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84)
84화
장건과 적풍은 외눈 구름의 천막으로 가기 위해 부족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 중간중간 장건을 마주친 부족 사람들은 모두 가볍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몇몇은 중원인들이 하듯 두 손을 모아 포권을 보여주기도 했다. 장건은 그 인사들에 같은 동작으로 화답해주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자네 덕분에 부족원들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
조금 앞에서 앞서가던 적풍의 말에 장건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적풍은 슬쩍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중원인 중에도 괜찮은 사람이 있기는 하다는 식으로. 물론 다 좋은 사람은 아닐 테지만 그들은 인구가 많으니 그만큼 시원찮은 사람도 많을 뿐이라는 거였지. 적어도 무조건 그들을 밀어내야 한다는 의견은 사그라졌어.”
말을 하던 적풍은 피식 웃었다.
“오히려 그들의 사회와 방식을 잘 배워서 그들을 홀딱 벗겨 먹는 데 써먹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졌네. 그렇게 벌어들인 재물로 부족을 더 번영시켜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었지.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장건은 어깨만 가볍게 으쓱거렸다.
함부로 그의 생각을 이야기해줄 수는 없었다. 적풍은 가볍게 물어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장건이 한 말은 부족 전체에 대한 그의 의견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 의견은 방금 부족 사람들의 인사에서 보듯이 부족의 유일한 중원인 친구의 의견으로서 상당한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장건은 그렇게 되진 않길 바랐다. 이들이 자신이 어설프게 내민 해답에 얽매여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거나, 혹은 다시 숲과 산속에 숨어 문명과 멀어지길 바라지 않았다. 결국 이곳에서 살아왔고, 또 살아가야 할 사람들은 그들이었다. 지나가던 한낱 방랑자로서 칼 쓰는 일 정도는 도와줄 수 있어도 부족의 운명을 결정해 줄 수는 없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적풍은 대답없는 장건에게 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계속 앞장섰다.
두 사람은 곧 외눈 구름의 천막 앞에 도착했다. 이상하게도 외눈 구름은 천막 밖으로 나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오는군. 얼른얼른 다니지 어디서 뭐 하고 있었나?”
“땀을 좀 흘렸습니다.”
외눈 구름은 굽은 허리를 애써 펴며 붉은 눈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땀을 흘렸다고?”
“무공 수련을 하느라.”
“그럼 간단하게 씻고 들어가게. 여기 물통 있으니까.”
장건은 일단 그가 시킨 대로 그 물통의 물로 대충 땀을 씻었다. 그는 외눈 구름이 내민 천으로 물기를 닦아내며 물었다.
“뭡니까? 왜 나와 계시는 거고요?”
“뭐긴?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 들어가면 다 알게 될 것이네. 아, 칼은 이리 주고 들어가게.”
외눈 구름의 말에 장건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감각에 따르면 천막 안에 누군가 들어가 있었다. 뭘 어쩌려는 것인가 싶었다. 그는 그저 그 검은 창 촉의 연원과 마궁의 흔적을 찾을 수 있길 바랐을 뿐이다.
어쨌든 외눈 구름의 내민 손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 칼집째 뽑아 그에게 맡기고 천천히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뒤에서 천막의 입구를 내려 막아버렸다. 이제 이 천막은 천장에 조그맣게 뚫린 구멍 말고는 모두 막힌 것이다. 비록 그 벽이 가죽과 천일 뿐이라도.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선 장건은 잠시 멈칫 굳었다. 천막 안에는 희미한 불씨만 반짝이는 모닥불과 그 너머 앉아 있는 비랑뿐이었다.
“···비랑?”
그녀는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입은 옷은 복잡한 문양과 장식으로 화려했고, 희미한 불씨에서 피어오른 하얀 연기는 그녀의 몸을 둘러싸 그 선을 두루뭉술 흩어버리고 있었다.
장건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불씨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빠져나가는 동시에 밤하늘의 달과 별빛이 찬찬히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이 천막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먼 지평선에 불그스름한 석양이 빛나고 있었음을 생각해보면 기이한 일이었다. 달과 별이 빛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때 비랑의 입이 열렸다.
“또 보는구나, 방랑자.”
장건은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천천히 눈을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는 순간 비랑도 느릿하게 눈을 떴다. 계곡 부족 특유의 황금색 눈.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것은 하루살이의 열정이자 천년 산맥의 지혜였다.
