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94)
94화
좁은 골목에 어울리지 않던 커다란 대문 너머에는 널찍한 공터와 그 한가운데 작은 사당이 차려져 있었다. 공터에는 조금 전까지 회룡단 조직원들이 쉬고 있었는지 여기저기 비를 막을 작은 천막과 모닥불, 뭘 먹던 그릇, 쇠 주전자, 바닥에 까는 담요 등등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엔 다른 조직원들과는 다르게 밖으로 나오지 않고 안에서 기다리던 조직원도 있었다.
“···뉘슈?”
사당은 시장 바닥과 다름없는 공터보다 조금 높았고, 그래서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했다. 그 조직원은 그 계단 바로 앞에 앉아서 찻물을 홀짝이던 참이었다.
그는 대문을 열고 들어온 장건과 그의 손에 들린 칼을 보고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어벙한 표정이었다. 장건은 뚜벅뚜벅 그 앞까지 걸어가 멈춰서서 사당과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이는 보이지 않았다.
멍해 보이는 조직원에게 시선을 맞춘 장건이 물었다.
“왕 씨 형제는 저 안에 있나?”
조직원은 두 눈을 끔뻑거리며 질문을 한 장건을 올려다보다가, 슬쩍 열린 대문 너머를 훔쳐보고는 스르륵 얼굴이 굳었다.
“···그, 그렇소.”
장건은 바짝 긴장한 그 조직원을 뒤로하고 계단을 올랐다. 조직원은 등을 보이는 그를 두고 꿀꺽 침을 삼켰다가, 쇠 찻잔 든 오른손을 덜덜 떨며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장건이 그 몇 안 되는 사당의 계단을 오르는 동안 온갖 감정이 교차하는 듯 파르르 떨었다.
다음 순간 그는 쇠 찻잔을 내던지고 허리에 매여있던 칼을 잡아 뽑았다.
뽑혀 나온 칼은 빨랐다. 다른 조직원들과는 다르게 혼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유가 그 실력 때문이기라도 한 것인지 바로 잡히지 않은 자세에도 불구하고 그의 칼은 번쩍 섬광을 그렸다.
그러나 그 섬광이 장건의 칼보다 빠르진 못했다.
공터 안에 챙-하고 맑은 쇳소리가 울리고, 반 토막 난 칼날은 허공을 휘휘 날아 멀찍한 곳에 떨어졌다. 칼날이 떨어짐과 동시에 조직원 또한 스르륵 앞으로 꼬꾸라졌다.
죽은 이를 뒤로한 장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칼을 한 번 털어내고 계단을 올라 사당 문 앞에 이르렀다. 그 문을 가볍게 밀어내니 애초부터 잠겨 있지 않았던 듯 끼이익-하는 소리를 내며 가볍게 열렸다.
사당 안에는 큼직한 나무 불상 하나만 놓여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촛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비로워야 할 불상은 시커멓고 음산하게만 보였다.
장건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선은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어딘가 비밀통로가 있음을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 사당 밖에서 안을 둘러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무 불상 뒤에서 바닥 위로 올라와 있는 밧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엄청 교묘히 숨겨진 비밀통로는 아니었다. 아마 그래서 회룡단 조직원들이 바깥을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밧줄을 붙들고 잡아당기자 나무 바닥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렸다. 싸늘하고 텁텁한 공기가 훅 올라오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잠시 그 아래를 바라보던 장건은 곧 거침없이 그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런 좁은 통로 안에서는 상황에 대처하기도 힘들고 끝에 기습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장건이 생각하기에 지금 밑에 있을 놈들이 그의 공격을 짐작하고 있진 못할 터였다.
사실 장건의 등장은 이들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누가 먼 동부에서 일어난 원주민 학살 사건을 쫓아 여기까지 와서, 단번에 그 범인을 쫓아 이 지하실로 내려간다는 말인가?
