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 West Murim RAW novel - Chapter (99)
99화
사흘 동안 비는 두 번 내렸고, 아논은 두 번 정신을 잃었다. 모두 술에 취해서였다.
아논은 금은이 많았다. 첫날에는 장건과 둘이서만 술을 마셨지만 곧 태평루 전체에 돈을 뿌리며 혼자서도 기녀 서넛을 앉혀놓고 술을 마셨다. 호탕하게 돈을 뿌리고 쉽게 화내는 일도 없이 온종일 놀아대니 태평루 사람 중 그를 싫어하는 자가 없었다.
그 유별남은 곧 기루 거리에서도 유명해져서 검은 피부의 부자를 구경하러 오는 손님이 생길 정도였다. 자신을 무슨 볼거리처럼 여기는 그들의 모습에 화가 날 법도 한데, 아논은 상대가 너무 무례하지만 않다면 모두 친구로 여기고 같이 술을 마셨다. 덕분에 태평루는 사흘 동안 무슨 커다란 연회장처럼 방탕한 놀이터가 되었다.
아논의 독특한 외모와 먼 서방의 신비한 이야기들은 감산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는 인간처럼 희로애락에 충실한 신들의 이야기와 역경과 고난을 헤쳐나가는 영웅들, 그리고 세계를 가로질러 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수많은 별천지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 환호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장건은 한 발 떨어져 입에 연초 하나를 물고 서서 묘한 감상을 느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 기다리던 사흘째가 되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가벼운 운기조식을 한 장건은 옷을 차려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지난밤 신나게 놀아 젖힌 아논과 기녀들, 사람들이 이 층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그걸 삐딱하게 서서 바라보고 있으니 계단에서 관량이 올라왔다. 녀석은 쟁반 하나를 들고 있었고, 그 위에는 대접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뭐냐?”
“꿀물이요.”
“꿀물?”
관량은 장건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아침에 이거 한 사발 가져다주면 은덩이 하나씩 던져 주던데요? 아논 아저씨 진짜 부자인가 봐요. 선원이 뭐 저렇게 돈이 많은지 모르겠다니까요. 아, 혹시 해적인가?”
“해적이면?”
녀석은 히죽 웃었다.
“해적이면 어때요. 돈에는 죄가 없는걸요.”
사흘 전 재신財神을 물어온 덕에 아버지에게 큰 칭찬을 받은 관량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논 주변을 맴돌며 이런저런 심부름을 해주고 돈을 받았다. 그전까지 같이 놀았던 장건 입장에서는 웃음만 나왔다. 권법 한 자락 가르쳐주려 했는데, 덕분에 관량이 바빠져 시간이 나질 않은 것이다.
장건은 고개를 살살 내저으며 쟁반을 든 녀석과 아논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먹던 음식과 빈 술병들 사이에 대자로 드러누워 있었다. 관량이 그를 흔들었다.
“아논, 아논! 일어나요! 오늘은 그 칼 받으러 가야 한다면서요?”
아논은 드러누운 그대로 스르륵 눈만 떴다. 그리고 눈을 떴던 것처럼 자연스레 상체를 일으키고는 관량과 장건을 돌아보았다.
그가 말했다.
“···벌써 사흘 지났나?”
장건은 웃었고, 관량은 그 앞에 쟁반과 대접을 내밀며 대답했다.
“그럼 그 많은 술과 음식을 언제 다 먹었겠어요? 아논 덕분에 우리 집 술 저장고가 텅텅 비었다니까요.”
아논은 그 대접을 받아 꿀꺽꿀꺽 마시고는 입가를 닦으며 크게 트림까지 했다. 그 후 기대하는 눈빛의 관량에게 자연스럽게 금화 하나를 꺼내 주었다.
“이게 뭐야? 이건 어디 돈이에요?”
“인디아.”
“···거긴 또 어딘데요?”
관량은 그렇게 말하며 금화를 살펴보았다. 둥글지 않고 각진 모양에 태양과 코끼리 등이 간략한 모양으로 새겨져 있었다. 신대륙과 중원에서 통용되는 모양은 아니었다. 하지만 금은 금이었기 때문에 관량은 그걸 냉큼 품 안에 집어넣었다.
꿀물을 마신 아논은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나서 몸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던 장건이 물었다.
“갈 수 있겠나?”
“물론. 이 정도 숙취는 아무렇지도 않다. 망망대해를 지나던 때에는 진짜 사흘 밤낮을 술만 마셨던 적도 있다. 그때 비하면야, 뭐.”
