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98)
98화
그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깜짝 놀란 관량이 덜컥 딸꾹질을 시작했다. 성난 눈으로 관량을 노려보던 검은 손님은 다시 점원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 물건 주인 나였다! 근데 그 새끼가 훔쳐 갔다! 그럼 누구 잘못이냐!”
점원은 제발 좀 진정하라는 듯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알아봐 드리지요. 의뢰인이랑 구매자를 찾아서 물건 돌려드릴 테니, 나중에, 나중에 다시 오십시오.”
“나중에 언제! 날짜 말해!”
점점 몰리는 손님들의 시선에 점원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곧 이쪽을 보는 다른 손님들도 모두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그럼··· 일단 물건의 감정을 하고 중개를 한 저희 대장간 책임도 있으니··· 사흘, 사흘 후에 오시면 그 물건과 범인을 잡아다 놓겠습니다. 저희 포가蒲家 대장간의 명예를 걸고 말입니다.”
사흘이라는 말에 다시 벌컥 소리를 지르려던 검은 피부 손님은 뒤이어 명예를 걸겠다는 이야기에 조용해졌다. 그는 점원이 진심인지 보겠다는 듯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킁-하고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믿어본다, 사흘 후 온다.”
그는 약간 어설픈 발음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딸꾹질하는 관량을 지나갈 때는 자신의 커다란 두 눈으로 희번덕 노려보았고, 그 눈빛에 다시 한번 놀란 녀석은 덜컥 숨을 멈춰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아이가 너무 놀란 듯 보이자 장건은 녀석의 등에 손을 올려주었다. 단단한 손이 등을 받쳐주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관량이 장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을 따라 검은 피부의 손님도 장건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장건이 먼저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군. 아이가 말실수를 했소.”
두 사람을 지나가던 그는 장건의 말에 덜컥 걸음을 멈췄다. 그는 거의 노려보다시피 장건을 쏘아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들?”
장건은 고개를 저었다.
“친구.”
그는 장건과 관량을 번갈아 보다가 다시 말했다.
“대신 사과 싫다. 직접 해라.”
“···예, 예?”
관량이 어벙하게 되묻자 그가 다시 말했다.
“나 노예 아니다. 누구도 날 소유할 수 없다. 난 자유인이다.”
그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가 화를 내지 않자, 관량도 겁먹은 기색을 지우고 좀 더 또렷이 그의 눈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그의 흰자, 검은자의 경계가 분명한 눈동자를 바라보던 관량은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유인. 알았어요,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미안해요.”
어딘가 엄격하고 적대적인 무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관량의 사과를 듣고는 갑자기 씨익 웃었다. 그는 관량을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
“난 아논이다. 반갑다, 어린 친구.”
관량은 잠시 그 손바닥을 가만 바라보다가, 곧 어설프게 마주 잡았다. 그리고 자신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저는 관량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아논은 관량의 대답을 듣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이번엔 장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장건은 그 손을 자연스레 마주 잡고 흔들어주며 말했다.
“장건.”
“만나서 반갑다, 장건. 혹시 여기서 물건 사려고 왔나?”
장건은 대뜸 이어진 아논의 질문에 묘한 웃음을 지었다.
“사러 온 건 아닌데··· 무슨 문제 있나?”
“사려면 사흘 뒤 사라. 여기 신용 문제 있다. 사흘 뒤 내 물건 돌려주면 신용 회복이다. 그전까진 도둑놈과 한패다.”
장건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관량도 그 말에 웃었다. 그가 여기서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대뜸 불매를 종용할 정도로 화가 났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물론 옆에서 듣고 있던 점원은 안색이 싹 굳었다. 그는 세 사람 옆으로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 물건이랑 판매자는 꼭 찾아드린다니까요! 사흘만 기다리시면 되는데 왜 다른 분들에게까지···”
아논은 의심스럽다는 듯 게슴츠레 눈을 뜨고 점원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만 찍찍거려라. 사흘 뒤 오겠다.”
“찌, 찍찍?”
아논은 장건과 관량에게 시선을 돌려서 다시 한번 씨익 웃어주고는 살짝 고개를 까딱거렸다. 말은 좀 어설퍼도 인사하는 모양은 중원인이나 다름없었다.
그 후에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대장간을 떠났고, 상대가 떠난 점원만 푹 한숨을 내쉬며 장건과 관량에게 말을 걸었다.
“···뭐 더 찾으시는 거 있으십니까?”
“없소. 사흘 뒤 오지.”
“···예,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다른 볼일이 없던 장건과 관량도 대장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대장간 대문을 나선 그들의 눈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아논이 보였다. 그를 본 관량이 장건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저 영업 좀 할게요.”
장건은 피식 웃었다.
“숙소 찾는 게 아니면?”
“에이, 제 경력이 얼만데. 저건 딱 봐도 견적이 나오잖아요. 사흘간 일정이 텅 비어버린 길 잃은 남자의 뒷모습. 열에 아홉은 오늘 묵을 곳을 찾는 거죠.”
