이었다.
장건은 좌우로 나뉘어 정신없이 날아오는 화살을 비껴내며 툭툭 조조의 고삐를 당겼다. 그에 조조는 한숨이라도 쉬는 것처럼 푸욱-깊은숨을 내뱉더니 곧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녀석이 먼저 따라잡아 가는 놈들은 셋으로 나뉜 쪽이었다.
그리 넓지도 않은 능선에서 정신없는 기마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궁수 셋은 뒤에서 따라오는 장건을 피해 달리며 화살을 쏘았고, 그 장건 뒤에서는 나머지 둘 남은 궁수들이 쫓아가며 화살을 쏘았다. 장건은 전후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손에 든 칼 한 자루로 깔끔하게 막아내며 점점 조조의 속도를 올렸다.
그제야 궁수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들의 말은 신사천 암상에서 고르고 고른 좋은 혈통이었다. 황군 군마와 비교해도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 그런 좋은 말. 하지만 장건의 조조는 전설의 오추마라도 되는 것처럼 맹렬히 내달려 그들을 따라잡고 있었다.
장건은 궁수들의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진 순간 가볍게 다리를 끌어 올려 달리는 말 위 안장에 쪼그려 앉으며 조조에게 속삭였다.
“간다.”
조조는 콧김만 한 번 푹 내뿜었다. 그 대답을 들은 장건은 굽혔던 다리를 쭉 펴며 궁수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는 뛰어오른 순간 빙그르르 몸을 회전시켰고, 그 동작에 날아오던 화살들은 모두 그를 빗겨나갔다. 동시에 회전하는 화살처럼 쏘아진 장건의 칼날이 휘리릭 돌며 세 궁수를 스쳤다. 그 셋을 통과한 장건이 조금 더 훌쩍 날다가 회전력을 잃고 떨어질 즈음 그의 발밑엔 조조가 있었다.
그가 다시 조조의 안장에 안착한 순간 상체가 둘로 잘려 나간 궁수들이 바닥에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장건은 그걸 뒤돌아 확인해 보지도 않고 그대로 조조의 고삐를 돌려 부드럽게 선회했다. 그와 조조가 몸을 돌리자 그의 뒤를 따라 달려오던 나머지 궁수 둘은 그를 마주 보게 되었다.
동료 셋이 한순간에 죽어 나가는 걸 본 둘은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장건을 보고 다급히 허리에 매고 있던 검과 채찍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검이 검집을 벗어나기도 전, 허리에 감겨 있던 채찍이 완전히 풀려나오기도 전, 질주하는 조조와 장건은 이미 그들을 스쳐 지났다.
“워워. 힘드냐?”
그 맹렬한 가속 이후 조조 급격히 힘이 풀려 푹푹 숨을 내쉬며 마치 고장 난 것처럼 털털 걷기 시작했다. 물론 장건은 조조가 힘든 척 꾀를 부린다는 것을 알았다. 녀석은 아마 방금 같은 가속을 두어 번은 더 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 평소보다 많이 달린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장건은 별말 없이 녀석의 목덜미를 툭툭 쳐주기만 했다. 그는 칼을 휙 털어 집어넣고 고삐를 다시 뒤로 돌렸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서였다.
완만한 능선 여기저기에 주인 잃은 말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장건이 만든 시체들도. 장건은 그중 무기를 꺼내려다 그대로 당했던 이들에게 다가갔다. 하나는 칼을 맞고 즉사했지만 나머지 하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보고 누워 피가 철철 흐르는 자기 가슴팍을 붙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털털 장건과 조조가 다가오자 바들바들 떠는 와중에도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죽어가는 그가 말했다.
“···제가의 무사냐?”
“아니.”
“···그럴 것 같았지. 그 멀리서도 느낄 수 있는 존재감이라니. 제가에서 그런 고수는 다 늙은이뿐인데···”
장건은 안장 머리에 팔꿈치를 기대 몸을 숙이며 말했다.
“넌 암상의 무인이 아니군. 그런데 왜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모조리 죽이려 했나?”
“···그게 내 임무니까. 이 황야에서 장보도에 얽힌 이들은 모조리 죽어야 전설과 의혹이 탄생할 테니까··· 그리고 제가의 힘도 뺄 수 있고.”
그의 호흡은 점점 느려졌다. 그의 눈이 다시 퍼런 하늘을 향했다.
