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171)
야나가 어르무리를 떠났다.
추성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르무리를 사는 대부분의 요괴들은 알지 못하는 일이지만, 추성은 알았다.
물론 추성이 스스로 잘나서 야나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확실한가?”
추성은 불빛이 아른거리는 어르무리의 밤을 내려 보면서 물었다.
그 말에 추성의 근처에 서 있던 존재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는 큼직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야나는 어르무리를 떠났다.”
머리부터 눌러 쓴 후드 아래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가느다란 남자의 것 같기도 했고, 여자의 것 같기도 했다.
“앞으로 적어도 보름이 지나지 않고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휴잴 산맥의 마령정(魔靈亭)까지는 야나의 속도로도 이틀은 걸릴 것이고, 그곳에서 열흘 밤낮을 금식하며 기도를 올려야 마령과 접신할 수 있다.”
“흠!”
추성은 팔짱을 끼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휴잴 산맥의 마령정이 무엇인지, 추성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안다.
야나가 손에 넣은 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요력과 힘이 마령정이라는 것에서 비롯된 것임을.
그것을 알게 되고서 추성도 마령정이라는 곳에 가보고자 했지만, 괴인(怪人)이 말하기를 마령정은 가기를 바란다고 하여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하였다.
아쉽기는 했지만, 추성은 마령정을 포기했다.
야나가 어르무리로 돌아오기까지 보름.
그 안에 추성은 어르무리를 도모할 생각이었다.
야나가 있을 적이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실제로 추성은 몇 년 전에 야나에게 원한을 산 이후로, 야나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두려워 어르무리에서 도망쳤었다.
‘그때는 그랬지.’
그 수치스러운 도주는 아직도 생생하다.
어르무리에서 쌓아 놓았던 모든 명예,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들.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구차하게나마 목숨을 건지고자 어르무리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야나가 없는 빈집을 턴다는 기분은 어쩔 수 없이 있었으나, 추성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 정도 수치심 따위, 대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추성은 오만하고 도도한 야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마을에서, 죽일 듯이 매서운 시선을 보내던 야나의 표독스런 얼굴을.
‘……음.’
그 얼굴을 떠올리니 추성은 아랫도리에 피가 쏠리는 것을 느끼며 슬며시 옷자락을 들어 불룩 튀어나온 사타구니를 감추었다.
언젠가 야나를 자신의 몸뚱이 아래에 눕혀 놓겠다고, 추성은 그런 다짐을 품었다.
추성의 곁에 있던 괴인은 그런 추성을 신경 쓰지 않았다.
추성은 다루기 쉬운 말이었다.
강대한 요력을 가지고 있어 힘이 강하면서도 다루기가 편하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봤자 병신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야나를 따먹겠다는 생각일 거야.’
괴인은 심드렁하니 생각했다.
대충 떠올린 생각이었지만 그게 정답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야나가 어르무리를 떠났으니 널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겠지. 네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적귀도 없고 야나도 없다면 어르무리에서 이 몸이 가장 강한 요괴다.”
추성이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추성은 괴인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말했다.
그 말에 괴인은 후드 아래에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약속도 반드시 지킬 것이다. 긴 세월 백귀야행의 도시로 존재해 온 어르무리는 도시 자체가 요성을 띄고 있지. 나는 약속한 대로, 그 요성을 너에게 인도할 것이다.”
그것이 괴인과 추성 사이에서 나눈 약속이었다.
괴인이 추성과 접선한 것은 한 달 전이다.
그는 숨어 있는 추성을 찾아와 거래를 제안했다. 어르무리의 주인이 되게 해줄 테니 자신의 부탁을 들어달라는 말이었다.
괴인의 부탁은 간단했다.
야나가 없는 어르무리에서, 대요괴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을 모조리 죽일 것.
추성은 그 부탁을 대수롭지 않게 수락했다. 야나보다는 나약하다 하여도 추성은 대요괴 중의 대요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괴인의 부탁은 추성으로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어르무리에서 확실하게 군림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잡음을 내는 대요괴들을 쓸어내는 것이 당연히 우선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자.”
추성이 불꽃처럼 시뻘건 눈을 빛내며 내뱉었다.
괴인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추성은 부푼 기대를 가슴에 품고서 괴인과 함께 어르무리로 향했다.
* * *
호흡을 의식해서 내뱉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이성민은, 스킬로서 익힌 부족의 호흡법에 따라 호흡을 이어갔다.
아직 처음이라 의식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시간이 지나 익숙해질수록 무의식적으로 호흡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 꽤 걸리겠지만.’
이성민은 자신이 새로운 것을 잘 익히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익혔던 모든 무공이 그랬다. 그럴 때마다 타고난 재능의 생각이 나 씁쓸해졌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감이 좀 오냐?]허주가 묻는다.
그 말은 조금 멀리 들렸다.
이성민은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관조했다.
단전 밑바닥에 있던 요력은 의식적으로 끌어내려 할 때가 아니면 요지부동이었고, 그렇게 끌어 올릴 때마다 이성민의 육체에 부담을 주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호흡을 이어나갈 때마다 고인 요력이 꿈틀거리며 움직인다.
그것은 천천히 단전 전체로 퍼져 나가고 이윽고 기혈을 타고 흐른다.
이성민은 호흡을 유지하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일렁거리는 붉은 기운이 이성민의 손을 덮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것은 이성민이 펼치는 자하신공의 기류보다 훨씬 약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네놈의 요력이라고 해 봐야 미약한 것이다. 네놈이 중요한 순간에 사용하는 요력은 이 어르신이 네놈에게 더해주는 것이니까.]‘한 번 줘 봐.’