도저히 공존할 수 없어 보이지만, 동시에 대자연에선 당연한 모습. 장건은 그녀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 계곡의 정령이었다.
“···비랑의 몸을 빌린 건가?”
“이번엔 조금 더 긴 대화를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지.”
지난번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마주했을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비랑의 모습이기 때문일까, 그녀는 어딘가 차분하고 성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신비한 두 눈과 그 분위기가 합쳐지자 그녀는 마치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고대의 무녀처럼 보였다.
“긴 대화라.”
“그래, 긴 대화. 초원이 남긴 이 흔적을 훑어보려면 하룻밤이 꼬박 다 필요할 거다.”
언제 꺼냈는지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두 손으로 장건이 구해온 검은 창 촉을 받쳐 들었다. 희미한 별빛과 연기에 휩싸인 그녀, 그리고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는 황금빛 두 눈.
“이리 가까이 오라.”
장건은 일단 그녀의 말대로 했다. 흐린 불씨 모닥불 앞에 다가가 앉은 것이다. 그런데 정령은 고개를 저었다.
“더 가까이.”
여기서 더 가까이 붙으면 그건 서로의 무릎이 닿을 거리였다. 그래서 장건이 잠시 멈칫거리고 있으려니 도리어 그녀가 스르륵 다가오기 시작했다.
“당황할 것 없어. 그냥 받아들여도 좋아, 네가 다치는 일은 없어.”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정령은 가볍게 미소 짓는 얼굴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장건은 그 순간 그녀의 몸 주변에서 흐르던 희뿌연 연기가 자신의 몸을 감싸고, 코와 입, 귀로 흘러들어오려는 것을 느꼈다.
반사적으로 내공을 움직여 막으려니 정령의 손이 가슴께를 쓸어왔다.
“괜찮아, 널 해치려는 게 아니야.”
비랑의 얼굴을 한 그녀는 그 부드러운 손길로 자연스럽게 장건을 뒤로 눕혔다. 장건은 뒤로 누워 둥글게 뚫린 천막 구멍을 보며 내공을 가라앉혔다. 생각해보면 뭐라도 도움을 얻기 위해 온 것은 자신이었다. 비랑과 외눈 구름, 그리고 이 계곡의 정령을 믿어야 했다.
연기가 그의 내면으로 스며들어오기 시작했다. 장건은 자신의 폐와 심장에 그 연기가 스며들며 뜨겁게 달궈지는 전신 기혈을 느꼈다. 그와 함께 어둑한 천막 안에서 마치 전류가 반짝이듯 노란빛의 무언가가 문득문득 시야를 스치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은 잠시 후 그의 시야 전체를 채웠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평면적이지 않다. 밝고 어두움의 변화와 그에 따른 색의 변화로 복잡하고 다채로운 삼차원의 모습이다. 그러나 장건은 그 순간 반짝이는 노란색 섬광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의 윤곽선을 뚜렷이 구분하여 세상을 평면적인 그림으로 만들어버리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 어느 화가의 그림 속 풍경 같은 장면에서, 비랑의 몸을 빌린 정령은 뒤로 누운 장건의 위로 올라와 앉았다. 장건은 반짝이는 그녀의 이목구비에서 비랑의 얼굴을, 전에 보았던 아이의 얼굴을, 그리고 너무나 늙어버린 노파의 얼굴과 또 다른 수많은 얼굴을 보았다.
한 사람이되 여러 얼굴을 가진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장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건은 그 미소에 자기도 모르게 비슷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그녀가 검은 창 촉을 두 손으로 거꾸로 쥐어 높이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것이 빛나고 있는데 그 창 촉만은 여전히 검은색 그대로라 눈에 띄었다.
그리고 정령은 그 창 촉을 마치 잘 보라는 듯 높이 치켜들었다가, 그대로 장건의 가슴팍에 내려찍었다.
살이 찢어지는 욱신한 고통과 동시에 두 눈앞에선 노란빛의 폭탄이 터진 듯 환해졌다.
[그 중원인들을 모두 쫓아내야 합니다! 이 들판과 산, 계곡은 모두 선조들부터 이어진 우리들의 땅입니다! 굳이 그들과 대화하거나 거래할 필요 없어요!]한 전사가 자신의 부족원들을 향해 그리 외쳤다. 하지만 그 외침을 듣는 부족 사람들은 조금 생각이 달라 보였다.
