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78)
78화
허리 위로 올라오는 나무는 하나도 찾을 수 없는 평원에 조조가 장건을 엎고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었다.
안장에 앉은 채 녀석의 걸음걸이에 맞춰 흔들거리는 장건은 그 느릿한 걸음을 전혀 재촉할 생각이 없는지 눈까지 감고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가볍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태양은 지평선 가까이 내려와 있었지만 여전히 따듯했고, 평원의 바람은 선선히 불어와 그들을 스쳤다.
남부에서 양굉, 이연과 난리를 겪었던 장건은 이제 조금 북부로 올라와 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정처 없는 걸음이 그를 이쪽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조조의 걸음에 맞춰 흔들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음률을 흥얼거리던 장건은 슬며시 눈을 떴다.
세상은 지평선을 기준으로 선명히 둘로 나뉘어 있었다. 물론 그 지평선이 곧게 평탄하지는 않았다. 저 멀리 높게 솟은 산맥들로 삐죽삐죽 덧니가 솟아있는 지평선이었다. 장건은 자기도 모르게 시야 정면에서 시작해 오른쪽으로 쭉 눈을 돌리며 그 잘못 자란 어금니 같은 지평선을 둘러보았다.
장건도 사람인지라 머리가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아가진 않았다. 쭉 뒤쪽까지 돌아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왼편에서 불그스름 세상을 물들이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거대하고 광활한 자연은 그 자체만으로 그를 한낱 인간에 불과함을 말해주었지만, 동시에 장건은 그 자연들마저도 결국 더 큰 우주의 티끌임을 알았다. 별의 바다에서 본 이 먼지 위 생명은 어찌나 작을 것인가.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것도 그저 인간의 시선일 뿐이다. 더 크고 더 넓다 해서 그게 더 위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 조그마한 의지로 어떤 방식으로든 이 세계에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진정한 위대함일 수 있었다.
슬쩍 찌푸린 눈살로 석양을 바라보던 장건이 조조의 옆구리를 툭 치며 약간 퉁명스레 말했다.
“임마, 오늘도 야영이잖아.”
조조는 그게 뭐 자기 탓이냐고 말하듯 머리를 흔들어 고삐를 당겼다.
“네가 빨리 갔으면 뭐 마을이라도 하나 찾았겠지.”
조조의 걸음이 더 느려졌다. 이제 걷는 것인지 기는 것인지 모를 속도였다.
“···너도 지붕 아래서 자는 게 더 좋지 않겠냐? 그러지 말고 조금 달려보자. 혹시 모르잖냐.”
조조는 완전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자기 등에 탄 장건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미심쩍다는 눈빛이었다. 장건은 그를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고, 조조는 푸르륵 한숨을 내쉬더니 털털털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가볍게 뛰는 듯하던 그 움직임은 곧 질주가 되었다. 조조는 바람을 타고 나는 것처럼, 혹은 바람 그 자체가 된 것처럼 평원을 달려 나갔다.
그 급발진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장건은 곧바로 자세를 낮추며 안정적인 자세를 갖췄다. 거센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며 옷자락을 마구 흔들었다. 이렇게 달리는 것으로 보아 조조도 힘이 남아도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잠시 조조의 질주를 즐기던 장건은 뭔가를 발견하고 툭툭 고삐를 당겼다. 조조는 그 신호에 슬슬 속도를 줄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곧 장건이 발견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 기준 오른쪽 평원에 마차 하나가 야영지를 차린 것이 보였다. 이제 막 불을 피웠는지 연기도 피어오르고 있었다. 장건이 말했다.
“가볼까?”
조조는 긍정하듯 가볍게 투레질하며 그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황야의 낯선 이는 언제나 불확실성을 안고 있었다. 저 야영지에는 남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도적들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새로운 개척지를 찾는 농부가 있을 수도 있었다. 혹은 동부 내륙의 특산물을 해안 도시들로 가져다 파는 상인이 차린 야영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누가 되었든 그들은 장건이 모르는 이였고, 그 모르는 이들과의 만남은 장건에게 새로움을 선사하며 그가 인지하는 세상을 확장해 주었다. 머리로는 이 별과 저 우주를 알지만 심장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들이 진짜 세계라 말하기에, 그리고 진짜 무공은 어두운 동굴이 아니라 그런 확장된 세상에서 만들어지고 재현된다 생각했기에 그가 그렇게 방랑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터덜터덜 그곳을 향해 다가가자니 앉아있던 누군가가 일어나서 야영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반쯤 팔짱을 끼고 손에 든 찻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황야를 여행하면서도 차 한 잔의 여유라. 장건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야영지의 마차가 상당한 고급품이라는 것과 앞으로 나선 이의 옷 역시 수수하지만 좋은 재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건이 어느 정도 가까워져 슬슬 걸음을 멈추었을 때, 낯선 이가 먼저 말했다.
