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87)
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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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루의 삼 층 특실엔 일부 벽을 움직여 거리를 내다볼 수 있는 열림창이 있었다. 장건은 그 열림창 앞에 앉아 한밤중에도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 감산의 기루 거리를 내려다보며 술잔을 홀짝거렸다.
그가 이 태평루에 머문 지 벌써 사흘째였고, 그 시간은 위험하니 떠나라던 태평루주 관수찬이나 오히려 자신이 미안해야 할 것이라 말했던 장건이나 조금 머쓱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사흘 동안 태평루를 쳐들어온 건달이나 무사는 없었다. 지금도 태평루는 멀쩡히 영업하며 아래층에선 손님을 받아 시끌시끌하게 금을 튕기고 퉁소를 불며 노래를 불렀다. 기녀와 악공들이 손님들을 홀리고 주방에선 끊임없이 요리와 술이 나갔다.
때때로 전날 건달을 쫓아냈던 태평루의 무사는 어디 있느냐 묻는 사람도 있었다. 장건이 건달을 쫓아낸 것이 조금 와전되어 그가 이 기루의 새로운 경비 무사라는 소문이 난 것이다. 그에 기녀들은 모두 모호한 태도를 보여주었고, 덕분에 장건의 신비함은 나날이 커졌다.
루주 관수찬과 기녀들 나름대로는 그의 신비함을 키워 건달들이 쉽게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할 생각인 듯 보였다. 장건 입장에서는 애써 그럴 필요 없는 행동이었으나, 굳이 말리지도 않았다. 애초 처음부터 우르르 몰려오지 않았다는 것부터가 당장 그 조직의 상황이 정상적이지 못한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쳐 날뛰는 도시의 암흑가, 그걸 못 본 척하는 무림맹 지부, 황군도 지난 소탕 이후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그런데 정작 그 미쳐 날뛰어야 할 암흑가에서는 자신들을 무시한 무사 하나 처리하는데도 이렇게 늦어지고 있다··· 과연 이 도시의 혼란은 어디서 왔고, 또 당장 움직이지 않는 흑혈파의 속셈은 무엇이란 말인가?”
거리를 내다보던 장건은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 있던 관량이 혼자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장건을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히죽 웃고 있었다. 장건도 피식 웃으며 물었다.
“아버지가 말해주었나?”
“네. 정확히는 혼자 심각하게 중얼거리시는 걸 들었죠. 난 그걸 아부지가 왜 고민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린 이 기루만 잘 지키면 되는 거 아닌가요?”
“네 아버지 나름의 생각이 있는 거겠지.”
태평루는 십여 년 전 중원에서 넘어온 관수찬이 세운 기루였다. 자세한 사정은 이야기해 주지 않았지만 지난 사흘간 지켜봐 온 바로는 분명 명문가의 후예였음이 분명했다.
그런 그가 지난날 건달들에게 더는 보호세를 내지 못하겠다고 말했던 것은 현재 암흑가의 혼란으로 돈을 바쳐야 할 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다른 자들을 물리쳐 주던가, 아니면 보호세를 깎아달라고 했던 것이 그대로 소란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다행인 건 그놈들이 가만있으니까 다른 놈들도 눈치를 보느라 우릴 건들지 않은 거 같다는 거예요.”
태평루는 이 기루 거리의 조합에 회비를, 무림맹 감산 지부에 토지 사용료를, 그 외에도 뒷골목 조직 셋에게 돈을 뜯겼다. 거기에 기루 유지비를 빼면 거의 버는 그대로 그들에게 가져다 바친 것이다.
그런데 장건이 건달들을 쫓아낸 이후 그 건달들의 조직인 흑혈파가 움직이지 않자, 다른 두 조직도 상황을 보려는 듯 보호세를 받으러 오질 않았다. 지난 사흘간 기루는 정말 손님들을 제외하고는 조용했다.
장건은 술병을 들어 빈 잔을 채우며 관량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술상에 차려진 음식을 기웃거리다가 슬쩍 주워 먹으며 이 방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녀석이 이 방에 있는 표면적인 이유는 일단 장건의 심부름꾼이었고, 실제로 그가 이것저것 시키면 잘하기도 했다. 물론 진짜 이유는 관량이 장건의 무공을 보고 뭐라도 한 자락 배워볼 수 있을까 싶어 기웃거리는 것이었다.
장건은 그런 녀석을 굳이 내쫓거나 멀리하지 않았다. 솔직히 사흘 동안 이 방 안에 있으면서 술만 홀짝이는 것도 한나절이지 진탕 취하려는 것도 아니니 계속 술만 마실 수도 없었다. 결국 장건은 관량에게 태평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지난 사흘을 보내게 된 것이다.
관량은 요리를 집어 먹고 손가락에 묻은 양념까지 핥아내고는 장건에게 말했다.
“저는 왜 무림맹이 움직이질 않는지 모르겠어요. 당장 오늘 아침에도 뒷골목에서 시체가 하나 나왔다니까요. 무림맹은 그런 사파들의 짓거리 막으려도 생긴 단체 아니었어요? 아니, 그렇게 태업하면 신사천 무림맹 본 단에서 그, 감찰원인가? 그런 거 와서 부패한 맹원을 싹 잡아가는 걸로 아는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니까요.”