“···하지만··· 결국 이 꼴이군··· 고작 이런 황야에서 죽으려 바다를 건너왔다니···”
그는 그 중얼거림을 끝으로 숨이 멎었다. 그를 가만 내려다보던 장건은 이내 내려서 바닥에 나뒹굴었던 활을 집어 들었다. 묵직한 무게와 보통의 활보다 훨씬 굵은 시위, 그리고 여러 재료를 하나로 합쳐 만든 복합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철시를 쏠 정도의 활이면 보통 활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이 궁수들의 세력이 아주 큰 자들, 그러니까 고대 세가쯤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잠시 활을 살펴보던 장건은 쇠 화살도 하나 챙겨 안장에 걸어놓고 다시 올라탔다. 사실 고대 세가들의 암투는 잘 보이진 않으나 항상 있었다. 장건이 끼어들어 뭘 어쩌기엔 옛 춘추전국시대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싸움질인 것이다.
장건은 조조의 고삐를 돌려 능선 아래를 향했다. 멀찍한 곳에 이연과 양굉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 * *
“주, 주 군사님··· 살려, 주십시오···”
주선은 조금 착잡한 눈으로 마지막 태평대원을 바라보았다. 지금 벽에 꿰어 있는 이 애송이를 제외하고 나머지 태평대는 모두 죽었다. 검은 궁수들의 화살이 치명적이었다.
제가의 병력을 끌어내는 것은 연가와 신사천 암상, 그리고 태평대를 움직인 무림맹주의 합의로 이루어진 결과다. 하지만 그 합의에 장보도의 보물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내용은 없었다. 때문에 맹주는 그 보물을 획득해 태평대의 세력을 키울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이렇게 나타난 궁수들을 보니 연가도 보물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더불어서 맹주에게 갈 정보의 통제도 노렸을 것이 분명했다. 아마 도둑들이 끼어들지 않았어도 마지막에 연가의 활이 향하는 곳은 그들 태평대였을 것이다.
“주 군사님··· 제발···”
짧은 상념에 잠겨있던 주선은 곧 고개를 들었다. 벽에 바짝 붙어있다가 그대로 꿰인 태평대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녀는 슬쩍 건물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확인했다. 그때가 장건과 궁수들의 싸움이 마무리될 때쯤이었다.
두 도둑이 그의 싸움에 정신 팔린 것을 확인한 그녀는 몸을 돌려서 태평대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밝아지는 그의 얼굴에 손아귀를 가져가 입을 막았다. 당황한 그가 읍하고 숨 막힌 소리를 냈지만 그녀의 손아귀는 떨어지지 않았다.
태평대원은 있는 힘껏 버둥거리며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주선의 다른 손이 화살 맞은 부분을 꾹 누르자 아찔한 고통과 함께 힘이 풀렸다. 결국 잠시 후 그는 흐린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죽었다.
그를 마무리한 주선은 슬금슬금 몸을 돌려 장건과 두 도둑이 있는 곳에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건이 여기 나타났다는 것은 백사경이 당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스승에게 그 소식을 전해야 했다. 그리고 그건 남은 태평대의 세력은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왔음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던 백사경이 죽은 건 아쉽지만, 그녀가 다룰 부하와 세력이 생기는 건 나쁘지 않았다. 달려가는 그녀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 * *
이연은 다가온 장건이 반가운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 옆에 있는 양굉은 그렇지 못했다. 입은 웃고 있지만 얼굴에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는 장건의 차분한 눈을 올려다보며 애써 먼저 말을 꺼냈다.
“헤, 헤헤··· 잘 자셨소? 내가 먼저 길을 좀 찾아 놓았소. 보물은 아마 저 집 지하에 있을 것이외다.”
