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85)
85화
장건이 대충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와보니 밝아오는 아침 하늘과 천막 옆 모닥불에 앉아 뭔가를 우물거리는 적풍과 외눈 구름이 보였다. 옷고름을 여미며 다가가 앉으니 적풍은 별말 없이 걸쭉한 무언가가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그걸 두어 숟갈 떠먹을 때쯤 옆에 있던 외눈 구름이 모닥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알아야 할 것은 다 알았나?”
“···대충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았습니다.”
외눈 구름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붉고 하얀 눈으로 장건을 바라보았다.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정령을 욕보인 자들이네. 그들이 대가를 치르게 될까?”
장건은 그를 마주 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될 겁니다.”
노인은 장건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를 들으며 조금 힘겹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허리띠 주머니에서 어떤 가루 한 줌을 집어 모닥불 위에 뿌리며 말했다.
“그럼 초원의 친구들을 대신해 미리 감사하겠네. 자네가 다음번 왔을 때 내가 살아있을지,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을지 모를 일이니까···”
“어르신, 아침 공기가 쌀쌀합니다. 들어가시죠.”
그가 뿌린 가루로 모닥불에서 옅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식사하던 적풍은 그걸 보고 그릇을 내려놓으며 외눈 구름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잠시 연기를 바라보던 외눈 구름은 곧 얌전히 적풍에게 이끌려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바라보던 장건은 외눈 구름이 일어난 자리에 자신의 칼이 놓여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곧바로 집어 허리춤에 끼워 넣은 그는 남은 죽을 떠먹으며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질 때의 석양과는 다르게 온 세상을 일깨우는 듯 화창한 노란빛이 하늘을 환하게 채우고 있었다.
장건은 입을 우물거리며 그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 * *
외눈 구름에게는 떠난다고 인사하지 못했다. 전날 밤을 밖에서 지새운 것인지 잠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장건은 아침의 대화를 인사라 생각하기로 하고 그냥 떠나기로 했다.
조조의 안장을 정리하고 있으니 비랑과 적풍이 뭔가 한 아름 들고 다가왔다.
“···이게 뭐요?”
“친구가 떠나는데 선물을 줘야죠. 먹을 것도 조금 쌌어요.”
잘 다듬은 가죽과 말린 육포였다. 장건은 은덩이도 있고, 식량도 적당히 가지고 있었지만 선물을 거절하진 않았다. 애써 준비해 주었는데 거절하기도 뭣했다.
“중원인들 피우는 방식으로 말린 담배도 좀 담았네. 잘 가게, 장건. 앞으로도 자주자주 놀러 오고.”
장건은 적풍의 말에 피식 웃으며 고래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조의 위에 오르려 하니 비랑이 먼저 녀석의 고삐를 잡았다.
“배웅해줄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조의 고삐를 끌며 앞장서 나갔다. 그걸 조금 멍하게 바라보던 장건은 곧 다시 웃으며 적풍과 인사를 나온 부족 사람들을 보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몇몇 부족 사람들이 바쁜 아침 중에도 장건에게 인사를 나온 것이다.
인사를 한 장건은 앞장서는 비랑과 조조에게 따라붙었다. 그러자 비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또 올 건가요?”
“지나다 보면 또 올 수도 있지.”
그녀는 조조의 고삐를 끌며 흐-음하고 콧소리를 내었다. 장건은 그게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면서도 먼저 말을 꺼내진 않았다. 때론 침묵이 답이다.
비랑은 마을과 숲의 경계쯤까지 앞장서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품에서 검은색 창 촉을 꺼내 내밀었다.
“이 안에 담겨 있던 기억과 힘은 이미 많이 흩어졌어요. 하지만 주변에 흉수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려줄 수 있을 거예요.”
장건은 그녀가 내민 창 촉을 받아들었다. 확실히 그 물건 전체에 흐르던 묘한 기운은 사라진 상태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냥 거무튀튀한 날붙이로만 보일 정도였다.
그때 그녀가 말했다.
“···또 올 건가요?”
방금 했던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떨림과 장건을 올려다보는 시선은 같지 않았다. 그를 가만히 마주 보던 장건은 옅게 웃었다.
“주술사는 반려를 가질 수 없다던데.”
“반려?”
비랑은 장건의 말에 반문하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 눈가에 살짝 맺히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글쎄요, 전통이라는 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거예요. 세상이 바뀌면 그만큼 삶의 방식도 바뀌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장건. 나와 반려가 되려면 적어도 이 부족에 뿌리를 내리기는 해야 할 거예요. 난 부족의 주술사가 될 테니까요. 그럴 수 있어요? 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아이를 키우는. 정착한 삶을 살아야 할 거예요. 보람 있고 아름답지만, 또 동시에 지루한 삶이겠죠.”
장건은 그렇게 말하는 비랑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받은 창 촉을 허리춤에 끼워 넣었다.
“···그건 좀 힘들 것 같군. 적어도 당장은.”
“그렇죠? 장건은 그럴 것 같았어요. 당신의 영혼은 억눌릴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바람처럼 자유롭기 그지없으니까요.”