장건은 굳이 각 도시 간의 위치나 기타 여러 요인으로 만들어졌을 무림맹 내부의 파벌에 관해서나, 그로 인해 감산 지부장 정도 되면 자신을 털어내려 온 감찰원을 도리어 힘으로 억누를 수 있으리라는 등의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확실한 것도 아니고, 관량 또한 무슨 대단한 식견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손님이 왔군. 넌 이만 가봐야겠다.”
“예? 손님이요? 아니 손님은 밑 층에 잔뜩···”
그때 스르륵 문이 열렸다. 관량은 깜짝 놀라 문을 돌아보았다. 문 너머에는 장아영이 서 있었다. 그녀는 장건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고는 말했다.
“흑혈파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단 두 분만 오셨더군요. 지금 올라오고 있습니다··· 량이는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장건은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인 장아영은 방 안으로 들어와 관량을 붙잡아 끌었다.
“자, 잠깐, 장 이모! 나 구석에서 얌전히 있을게!”
“량이 너! 괜히 무사님 방해하지 말고 얼른 나와!”
귀를 붙잡힌 관량은 질질 끌려 나갔다. 그렇게 두 사람이 빠져나가고 잠시 지나자 누군가 삼 층 복도를 걸어오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들은 열려있는 문까지 거침없이 다가오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 안에 장건을 바라보았다.
장건도 그들을 마주 보았다.
삼십 대로 보이는 남자 둘이었다. 둘은 형제인 듯 서로 닮았고, 검은색에 소매가 넉넉한 비단옷을 입은 채 뒷짐을 지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차림새나 자세나 술잔을 들고 앉아있는 장건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오른쪽에 염소수염을 기른 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사흘 전 우리 부하를 핍박한 무사냐?”
“핍박? 그놈들이 아니라 내가?”
장건이 반문하자 왼쪽에 수염 없이 매끄러운 남자가 말을 받았다.
“태평루는 엄연히 우리 흑혈파의 사업장이다. 그 사업장이 제멋대로 굴려 한다면 당연히 기강을 잡아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넌 우리 일하는데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이야.”
불청객이라는 말에도 장건은 어깨 한번 으쓱인 후 들었던 술잔을 훌쩍 들이켰다. 그리고 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건달 여럿을 예상했는데 단 두 사람이라.”
“어설픈 놈 하나 처리하는데 굳이 여럿이 몰려올 필요는 없지.”
수염 없는 남자의 말 이후 이번엔 염소수염이 말을 받았다.
“자, 어떻게 해줄까? 두목의 자비로 네 목숨까지 거둬가진 않기로 했다. 그냥 팔다리 중 하나만 자를 거야. 특별히 네가 고르는 것으로 잘라주지.”
하지만 장건은 그의 살벌한 말에도 뚱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 반응에 두 남자의 표정이 살짝 굳을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단둘이서만 움직이는 걸 보아하니 너희가 흑혈파의 해결사군. 왜 떠돌이 무사 하나 상대하는데 굳이 무리의 해결사가 나섰을까? 그것도 사흘 만에, 그 무력도 정확히 측정되지 않은 자에게. 혹시 움직일 병력이 없나?”
두 사람은 장건의 말에 흘낏 서로를 돌아보다가 뒷짐 지고 있던 손을 풀어 자연스레 늘어뜨렸다. 풍성한 소매가 그 양손의 모습을 가렸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사지 하나가 아깝지 않은 모양이야.”
“···혹 무슨 뒷배라도 있어 그걸 믿고 그렇게 안하무인으로 구는 것이냐?”
“난 장건이다. 뒷배는 없다. 나뿐이지.”
그들은 잠시 장건의 당당함에 입을 다물었다. 얻어맞고 온 놈들이 주먹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는 것으로 보아 한 수가 있는 놈인 건 맞은 듯한데, 그래도 지난 사흘간 기루에서 죽치고 있던 놈이 뭔가 세력을 감추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난 자명.”
“난 자운이다.”
염소수염과 매끈한 턱은 그렇게 자신들의 이름을 밝혔다. 그리고 천천히 문턱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문에서 제일 먼 반대편 기둥에 기대고 앉아있던 장건은 그를 보며 느긋하게 일어섰다.
염소수염 자명이 그걸 보며 말했다.
“뭐 하다 굴러온 놈인지는 몰라도 우리 흑혈파를 건든 건 아주 실수한 것이다.”
“우린 곧 이 감산의 뒷세계를 평정하고 일대의 지배자로 일어설 것이니까.”
매끈한 턱 자운이 그렇게 말하며 우뚝 멈췄다. 그가 걸음을 멈춘 동시에 자명도 걸음을 멈추고 장건을 노려보았다.