아논은 허풍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자기 겉옷을 주워입었다. 그는 옷을 다 입고도 몸이 찌뿌둥하다는 듯 계속 움직였다.
“감산은 너무 축축하다. 날씨는 서늘한데 습기가 많아서 별로다. 혹시 오늘도 비가 오나?”
“아뇨, 오늘은 비 안 오던데요.”
대접을 챙기던 관량이 그리 말하자 아논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때 장건이 이어서 말했다.
“대신 안개가 꼈지.”
“···안개도 싫다. 햇빛 안 보인다.”
아논의 표정이 뚱해졌다.
“선장한테 감산성은 이제 오지 말자고 해야겠다.”
관량은 아침 식사를 차려준다고 했지만 장건과 아논 모두 건너뛰었다. 두 사람이 곧장 대장간으로 향할 듯 보이자 녀석은 돕던 기루 일을 내려놓고 슬쩍 그 뒤를 따라붙으려 했다. 그러나 태평루 문을 나서기 전에 관수찬의 눈에 걸렸고, 결국 귀가 붙잡혀 끌려가야 했다.
부자가 안으로 사라지자 대신 장아영이 나와 머리를 숙였다.
“외출하십니까?”
장건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논은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난 아마 안 돌아올 거다. 여태 먹고 논 것 중에 계산 안 한 거 있으면 지금 말해라.”
장아영은 고개를 저었다.
“지난밤 뿌리신 금은으로 이미 충분한 삯을 치르셨습니다. 오히려 과하게 주신 편이지요.”
“그런가? 그럼 남는 건 어린 친구 용돈 줘라. 그 친구 돈 좋아하는 게 나중에 커서 큰 상인이 될 것 같다.”
“···감사합니다, 대인.”
“대인大人? 맞다, 나 큰 사람이다. 이제 알았나?”
아논은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뻑적지근한 표정을 짓다가 장건의 손에 등이 떠밀려 나와야 했다. 장아영은 떠나는 두 사람을 보며 다시 한번 머리를 숙였다.
태평루 문을 나서자 제일 처음 장건과 아논을 반긴 건 감산성 거리를 뿌옇게 채운 안개였다. 그 안개 때문인지 공기는 텁텁했고, 때가 한참이 지났음에도 하늘은 밝지 않았다. 장건이 이곳 감산에 머문 며칠 중에서도 제일 안개가 짙게 낀 아침이었다.
“다들 여기서 어떻게 사는 건지 모르겠다. 아침에 햇살도 못 받으면 하루의 시작으로는 최악 아닌가?”
“글쎄. 항상 이렇게 안개가 끼지는 않겠지. 들어보니 여름에는 맑은 날도 많다는데.”
“그런가? 음. 하긴, 다들 밤에 신나게 놀았으니 아침이 조금 어둑해도 나쁠 건 없어 보인다.”
둘은 짧은 잡담을 나누며 대장간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짙은 안개에도 불구하고 둘 다 길 한번 헷갈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감산성의 시가지를 빠져나와 도시 외곽에 이를 수 있었다. 대장간에 가까워지자 그 앞 도로를 쓸고 있는 점원이 보였다.
“어이! 나 왔다!”
점원은 아논의 외침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지난번 아논과 장건을 상대하던 점원은 아니었다. 젊다 못해 약간 어려 보이는 그 점원은 다가오는 장건과 아논을 바라보다가 슬쩍 인사를 하며 물었다.
“어서 오세요. 저희 대장간을 찾아주신 거 맞으시죠?”
“맞다. 나 받을 물건이랑 사람 있다.”
“···무슨 물건인지는 몰라도 참 일찍 오셨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는 아논의 시커먼 얼굴이 신기한지 흘끗흘끗 뒤를 돌아보며 대장간 안으로 안내했다. 안쪽의 판매장에는 다른 점원들이 이곳저곳 쓸고 닦으며 청소하고 있었고, 안쪽 문 너머에서는 깡깡 쇠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안으로 들어서는 장건과 아논을 본 점원 중 하나가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본인이 쓸던 빗자루를 다른 점원에게 내주고는 탈탈 손을 털며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판매부 부장 포양섭입니다. 사흘 전 일 때문에 찾아오신 거지요?”
아논의 표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매장을 청소하는 점원 중 지난번 그를 상대하던 점원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건 열에 아홉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아논이다. 내 물건이랑 그거 들고 튀었던 도둑놈은 어디 있나?”
“흠. 그 문제를 설명해 드리기 전에, 손님? 손님도 사흘 전에 칼 하나를 맡기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논의 문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려던 장건은 판매부 부장이라는 자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부장은 그 둘을 안으로 들여온 점원을 보고 말했다.