웃으면서도 벌써 원주민 주술사가 된 듯 말하던 비랑은 곧 시선을 내리깔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바닥을 바라보니 장건도 할 말이 없었고, 둘 사이에는 금세 침묵이 가득 들어앉았다. 잠시 그렇게 바닥에 시선을 두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난 바람을 잡을 수 있길 바라진 않아요. 그저 그 바람이 이 주변을 지날 때 날 기억하고 찾아오길, 더운 여름의 열기에 잠시 쉬어가길, 추운 겨울의 눈보라를 피해 잠시 머무르길 바라는 것뿐이에요··· 그것도 힘들까요?”
장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힘들지 않소.”
비랑은 다시 미소 지었다.
“그래요. 그거면 됐어요.”
그녀는 손을 뻗어 장건의 옷자락을 가볍게 털어 다듬어 주었다. 그리고는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잘 가요, 장건. 다음에 또 봐요.”
물러난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던 장건은 곧 안장에 걸어두었던 삿갓을 끌러 머리에 썼다. 이후 훌쩍 조조의 안장 위에 올라탄 그는 삿갓 끝을 잡고 비랑을 향해 살짝 숙여준 후 쯧쯧 혓소리를 냈다. 그 혓소리를 들은 조조는 자신도 인사를 하듯 비랑을 향해 가볍게 투레질을 하더니 곧 달리기 시작했다.
비랑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장건과 조조를 바라보다가, 곧 마을로 몸을 돌렸다. 아직 그녀는 선대 주술사와 계곡의 정령에게 배울 것이 많았다. 외눈 구름의 시간이 많지 않아 바쁘게 배우고 익혀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다시 한번 장건의 뒷모습을 확인하고야 말았다. 그녀는 마을로 돌아가며 몇 번이나 뒤돌아 먼 서쪽을 확인했다.
* * *
감산성을 향한 길의 풍경은 남부와 조금 달랐다.
많은 강이 흐르며 빼곡한 침엽수 숲이 있었고, 남부에서처럼 메마른 황야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 숲과 강에는 크고 작은 동물과 물고기도 많았다. 물도 구하기 쉬우니 여정은 쾌적했다. 아침마다 안개가 껴서 축축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으나 누런 흙먼지를 뒤집어쓰던 남부보다는 훨씬 좋았다.
장건은 그렇게 서쪽으로 길을 잡은 지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감산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대륙 삼대 도시, 감산성.
이곳 위로 조금 더 추운 곳에도 통나무와 가죽을 거래하는 작은 항구도시 두엇이 더 있으나 사람들은 보통 북쪽 도시라고 하면 이 감산성을 떠올렸다. 이 신대륙에 중원인들이 처음 발 디딘 세 도시 중 하나이자 다른 두 도시에 비해선 조금 작으나 그래도 대도시라고 불릴만한 커다란 도시.
일 년 내내 자주 비가 내리고 안개 끼기를 밥 먹듯 해서인지 냉소적인 사람이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와중에 밤 문화는 크게 발달하여 수많은 기루와 음식점, 객잔 등으로 각각 거리를 이룰 정도의 특이한 도시였다.
북부 항로를 타고 온 새로운 중원인들과 전부터 살던 신대륙 사람, 그리고 적게나마 원주민들이 섞여 살며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땅이기도 했다.
그 감산성을 향해 나아가는 장건과 조조 옆으로 수많은 이들이 스쳐 지났다. 떠나는 자와 돌아온 자들이 복잡하게 섞여 길가는 소란스러웠다. 뭔가 쨍한 하늘을 가지고 있던 신사천과는 달리 감산성의 하늘은 어딘가 흐리고 우중충했으며, 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질척거렸다.
조조는 말굽에 달라붙고 털을 더럽히는 진흙이 짜증 나는지 연신 푸르륵거렸다. 장건은 그런 녀석의 목덜미를 툭툭 쳐주며 감산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일단 식사와 숙소를 잡을 생각으로 객잔 거리를 향해 나아갔다. 감산 안에 들어서긴 했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서인지, 아니면 너무 멀기 때문인지 검은색 창 촉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발품을 좀 팔아야 할 듯 보였다.
그때 털털 걸어가는 조조의 옆으로 웬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와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무사님! 무사님! 감산 최고 객잔인 저희 왕가 객잔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에요! 저희 이가 객잔이 진짜 감산 제일의 객잔이에요! 제가 무사님을 모실게요!”
“감산 최고의 객잔은 저희 오룡 객잔뿐입니다! 저희 객잔으로 가시죠! 지금 가시면 죽엽청 한 병이 반값!”
“아니, 무사님! 굳이 객잔으로 가실 것 뭐 있습니까! 그냥 저희 기루로 오시죠! 아직 대낮이지만 특별히 무사님에게만 대출혈 장사를 하겠습니다!”