당사자인 청사는 이곳에 와 있고 원영단을 챙긴 인물은 더 먼 동쪽으로 사라졌다. 생존자는 그 둘 뿐이었다. 설사 불타버린 원주민 마을을 발견하더라도 거기서 곧장 범인 청사를 쫓아 이곳 감산성까지, 그것도 이곳 회룡단 은신처까지 쳐들어왔다는 것은 무슨 천리안이라도 달리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장건은 왔다. 묘한 우연과 의지의 합주 끝에. 여기서 마궁이 무슨 짓을 꾸미는 것인지는 아직 몰랐으나 장건은 그들이 가진 계획이나 심산 따위를 신경 써 줄 생각이 없었다. 그저 이 아래 있을 푸른 뱀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뿐이었다.
허리 뒤에 매인 검은색 창 촉에서 부르르 떨림이 느껴졌다. 그 창 촉에 서린 원한이 원수가 가까워지고 있음에 흥분하고 있었다.
장건의 예상대로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를 저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길 끝에서는 철문 하나로 가로막혀 있었는데, 횃불이나 등불 하나 없어서 아주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장건은 별 어려움 없이 철문으로 다가가 눈을 감고 왼손을 가져다 댔다.
손바닥에 쇠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그 너머에서 사람의 대화로 짐작되는 진동이 느껴짐을 확인한 그는 눈을 뜨고 철문을 살폈다.
철문은 안에서만 열 수 있는 것인지 열쇠 구멍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칼날이 들어갈 틈도 없어서 걸쇠를 자르고 여는 것도 힘들 듯했다. 조금 더 살펴보니 그나마 철문 주위까지 모조리 쇠는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힘으로 열어젖히기.
“괜히 땀 빼게 하는군.”
장건은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철문 앞에 섰다. 두 발은 어깨보다 조금 넓게 벌리고, 두 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아랫배쯤에 두었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팽창된 폐와 아래로 길게 늘어난 횡격막이 단전을 자극해 그 안에 담긴 기운을 움직였다. 단전에서 일어난 기운은 바람 같은 움직임으로 전신을 휘돌다가 두 갈래로 나뉘어 좌반신과 우반신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양 손바닥이 있었다.
차분한 바람 같던 내력은 양팔의 기혈을 타고 손바닥으로 내려가며 급격히 뜨거워졌다. 그것은 단순한 양기의 집약이 아니라, 음양의 기운이 맹렬한 속도로 꼬이고 회전하며 기혈을 내려가 일어나는 열기였다. 기운과 기운이 서로의 몸을 비벼 일어나는 마찰에서 비롯된 신비한 힘이며, 삼매진화의 요체이기도 했다.
그 열기는 장건의 팔뚝 안에서만 머무는 것을 넘어 바깥으로도 후끈한 바람을 일으켜 옷깃을 흔들었다. 누군가 지금 장건을 보고 있었다면 마치 흐릿하게 보이는 화룡火龍 두 마리가 양어깨를 시작으로 스르르 팔뚝을 타고 내려가 마침내 두 손바닥 안으로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기운이 충분히 모인 것을 느낀 장건은 천천히 두 손을 들어 가슴께로 끌어올린 후, 참았던 호흡과 함께 철문을 향해 쏟아내었다.
텅-하는 소리가 울리고 철문은 와락 구겨지며 안쪽으로 튕겨 들어갔다. 문 주변은 날아가는 문짝과 함께 박살 나서 부스스 흙먼지를 피웠다. 안에서 울리던 대화는 갑작스러운 소란에 뚝 멎었다.
장건은 그 흙먼지를 거침없이 뚫고 안으로 들어섰다.
위에 있는 사당과 그 공터만 한 공간이 그 안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중간중간 굵은 기둥을 제외하고는 별것 없었는데, 그 중심부로 보이는 곳에는 관처럼 보이는 것 하나와 그것을 품品자로 둘러싸 앉아 있던 세 사람이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을 본 장건은 씨익 웃었다.
박살 난 문과 웃음 짓는 장건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들은 곧 훌쩍 자리에서 일어나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긴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자가 조금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누구냐?”
목소리까지 들은 장건은 더 확신할 수 있었다. 꿈에서 보고 들은 자가 맞았다.
“누구긴. 당신 찾아온 사람이지.”
이미 심각하던 긴 수염의 얼굴이 더 차갑게 굳었다. 그는 흘낏 다른 두 사람에게 눈짓했고, 그 둘은 천천히 좌우로 벌어져 움직이며 장건을 포위했다.
