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102)
위치를 잡는다. 벽이 얼마나 두꺼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끝에 도착하는 것보다는 낫다. 이성민은 시야 한쪽에 떠있는 미니맵을 바라보았다.
끝으로 이어지는 길은 총 네 개. 현재 이성민이 있는 길에 있는 것은 취걸과 장득수, 혈혈노파다. 이성민은 다른 길 네 개를 응시했다.
네 개의 길 중 두 개는 노란 점과 붉은 점이 공존해 있었다. 그리고 다른 길에는 하나는 노란 점 두 개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남은 길에는 붉은 점만이? 있었다. 이성민은 붉은 점만이 남은 길을 노려 보았다.
‘누구지?’
누구의 도플갱어인가. 길 하나에 도플갱어만 남아 있는 것이라면 저 길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도플갱어에게 살해되었다는 뜻일 터.
‘위지호연인가?’
어쩌면 이미 백소고는 죽은 것이 아닐까. 그런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온다.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뿌득 씹으면서 불길함을 삼켰다. 다른 길을 본다. 사람만 세 명 있는 길. 사람과 도플갱어가 함께 있는 길이 하나. 도플갱어 둘이 있는 길이 하나.
도플갱어만 있는 길은 일단 제외한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현재 이성민이 위치해 있는 길에서 갈 수 있는 것은 오른쪽과 왼쪽. 그 중 왼 쪽에는 사람과 도플갱어가 있었고, 오른 쪽에는 사람이 셋 있었다.
미니맵을 보던 이성민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노란 점 세 개가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최악의 경우는 이것이다. 저 노란 점 세 개가 위지호연이 아닌, 위지호연의 추종자들이라는 것. 위지호연 본인이라면 크게 문제는 안 된다. 위지호연도 이성민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를 추종하는 마인들이라면? 그들이 이성민을 내버려 둘 것 같지는 않았다.
‘위지호연의 이름을 팔아도 믿어 줄 것 같지도 않고.’
노란 점들 간의 거리가 가깝다. 곧 있으면 조우할 것이다. 아니면 이미 서로를 포착했을 지도 모른다. 이성민은 왼쪽 길을 힐긋 보았다. 도플갱어와 사람의 거리는 꽤 떨어져 있다.
“제기랄.”
이성민은 강기에 덮힌 창을 오른쪽 벽으로 향했다. 정말 최악의 경우라서, 이 벽 너머에 마두 둘. 독고귀검과 마랑철권이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위지호연과 백소고가 있을 지도 모르고, 극천도나 무쌍괴협이 있을 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없다. 해봐야 안다. 창 전체를 휘감고 있던 강기가 창두 끝으로 모인다. 날이 선 부분에 응집된 강기가 작게, 작게 응축되었다.
[호오.]그것을 보고서 허주가 놀란 소리를 내었다. 이성민이 제법 뛰어난 실력을 가진 고수라는 것은 알았으나, 설마 이렇게까지 강기의 조율이 능숙하다는 것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달한 무공의 경지로는 불가능한데. 어떻게 할 수 있는 거냐?]“예전에 해봤거든.”
이성민은 창끝을 노려보면서 대답했다. 이성민이 도달한 무공의 경지. 상태창으로 보이는 무공의 경지만 본다면 이렇게까지 강기를 조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적으로 이성민의 무공 수위는 자하신공과 구천무극창, 무영탈혼이 모두 8성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다르게. 이성민은 이미 그보다 훨씬 앞선 경지에 도달한 기억이 있었다. 그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머리가 기억하고 있는데, 육체와 익힌 무공이 그것을 완전히 펼칠 수 없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본래라면 가능하지 못한 것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내공의 소모가 크다.
하지만 해낸다. 단전에 공허감이 들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개의치 않았다. 이성민은 창을 잡은 손에 계속해서 힘을 불어 넣었고 내공을 쏟아 부었다. 루비아가 혀를 내둘렀고 허주는 침묵했다. 창끝에 응집된 강기는 진한 자색이었다.
‘정신세계랑은 확실히 다르군.’
그때는 이것보다 빠르고 편했는데. 이성민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것뿐이었다. 이성민은 붉은 색 살덩이로 이루어진 벽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재밌는 놈이군.]이성민의 창이 벽을 터트렸을 때, 허주가 껄껄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성민은 숨을 몰아쉬면서 뚫은 벽을 걸어 들어갔다. 내공이 크게 빠져나간 덕에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이성민은 떨리는 다리를 잡고 있다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어쩔 수 없군.’