옆에 있던 이연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딴 변명이 먹히리라 생각하냐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장건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 말없는 시선에 양굉은 슬슬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그, 저기 뭐냐. 내가 새벽잠이 좀 없어서리··· 먼저 좀 출발했소이다··· 두 사람은 쪼금 바쁜 듯하여서···”
그때 장건이 안장 머리에 걸쳐 두었던 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주워왔던 쇠 화살도 집어 시위에 재고는 쭉 잡아당겨 양굉을 겨눴다. 양굉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옆에 있던 이연도 대번에 저럴 줄은 몰랐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양굉은 두 손을 펼쳐 보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장 형. 진정, 진정하시오··· 그, 내가 좀 잘못하기는 했는데, 사실 장 형이랑 이씨 이 친구도 너무한 거 있었소. 안 그렇소? 아니, 옆 방에 뻔히 나 있는 거 알면서 둘이 배 맞추고 노는 게 말이 되는 짓이오? 장보도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선··· 나 같은 도둑한테 그런 커다란 빈틈을 보여주는 건 삼 일 굶주린 사람 앞에 밥 차려 놓고 하루 더 참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이오···”
눈을 동그랗게 뜨던 이연은 양굉이 변명이랍시고 하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자기는 왜 끌어들이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때, 장건은 양굉을 겨누던 활을 옆으로 슥 돌려 시위를 놓았다. 검은 화살이 쨍한 하늘 위를 쭉 가르며 날아갔다.
멍한 얼굴로 그 화살의 궤적을 따라가던 이연과 양굉은 깜짝 놀랐다.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는가 싶었던 화살 끝에 저 멀리 도망가던 누군가의 등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연이 그 등판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저 여자··· 아까 우릴 윽박지르던 태평대군요···”
“다시 만나면 태평대는 모두 죽이겠다 했었지.”
이연은 풀썩 쓰러져 움직이지 않는 그녀를 보며 그걸 언행일치라 봐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양굉에겐 이제 널 죽이겠다 선언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파르르 잘게 떨고 있으니 장건이 다시 활을 걸어놓고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양굉이 보물이 있다 했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서로를 돌아보던 이연과 양굉이 냉큼 뒤를 따랐다.
집 안으로 들어선 장건은 그 안의 난장판을 쭉 둘러보고는 발밑에 가볍게 힘을 주어 보았다. 그 아래 지하실이 있음이 분명한 흔들림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장건은 난장판 속에서 쓰러진 의자 하나를 집어 구석에 바로 세웠다. 그리고 그 위에 걸터앉고는 자신을 따라 들어온 양굉에게 말했다.
“뜯어.”
“···뜯으라고? 바닥을?”
장건은 앉은 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양굉은 곧 으하하 웃었다.
“암! 뜯어야지! 이 아래 장 형의 보물이 있는데! 잠시만 기다리쇼! 내가 깔끔하게 열어놓겠소. 이봐, 이연. 나 좀···”
그러나 그의 말은 중간에 막혔다. 장건이 이연에게 손짓해 자기 옆으로 불렀기 때문이었다. 이연은 굳이 장건의 심사를 거스를 생각이 없는지 그 옆으로 다가가 자기도 의자 하나를 세워 앉았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던 양굉은 다시 웃었다.
“하하하! 이거 뭐, 나 혼자 하면 되지! 혼자서도 충분하오! 내 금방 할 테니 잠깐만 기다리시오.”
그는 잠시 혼자 주변을 치우고 바닥을 두드려보는 둥 호들갑을 떨다가 들고 있던 도끼로 텅텅 바닥을 찍기 시작했다.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건은 품에서 작은 종이와 담배갑을 꺼내 연초를 말았다. 남은 담배가 적어서 아무래도 마지막 연초인 것 같았다.
그런데 도끼로 바닥을 찍던 양굉이 그 연초를 보고는 손을 멈추고 헤-웃었다. 불을 붙이려던 장건이 뭐냐는 식으로 바라보자 그가 대답했다.
“그 연초, 내가 준 거 아니오?”
정확히는 장건이 빼앗은 것이다. 장건은 빈 갑을 양굉에게 휙 던져주었다.
“지랄 말고 하던 거 해.”
“···하하하! 금방 하겠소! 잠깐만 기다리시오!”
그렇게 양굉은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도끼질을 했고, 장건은 한쪽에서 연초를 피우며 그걸 가만 지켜보았다. 이연은 그 옆에서 지하가 보이나 고개를 빼꼼 들어보고 있었다.
“···이게 잘못하면 그냥 바닥이 몽땅 꺼질 수 있다 이거지. 하지만 내가 누구요? 다 기둥이나 중요한 부분은 피해 가며 해내는 정도야 별것 아니외다. 이게 다 장 형의 보물을 위해서···”
양굉은 혼자 뭐라뭐라 중얼거리며 바닥에 큼직한 구멍을 냈다. 진짜 뭘 알고 하긴 했는지 바닥의 다른 부분이 무너지거나 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헤헤, 다 뜯었소.”