긴 수염이 말했다.
“날 찾아왔다니, 이 감산에 날 아는 자는 없을 터인데.”
“난 감산성 출신이 아니다.”
긴 수염은 자신의 수염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이한 일이군. 눈과 표정을 보니 정말 날 아는 모양인데, 정작 내 기억엔 전혀 없는 얼굴이지 않은가.”
장건을 훑어보던 그의 눈이 흘낏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끝에는 와락 구겨져 바닥을 굴러다니는 철문이 있었다. 그 철문에는 두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긴 수염의 눈이 가늘어졌다.
“···놀라운 내공이군.”
“네가 한 짓에 비하면 별것 아니지.”
긴 수염은 가늘어진 시선 그대로 장건을 노려보았다.
“내가 한 짓?”
“그래. 네가 한 짓.”
장건은 의아한 긴 수염의 눈빛을 무시하고 좌우로 흩어진 다른 두 남자를 훑어보았다.
“너희가 왕 씨 형제겠군. 왕삼이 안부 전해달라던데.”
두 남자는 그 자리에서 멈칫하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왕삼이 무림맹에 체포되었다는 사실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대법을 앞당기려 이 지하실에 내려와 있는 이유도 여태 말을 잘 듣던 감산 지부가 갑작스레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오른쪽으로 움직이던 남자가 장건을 노려보며 물었다.
“무림맹? 신사천에서 특별히 무사를 보낸다는 정보는 없었는데.”
왼쪽으로 움직인 남자가 말을 이었다.
“셋째는 어떻게 했지? 죽였나?”
장건은 그들을 스윽 둘러보며 왼손으로는 허리춤의 칼집을 붙잡고 말했다.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군. 사실 나도 너희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긴 수염은 장건을 알아보려는 것인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고, 나머지 둘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며 포위를 마무리했다. 그때 장건의 말이 이어졌다.
“왕삼이 왕 씨 형제의 셋째였으면, 너희 둘 이름은 설마 왕일, 왕이냐?”
그 말에 두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른쪽에 있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왕일이다.”
왼쪽의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난 왕이. 그게 뭐 이상한가?”
둘의 대답에 장건은 털털 웃었다. 가명인지 진짜 이름인지는 알 수 없어도 정말 대충 지은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짧은 잡담을 듣던 긴 수염은 턱을 쓰다듬던 손을 휙 털어내며 낮게 말했다.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는 통성명이나 하자는 것이나? 좋다, 난 남궁여준이다. 넌 누구냐?”
“장건.”
남궁여준은 장건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느냐는 듯 왕일과 왕이를 바라보았다. 왕일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지만 왕이는 뭔가 생각날 것 같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곧 기억난다는 듯 장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장건! 구음사혈 탈취를 방해한 잡니다! 황군으로 추측되는 고수!”
황군이라는 말에 남궁여준과 왕일의 표정이 덩달아 차가워졌다. 물론 오해를 받은 장건은 묘한 웃음만 짓고 있었다.
장건이 마궁의 일을 방해한 것은 한 번이 아니었다. 북동쪽 계곡 부족에서 한 번, 감산성 일대 경제를 집어삼키려던 서위량을 해치우며 또 한 번, 그리고 저자가 언급한 구음사혈, 아마 진서하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짐작되는 사건에서 다시 한번. 그리고 장건도 몰랐지만 중부 일대에서 문제를 일으키다가 장건 손에 목이 달아난 적사단과 두목 감상청도 마궁의 끈이 뻗어있던 마적들이었다.
어쨌든 다른 사건 많은데 굳이 구음사혈만을 집어 이야기한 것과 그를 황군이라 짐작하는 것은 마궁이 장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모습이었다.
사실 이 신대륙의 넓디넓은 땅덩어리와 전자기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시대 기술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보가 모이려면 그것을 물어올 정보원이 살아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다시 그것을 취합해 제대로 된 이야기를 파악해야만 했다.
중원도 아니고 이 신대륙에서조차 황군의 눈을 피해 몸을 낮춰야 하는 마궁 입장에서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기실 황제의 정보원인 암룡대가 신대륙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도 국가적 역량이 동원되었기에 가능한 짓거리였다.
