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81)
81화
마차 쪽에 타고 있던 저량이 외쳤다.
“저, 저놈! 이리로 온다!”
마부석에서 한창 고삐를 튕기던 훈마는 그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검은 말과 그 기수가 시커먼 연기를 풀풀 피우며 달려오고 있었다.
짧게 욕설을 중얼거린 그는 저량의 뒷덜미를 붙잡아 마부석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어, 왜, 왜 이러나?”
“고삐 잡으시오!”
“내, 내가?”
“그럼 당신이 저놈이랑 싸울래!”
훈마의 고함에 저량은 더 군말 없이 고삐를 잡았다. 그렇게 고삐를 떠넘긴 훈마는 큼직한 자기 칼을 뽑아 들며 천장이 날아간 마차 쪽에 섰다. 그렇게 서서 보니 새삼 악귀의 붉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제길···”
악귀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그들을 따라붙으며 어느새 꺼내든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훈마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도 이 마차 지붕을 날려버린 게 저 화살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떠돌이 장건은 고수였던 모양인지 저걸 어찌 막아낸 모양이지만, 훈마는 그처럼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죽어줄 수는 없었다. 훈마는 마구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 나름대로 균형을 잡고는 두 손으로 칼을 잡았다. 저 뒤에서 악귀만큼이나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장건이 보였다. 딱 한 번만 버텨주면 그가 따라붙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훈마는 악귀의 화살이 정확히 자신을 노리는 것을 보며 천천히 호흡을 가라앉혔다. 딱 한 번, 딱 한 번만 막자, 적어도 저량은 살리자, 사람이 그럭저럭 괜찮으니 살아남으면 내 가족 정도는 책임져 주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곧 이를 악물었다. 악귀의 활시위가 끝까지 당겨진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화살이 활시위를 떠났다.
훈마는 반사적으로 날아든 화살을 쳐냈다. 그리고 조금 전에는 대포알처럼 마차를 부쉈던 화살이 이번엔 그냥 팅-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훈마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너-! 넌 중원인이 아니구나-! 대지의 자식이 중원인의 앞잡이가 되다니-!]어리벙벙한 훈마의 머릿속에 그런 고함이 울렸다. 그 소리에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던 훈마는 곧 힉 숨을 들이켜며 칼을 휘둘렀다.
[배신자에겐 죽음뿐이다-!]훈마는 어느새 훅 찌르고 들어오는 악귀의 창을 겨우 비껴냈다. 하지만 그 찌르기의 여파만으로 마차 구석으로 튕겨나게 되었다.
[죽어라-!]마차 안에서 구르는 훈마에게 악귀의 창이 내려꽂혔다. 훈마는 급히 반대쪽으로 굴러 창을 피했고, 빗나간 창은 이미 반쯤 박살 난 마차를 더 때려 부쉈다. 고삐를 잡고 있던 저량이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악귀의 눈이 저량을 향했다. 그 순간 저량은 장건이 들었던 것과 같은 괴성을 듣고 눈이 풀려버렸다. 악귀의 창이 이번엔 그를 노렸다.
그때 나는 듯 달려온 장건의 칼날이 악귀의 옆구리를 갈랐다.
붉은 피가 뿜어지는 일은 없었다. 악귀는 그저 귀를 찢는 듯한 비명을 지르더니 조금 전처럼 훅 검은 연기로 흩어졌다. 고개를 들었던 훈마는 그 놀라운 광경에 입을 쩍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장건이 외쳤다.
“정신 차리고 저 양반 챙기시오! 그리고 멈추지 마시오!”
마차가 정신없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려 훈마의 귀를 울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눈이 풀려 휘청대는 저량을 얼른 끌어 마차 한쪽에 눕혀놓고 고삐를 잡았다. 마차는 여기저기 박살이 났지만 그래도 바퀴와 바퀴 축은 멀쩡했다.
장건은 조조의 속도를 늦추며 빠르게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훈마가 화살을 튕겨내던 장면은 장건도 보았다. 저 귀신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중원 사람을 상대할 때 어마어마하게 강해진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그가 상대하는 것보다 훈마가 상대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건은 그렇게 싸움을 떠넘길 마음이 없었다.
조조를 멈추고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던 장건은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선 악귀가 보였다. 연기 때문에 흑마와 기수가 한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때 장건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렸다.
-···너의 몸에서 대지의 향기가 나는구나. 물과 흙, 나무의 냄새. 계곡의 정령에게 은혜를 받았느냐?
장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조금 전 들었던 악귀의 것과 달랐다. 훨씬 차분하고 이성적인 목소리였다. 장건은 곧 그것이 기수의 것이 아닌 흑마의 목소리임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의 존재가 아니었군. 당신은 누구요?”
-나는 들판이다. 마른 풀이고, 바람에 날리는 모래바람이다. 그리고 학살당한 아이들의 어머니다.
그 대답에 장건의 눈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비명을 들었소. 무슨 일이 있었소?”