[그 중원인들에게 고작 가죽 몇 장으로 얻을 수 있는 천과 도구, 식량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그리고 이 땅이 우리의 땅이라니? 이 대지와 산, 물과 구름은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지 누군가의 소유가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들어와 살겠다면 그걸 우리가 무슨 권리로 막겠느냐?]전사는 답답하다는 듯 다시 외쳤다.
[그냥 가죽 거래나 하는 중원인들이 아닙니다! 그런 평범한 이들이 아니라, 누군가 이상한 자들이 끼어들었어요! 지난번까지 잘만 거래해주던 그 ‘조합’이라는 곳에서 무슨 권리서니, 토지 증명서니 하는 이상한 종이 쪼가리를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 그들의 도시에서 일하는 동족이 있지 않으냐. 그쪽 사람을 구해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알아보면 될 일이다. 무작정 그렇게 쫓아내자고 할 것이 아니라. 너는 언제까지 그렇게 외부인을 밀어낼 생각만 하려는 게냐? 그들이 바다를 건너와 도시를 세운 지 벌써 백 년이 넘어가는 이 와중에!]전사는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부족원들에게 실망했고, 또 부족원들은 그렇게 무작정 쫓아내자는 말만 하는 전사가 미덥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불신이 피어올랐다.
그때 그걸 어디라고 굳이 특정할 수 없는 곳에서 바라보던 장건은 귓가를 스치는 숨결과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풍경은 바뀌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은 부족 사람들과 중원 사람들로 바뀌었다. 그 중원인 중 옷을 잘 차려입은 누군가가 앞으로 나와 외쳤다.
[이곳의 강과 벌판은 이제 내 소유다! 그리고 여기 이것이 바로 그 증서다! 그러니 당신들은 이곳을 더 이상 불법 점거하지 말고 모두 떠나라!]그가 그렇게 중원어로 말하자 그 옆에 있던 중원 복식의 신대륙 원주민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원주민 말로 말했다.
[다 꺼져! 여긴 이제 고 상단주님 땅이다!]그 지나치게 축약된 외침에 부족 사람들 모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그들의 의견을 모은 원로가 앞으로 나서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다. 여긴 우리가 옛 선조들부터 오랫동안 살아온 땅이다. 물론 당신네들이 이곳에 들어와 살겠다면 말리지 않겠다만, 왜 우리가 나가야 한다는 말인가?]중원인 쪽 원주민이 고 상단주라는 자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 특정할 수 없는 곳에 있던 장건은 그들의 대화도 들을 수 있었다.
[가기 싫다는데요.] [분명히 싫다고 말했나?] [예, 뭐. 비슷합니다.]그는 실실 웃으며 그리 대답했다. 그 웃음이나 얼버무린 말이나 누가 보아도 그렇게 단순히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으나, 중원인 상단주는 비슷한 웃음을 짓더니 크게 외치며 몸을 돌렸다.
[그럼 어쩔 수 없군! 내 당장은 불법으로 내 땅을 점거한 당신들에게 쫓겨나나, 곧 내 땅을 되찾으러 오겠다!] [너희 전부 목 닦고 기다려라!]다시 한번 이뤄진 그 축약에 부족 사람들 모두 혼란스러워했다. 하지만 중원인들은 더 설명하지 않고 그렇게 물러나 버렸다. 중원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던 사람도 당황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했다. 당장 들은 것만으로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장건은 가라앉은 눈으로 조용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비슷한 상황을 계곡의 부족도 겪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장건이 있었고, 아무래도 이들에겐 그런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다음으로. 놀라지 마.
다시 한번 귓가를 스치는 숨결과 목소리 후 장면이 바뀌었다. 부족이 불타고 있었다.
부족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나이가 많고 적고를 따지지 않는 무자비한 중원인들이 부족 사람을 모조리 죽이고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있었다. 그 불길과 연기에 당황한 원주민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면, 중원인들은 실실 웃으며 그들을 찔러 죽였다.
마을 밖으로 도망치는 부족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셋으로 나뉘어 부족을 포위하고 몰려온 중원인들은 단 한 명도 빠져나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혹시나 그 포위를 벗어나 멀리 달려도 말을 탄 상단주가 금세 쫓아가 그 등에 칼을 꽂았다.