“안쪽에 가서 육 번 예약 상품을 가져오거라.”
눈치를 살살 보던 점원은 냉큼 고개를 숙이고 총총 안쪽으로 들어갔다. 부장은 그 후 다시 아논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말을 이었다.
“우선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하여 사죄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손님···”
“사죄는 됐고, 내 물건이랑 도둑놈 찾아온다던 자식은 어디 갔나?”
부장 포양섭은 아논의 질문에 한숨을 푹 내쉬더니 대답했다.
“그 친구는 오늘 출근을 안 했습니다. 아니, 오늘뿐만 아니라 사흘째 출근을 안 했죠.”
“뭐? 그럼 내 물건은?”
“···일단 무림맹에 신고는 해두었습니다. 아마 감산 뒷골목 정리가 끝나면 수사를 시작하지 않을까 싶군요.”
아논의 표정이 확실하게 일그러졌다.
“뭐 하는 거냐? 오늘까지 내 물건 되찾아 놓는다며?”
“죄송합니다, 손님. 저희도 매우 당혹스러운 사태입니다. 원하신다면 그 물건과 대등한 가격의 새 상품으로 바꿔드릴···”
그 순간 아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뭔가 욕을 한 것 같았는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그 언어를 알아들은 자는 없었다. 아논은 그렇게 소리를 지르다가 옆에 있던 진열대를 대뜸 후려쳤다. 진열되어 있던 날붙이들이 와장창 굴러떨어졌다.
“바꿔? 너는 네 명예를 누군가와 바꿀 수 있나? 그 칼은 선장이 나에게 준 내 명예고, 나의 이름이다! 너희들의 명예를 건다기에 믿었는데 이딴 짓거리라니!”
아논은 선원답게 덩치가 좋았다. 거기에 팔다리까지 길쭉길쭉하니 가볍게 움직여도 동작이 화려해 보였다. 그가 그렇게 진열대를 마구 쓰러뜨려도 검은 피부의 무뢰배에게 겁먹은 점원들은 뭐라 말도 못 하고 주춤주춤 물러섰다. 물건을 바꿔주니 어쩌니 하던 포양섭도 그 난폭한 모습에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질 못했다.
결국 한걸음 떨어져 있던 장건이 말리려 나서려는 순간, 안쪽 문에서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만!”
모든 시선이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 집중되었다. 안쪽 대장간에서 걸어 나온 인물은 전날 장건에게서 칼을 받아 간 흰 수염 노인이었다. 그는 장건의 새 칼로 짐작되는 것과 망치를 들고 우뚝 서서 아논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처음의 호통과 다르게 낮고 울리는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불만 있으면 말로 해라. 아니면 진짜 칼을 들던가.”
진열대를 엎어대던 아논은 그 말에 킁 콧김 한번 부는 것으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천천히 옆에 진열되어 있던 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불만? 내 물건 훔친 놈에게 그거 팔아먹을 방법을 열어준 게 당신들이다. 알아서 해결하고 물건과 도둑을 잡아다 주겠다고 한 것도 당신들, 명예를 걸어놓고 지키지 않은 것도 당신들, 물건을 바꿔주겠다며 날 조롱한 것도 당신들이다. 뭐 하자는 거냐? 진짜 내가 칼 들이밀고 협박이라도 하길 바라는 것이냐?”
노인은 아논의 말을 듣고 눈썹을 찡그리더니 무슨 일인지 다 알겠다는 듯 그 옆에 있던 판매부 부장 포양섭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놈 집에 찾아가 봤어?”
“···문은 잠기고 안에는 아무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진짜 그놈이 우리 대장간 명예를 걸었나?”
포양섭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노인의 눈이 더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숙부. 그때 제가 나서서 정리했어야 했는데, 강식이 그놈이 평소엔 잘하던 녀석이라···”
“장물이나 중계해주는 놈이 잘하긴 뭘 잘해? 너도 뭘 받아먹은 게 있으니 그걸 묵시한 거 아니야?”
노인의 뚱한 말에 포양섭은 꾹 입을 다물었다. 노인은 그 꼴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다시 아논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군. 우리 대장간 사람과 자금을 모조리 동원해서라도 그 물건과 도둑을 잡아 주마. 보상금도 준비하고.”
“믿을 수 없다. 이미 그놈이 이 대장간의 명예 걸었다. 그때 말리던 사람 아무도 없었다. 그건 여기 있던 사람들 다 동의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건 당신이라고···”
“이 망치에 걸고!”