“안녕하시오?”
장건은 삿갓 끝을 잡고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그 인사를 본 남자는 옅게 웃었다. 그는 잘 다듬어진 수염과 뒤로 깔끔히 빗어넘긴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그 생김새와 옷차림이 퍽 어울렸는데, 간단히 말해서 돈이 좀 많아 보였다. 그는 차를 한 모금 홀짝이더니 말했다.
“남쪽에서 올라오시는군. 그쪽에 무슨 특별한 소식 있소?”
“글쎄. 신사천에서 소란이 조금 있기는 했지.”
“오.”
장건의 대답에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새로운 이야기, 그거 좋군. 혹 식사 하셨소? 달걀이 몇 개 있는데 이야기 값으로 괜찮으시려나?”
달걀. 문득 생각해보니 먹어본 지 꽤 된 것 같았다. 신사천에서 먹으려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을 텐데, 막상 또 이렇게 야외에서 먹게 되리라 생각하니 침이 고였다.
“괜찮은 거 같군.”
장건은 안장에서 내려 고삐를 끌며 그에게 다가갔고, 남자는 몸을 돌려 야영지로 다가갔다. 동시에 장건은 그 야영지의 기척을 쭉 훑었다. 앞서가는 남자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 같았고, 마차에도 특별히 숨어있는 인기척은 없었다.
모닥불로 다가가니 또 다른 남자 하나가 앉아서 죽그릇을 들고 우물거리며 장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피부와 생김새가 중원인과 약간 달랐다. 장건이 보기에 그는 신대륙 원주민이었다.
말끔한 남자는 마차 쪽에서 쇠 찻잔 하나를 찾아와서는 훅훅 불어 대충 먼지를 털어내고는 모닥불에 데워지던 찻물을 담아 장건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자기 것도 다시 채워서 먼저 홀짝 먹어 보였다. 먼저 살갑게 인사하는 것이나 앞서서 찻물을 먹어 보이는 모습 등이 황야에서 낯선 이를 만나는 게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조조를 다른 말들 옆에 세워둔 장건은 그 찻잔을 받아 홀짝였다. 물론 찻물이 혀끝에 닿기 전부터 단전에서 일어난 내공이 가볍게 전신을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를 마시고도 몸에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그냥 찻물이었다.
장건은 차의 향이 나쁘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끔한 남자 또한 그 끄덕거림을 보고 흐뭇하게 웃으며 모닥불 한쪽에 앉았다.
“자, 앉아보시오. 난 저량이라고 하오. 책을 쓰고, 평소엔 글씨를 쓰기도 하지.”
“장건. 떠돌이요.”
저량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장건? 좋은 이름이구려. 내가 아는 사람도 장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소.”
“기억하기 좋은 이름이긴 하지. 그 사람도 신대륙 사람이오?”
“아,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소. 그냥 몇 다리 건너 들어본 사람이지. 하지만 나에겐 참 고마운 사람이오.”
장건은 찻물을 홀짝이며 자리에 앉아 되물었다.
“만나지도 않은 사람이 고맙다니?”
“허허. 방금 내가 책을 쓴다고 하지 않았소? 그 사람 이야기를 듣고 영감이 떠올라 책을 하나 냈는데, 중원에서 그게 괜찮게 팔렸소.”
“책?”
저량은 부끄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아, 제목은 말해주지 않을 것이오. 괜히 자랑하는 거 같으니까. 하지만 만날 배곯던 내가 이런 주문 제작 마차를 타고 여행을 할 수 있는 건 모두 그 흥행 덕분이었지. 그러니 얼굴을 몰라도 고마움이 드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소?”
장건은 주문 제작이라는 말에 마차를 한 번 돌아보았다. 확실히 마차는 수수하면서도 은근히 어딘가 고급품처럼 보였다. 마치 그의 옷처럼. 원래 무작정 화려한 것보다 저런 것이 더 비싼 법이다.
“정말 많이 벌었나 보군.”
“하하하! 뭐, 그 이후에 낸 책들도 연이어 성공한 덕분이지.”
한 번 크게 웃은 저량은 깜빡했다는 듯 묵묵히 식사하는 원주민을 소개해 주었다.
“아, 이쪽은 훈마薰馬라고 하오. 내 경호원이지. 훈마 덕분에 내가 걱정 없이 여행하고 있소.”
죽을 퍼먹던 훈마는 장건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반갑소. 연기 속의 말, 당신들 말로 대충 훈마요.”
“장건. 만나서 반갑소.”