이성민은 우선 아공간 포켓에서 포션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것만으로 몸의 피로는 조금 가셨지만, 포션이 소모된 내공까지 회복시켜주지는 않았다. 내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운기조식을 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은 없다.
이성민은 아공간 포켓에서 대환단을 꺼냈다. 그는 대환단을 반으로 쪼개고서 입 안에 넣었다. 그러자 입에 넣은 대환단의 반쪽이 바로 녹아 목으로 넘어간다. 본래 영약을 복용한다면 운기조식을 하며 내공을 취해야 하지만, 검은 심장을 가진 이성민은 그런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복용한 대환단 반쪽의 내공은 바로 이성민의 단전에 쌓였다.
“후우!”
이렇게 사용하기 위해 대환단과 마정석을 복용하지 않고 둔 것이다. 주화입마의 위험성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급할 때에 내공을 바로 회복하기 위함도 있었다. 비었던 단전이 가득 찬다. 확실히 대환단은 소림 최고의 영약답게 반쪽만으로도 이성민이 소모한 내공을 대부분 회복시켜 주었다.
‘주화입마는 없군. 허주의 말이 맞을 지도 몰라.’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지만. 이성민은 내공이 회복된 것을 확인하고서 바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노란 점 두 개는 같은 위치에 있었고, 지금 이성민이 있는 곳과는 그리 멀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교전하고 있는 둘이 보인다. 그 뒷모습을 보았을 때. 이성민의 가슴이 쿵쿵거리며 뛴다. 새하얀 무복과 회색 머리카락. 이성민은 그녀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백소고다.
백소고를 공격하고 있는 것은 검은 무복을 입은 거한이었다. 덩치만을 보자면 장득수보다 크다. 검을 휘두르지 않고 맨 주먹을 사용하는데, 그 강맹한 공격은 직접 당하지 않고 보는 것뿐인데도 가슴을 졸이게 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주먹. 마랑철권인가?’
백소고와 마랑철권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맨 몸으로 무투를 벌인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하지만 둘의 공격법은 판이하게 달랐다. 백소고가 무영탈혼을 기본으로 하여 쾌와 환을 중점으로 쉴 틈 없이 몰아친다면, 마랑철권은 느리고 묵직했다. 둘 중 누가 우세하다고 판단하기에는 이른 듯 했지만, 이성민이 보기에는 백소고가 조금 우세한가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소고의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빼빼 마른 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이성민을 보고서 눈을 가늘게 떴다.
독고귀검이다.
독고귀검 외에 다른 누군가를 떠올릴 수는 없었다. 극천도나 무쌍괴협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백소고를 공격할 이유는 없다. 실제로 서있는 남자의 허리춤에는 기다란 검이 걸려 있었다.
경공을 펼치는 이성민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운이 좋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설마 이 길에서 독고귀검과 마랑철권과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나마 아주 불운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은, 마랑철권과 독고귀검이 합공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된 것은 마랑철권이 강짜를 부렸기 때문이다. 서로가 무기를 쓰지 않고 맨몸 무투에 일가견이 있으니, 마랑철권이 직접 나서서 한 번 겨뤄보고 싶다고 승부를 걸어왔다.
‘여기서 내가 이긴다고 해도…’
백소고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마랑철권은 뛰어난 고수였지만, 백소고는 그 마랑철권보다 반 수 정도 뛰어났다. 쉽게 쓰러트릴 수는 없지만 큰 변수가 일어나지 않는 한 백소고는 마랑철권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독고귀검이다. 독고귀검은 위지호연을 따르는 추종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 받는 고수였다. 만전의 상태라면 모를까, 마랑철권을 쓰러트린 후에 독고귀검과 싸우게 된다면 백소고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한없이 적었다.
‘마랑철권을 제압하고서 그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한다면… 아니. 이게 가능할 리가 없지. 독고귀검이 마랑철권의 목숨을 신경쓸 리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백소고는 아직 죽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서 마랑철권을 압박했다. 뒤로 조금씩 밀려나는 마랑철권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독고귀검의 미묘한 웃음을 뒤로 하고 앞으로 나섰는데, 이렇게 망신을 당하게 되니 열불이 끓었다.
“계집년이…!”
노한 목소리로 씹어 뱉어 보지만 마랑철권은 백소고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중에,
쿠우우웅!
커다란 소리가 났다. 독고귀검이 반응했고 백소고의 어깨도 흠칫 떨렸다. 그로 인해 자그마한 틈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소리에 놀란 것은 마랑철권도 마찬가지라 백소고가 보인 틈을 기회로 바꿀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오는군.”