“아직 아침인데?”
관량이 씩 웃었다.
“감산에 들어온 서역인 열의 아홉은 선원인데, 난 선원 중 밤낮을 가리며 술 마시는 사람은 본 적 없거든요?”
그렇게 말한 관량은 소매를 걷어 올리며 후다닥 달려가 아논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아논이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건이 귀에 내력을 집중하고 말고 할 시간도 없었다. 아논은 곧바로 관량과 함께 장건에게 다가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술 좋아하나? 난 좋아한다!”
* * *
태평루로 돌아온 장건은 엉겁결에 아논과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다. 물론 불편했다면 당연히 거절했을 테지만, 그처럼 중원 말을 잘하는 흑인과 이야기를 나눠 본 적 없었던 장건은 우하하 웃는 아논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어쩌다 이곳까지 흘러왔을지도 궁금했던 탓도 있었다.
아논은 대낮부터 기루 1층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벌컥벌컥 독한 술을 들이켰다. 탁자 반대편에 자리 잡고 앉은 장건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술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며 혼자 신난 아논을 바라보았다.
한참 말도 없이 독주만 들이켜던 아논은 두 병을 연이어 비우고 나서야 푹 한숨을 쉬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걸 본 장건이 물었다.
“아까 대장간에선 무슨 일이었나?”
그 말에 아논은 화가 난다는 듯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가 다시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나랑 같은 배 타는 놈이 내 뒤통수를 쳤다···”
그는 그렇게 말문을 열어놓고 술 한 잔을 더 들이켰다.
“···나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 사람이다. 배 타고도 일 년은 가야 할 곳에서 왔다. 사실 여기까지 온 건 내 의지 거의 없었다. 날 구해준 선장이 가자는 대로 갔을 뿐이다.”
“선장?”
“선장. 날 구해준 분이다. 관량이 말하는 곤륜노 될 뻔했던 나는 선장 덕분에 자유인 됐다. 아주 고마운 분이다.”
장건은 술을 한 모금 홀짝 마시고 말했다.
“그 선장이라는 사람이 대진국大秦國 사람인가 보지?”
“대진국? 아, 로마? 아니다. 선장 출신은 나도 모른다. 하지만 로마인은 아니다. 오히려 페르시아, 그러니까 중원 말로 파사波斯 지방 사람이랑 닮았다. 어쨌든 중요한 건 선장이 아니다. 아니, 중요하긴 한데, 그 새끼보다 중요한 건 아니고···”
그때 관량이 안주 한 접시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끼어들었다.
“대진국? 나도 대진국 알아요. 먼 서쪽의 제국이잖아요? 아저씨 그쪽 사람이에요?”
“난 카르타고 남부에서 살았다. 로마 사람은 아니었다.”
“···카, 칼타고? 롬?”
접시를 내려놓고 아는 단어가 나와 얼른 끼어들었던 녀석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장건은 그런 녀석의 코를 튕겨주며 말했다.
“궁금하면 네 아버지한테 물어봐라. 나도 중원 말로 로마는 알아도 카르타고는 뭐라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녀석은 장건이 아논과 비슷한 발음을 자연스레 하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슬그머니 몸을 뺐다. 진짜 아버지한테 물어보러 가는 모양이었다. 장건은 그걸 보다가 아논에게 시선을 돌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 로마는 꽤 오래전에 둘로 나뉘었는데.”
“둘? 로마가 둘로 나뉘었다고? 언제? 왜?”
본래 알던 역사와 이 세상의 역사를 비교하려 입을 열었던 장건은 곧장 말문이 막혔다. 그쪽 역사를 잘 알았다면 자세히 물어보았을 텐데,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탓에 바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서···”
아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역사 잘 모른다. 하지만 로마가 둘로 나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 로마 하나다. 언제나 하나였다.”
그의 대답에 잠시 생각하던 장건은 곧 고개를 살살 내저으며 잔을 비웠다. 그가 알던 로마와 이 세상의 로마를 비교해서 뭘 어쩔 것인가? 가물가물한 옛 기억을 열심히 되살려 비교해 보아도 그건 결국 장건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에겐 장건의 기억이 허무맹랑해 보일 테니까.
“···그래, 그 뒤통수 맞은 사연은 뭔데?”
술맛 때문인지 씁쓸한 혀끝으로 가볍게 입맛을 다신 장건은 주제를 돌렸다. 다행히 아논은 그런 말 돌리기에도 술술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방금 말했지만 선장이 나 구해줬다. 노예로 일만 하다 죽을 뻔했는데 살려준 것이다. 그래서 나 배에서 열심히 일했다. 은혜 갚는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선장이 그걸 좋게 본 것 같다. 덕분에 얼마 전에 나 갑판장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지난번 갑판장이 해적들이랑 싸우다가 죽어버린 덕도 있었지만···”
“배에서는 얼마나 일했는데?”