예상했던 대로 원주민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쪽에 세워둔 큼직한 칼이나 중원식으로 잘 차려입은 옷, 중원 본토인과 크게 구분할 수 없는 발음 등으로 보아 아무래도 도시 쪽에서 살아가는 원주민으로 보였다. 그리고 옷 위로 드러나는 잘 단련된 몸은 그가 무공을 익혔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량은 둘이 인사를 하는 동안 옆에서 꼼지락거리며 길쭉한 손잡이가 달린 철판과 달걀을 꺼냈다. 야영할 일이 많은 신대륙에서는 솥보다는 저렇게 생긴 휴대용 번철燔鐵을 많이들 썼다.
“자, 이 달걀은 내가 부쳐줄 테니, 그 신사천에서 있었다는 소란이나 좀 말해보시오.”
장건은 그 자연스러운 모습에 피식 웃었다.
“혹시 여행하는 이유가 책의 소재를 찾기 위해서요?”
“허허, 내가 원래 여행을 좀 좋아하는 사람이라. 물론 그것도 일부 있기는 하오.”
왠지 이름을 숨기던 공주가 떠올라 물었던 장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사천에서 벌어졌던 장보도 추격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이 그 장보도 도둑이었음을 이야기하진 않았고, 일이 다 끝나고 나중에 일의 전모를 전해 들었다는 식으로 말해주었다.
덕분에 장건의 이야기는 생생함이 많이 빠진 건조한 사건의 나열로 들렸다. 그런데 그 평이한 어조와 이야기가 밍밍할 수도 있건만, 저량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혼자 오오-거리며 은근히 추임새까지 넣어주었다.
그는 짧은 이야기가 끝나자 죽을 담은 그릇 위에 잘 부친 달걀을 얹어 내밀고서는 본인은 품에서 작은 책자와 세필 붓을 꺼냈다. 그리고는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깊은 생각에 빠져서 마구 뭔가를 적어댔다.
장건은 받은 죽과 달걀을 떠먹고 우물거리며 물었다.
“뭔가 구상이 떠오르긴 하는 모양이오?”
“어? 어어, 그렇소, 고맙소이다.”
저량은 그렇게 대강 대답하고는 계속 세필을 꼼지락거렸다. 장건은 그 무례함에 화가 난다기보다는 얼빠진 모습 때문에 살짝 웃겼다.
“자주 저러지. 내가 봤을 때 저 사람은 혼자 여행 다녔으면 어디 도시쯤 가서 싹 털렸을 것이오.”
옆에 있던 훈마가 대신 변명하듯 그리 말했다. 장건은 괜찮다는 듯 옅게 웃어 보였고, 식사를 마친 훈마는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혼자 여행을 다니시나 본데. 불편하진 않으시오?”
“혼자라서 편한 것도 있지.”
장건은 죽을 떠먹으며 그리 대답했다. 그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훈마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다른 말들과 함께 메인 조조를 바라보았다. 조조는 그때 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이 모두 암컷임을 깨닫고 슬금슬금 추파를 던지던 중이었다.
“대단한 말이군.”
그 말에 장건도 껄떡대는 녀석을 보았고, 자기도 모르게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대단한 녀석이긴 하지.”
“아니,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오. 대충 보아도 평범한 말이 아니군. 어디서 저런 녀석을 구했소?”
장건은 조조에게 시선을 고정한 훈마의 모습에 도리어 물었다.
“말을 잘 아시오?”
“백 년 전 당신들 조상이 말을 들여오기 전까지 이 땅에 말은 없었지만, 그들도 결국 정령이 이 세상에 표현된 모습 중 하나지··· 물론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마사馬事 일을 하긴 했소.”
장건은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며 슬쩍 웃는 훈마의 모습에 마주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 먹은 죽 그릇을 내려놓으며 찻잔을 들었다.
“평범한 말이 아니다··· 그렇긴 하지. 나와 바다를 건너기 전에는 저놈도 끗발 좀 날리던 녀석이었으니까.”
하늘은 붉은빛에서 검푸른색으로 물들어가고, 동쪽 끝 하늘엔 성급한 별들이 벌써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장건은 흔들거리는 모닥불과 낯설지만 악의가 없는 이들을 앞에 두고 조조를 바라보았다.
두 마리 암말 사이에서 왔다 갔다 껄떡대던 조조는 장건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장건은 그 초롱초롱한 눈가에 가득한 장난스러움과 영악함을 보았다. 평소엔 그보다는 귀찮음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장건은 그 장난스러움 너머에 순수한 흉포함이, 온몸의 피가 말라버릴 순간까지 달릴 광란의 질주가 잠들어 있음을 알았다.
장건이 말했다.
“저 녀석은 황하룡黃河龍의 아들이오. 피의 절반은 용의 것이지.”
혼자 끄적거리던 저량이 슬며시 책자와 세필을 내리며 장건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자 관심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장건은 그 모습이 또 웃겨서 옅게 웃었다.
“적어도 호남 마시장에서는 그런 전설이 붙을 정도로 난폭한 놈이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