그 말에 장건이 일어나 구멍으로 다가갔다. 안쪽을 슬슬 살펴보던 장건은 가볍게 그 아래로 뛰어내렸다.
지하실은 그리 깊지 않았다. 기껏해야 장건 키보다 조금 더 큰 정도에 불과했다. 장건의 눈이 구멍에서 들어온 빛을 바탕으로 지하실 안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 지하실 안은 뭔가 대단히 은밀히 숨겨진 금고라기보다는 그냥 지하 저장고처럼 보였다. 양옆으로 삼 단짜리 선반이 있었고, 그 위에는 원래 먹을 수 있는 무언가였던 것으로 보이는 말라비틀어진 쪼가리들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상자 하나를 끌어안은 백골이 누워 있었다.
“뭐가 있나요?”
“위험한 건 없소. 내려와 보시오.”
구멍 위에서 물었던 이연은 장건의 대답에 얼른 밑으로 뛰어내렸다. 한 발 늦게 양굉도 슬쩍 따라 내려왔다.
“···고대 세가의 비밀창고로 보이진 않는군요. 그냥 지하 저장고라면 모를까.”
이연이 지하실을 둘러보고 장건과 비슷한 감상을 내렸을 때, 장건은 백골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모습을 살폈다.
백골이 걸친 옷은 오랜 세월에 낡았으나 그 위에 그려진 문양이나 천의 소재로 보아 대단히 고급품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를 관찰하던 장건은 그가 안고 있는 상자를 끌어당겼다. 백골은 너무나 쉽게 그 상자를 내어주었다.
상자는 어른 남자 상체만 한 크기였다. 이연이 그걸 보고 말했다.
“그게··· 보물 전부인 모양이죠?”
“열어봐야 알지.”
상자는 쇠로 된 자물쇠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자물쇠는 오랜 세월에 낡아 장건이 그걸 붙잡고 가볍게 끌어당기자 툭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장건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열어젖혔다. 이연과 양굉이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찬란한 은빛이 그들을 비췄다.
“···은빛?”
두 도둑의 표정이 굳었다. 상자 안에는 은덩이가 몇 덩이 들어 있었고, 그 위에 멀끔한 책자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화, 황금도 아니고 은? 그것도 한 상자?”
“···지, 진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저 책, 저 책이 진짜야.”
양굉과 이연은 차마 손을 뻗지는 못하고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떨리는 눈에 피식 웃은 장건은 그 책자를 집어 중간쯤을 펼쳤다.
[···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진짜 황제와 황군을 뒤집어엎고 새 제국을 세울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일까? 정말 본인이 황제를 이길 수 있다고 믿을까? 내 아버지지만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함께 일어나기로 했던 오랑캐들은 당연하게도 협정을 지키지 않았다. 그나마 신라는 은밀히 인사를 보내 사과를 하기라도 했지만, 나머지는 그딴 것도 없이 그냥 연락을 끊어버렸다. 물론 그마저도 협정을 황제에게 일러바치지 않는 대가를 받아내기 위해 온 것이었지만. 약아빠진 놈들.
···아버지의 생각보다 황군의 의심이 너무 빨랐다. 가문을 살리기 위해선 이제라도 모든 끈을 지우고 몸을 웅크려야만 한다.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황제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사실··· 그러기만을 바랄 뿐이다···]
책을 읽던 장건은 피식 웃었다. 이세민. 역시 알려진 것과 다르게 그는 얌전한 인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세가제일고수니 뭐니 하는 무공을 쌓았다는 것부터가 보통이 아님은 분명했다. 당연하게도 그는 황제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잘 되진 못한 모양이었다. 장건은 몇 장을 대충 스르륵 넘겨보았다.
[···아버지가 황제를 독대하고 돌아왔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는 그날 이후로 농인이 된 듯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항상 지하 연공실을 쩌렁쩌렁 울리던 기합도 더는 울리질 않았다. 아버지는 평소 내공을 수련하던 정원 바위에 앉아 폐인이 된 듯 그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다.대신 전방위에서 가문을 조여오던 황군의 압박이 사라졌다. 나는 이것이 뜻하는 바가 두렵다. 황제가 모든 것을 알고 아버지를 불렀던 것일까? 그럼 왜 우리 가문이 불타지 않았지? 해볼 테면 해보라는 것일까···?