-속임수와 배신, 악의로 똘똘 뭉친 중원인의 거짓말. 나의 아이들은 모두 죽었고, 나 또한 내 심장을 빼앗겼다. 몸을 잃은 원한과 뜻을 잃은 육신은 하나가 되었고, 이제 내가, 우리가 할 것은 그저 복수뿐이다.
[중원인을 죽여라-! 찢어라-! 그 심장을 뽑아버려라-! 이 땅의 모든 중원인에게 복수하라-!]붉은 얼굴의 기수가 손에 든 창을 번쩍 들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붉은 얼굴은 이제 그냥 붉은 것이 아니라 새빨간 것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걸쭉하고 끈적이는 그것, 그건 피였다.
그를 보는 장건은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중원인이 그렇게 사악하진 않다거나, 중원인이든 원주민이든 어디에나 악인은 있을 수 있다든가 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산 사람도 아니고 원한에 사무친 귀신에게 그런 말이 먹힐 것 같지는 않았다.
장건은 그저 묵묵히 그 외침과 비명을 들었다. 머리와 핏줄을 타고 절절히 흘러드는 원한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동안 하늘의 먹구름은 더 어두워졌고, 기수의 붉은 얼굴에서는 시뻘건 피가 철철 흘러내렸으며, 차분한 소리를 전하던 흑마도 두 눈을 붉게 번쩍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둘은 곧 한목소리가 되어 외쳤다.
[-중원인을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아무래도 장건에게서 정령의 기운을 느끼고 잠시 정신을 차렸던 것에 불과한 듯했다.
깊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장건은 늘어뜨렸던 칼을 천천히 들어 악귀를 겨눴다. 그러자 악귀는 마치 그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뚝 외침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흑마와 기수는 찢어지는 듯한 괴성을 지르며 장건의 정면으로 달려왔다.
장건은 그를 보며 전신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전날 소림승 진견의 사자후를 떠올리며 길고 낮은 소리를 토해냈다. 마치 깊은 산속에서 메아리가 되돌아오듯 거대한 울림이 벌판을 가득 채웠다.
그 진동이 흑마와 기수에게 닿자 그들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연기가 촛불이 바람에 날리듯 흩어져버렸다. 거세게 달리던 흑마는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지르며 멈췄고 기수 또한 아까보다 훨씬 사람 같은 고함을 지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조조를 움직인 장건은 번쩍 칼을 휘둘렀다. 시퍼렇게 빛나는 칼날이 기수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조금 전과 달리 칼날에 감촉이 있었다. 장건이 흘끗 뒤를 돌아보니 기수의 옆구리가 쩍 갈라져 울컥울컥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앞으로 쭉 달리다가 부드럽게 선회한 조조는 다시 그들을 향했다. 장건의 칼날도 잔뜩 담긴 내력으로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칼날이 다시 휘둘러지기 직전, 고통에 겨워 비틀거리던 붉은 얼굴의 기수가 번뜩 장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그 얼굴에서 시뻘건 피 안개가 장건의 얼굴을 향해 쏟아졌다.
장건은 곧바로 눈을 감고 호흡을 멈췄다. 휘두르던 칼은 멈추지 않았다.
[끄-아-아-아-!]손의 감촉 직후 악귀의 비명이 울렸다. 하지만 장건은 눈을 뜨지 못했는데, 따끔거리며 얼굴의 이목구비로 파고들려는 피 안개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공으로 모공과 다른 구멍을 틀어막은 덕분에 내부로 들어오지 못했으나 쉬이 흩어지지도 않았다. 시야는 완전히 차단되었고 호흡도 막혔으며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장건이 손을 들어 그걸 흩어내려는 순간 갑자기 조조가 급히 움직였다. 장건은 희미한 감각 속에서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창날을 느낄 수 있었다. 직후 그는 칼을 들어 창날을 비껴냈으나 오감이 차단되어 그 반발력을 완전히 해소할 수 없었다. 장건은 안장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그걸 감당해 준 것은 조조였다. 녀석은 마치 장건의 다리가 된 듯 움직여 휘청 흔들리는 장건을 받아주었다.
[죽어라-!]악귀는 장건에게 틈을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다시 공격해왔다. 천근의 힘이 실린 창이 장건을 후려쳤다. 그러나 장건은 장님이 된 상태에서도 칼을 들어 그 공격을 흘려냈다. 타점을 잃은 악귀의 힘이 허공을 우르르 진동시켰다.
어둑한 먹구름 아래 드넓은 벌판,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그곳에서 두 기수가 서로의 날붙이를 번뜩이기 시작했다.
악귀의 창날이 폭풍처럼 장건을 노렸다. 단순한 듯 절묘한 단창술에 무지막지한 힘이 결합 되어 장건의 몸뚱이를 찢어버리려 들었다. 바람 갈라지는 소리가 휭휭 울렸다.