아논이 고개를 저으며 불신을 드러내자 노인은 들고 있던 망치를 들어 보이며 처음의 호통을 다시 들려주었다.
“···내 반드시 물건을 찾아주겠다.”
아논은 노인이 호통으로 말문을 막자 커다란 자기 눈썹을 슬쩍 좁혔다. 전혀 설득된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노인과 아논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묵묵히 서로를 마주 보며 대장간의 긴장감을 높였다. 점원들은 물론이고 안쪽 문 너머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대장장이들도 장내의 상황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혼자 아무 긴장감이 없던 장건만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눈썹을 긁적거렸다. 대장간 사람들과 아논의 마음이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로 저렇게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는 건 건달이나 도적놈들끼리나 하는 짓이었다. 끝내 서로를 헤치는 결과만을 낳을 행동.
장건은 결국 터벅터벅 걸어서 아논과 노인 사이에 끼어들었다.
“봅시다. 아논, 검에서 그 손 떼고 기다려 보시오. 노인장, 그거 내 칼이오?”
거침없이 앞으로 나서서 중재하는 장건의 모습에 아논은 슬그머니 검을 놓고 팔짱을 끼며 물러섰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던 어린 점원에게 칼을 주었고, 점원은 쪼르르 다가와 장건에게 칼을 주었다.
장건이 받아 들고 보니 이전 칼처럼 별다른 장식이나 수실 없이 무난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칼날을 뽑아 든 순간 생각을 바꿔야 했다. 세상에 드러난 칼의 몸은 그 시퍼런 예리함만으로 그 어떤 보석과 황금 치장보다 아름다운 빛깔을 뽐냈기 때문이었다.
“불순물이 많아서 쇠를 다시 정련했다. 무슨 유물을 가져온 것인지는 몰라도 처음 그 쇳덩이를 만든 장인은 자기 기술로 한철을 완전히 정련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애초부터 미래에 다시 만들 생각이었다. 덕분에 그 큰 쇠붙이에서 딱 그 칼 하나 만들 분량이 나왔지. 보아하니 장식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고, 그래서 그냥 깔끔하게만 뽑았다. 마음에 드나?”
“음. 충분하오.”
장건은 짤막한 감상 후 그대로 칼집에 칼을 집어넣었다. 그 담백한 반응에 노인은 물론이고 대장장이들, 점원들 모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들도 반쯤 홀린 듯 칼날을 보았는데, 무사가 되어서는 그렇게 번뜩이는 칼의 예기를 보고도 어찌 저렇게 덤덤할 수 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장건은 그 칼집을 그대로 허리에 매고는 주제를 돌렸다.
“그 망치에 걸고 대장간을 움직여 그 점원을 찾고 아논의 물건을 찾는 데 얼마나 걸리겠소?”
“···그건 확신할 수가 없군.”
“점원이 출근하지 않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기 때문에?”
노인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감산은 신사천과 천후성처럼 항구가 잘 발달한 도시지. 최악의 상황에는 이미 배를 통해 물건과 도둑이 바다로 떠났을 수도 있다는 말이야··· 대장간의 자금을 모두 쓰더라도 물건을 찾아주겠다는 말은 그 상황을 고려한 말이고.”
아논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지고 입은 욕설을 내뱉으려 일그러졌다. 그때 장건이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욕할 시간 없다. 물건 되찾고 싶으면 지금은 조용히 있어.”
두 눈이 동그래진 아논이 입을 다물자 장건은 다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 점원 이름이 뭐요?”
“강식. 부모나 친인척 없이 외롭게 살던 놈이지. 빠릿빠릿한 놈이라 점원으로 쓰고 있었는데···”
장건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소. 그럼 그 점원 집까지 안내해 줄 사람 하나만 붙여주시오.”
“···직접 쫓겠다고?”
“보아하니 그쪽도 결국 돈을 써 누군가를 고용하려는 것 아니오? 무림맹이 움직이려면 더 한참 걸리고. 그러니 그냥 이쪽이 먼저 나서는 게 빠르지. 저 친구 보상금이나 준비해 두시오.”
노인이 어벙하게 바라보는 와중에 아논이 말했다.
“직접 잡으러 가자고?”
“싫은가?”
아논이 씨익 웃었다.
“사실 사흘 전부터 그랬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은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며 말했다.
“···만덕아, 네가 안내하거라.”
“네, 저요?”
장건에게 칼을 건네주었던 어린 점원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곧 이어진 노인의 엄한 눈길에 곧 싫은 티를 감춰야 했다. 노인이 이어서 처음의 고압적인 태도를 거두고 말했다.