···황군의 압박은 사라졌지만 대신 다른 세가들이 우릴 노리기 시작했다. 외부에 쏟았던 힘을 모조리 날려 우리가 약해진 것을 눈치챈 것이다. 승냥이 같은 놈들. 아버지가 멀쩡했을 때는 허리를 굽실거리던 놈들이···]
그 뒤로도 몇 장 더 둘러본 장건은 그 책자가 이세민이 가주가 된 이후 아들 이치가 지켜본 이씨 세가의 흥망성쇠가 담겨있을 뿐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 무공 한 줄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마지막 장에 몇 줄 짧은 내공 운용법이 적혀 있었다.
“쇄금장碎金掌?”
대충 보니 두 손으로 펼치는 장법, 정확히는 손바닥을 통한 내공 분출법이었다. 기습이나 암살용이란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연과 양굉이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장건은 곧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평소에도 다양한 내공 운용을 실험하는 그였기에 적혀 있는 그대로 내용을 쓰면 두 손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 내공 운용법은 쇠를 깨뜨린다는 말처럼 상당히 강력한 위력을 가졌으나, 몇 번 쓰면 두 손의 경락이 딱딱하게 굳고, 그 상태에서 또다시 사용하면 도리어 시전자의 기혈이 깨져나갈 터였다.
한마디로 정말 위급한 순간에 구명절초求命絶招로 쓸 무공에 불과했다.
책자를 끝까지 보니 그 위험을 설명한 글귀도 있긴 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백 년 전 세가제일고수 이세민의 무공을 기대하던 사람에겐 아쉬운 수준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장건은 그와 비슷한 위력에 아무 부작용 없는 전사경이나 침투경 등을 쓸 수 있으니까.
장건은 이연에게 책자를 넘겨주며 말했다.
“일단 올라가서 이 은덩이를 나눕시다.”
“예? 아, 예.”
이연은 그리 대답하면서도 급히 책자를 훑었고, 그 옆에서 양굉도 같이 훔쳐보았다. 그를 본 장건은 피식 웃으며 양굉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아, 아앗! 왜 그러시오!”
“넌 이거나 들고 올라가.”
잠시 정신 못 차리던 양굉은 그 말에 얌전히 은덩이 궤짝을 들었다. 그렇게 먼저 두 사람을 올려보낸 장건은 백골에게 다가갔다. 살아있을 적 이치라고 불렸을 그 백골은 텅 빈 눈구멍으로 장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앞에 다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장건은 그 눈구멍을 잠시 바라보며 백골의 살아있을 적 얼굴을 그려보다가, 낡아빠진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잠시 후 그 붙잡은 손아귀에서 화르륵 불길이 피어올랐다.
장건은 그렇게 불타오르는 이치의 백골을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 * *
먼저 밖으로 나온 이연과 양굉은 밝은 바깥으로 나와 책자를 살폈다.
“뭐, 뭐? 그냥 일기라고?”
“···그런 거 같은데.”
“시, 시발··· 내가, 내가 좀 봐도···”
“손 치워. 이건 내 가문의 비사가 적힌 물건이고, 또 지금은 장 무사의 소유야.”
“아니 좀 본다고 닿는 것도 아닌데-”
이연이 들고 있는 책자로 손을 뻗던 양굉은 윽, 하고 굳었다. 뒤통수를 장건이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그는 곧 헤헤 웃으며 장건을 돌아보았다.
“헤, 헤헤. 장 형. 이거 참 쪽박을 찬···”
양굉의 몸이 다시 굳었다. 그들이 나온 집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장건의 손에 밧줄이 들려 있다는 것 때문이기도 했다. 어디서 난 밧줄인가 보니 그 짧은 사이에 저쪽 우물가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양굉은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느끼며 그 낡았지만 굵직한 덕분에 여전히 쓸만해 보이는 밧줄을 바라보았다.
“그, 그건 왜···”
그 후 장건은 밧줄 일부로 양굉의 두 손발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그를 한쪽에 앙상하니 서 있는 나무로 질질 이끌었다. 밧줄과 나무. 묶인 손.
양굉은 장건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깨닫고 창백해졌다.
“자, 잠깐, 잠깐 장 형! 뭐, 뭐 하려고? 뭐 하려고!”
“당장 죽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있어.”
그 살아있는 사람 입에서 나온 것이 맞는지 싶은 차가운 단어에 양굉은 입을 다물고 끌려갔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장건은 정말 양굉이 상상한 그 행동을 하려는 것인지 밧줄로 고리 모양을 만들더니 거침없이 양굉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 밧줄을 휙 던져 나무에 걸치고는 이연을 돌아보았다.