“황제의 개? 아, 그래··· 동부 평원의 일을 파악했나 보지? 여기저기 아무 곳이나 킁킁대며 냄새를 맡고 다니는 짓거리가 정말 똥개나 다름없군.”
장건의 정체를 황군이라 짐작한 남궁여준은 다시 자신의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경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금 전 장건이 자신에게 한 말의 의미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아하니 도사나 승려는 아닌데··· 그렇다면 그 빨간 원숭이들이 뒈졌다는 것 외에는 모른다는 말이군. 냄새 맡는 것 외에는 별 쓸모없는 놈들답게 사건의 숨겨진 진의를 파악하는 능력은 형편없어. 그리고···”
남궁여준은 수염을 쓸어내린 손을 그대로 내려 허리에 매인 검 손잡이를 잡았다.
“홀로 이곳에 내려오다니, 오만하군.”
왕 씨 형제도 그가 검을 잡는 것과 동시에 자신들의 칼을 잡았다. 그를 마주한 장건은 여전히 왼손으로 칼집을 붙들고 있었다. 남궁여준은 그를 보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황제의 개들은 항상 그렇지. 결국은 능력이 모자라 이 땅에 좌천된 자들이 언제나 자신들은 황군의 맹호교위니 비장군이니 거들먹거리며 고개만 뻣뻣해. 지난번 손광의 경우를 생각하고 공을 세울 생각에 혼자 달려온 모양인데, 그것이 네놈의 실수가 될 것이다.”
말을 맺음과 함께 그의 눈동자에서 검푸른 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장건 양옆을 둘러싼 왕 씨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칼을 잡은 그들의 손에서 울퉁불퉁 굵은 혈관들이 튀어나왔다.
“···천년의 세월 동안 빚어진 신공을 보여주마.”
그들의 눈이 검푸르게 빛나자 갑자기 그 지하 공간 자체가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켜져 있는 횃불이 대여섯 개에 불과했던지라 그리 따듯하지 않은 공간이었으나, 그 온도의 하강은 비정상적인 현상이었다.
온도가 낮아지며 활활 타오르던 횃불의 빛도 슬그머니 수그러들더니 잠깐 사이에 지하 공간은 아주 음산하고 차가운 굴이 되었다. 그건 단순히 온도가 낮아져 느껴지는 추위가 아니라, 남궁여준을 비롯한 세 남자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냉혹한 마기가 생명 본연에 깔린 공포를 강제로 일깨우며 몰아치는 축축한 싸늘함이었다.
그들의 기세는 지금까지 장건이 만나왔던 마인들 중 단연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왕 씨 형제가 아니라 남궁여준이라는 자의 마공이 그러했다. 마인이 하나도 아니고 셋이니 장건은 자연스레 이 싸움이 쉽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직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황군이 아니라 항변하지도, 혹은 물러날 구석을 찾지도 않은 채, 전신의 감각을 모조리 일깨우며 문을 부순 후 가라앉았던 단전의 내공을 다시 한번 격렬히 질주시켰다. 피부와 호흡을 통해 그의 몸 안으로 침습하려던 마기는 그 강렬한 움직임에 뜨거운 물에 댄 것처럼 밀려나야 했다.
차가운 지하 공간 안에서 오직 장건의 몸 주변만 후끈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남궁여준은 그걸 보고 느꼈으나 전신에서 차갑게 끓어 넘치는 마기에 입을 열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건 왕일과 왕이도, 그들을 마주한 장건도 마찬가지였다.
네 남자는 그렇게 석상처럼 그 자리에 선 채 다음 순간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최선의 공격로를 찾아 끊임없이 서로의 빈틈을 찾았다. 지하 공간의 공기는 열기와 냉기가 서로 잡아먹으며 소용돌이처럼 휘돌기 시작했다.
그 작은 바람은 잠시 후 지하 공간을 격렬하게 내달리는 태풍이 되어 네 남자의 머리칼과 옷깃을 마구 흔들어댔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방해에도 여전히 눈 하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그 폭풍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으며 지하 공간은 완전히 고요해졌다.
직후 왕 씨 형제가 바닥을 박차고 동시에 장건의 칼도 뽑혔다.