독고귀검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마랑철권도, 백소고도 느꼈다. 누군가가 고속으로 접근하고 있다. 누구지? 백소고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녀에게 있어서 진정한 최악은 다가오는 것이 혈혈노파거나… 위지호연일 때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백소고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저 놈은 뭐야?”
백소고는 뒤를 볼 수가 없다. 하지만 마랑철권과 독고귀검은 아니었다. 마랑철권은 백소고에게 집중하느라 다가오는 것이 누구인지 볼 수가 없었다.
“무림맹 놈들 중에 창을 쓰는 녀석이 있었나?”
독고귀검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검을 뽑았다. 창. 없다. 취걸과 무쌍괴협은 무투파고, 장득수는 도끼를 쓰며, 극천도는 도를 사용한다. 창… 창. 백소고의 기억 저편에서 누군가가 떠올랐다. 한 명. 창을 쓰는 무인을 알고 있었다.
“보기에는 어려 보이는데… 뭐하는 놈인지 모르겠군.”
독고귀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앞으로 향했다. 다가오는 것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저 누구인지 모를 놈에게 흥미가 동했다. 백소고는 뒤를 돌아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먼저 죽일까?”
“필요없다!”
독고귀검이 마랑철권에게 물었고, 마랑철권이 거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독고귀검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러던 중에
까아앙!
섬광처럼 쏘아진 찌르기가 독고귀검의 검과 부딪힌다. 독고귀검의 자세는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굳건히 서서 속도가 실린 찌르기를 받아 냈다.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던 독고귀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지금의 일격을 통해, 상대가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가진 고수라는 것을 알았다.
“누구냐?”
독고귀검이 묻는다. 마랑철권의 공격에 백소고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갑작스런 3자의 난입에 마랑철권도 바로 백소고에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는 숨을 몰아쉬면서 백소고와, 독고귀검을 공격한 남자를 보았다.
이성민을.
백소고는 두 눈을 크게 뜨고서 이성민의 등을 보았다. 1년 전에 보았던 등이다. 그때와 비교해서 겉모습의 큰 차이는 없다. 그런데, 왜일까. 왜 저 등이, 1년 전과 비교해서 크게 성장하지 않은 등이 더 커보이는 것일까.
이성민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사실은 보고 싶었다. 뒤를 돌아서, 백소고에게. 사저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다. 오랜만이라고, 잘 지냈느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할 수는 없었다. 바로 앞에는 독고귀검과 마랑철권이 있다. 이성민이 틈을 보인다면 독고귀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가할 것이다.
“사저.”
창을 든다. 양 손이 저릿했다. 속도를 실어 충돌했으나 독고귀검은 이성민의 공격을 무리없이 받아냈다. 비록 독고귀검의 도플갱어가 취걸에게 쓰러졌다고는 해도, 독고귀검의 실력이 취걸보다 못한 것은 아니었다. 이성민이 느끼는 독고귀검의 강함은, 그가 여태까지 보았던 모든 무인을 통틀어서 가장 강했다. 만월 아래의 검귀도 독고귀검과 비교한다면 몇 수 떨어져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백소고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이성민은 독고귀검을 노려 보았다. 그러면서 천천히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백소고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1년이다. 고작해야 1년. 1년 전과 비교해서 백소고는 분명히 강해졌다. 하지만 이미 경지에 오른 백소고의 실력은 1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고는 하나 크게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성민은 어떤가.
백소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1년 전에 보았던 사제의 강함은 저 정도가 아니었다. 그때의 이성민도 초절정에 근접해 있기는 했지만, 어딘가 불안정하다는 느낌이 강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의 이성민은 백소고도 놀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사… 사제?”
왜 네가 이곳에 있는 거지? 백소고는 그를 묻고 싶었으나, 지금 상황이 그런 질문을 나누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침묵했다. 독고귀검은 백소고와 이성민을 보면서 웃음을 흘렸다.
“묵섬광에게 사제가 있었나? 그건 처음 듣는군.”
독고귀검의 검에 시뻘건 검기가 솟구친다. 이성민은 양 손으로 창을 잡고서 호흡을 골랐다. 위지호연의 지인이라고 말해봤자 믿어주지 않겠지. 그렇다면 백소고를 데리고서 싸움을 피해 도주할까. 저들이 그럴 틈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할 수 있을까.
상대는 독고귀검.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는 상대다. 뛰어난 검수가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지는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해 보았다. 이성민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눈앞에 있는 독고귀검은, 지금의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할 수 있을까?
다시 떠오른 의문에, 이성민은 걸음을 앞으로 뻗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해야만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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