부족 사람들이 모두 무력하게 당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초원과 고원을 달리는 전사들이었다. 그리고 계곡 부족의 전사들처럼 그들이 모시는 정령의 힘으로 가슴이 열린 전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전사의 숫자보다 중원인들의 숫자가 더 많았다. 게다가 그들 중 상단주라고 불리던 자는 부족 최고 전사의 머리를 가볍게 잘라 내던지며 사기를 꺾었다.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렇게 부족 사람들을 학살한 중원인들은 곧 타다 만 그들의 집안에서, 혹은 불붙이기 전의 집에서 값이 나갈 것 같은 것들을 모조리 모아 마을 중앙으로 모았다. 아무래도 모두 한곳에 모아 배분하려는 것 같았다.
말을 타고 모인 그들을 둘러보던 상단주는 곧 웃으며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 물었다.
[다 왔나?] [멍청하게 저 야만인들 손에 죽은 놈이 다섯이요. 그들 빼곤 다 왔수다.]상단주는 칼잡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작스레 검을 뽑아 방금까지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중원인 칼잡이들이 모두 당황하는 와중에 그의 품에서 노란 종이가 나왔다. 그는 그 종이를 쓰러진 말 시체 위에 툭 던졌고, 그 종이 쪼가리들은 놀랍게도 말의 피와 닿는 순간 시커먼 불길을 피우며 재가 되었다.
[···뭐, 뭐요? 도사? 당신 도사요?]상단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왼손으로 검결지劍結指를 쥐고 입술 앞에 세우고는 두 눈을 감고 혼자 입술을 달싹거릴 뿐이었다. 칼잡이들 모두 그 모습에 혼란스러워했다. 마치 원주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닥을 흥건히 적시던 말의 피가 부글부글 끓더니 저 혼자 살아있는 존재가 된 듯 벌떡 일어났다. 칼잡이들 모두 그걸 보고 입을 떡 벌리자니 그 혈마血馬가 그들을 덮쳤다.
피로 이루어진 말은 칼잡이들을 하나하나 삼켜나갔다. 겁먹은 칼잡이들은 금방 정신 차리고 도망쳤으나 그들의 뜀박질이 달리는 말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잠시 후 모든 칼잡이가 혈마에게 먹히고, 남은 것은 여전히 눈을 감고 읊조리는 상단주와 중원 복식을 입은 원주민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에 우중충한 먹구름이 끼더니 여전히 불타고 있는 마을 한가운데 땅에서 흐끄무레한 무언가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상단주의 입에서 울리는 주문 소리는 점점 더 커져 목청 좋은 사람이 외치는 것보다 크게 울렸다.
그때 마지막 칼잡이를 삼키고 달려온 혈마가 훌쩍 뛰어 마을 한가운데 높이 피어오른 무언가를 향해 달려들었다.
희게 피어났던 안개는 자신의 안으로 혈마가 들어온 순간 그 흐릿한 몸뚱이만큼이나 불분명한 비명을 내지르더니 슈루룩 혈마에게 빨려 들어갔다. 그때까지 주문만 외우던 상단주는 그렇게 안개가 사라진 순간 검결지를 쥐었던 왼손으로 혈마를 쭉 뻗어 가리켰다.
그 손짓에 보이지 않는 화살이라도 담겨 있던 것인지 혈마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크게 내지르더니 왈칵 무언가를 토하고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우중충한 하늘과 천지를 울리던 주문 소리도 혈마가 쓰러지는 동시에 사그라졌다. 상단주는 가볍게 검을 털어내고는 말에게 다가가 그가 토해낸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그건 전날 장건이 정령에게 받았던 것처럼 말랑말랑하지만 동시에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구슬이었다. 물론 상단주 손에 들린 것은 장건의 것에 비해 색깔은 시커멓고, 크기도 세 배쯤 차이가 났지만.
그걸 잘 살펴보던 상단주는 곧 가까이 다가온 원주민에게 그걸 던져주었다.
[제대로 나왔군. 비단 같은 것으로 잘 싸서 궁으로 가져가거라.] [···이게 원영단原靈丹입니까?] [그래. 대계大計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지.]원주민은 받아든 구슬을 조심히 끌어안으며 허리를 숙였다.
