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77)
77화
* * *
“시체뿐입니다. 보물이라고 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운성은 부하의 보고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불타고 있는 건물을 보았을 때부터 대충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다. 설사 보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장건과 그의 일당이 그걸 모두 털어갔을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내에 그들이 다 들고 사라진 것으로 보아선 보물의 양도 얼마 되지 않았던 모양이고.
그는 부하의 보고를 듣다가 문득 저편 능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능선 자락에는 말을 탄 제상천이 붉게 물들어가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는 습격을 이겨냈다.
그건 후계자 제상천의 입지를 키워주기 위해 가주가 무리했던 것이 도리어 선견지명이 된 경우였다. 추격대 무사들은 숫자도 백에 가까웠던데다가 또 잘 훈련된 가문의 주력이었다. 아무리 연가의 기습이었다고는 하지만 숫자도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났고, 또한 제일 선두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제상천의 모습으로 사기가 높았다.
제상천 개인의 처지에서 보았을 땐 전화위복이었다. 그는 이 전투로 연가의 밀정에게 빠져 자살 시도나 하는 한심한 애송이에서 용맹한 심장과 뛰어난 무공을 가진 가문의 후계자임을 증명했다. 제일 선두에서 말을 달리고 제일 많은 연가 무사를 헤치운 것이 제상천 그였기 때문이었다.
아마 가문으로 돌아가면 지금 남아있는 추격대 일원들은 제상천의 든든한 지지자가 될 것이다. 이미 후계자라는 강력한 명분이 있는 상태에서 그 가문 내 지지 세력은 제상천의 큰 힘이 될 터였다. 하지만 당장 그는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는데, 그건 습격 중에 섬지영이 크게 다쳤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운성의 반대에도 무사를 둘로 나누어 섬지영을 먼저 가문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지금 그 절반의 무사와 함께 이미 다 털려버린 이 장소에 도착한 것이다.
보물 탈취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던 인물은 이제 그딴 것에는 흥미가 없다는 듯 섬지영이 먼저 떠난 서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그가 이미 내린 명령을 따라야 하는 제운성으로서는 갑갑해지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제운성은 다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의 다 타고 기우뚱 쓰러지려는 잿더미 건물과 그 앞에 가지런히 늘어진 시체들이 보였다.
연가의 궁수로 보이는 자가 다섯, 태평대로 보이는 이가 열둘이었다. 태평대는 모두 화살이 맞아 죽었다. 그중 하나는 꽤 멀리까지 도망갔지만 결국 등판에 화살을 맞아 죽어 있기도 했다.
연가 궁수 다섯은 모두 칼에 맞아 죽었다. 제운성은 그 깔끔한 칼자국을 보고 장건의 실력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각주님, 몇몇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추적할까요?”
“몇몇 흔적? 흔적이 나뉘었나?”
추격대에서 몇 없는 제운성의 직속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둘과 하나로 나뉜 듯합니다.”
“흠. 보물을 발견하고 곧장 나눠 헤어진 모양이군. 그렇다면 둘이 모여 갔다는 쪽도 얼마 안 가서 나뉘었을 것이다. 이제 추격은 큰 의미가 없어졌군.”
부하는 슬쩍 제운성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 어쨌든 그중 하나는 이세민의 무공을 가지고 있을 텐데, 의미가 없다 하심은···”
“그들은 도둑들치고 너무 깔끔하게 물건을 나눠 헤어졌어. 제일 크게 갈등이 일어나야 할 보물이 제 역할을 못 했다는 이야기지. 여기서 그 보물이 뭐겠나?”
부하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대답했다.
“···이세민의 무공 말입니까?”
“그래. 당장 우리가 적들을 물리치고 쫓아온 시간 동안 보물을 나누고 갈라질 수 있었다는 말은 보물들의 가치는 둘째치고 부피가 크지 않았다는 이야기네. 동시에 그 셋이 욕심낼만한 물건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지. 아무래도 내 생각엔 그 이세민의 무공이 아예 없었던가, 있었더라도 헛된 욕심을 일으킬 만큼 유혹적이지 못했던 듯하군. 그리고 한낱 도둑들에게도 욕망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우리 제가도 굳이 욕심낼 이유가 없지.”
부하는 제운성의 추리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가의 혈리응, 가문의 수사관다운 짧은 추리였다.
“그럼 난 그 도둑놈들도 탐내지 않는 물건 때문에 우리 가문의 무사들을 낭비한 건가?”