장건은 활짝 열린 창을 등지고 서 있었고, 두 남자는 장건을 꼭짓점으로 삼각형을 그리는 자시에 멈춰 섰다. 그러면서 넉넉한 소매에 가려져 있던 그들의 무기가 드러났다. 흔히 호조虎爪라 불리는 기문 병기로, 손등 위에 칼날 여럿이 발톱처럼 튀어나온 모양새였다. 그게 양손에 하나씩, 강철 발톱 넷이 장건을 노리고 반짝거렸다.
장건이 그렇게 드러난 그들의 무기를 바라보는 동안 자명과 자운은 흘낏 시선을 나눴다. 장건에겐 당장 보이는 무기가 없었다. 그의 것으로 보이는 칼은 몇 발짝 떨어진 창가에 기대 세워져 있었다. 일 합으로 나뉘는 무림에서 그 몇 발짝은 절대 닿을 수 없을 거리였다.
기회라 여긴 두 사람은 슬그머니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여 자세를 낮췄다. 하지만 장건은 자연스럽게 선 자세 그대로일 뿐 특별히 대응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열린 창밖에서는 서늘한 밤공기는 물론이고 거리를 다니는 취객들의 노래와 고함도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게다가 자명과 자운 두 남자는 들어올 때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것인지 아래층에서 금과 퉁소를 연주하고 기녀들이 노래하며 노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방안에 켜진 등불은 장건과 가까운 쪽에 셋이 전부였다. 덕분에 방안은 꽤 어두웠고, 그 어둑한 그림자 한쪽을 자리를 차지하고 선 세 사람의 모습과 그들의 그림자는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흘낏 자명과 장건의 상태를 곁눈질하던 자운은 곧 자신의 형에게 그들 형제만의 신호를 보내며 바닥을 박찼다. 소매에 반쯤 가려졌던 칼날이 어둑한 방안에서 번쩍 빛나며 장건을 향해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과 동시에 장건도 움직였다.
장건의 발이 옆 술상 위에 올려져 있던 술잔을 톡 찼다. 그러자 그 술잔은 누가 전력으로 집어 던지기라도 한 것처럼 매끈턱 자운에게 날아갔다. 기겁한 그는 그 자리에 멈추며 양손을 교차해 날아온 술잔을 막아야만 했다.
강철 호조와 사기 술잔이 충돌하며 퍽-하는 소리가 터졌다. 자운은 자기도 모르게 잇소리를 내며 뒤로 살짝 밀려났다. 양팔에 무슨 망치에 찍힌 것처럼 찌르르 고통이 왔다.
하지만 움직인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호를 받은 염소수염 자명이 어느새 훌쩍 장건에게 다가가 양손의 호조를 찔러넣고 있었다.
술잔을 차서 자운을 막은 장건은 휘리릭 바람을 가르며 다가오는 자명의 호조에 그대로 마주 양손을 내밀었다.
자명은 그가 뭘 믿고 손을 내미는지 생각하는 것보다 일단 그 손을 찢어버릴 생각으로 더 깊게 호조를 찔러 갔다. 장건의 손은 그 예리한 칼날에 그대로 베여나갈 것 같았다.
그때 그의 양손이 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느린 듯 빠르게 호조로 다가간 장건의 손은 자명상의 눈으론 이해하기 힘든 원형 움직임을 보이며 칼날을 피하고 그 손목까지 파고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장건의 두 손이 뒤로 빠지며 자명의 호조도 같이 훅 빠져버렸다. 동시에 장건의 발이 그의 배를 걷어차 버렸다.
한 수만에 무기까지 빼앗기고 복부를 얻어맞은 자명은 억소리 한 번 내고는 방 한구석으로 굴러갔다.
“형님!”
술잔을 막았던 자운이 그 모습에 놀라 움직이려는 순간, 장건이 빼앗은 호조 하나를 휙 던져버렸다. 그 칼날은 그대로 자운의 어깨로 날아가 틀어박혔다. 그는 화끈한 어깨의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악!”
하지만 연이어 날아온 호조가 왼 허벅지에 꿰였을 때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단말마를 내지르고야 말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털썩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오른 어깨와 왼 허벅지의 고통을 느끼며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이어서 그가 단순한 떠돌이 무사가 아니라 상상 이상의 고수라는 것을 깨닫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별다른 소속도 밝히지 않고 떠도는 고수란 결국 신분을 숨긴 황군이거나 고대 세가 무사일 가능성이 컸다.
그는 제발 그런 것은 아니길 바라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저, 정체가 무엇이오? 혹 다른 놈들이 우리 세력을 꺾고자 고용한 고수요?”
가볍게 둘을 격파한 장건은 터덜터덜 술상 쪽으로 돌아가 술병 하나를 집어 병째로 훌쩍 한 모금 마시고는 창가의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서 말했다.
“그 세력. 지금 감산 뒷골목에서 난장판을 벌이고 있다는 그 암흑가 세력들에 대해서 아는 대로 다 말해봐.”
자운은 방금 감산 뒷골목 고수 둘을 쓰러뜨리고도 아무런 흥분 하나 보이지 않는 장건의 고요한 눈을 보며 뭔가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것을 느꼈다. 창백하던 그의 얼굴이 고통과 불안감으로 도리어 시커멓게 죽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