[궁까지 목숨 바쳐 지켜내겠습니다···헌데, 청사靑蛇께서는 같이 복귀하지 않으십니까?] [난 갈 곳이 있다. 감산에 만들어 두었던 선이 다 망가졌다. 그걸 정리하고 다시 연결하자면 또 한참 복귀할 수 없을 것 같더군.]청사라 불린 상단주는 그렇게 말하며 어서 꺼지라는 듯 휘휘 손을 내저었다. 그에 원주민은 다시 한번 깊게 허리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그를 보낸 청사도 곧 몸을 돌리고 떠나려다가, 우뚝 멈췄다. 그의 눈이 쓰러진 원주민 전사 중 하나를 바라보았다. 그 전사는 아직 죽지 않고 엉금엉금 기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벌겋게 충혈되어 치켜든 두 눈이 섬뜩했다.
[하하하! 이거 참. 훌륭한 버러지의 모습이군!]그러나 청사는 그 눈을 보고도 그리 웃더니 검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그는 곧 기어 오는 전사의 상태를 보고는 검을 놓았다. 전사의 뒤로는 이미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피는 물론이고 쏟아져 나온 내장이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 상태로 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할 수도 있으나 청사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굳이 힘을 쓸 것도 없겠구나. 그냥 그리 기다가 죽어라. 네 무력함을 되새기면서.]그는 그렇게 말하고 그냥 몸을 돌려 떠났다.
전사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를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그 손은 닿지 않았다. 상처와 피로 범벅인 손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죽은 부족 사람들, 가족에 대한 슬픔과 분노로 가득한 눈만이 멀어지는 중원인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곧 빛을 잃고 차갑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 땅에 남은 것은 죽은 자들뿐이었다.
그때 그의 뻗은 손을 향해 혈마의 입에서 쏟아진 피가 스르륵 흘러왔다. 시체의 손에 닿은 핏물은 마치 얼음 바닥이 깨지는 듯한 모양으로 한순간에 전사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한쪽에 쓰러진 혈마와 전사를 한 자리로 끌어당겼다.
잠시 후 그 자리에는 검붉은 빛깔의 커다란 고치만 남았다.
계속 지켜보고 있던 장건은 저 고치를 찢고 튀어나올 존재를 알았다. 그의 분노도, 그의 슬픔도 알았다. 특정할 수 없는 곳에 서 있던 장건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저 고치 안에 들었을 모습과는 다르게 멀끔한 차림의 전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은 잠시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신 복수를 해주겠다거나, 그를 감사한다거나 하는 말도 없었다. 둘 사이엔 묵묵한 시선만 있었다.
-이제 돌아가자. 네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았어.
그때 장건의 귓가에서 다시 한번 숨결과 속삭임이 들렸다. 동시에 이 장면이 시작되는 순간에 보았던 빛의 폭발이 또 한번 일어나 그의 눈을 가렸다.
* * *
“···”
장건은 두 눈을 꿈뻑거리다가 옆을 바라보았다. 자신처럼 벌거벗은 비랑이 그의 팔뚝을 베고 누워 있었다. 천장의 구멍에서 환한 아침 햇살이 들어왔고, 그 빛은 그녀의 얼굴을 반쯤 가려 비추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그걸 바라보고 있으니 슬며시 그녀도 눈을 떴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장건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리도 비슷한 꼴을 당했을 거예요.”
“···생각보다 정령은 무력한 모양이군.”
“그분들의 힘을 단순하게 인간의 영역에서 이해하려 하면 안 돼요. 게다가 그 중원인들은 먼저 부족 사람들을 모두 학살했잖아요. 손발을 모두 잃어버린 자가 뭘 얼마나 큰 저항을 할 수 있었겠어요?”
그녀의 대답에 장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진짜 궁금하던 질문을 했다.
“···우리가 옷을 벗고 있군.”
비랑이 빙긋 웃었다.
“좀 답답해서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스르륵 일어나 자연스럽게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걸 멍하니 보던 장건은 문득 창 촉에 찔렸던 가슴팍이 멀쩡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환상이고, 어느 순간까지 진짜였을까?
“옷 입고 나와요. 식사해야죠.”
비랑은 허리띠를 매만지며 그리 말하고는 먼저 천막을 나갔다. 상체를 반쯤 일으키고 그걸 바라보던 장건은 푸-하고 가벼운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누웠다.
“···불장난은 끝이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