호객꾼 노릇을 하는 아이들이었다. 거리의 시작부터 끝 사이에 있는 객잔이 수십 개는 되니 고개를 유치하기 위해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중 장건의 흥미를 끈 것은 다들 자기 객잔이 좋네, 얘네 객잔은 별로네 싸우는 아이들 틈에서 대뜸 자기네 기루로 오라 외쳤던 꼬마였다.
장건은 고삐를 툭툭 당겨 조조의 걸음을 멈추고 안장 머리에 양 팔꿈치를 얹으며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기루로 오라던 꼬마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그 눈빛을 보고는 안색이 확 밝아지더니 다시 외쳤다.
“식사를 원하십니까? 저희 태평루의 요리사는 일류! 웬만한 요릿집보다 더 훌륭한 식사를 하실 수 있습니다! 숙박? 저희 태평루의 방과 잠자리는 언제나 깨끗이 관리되고 그 안락함은 다른 객잔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납니다! 한번 누우면 다음 날 일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일 겁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희 태평루에선 이 감산성의 진정한 음주가무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장안에 비견되는 가히 불야성不夜城이라 할 수 있는 감산의 진짜 모습!”
진짜 장안을 가본 적은 있을까 싶은 꼬마 녀석이 그렇게 외치는 동안 장건은 느릿한 손으로 종이와 담배 주머니를 꺼내 연초를 말았다. 그걸 입에 물고 자연스럽게 검지로 불을 피우니 꼬마의 말이 끝났다. 장건은 후-하고 하늘 위로 연기를 뿜고는 다시 꼬마를 바라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이미 반쯤 흩어지고 있었다. 이 거리는 객잔 거리였고, 그래서 사실 기루 호객을 하는 이 꼬마 녀석은 반쯤 상도덕을 어기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객잔 호객꾼 아이들은 그 녀석을 향해 적대적인 눈빛을 보내면서도 특별히 제지하거나 방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건 이 꼬마에게 그만한 뒷배가 있거나, 아니면 그 조그만 덩치에 비해 어마어마한 독종이라 아무도 건들지 못하는 것일 터였다. 장건은 녀석의 눈썹을 삐죽 지나 이마로 뻗어 오른 흉터를 보며 아무래도 후자가 아닐까 짐작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장건은 곧 피식 웃으며 연초를 입에 물고 말했다.
“좋아. 그 태평루라는 곳으로 가자.”
“감사합니다, 무사님!”
꼬마는 넙죽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더니 총총 다가와 조조의 고삐를 잡아 이끌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오가는 말과 마차, 사람들 사이에서 꼬마는 겁도 없는지 성큼성큼 고삐를 이끌어 나아갔다. 장건은 그런 녀석의 모습을 제법이라는 듯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이름이 뭐냐?”
“제 이름 말입니까? 관량이라고 합니다, 무사님!”
“난 장건이다.”
“···예?”
조금 전까지 또랑또랑 말하던 녀석은 순간 장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멍하니 되물었다. 그에 장건이 다시 말했다.
“통성명이 낯서냐?”
“···아, 네. 제 이름을 궁금해한 분은 많아도 대뜸 자기 이름도 말씀해 주시는 분은 없었어요.”
장건은 피식 웃었다.
“그럼 익숙해지면 되겠군. 반갑다, 관량. 난 떠돌이 장건이다.”
녀석은 뭔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반갑습니다, 장 떠돌, 아니 무사님. 어, 그··· 태평루까지 모시겠습니다.”
관량은 장건의 미소를 보며 자신도 슬그머니 웃더니 고삐를 다잡고 다시 앞장섰다. 뻣뻣하던 녀석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진 것을 본 장건은 삿갓을 한번 매만지며 느긋하게 녀석을 따랐다.
“저깁니다. 자꾸 했던 말 해서 죄송하지만, 저희 기루는 진짜 음식도 맛있고 잠자리도 깨끗합니다. 꼭 가무를 즐기지 않더라도 숙박하기에 좋은 곳이에요.”
장건은 관량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객잔 거리에 비해선 휑한 기루 거리가 보였다. 이곳은 이제 쉴 시간이었기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그 중 관량의 손이 가리킨 기루는 아주 크지는 않았으나 겉으로 보기엔 깔끔해 보였고, 간판도 멋들어진 글씨로 쓰여 있었다.
“저 간판은 저희 태평루 단골이셨던 왕상훈 선생이 써주신 겁니다. 듣기로는 반년 치 외상을 저 간판 하나로 대신했다는데, 장 이모 성격을 생각해보아선 아무래도 그냥 소문일-”
그때 그 안에서 여러 사람의 비명이 들리더니 누군가 일 층 태평루 창문을 깨부수며 밖으로 튕겨 나왔다. 나무 살과 종이를 엉망으로 부수며 나뒹군 남자는 이미 내던져지기 전에 많이 맞았는지 얼굴이 엉망이었다. 그 후 태평루의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 나온 자들은 딱 봐도 나 건달이요, 하는 험상궂은 남자들이었다.
장건은 물고 있던 연초를 반대편 입가로 굴리며 뚱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감산성에 들어서자마자 벌써부터 도시의 난잡함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