“가서 의자나 상자 하나 가져오시오.”
침을 꿀꺽 삼키던 이연은 얼른 아무 집에 들어가 의자 하나를 주워왔다. 장건은 덜덜 떠는 양굉을 그 위에 올려놓고 쭈욱 밧줄을 당겼다.
“자, 잠깐! 장 형! 자, 장건! 이 새꺄! 잠깐만! 커억!”
한순간 당겨진 밧줄에 양굉은 있는 대로 까치발을 세우며 몸을 쭉 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도 밧줄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목을 조여왔다.
이후 나무에 밧줄을 동동 묶은 장건은 핏발이 선 양굉의 얼굴과 꼿꼿이 선 자세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의 다리 하나 걷어차 부쉈다. 목의 밧줄과 그 의자 다리 하나에 의지한 양굉의 모습이 더 위태로워졌다.
“이 시발! 뭘, 뭘! 장건! 아, 아니! 장, 장 형! 장, 난치지 마시, 오··· 이거, 풀어주···”
하지만 장건은 그렇게 아슬아슬한 상태를 만들어두고는 들리는 절박한 외침을 깔끔히 무시하며 이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은덩이는 나눴소?”
“···예. 정해뒀던 비율대로요.”
장건은 고개를 끄덕이고 딱 양굉에게 주기로 했던 그 은덩이만큼을 그의 발밑에 대충 흩뿌려놓았다. 그리고 벌건 양굉의 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건 네 몫. 이번에도 그럭저럭 재밌기는 했다.”
그 후 그는 몸을 돌려 자기 몫의 은을 챙겨 조조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떠나기 시작했다. 잠시 망설이던 이연도 그 모습에 결국 자기 말을 챙겨 그 뒤를 따랐다.
설마 진짜 이렇게 해놓고 떠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양굉은 버둥거리려다가 의자에서 미끄러질 뻔하고는 다시 바짝 몸을 세웠다.
밧줄은 바짝 목을 조여 숨을 쉬기 힘들었고, 꼿꼿이 세운 몸과 발은 쥐가 날 것만 같았다. 쨍한 햇빛 때문인지 목의 밧줄 때문인지 삐질삐질 식은땀이 흘렀다. 어느새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건물의 불길 때문에 양굉은 더 답답함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반나절? 한 시진? 그 후에는? 한순간 미끄러지면 그대로 교수형이었다. 이를 악문 양굉의 눈이 저 멀리 능선을 타고 넘어가는 장건을 향했다. 이렇게 끝이라고?
그때 능선 꼭대기에서 장건과 이연이 멈췄다. 혹 돌아오려는 것인가 싶어서 양굉의 얼굴이 희망이 솟았다.
그런데 멈춰선 장건은 돌아올 생각은 안 하고 뭔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흐려지는 눈가를 있는 힘껏 깜빡거리던 양굉은 곧 그게 활시위를 당긴 자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양굉의 머리가 멍해졌다. 저 능선에서 이곳까지의 거리가 백 오십 보는 되어 보였다. 보통 명사수도 절대 맞출 수 없는 거리. 설사 대강 방향과 거리를 맞추더라도, 그 화살이 양굉의 밧줄을 끊어줄지, 아니면 머리통을 꿰뚫어버릴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장건의 활시위에서 시커먼 줄이 쭉 늘어났다. 화살을 쏜 것이다.
양굉의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갑자기 세상이 느려지며 모든 것이 선명해 보였다. 그리고 그 느려진 세상에서 검은색 쇠 화살이 허공을 날아 양굉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양굉은 그걸 이를 악물고 바라보았다. 이게 죽음의 순간이라면, 차라리 똑바로 바라보아야 했다.
쉐에엑 바람 찢는 소리를 낸 화살은 텅-하는 소리를 내며 나무에 박혔다. 그 후 줄이 끊어진 양굉은 우당탕 바닥에 나뒹굴었다.
“허억··· 시···발···”
그는 겨우 숨을 몰아쉬며 거뭇한 연기가 끼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화살은 그의 머리 위, 밧줄 부분을 정확히 스쳐 지나며 그 낡은 것을 끊어버렸다.
그가 겨우 옆으로 고개를 돌려 능선을 바라보았을 때, 장건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양굉은 푹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