제운성은 뒤에서 들리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제상천이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운성은 한숨이 나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이미 설명해 드리지 않았소, 공자. 이번 일은 연가와 신사천의 암상이 손을 잡고 우리 가문을 노리고 벌인 함정이었고, 공자의 뛰어난 무공과 무사들의 용맹함으로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이건 단순히 장보도의 가치를 볼 게 아니라 여기 얽힌 세력들의 이해관계를 살펴야 하오. 공자는 가문의 후계자로서 그 관계를 살피고 이용할 수 있는 눈과 능력을 갖춰야만 하외다.”
제상천은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어찌 되었든 신사천의 암상과 연가는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아, 그 도둑놈들에겐 현상금을 걸까?”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을 듯하오. 연가의 음모가 뒤틀린 것은 그들이 장보도를 탈취해 판을 흔들어 주었기 때문이니까. 오히려 따져보자면 상을 줘야 할 자들이지.”
제상천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문득 눈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무사들에게 말했다.
“뭐해? 더 볼일 없다며? 그만 가지. 잘하면 오늘 중으로 먼저 가던 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듯하니까.”
제운성은 그 당당함이랄지, 오만함이랄지 모를 태도를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제상천은 이씨 가문의 보물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아쉬움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연가의 습격대와 맹렬히 싸우며 그런 감정을 모두 털어버렸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사자라도 된 듯 맹렬히 싸우던 그의 모습은 제운성이 보아도 의외였으니까.
그가 황당함을 느끼든 말든 다른 무사들은 제상천의 말에 모두 다시 말 위에 올랐다. 당장 뭘 하고 있던 그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살살 흔든 제운성은 천천히 뒤를 따랐다.
그는 일부러 무림맹주가 끼어든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평대에 대하여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 제상천으로 하여금 그들 또한 연가와 암상의 일부였다고 착각하게 했다. 가문의 이익과 복수를 위해선 당연히 그를 밝히는 것이 맞았으나, 제운성은 거기에 자신이 이용할 부분이 있다고 여겼다.
맹주의 비밀을 쥐고 그를 뒤흔들거나, 혹은 그와 한편이 되거나.
제운성은 언제까지나 제가의 혈리응으로, 그저 말 잘 듣는 가문의 방계로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제 그 시작이 온 것뿐이라 여겼다. 그는 문득 지난날 상처 입고 떠나던 장건을 보고 했던 자신의 말을 다시 중얼거렸다.
“···끝내 꺾이는가, 아니면 세상을 꺾는가···”
그것이 보이지도 않는 장건을 향한 말이었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었는지는 불분명했다.
* * *
이연과 장건은 한참을 달렸다. 말이 너무 지치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해가며 달리니 어느새 저편 지평선에선 붉은 석양이 물들고 있었다. 황야는 그 벌건 빛에 물들어 적색의 대지가 되었다.
그때 갑자기 장건과 조조가 멈췄다. 살짝 처져서 따라 달리던 이연은 속도를 줄이느라 조금 앞서갔다가 말머리를 돌려서 그를 마주 보았다.
“왜 그러세요?”
장건은 뭐라 대답하지 않은 채 지난 여정 동안 이연이 보았던 침착한 눈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연은 왠지 그 눈이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장건의 입이 열렸다.
“이쯤이면 제가의 무사들과도 충분히 거리가 벌어졌을 것이오.”
이연은 잠깐 뭐라 대답할지 망설이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러다가 그 입술을 꾹 다물고는 괜히 코를 한 번 훌쩍이며 품에서 이치의 일기를 꺼내 내밀었다. 하지만 장건은 고개를 저었다.
“···왜 그러세요? 무공은 원래 장 무사가 가지기로 했잖아요?”
“거기 들어있는 무공이 특이하긴 하지만 나에겐 별 의미가 없소. 그러니 남는 건 이씨 가문의 기록뿐이고, 그건 그 후손이 가지는 것이 맞을 테지.”
일기를 내밀었던 이연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당신에게도 쓸모가 없다면 그냥 어디 비싸게 팔아치우시오. 제가와 암상에게 밉보였으니 신사천으로 돌아갈 순 없을 텐데, 그럼 집도 새로 구해야 하지 않소.”
그 말에 이연은 다시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애써 웃었다.
“날 너무 얕보는 거 아니에요? 난 천후성에도 작은 사무실 하나 마련해 두었다고요. 신사천에서 주로 활동하던 건 거기가 내 고향이어서 그랬을 뿐이죠. 아마 천후성에 가면 일이 더 넘쳐날걸요?”