“흠흠, 이거 정말 미안하게 되었군. 혹 강식이를 찾고 물건을 되찾더라도 꼭 대장간에 다시 들러주게. 자네 말대로 보상금을 준비해 놓지.”
장내는 빠르게 정리되었다. 점원들은 아논이 어지른 물건들을 치웠고, 빼꼼 머리를 내밀고 바깥을 훔쳐보던 대장장이들도 다시 안으로 들어가 깡깡 쇳소리를 냈다. 외투를 입은 점원 만덕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장간 밖을 나섰다. 장건과 아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시죠.”
두 사람은 만덕의 뒤를 따라 다시 감산성의 거리 속으로 접어들었다. 아직도 그득한 안개 속에서 여기저기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만덕은 그 틈으로 총총총 빠르게 앞장서 나갔다. 그 뒤를 따라 걷던 중 아논이 장건에게 물었다.
“아까는 왜 도와줬나?”
“그럼 거기서 진짜 싸울 생각이었나.”
“···그건 아니다. 하지만 네가 나서지 않았다면 싸웠을 수도 있다. 그건 고맙다.”
장건은 앞을 보는 시선 그대로 말했다.
“지난 사흘간 들은 이야기 값이라 생각해.”
“로마 신들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었나?”
그는 살짝 웃었다.
“그건 천년 뒤에도 인기 있을걸.”
아논은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비슷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곧 항구 쪽 거리에 이르렀다. 선원이나 물건 나르는 날품팔이들이 모여 이루어진 거리로, 객잔 거리만큼은 아니어도 음식점이 많고 일거리를 찾아 거리에 앉아 시간을 죽이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지나다니는 와중에도 내륙에서 몰려온 안개와 해안가에서 밀고 들어오는 해무가 만나 감산성은 여전히 안개가 자욱했다.
점원 만덕은 말도 없이 뚱한 표정으로 큰길을 벗어나 좁은 골목길로 나아갔다. 골목을 지나가는 그들을 흘낏 바라보는 시선이 많았다. 거주민들이 외부인을 경계하는 것이다.
하늘이 희뿌연 와중에도 만덕은 대강 길을 살펴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판자집 앞에 이르렀다.
“여기예요.”
“강식이라는 놈 집?”
“네. 저번에 왔을 때는 문이 잠겨 있었어요. 저 이제 가도 되죠?”
“글쎄. 이 집을 확인하고 나서도 이쪽 거리를 다니려면 길잡이가 하나 있어야겠는데.”
만덕은 무슨 개소리냐는 듯 장건과 아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아논의 품에서 금화가 나오자 녀석은 냉큼 허리를 숙였다.
“어디든지 말씀하세요. 제가 한때 감산 거리에서 좀 먹어주던 놈입니다.”
“한때?”
“지금은 후계자한테 모든 걸 물려주고 성실한 삶을 살고 있죠.”
도저히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은 청년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논은 귀엽다는 듯 웃었고, 장건은 눈앞의 판잣집으로 관심을 옮겼다.
문을 열어보려 움직이니 걸쇠에 걸려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논이 자기 주먹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문을 때려 부숴야겠는데.”
“안 그래도 돼.”
슬쩍 주변의 시선을 살핀 장건이 문의 걸쇠 쪽을 툭툭 가볍게 때렸다. 그러자 작은 쇳소리가 울리더니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오오··· 어떻게 한 거냐, 장건? 마술도 부릴 줄 아나?”
가벼운 발경을 통해 건너편에 걸려 있던 걸쇠만 부순 것이었다. 그 아주 간단해 보이는 장면 속에 장건이 가진 무의 이해와 예민한 감각, 공력 활용의 정수가 녹아 있었다. 어찌 보면 마술이라고 해도 좋을 기술이긴 했다.
“들어간다.”
안쪽에 인기척은 없었으나 장건은 상황을 주시하며 문을 열어젖히고 제일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 아논과 만덕도 얼른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주민들의 눈을 피할 생각에서였다.
“···뭐 아무도 없다.”
빠르게 집안을 훑어본 아논이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작은 판잣집 안에는 흔히 혼자 사는 사람 집답게 특별한 세간살이 없이 조금 어질러져 있다는 것 말고는 눈에 띄는 점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똑같이 안을 둘러본 장건은 흐트러진 이부자리 쪽에 다가가 쪼그려 앉으며 스윽 이불을 치웠다.
“···그 강식이라는 친구, 살아있나 모르겠군.”
이불 아래에서 검게 굳은 핏자국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