칼날이 칼집을 빠져나온 동시에 세상이 느려졌다. 장건 오른편에 있던 왕일이 조금 더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그를 막고자 칼을 대면 한순간 늦게 다가온 왕이가 훤히 열린 왼편을 공격해올 터였다. 두 눈을 시퍼렇게 번쩍이며 칼을 휘두르는 두 마인의 모습이 악귀 같았다.
장건은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망설이지 않았다. 칼집을 빠져나와 이미 벼락같던 칼을 더 빠르게 움직여 오른편 왕일을 향해 뻗었다. 넘치는 마기가 가득 담겨 거뭇하게 번쩍이는 왕일의 칼날과 장건의 칼이 만났다.
왕일의 검기는 그대로 잘려 나갔다. 자신의 칼날이 불티를 튀며 잘리는 것을 인지한 그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그는 목을 향해 다가오는 칼날을 막고자 반사적으로 왼손을 들었으나, 피륙으로 이루어진 그의 손은 그저 목보다 먼저 잘려 나가는 것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첫 번째 목을 베어낸 장건은 오른발을 뒤로 빼며 왼발을 축으로 두고 회전하던 힘 그대로 빙글 돌았다. 어느새 훌쩍 가까워진 왕이가 얇은 직도를 쭉 뻗어 찌르고 있었다. 그 칼끝에도 역시 폭발적인 마기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피하거나 걷어내기에는 이미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장건은 회전하던 칼날의 궤적을 그대로 두고 몸을 살짝 비틀었다. 정확히 목을 노리고 찔러오던 왕이의 칼날이 그 비틀림에 목표를 잃고 장건의 오른쪽 승모근 부분을 훑고 지나갔다. 칼날에 담겨 있던 강렬한 힘에 칼날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았음에도 살이 터져나갔다.
그러나 왕이는 그 대가로 오른쪽 겨드랑이부터 반대쪽 목덜미까지 뚝 잘려 나갔다. 그의 얼굴은 성난 짐승 같은 표정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 또한 왕삼처럼 외공을 익히고 있었던 듯 거센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장건의 칼은 더 견디지 못하고 땅-하는 소리와 함께 부러져버렸다.
직후 다시 정면으로 돌아온 장건의 전면으로 남궁여준의 검이 날아오고 있었다. 검푸른 마기가 줄줄 흐르는 그의 두 눈과 그 우악스러운 힘이 가득 담겨 공간을 찢듯 다가오는 검날. 거기 어디에도 장건이 아는 남궁이라는 성씨의 모습은 없었다. 지금 그를 향해 날아오는 검은 하늘을 닮지도, 그렇다고 제왕의 위엄도 없었다. 그저 냉혹한 난폭함만 있었다.
장건은 그 모습을 모두 눈에 담았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남궁과는 너무나 달랐지만, 또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그들의 무공을 되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 마음속 한 장면을 남김과 함께 한 바퀴 회전하며 좌반신 안에 일으켰던 삼매진화를 왼손으로 밀어냈다. 그의 발끝에서 시작된 화룡은 발목, 무릎, 허리, 어깨, 팔을 빙글빙글 돌아 손바닥 안으로 빨려들었다. 장건은 그 화룡이 담긴 손바닥을 그대로 남궁여준을 향해 뻗었다.
남궁여준도 샛노랗게 빛나는 장건의 손바닥을 보았으나 아직 한참 거리가 있음을, 그리고 그 거리에 따라 자신의 검이 먼저 닿을 것을 알았기에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는 그 손바닥과 장건을 그대로 쪼개버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가슴팍에 격렬한 통증을 느끼며 훌쩍 뒤로 나가떨어져야 했다.
그리고 그가 멀찍이 떨어져 있던 석관 주변까지 날아갔을 무렵 장건의 왼 손바닥에선 약간 늦게 우우우-하는 낮은 용음龍吟이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느려졌던 시간이 다시 본래 흐름을 되찾으며 죽은 왕 씨 형제의 몸뚱이는 투두둑 바닥에 흩뿌려졌다.
장건은 왼발과 왼손을 앞으로 뻗은 자세 그대로 그제야 여태껏 참았던 호흡을 길게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