“그럼 다행이군.”
장건의 눈이 서쪽 지평선에 걸친 석양을 향했다. 그를 본 이연은 그가 이대로 그냥 떠나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들고 있던 책자를 급히 집어넣으며 활기차게 말했다.
“이거 참. 어떻게 양굉 같은 놈이 장 무사님과 알고 지내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놈을 꽤 오래 알고 지냈지만 평소에는 골패 장난 같은 거나 하고 사는 놈인데.”
“그 골패 덕분에 알게 되었지.”
이연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설마?”
“이상하게 골패만 잡으면 시야가 좁아지고 담만 커지더군. 결국 자잘하게 따고 크게 잃으니 항상 손해만 보는 편이오. 양가놈과 둘 때도 적당히 일어나질 못해서 돈을 꽤 잃었지.”
“···그걸 살려두셨어요?”
장건은 슬쩍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겨우 골패 때문에 사람을 죽일까? 난 그 정도로 골패에 빠진 놈은 아니오.”
그 웃음을 조금 멍하니 바라보던 이연은 문득 양굉을 향해 화살을 쏘던 장건을 떠올렸다.
“···장 무사한테는 이번 일도 그 정도였다는 거군요. 얻어도 그만, 얻지 못해도 그만. 그래서 양굉을 죽이지 않았고요.”
“그렇게 설렁설렁한 마음으로 움직이진 않았소. 하지만 그놈이 뭔가 한 번 뻘짓을 하리라는 것 정도는 알았지. 사실 그놈이 정말 썩어빠진 놈이었으면 지도만 들고튀진 않았을 것이오. 진짜 우리를 배제하고 싶었다면 그렇게 도망갈 게 아니라 음식에 독을 타는 게 더 쉬운 일이었을 것이오. 객잔 주인과 아는 사이였으니까. 그렇게 무작정 튀는 것보다는 그 자리에서 우릴 정리하는 게 더 안전한 일이었소.”
장건은 석양을 바라보며 조조의 안장 한쪽에 매여 있던 삿갓을 풀어내며 말을 이었다.
“난 그놈이 자꾸 자기 아는 객잔으로 가자 해서 그런 속셈인 줄 알았지. 하지만 결국 놈이 한 건 그냥 상황에 따라 척수 반사적으로 손장난을 친 것뿐이었소. 애초부터 뒤통수칠 준비를 한 건 아니었단 이야기요.”
이연이 웃었다.
“척수 반사적으로? 재밌는 표현이네요. 본능을 말하는 건가 보죠.”
“비슷하오.”
석양을 바라보던 장건이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고, 그녀는 그 시선에 반사적으로 눈을 슬쩍 내리깔았다.
“···난 정말 그놈을 매달아 버리는 건 줄 알았어요. 거기서 화살로 줄을 끊을 수 있을 줄도 몰랐고요.”
“나도 몰랐소.”
이연은 장건의 대답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장건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삿갓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곧 그의 대답이 무슨 뜻인지 알고 크게 웃었다.
“정말 몰랐어요?”
“마지막으로 활을 쏘아본 게 언젠지 기억이 나질 않는군. 삼 년? 사 년? 도망치던 태평대를 쏠 때도 등이 아니라 머리를 노린 거였지.”
그녀는 장건의 대답에 다시 한번 와하하 웃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웃는 동안 장건은 삿갓의 끈을 가볍게 동여매고 툭툭 옷자락도 정리했다. 대충 정리가 끝나서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붉어진 눈가로 장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석양 때문이 아니라는 건 장건도 알았다.
그녀가 말했다.
“···같이 갈래요? 사실 천후성 사무실이 혼자 쓰기엔 좀 넓은데.”
장건은 그녀를 보며 옅게 웃어주었다.
“천후성은 따듯한 도시지. 덕분인지 사람들 천성도 넉넉하고 부드러운 편이고. 언제 찾아가도 괜찮은 땅이오.”
“···그럼 장 무사도 찾아올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 장건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이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붉은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장건은 툭툭 장건의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삿갓 끝을 붙잡고 가볍게 까딱였다.
그 단어로 표현되기에도 짧은 인사를 건넨 장건은 이연을 남겨둔 채 그대로 떠났다.
이연은 잠시 온통 불그스레한 세상에서 멀어지는 장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평선과 그를 구분할 수 없을 때까지 한참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