“배에서? 오륙 년 정도? 우리 배는 정말 안 가본 곳이 없다. 오늘 이곳 감산부터 남쪽에 천후성, 신사천도 지나왔고, 당연히 중원도 지나왔다··· 거기서 죽을 뻔한 일도 많았는데···”
장건은 그의 잔을 채워주었고, 아논은 잔이 차자마자 벌컥 들이켜고 보았다.
“푸후··· 우리 배에는 높은 직급을 달면 선장이 선물을 하나씩 해준다. 항해사는 무슨 목걸이 같은 걸 받았는데, 난 이왕이면 무기로 달라고 했다. 쓸데없는 금가락지보다 해적 모가지 썰어버릴 칼이 더 좋았다···”
신나게 술을 들이켜더니 슬슬 술이 올라오는 듯 아논의 눈이 살짝 풀려가기 시작했다.
“···선장은 알겠다며 멋들어진 칼 하나를 선물해줬다. 칼날에 물결무늬가 있었는데, 그게 보통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난 그걸 갑판장의 증표로 삼았다. 나 이후에도 갑판장은 그 칼을 쓰기로 한 것이다···”
그는 장건이 잔을 채워주지 않아도 혼자서 홀짝홀짝 잘 마셨다. 자연스레 안주도 집어 먹는 게 젓가락질에도 익숙해 보였다.
“···락카라는 놈이 있었다. 선장이 날 구할 때 같이 구해주고, 선원 생활도 나랑 똑같이 한 놈이다. 그런데 이놈은 여태 갑판 바닥만 닦는 불쌍한 놈이었다. 몸도 약하고 용감하지도 못해서 선원들과 어울리지도 못했지. 나는 나름 잘 챙겨주려 했지만, 결국 여기 감산에 와서 배에서 내리기로 했다. 기왕이면 로마 쪽에서 내리는 게 어떻냐고 했지만 배에 진절머리가 나서 싫다고, 당장 내리겠다고 하더군··· 이거 참, 술이 생각보다 독한데···”
주절주절 이야기를 풀어놓던 아논은 눈을 꿈뻑거리며 잔을 만지작거렸다. 여태 가만 듣던 장건이 그 잔 위에 쪼르르 술을 채워주었다. 아논은 다시 채워진 잔에 혼자 신이 나서 훌쩍 다시 들이켰다.
“푸후우··· 어쨌든··· 나는 그 새끼가 여기서 내린다길래··· 나름 생각해서 정착할 돈도 모아주고··· 격려도 해주고··· 그래서 둘이 따로 거하게 술도 마셨는데···”
“일어나보니 그놈과 돈, 선장에게 받은 칼이 사라졌다는 거군.”
느릿하게 말하던 아논은 장건이 이야기를 받아주자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를 가리키며 웃었다.
“흐흐··· 어떻게 알았냐···? 너무 뻔한 이야긴가···?”
“어찌저찌 그놈을 쫓아보니 오늘 아침 그 대장간에서 그 칼을 처리했던 거고?”
“맞다, 맞아··· 그 못된 놈··· 내가 그래도 동기라고 얼마나 잘 챙겨줬는데···”
이후 아논은 장건이 못 알아들을 언어로 중얼중얼하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 뭉개진 발음은 둘째 쳐도 거센소리가 단번에 욕인 걸 알 것 같았다. 의자에 몸을 기대로 팔짱을 낀 채 묘한 눈으로 그걸 바라보던 장건은 아논의 손이 술병을 찾으며 허공을 허우적거리자 대신 병을 집어 들었다. 아논이 그걸 보곤 헤죽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장건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천천히 잔을 채워주려다가 덜컥 멈추고는 마주 웃으며 말했다.
“너, 중원 말 더 잘할 수 있는데 일부러 어설프게 하는 거지?”
아논은 그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다시 게슴츠레 웃으며 불분명한 태도로 어깨만 으쓱거렸다. 그걸 바라보던 장건은 병을 기울여 잔을 채워주자 그는 그걸 훌쩍 들이켠 후 철퍼덕 탁자 위에 엎어졌다.
장건은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로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연초를 하나 말았다. 사흘간 재밌게 떠들 친구 하나가 생긴 것 같았다.
연초 연기를 뿜고 있자니 사라졌던 관량이 다가왔다. 녀석은 드르렁거리는 아논을 흘끗 확인하고는 장건에게 물었다.
“아부지도 칼타고는 뭔지 모르겠다는데요. 그게 어디에요?”
“서쪽. 아니, 어쩌면 동쪽이 더 가까울 수도 있겠군.”
더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이 된 관량을 두고 장건은 연초만 한 모금 더 빨아들였다. 그가 알던 세계는 이제 정말 닿을 수 없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니면 연초가 오래되어 맛이 변한 것인지 입 안이 썼다. 조금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