그에 맞서는 장건에겐 얼굴을 뒤덮고 있는 피 안개를 걷어낼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흐릿한 감각과 허리 아래를 든든히 받쳐주는 조조의 도움으로 악귀의 모든 공격을 흘려내었다. 그의 칼과 악귀의 창이 서로의 몸을 비비며 사방으로 노란 불티를 튀겼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붉은 얼굴의 기수는 창날 사이로 불쑥 들어온 반격에 왼 팔뚝이 뚝 잘려 나갔다.
기수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는 동시에 조조가 그 아래 흑마에게 머리를 들이박았다. 흑마와 기수 모두 휘청거렸고, 그 틈을 노려 장건의 칼날이 다시 한번 벼락같은 섬광을 그렸다.
그 빛은 기수의 붉은 얼굴을 반으로 쪼개버렸다.
얼굴이 반으로 갈라진 순간 기수는 우뚝 움직임을 멈췄고, 그의 머리에 씌어있던 깃털 장식 모자가 툭 쪼개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를 태우던 흑마는 이후 소리 없이 혼자 버둥거리더니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와 함께 장건의 감각을 가리던 피 안개도 흩어져버렸다.
따끔함이 사라진 것을 느낀 장건은 눈을 뜨고 피 안개를 뒤집어쓴 순간부터 지금까지 멈추고 있던 호흡을 푸-하고 뱉어냈다. 억눌려 있던 폐가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이려 헐떡거렸다.
장건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비틀거리는 흑마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세로로 쩍 갈라진 기수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져 흑마 위에 얹혀 있을 뿐이었다. 소림 사자후가 울린 이후로 그들을 감싸던 검은 연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흑마는 서 있는 것도 힘겨운 듯 계속 비틀거리고 있었다.
장건도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호흡을 한참 참으며 단전의 내공을 모조리 일깨워 쓰느라 진이 빠졌고, 희미한 감각만으로 괴물 같은 창술을 상대하느라 머릿속이 눅눅해진 기분이었다. 그 힘을 마주한 손아귀와 팔은 미세하게 떨리기까지 했다.
그때 축 늘어져 있던 기수가 꿈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양손을 들어 뱀 혓바닥처럼 갈라진 머리를 부여잡아 다시 하나로 모았다. 그러나 이미 쪼개진 것이 다시 붙는 일은 없었다. 얼굴 한가운데에 어긋난 선이 그어진 기수는 부르르 떨며 장건을 바라보았다.
[···너, 중원인. 본래 이 땅을 살아오던 것은 우리들이다.]“맞소.”
[···우리의 복수가 정당하지 못했나?]장건은 거칠었던 숨결을 천천히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아무 죄 없는 이들까지 학살했으니 정당하진 않겠지.”
[그럼 우리의 분노는? 학살당한 이들의 슬픔은 어찌 달래야 했나? 피는 피로써 갚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기수의 두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금 전 같은 피눈물이 아니라 진짜 눈물이었다. 그러나 장건은 그를 보며 옅은 한숨을 내쉬다가, 조용히 말했다.
“변명은 집어치우시오. 아무 연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그 분노를 토해낸 것은 당신들을 속이고 학살했다는 무뢰배들과 별다른 것 없는 행동이었소.”
붉은 얼굴은 그 대답을 듣고 허탈하다는 듯 다시 축 늘어졌다. 그리고 그의 시커먼 몸뚱이는 마치 다 타버린 숯처럼 천천히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그 아래 있던 흑마도 곧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때 하늘의 먹구름 사이를 비집고 햇볕이 내려왔다. 그 밝은 빛은 부서져 가는 기수와 흑마를 비췄다.
장건은 그 햇살 아래 무너져가는 그들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누가 그랬소?”
기수의 눈이 장건을 향했다. 그는 장건의 깊은 눈과 시선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동쪽에서 온 중원인.]장건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스러지던 기수는 그 묵묵한 시선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다음 순간 한층 편해진 얼굴이 되었다. 이후 먹구름이 완전히 걷히며 들판이 다시 환해진 순간, 그들은 단번에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장건은 곧 그곳에 무엇인가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조의 등에서 내린 그는 곧장 다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검은색 창 촉이었다.
그는 그 창 촉이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창 촉을 집어 든 순간부터 머릿속에 묘한 울림이 들려오는데 그걸 모를 수가 없었다.
쭈그리고 앉아 창 촉을 바라보던 장건은 곧 고개를 돌려 북쪽을 바라보았다. 도망쳤던 훈마와 저량이 돌아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불안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면서도 반파된 마차를 덜덜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이었다.
그들을 보며 옅게 웃은 장건은 창 촉을 품에 집어넣으며 일어섰다. 그의 눈이 조금 더 먼 북쪽을 바라보았다. 무공과 관련된 일이라면 장건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악령이니, 정령이니 하는 일은 그의 전문분야가 아니었다. 사실 당장 이 악령과 싸운 것도 소림 사자후를 몰랐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장건은 문득 자신을 바라보던 황금빛 눈들을 떠올렸다. 그의 다음 목적지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