이성민이 요구했다.
그러자 허주가 껄껄 웃으면서 자신의 요력을 이성민에게 보내 주었다.
익숙한 통증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끔찍해지기 전에, 허주의 요력은 이성민의 호흡을 통해 다시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푸확!
오른손을 감싼 요력이 훨씬 더 크게, 그리고 더 붉게 변했다.
이성민은 그 요력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기운에 가볍게 몸을 떨었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허주의 요력은 대단했다.
이성민이 익히고 있는 자하신공과 쌓은 내공도 초절정의 끝자락에 있는 것이라 대단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허주의 요력과 비교한다면 격의 차이가 심했다.
[그건 당연하지. 이 어르신과 네놈은 살아온 시간도 다르고 살아온 삶도 다르다. 네놈이 2100년 동안 정신세계에서 수행했다고 해도, 그것은 정신세계의 것이지 현실의 것은 아니잖느냐.]이성민이 품은 생각에 공감한 허주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렇다고 요력에 너무 취하지는 말아라. 호흡법을 통해 요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해도, 요력은 위험한 힘이야. 네놈의 몸뚱이가 특별하기는 하다만…… 요력에 너무 물든다면 그 특별함도 소용없이 요괴로 변이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알아.”
이성민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성민은 자하신공을 운용했다.
요력은 유지한다. 자하신공과 새로이 익힌 호흡법을 섞는다.
쉽지는 않았다.
허주를 통해 요력을 강제적으로 사용했을 때에는 자연스레 자하신공과 요력을 함께 사용할 수 있었으나, 호흡법을 통해 요력을 스스로 다루게 된 이상 자하신공과 호흡법을 동시에 의식해야만 했다.
정신을 집중한다.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자하신공을, 호흡법을 동시에 의식한다.
손을 감싼 요력의 색이 점차 바뀌어 갔다.
내공이 섞이면서 붉은색이 자색으로 변했다. 이성민은 두 눈을 부릅뜨고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숨을 크게 내쉬면서 호흡법을 그만두었다.
‘어려워.’
익숙하지 않은 것을 하려 하니 잘되지 않는다. 정신을 집중해야 간신히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괜찮다. 새로운 방법을 알게 되었고, 이것에 익숙해지면 된다.
“대단하십니다.”
그런 이성민을 보고 있던 아브롬과 다른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며 말을 걸었다.
“사자님의 신력은 저희 모두를 합한 것보다 커다랗습니다. 과연, 신과 직접 닿아 있으신 분답군요!”
잔재한 요력을 주워다 쓰는 마을 사람들과 허주를 통해 직접 요력을 받는 이성민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었다.
이성민은 선망 어린 눈으로 이쪽을 보는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광천마 어르신은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겁니까?”
“예.”
아브룸이 대답했다. 광천마와 루비아는 어르무리로 나가 있었다.
이 숲에만 있는 것이 답답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백귀야행의 도시인 어르무리를 나도는 것은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광천마는 초절정의 고수다.
어지간한 대요괴가 아닌 이상 광천마를 어찌할 수는 없다.
게다가 추성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에 광천마가 크게 실망하고 있으니, 외출이라도 하여 기분전환을 해야만 했다.
“너무 서운해하지는 마요.”
그런 기분으로 나온 외출이다. 어르무리의 거리는 광천마가 여태까지 보았던 그 어떤 도시들과도 달랐다.
노점에서는 생전 처음 보는 다양한 음식들을 팔았고, 그걸 팔고 있는 이들은 모두가 인간이 아닌 요괴였다.
하늘을 떠돌아다니던 불씨들이 서로 모여서 서로 다른 색으로 물들어 멀리 흩어지고, 다시 뭉치고. 그 화려한 불꽃놀이에 루비아는 시선을 빼앗겼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멍한 눈을 깜박거리며 불꽃놀이를 보던 루비아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 광천마를 보았다.
광천마는 양손에 꼬치를 든 루비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복수를 할 대상이 없다.
시간이 흘러 복수심이 흐려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당장의 답답함과 분노를 풀 길이 없다.
광천마는 심호흡을 통해 끓는 감정을 삭였다. 그런 광천마를 보던 루비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총총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저씨. 기껏 놀러 나왔으니까 좀 놀아요. 너무 표정 썩게 두지도 말고!”
“그래, 그래.”
광천마는 쓰게 웃으며 머리를 끄떡거렸다. 루비아가 자신을 챙겨주고 있다는 것은 안다.
그래서 광천마는 어둡게 물드는 감정을 무시하려 애쓰며 앞장선 루비아를 따라서 걸었다.
“성민 님이 같이 오지 않은 것이 아쉽네요. 한 번쯤은 이렇게 놀러 나와도 좋을 텐데.”
“기분전환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몰입할 것이 생겼다는 것 아니냐. 좋은 일이다. 어쩌면 그걸 계기로 하여 벽을 넘게 될지도 모르지.”
광천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이성민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미 이성민의 경지는 광천마를 초월해 있고, 요력을 다루는 방법까지 손에 넣었다.
그 말은 즉 무공의 경지가 아닌, 무공의 위력만을 두고 본다면 초월지경에 들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를 통해 수행을 계속한다면 정말로 초월지경에 들어설지도 모른다. 이 넓은 세상에도 거의 없는 초월지경의 고수가 되는 것이다.
광천마는 이성민을 질투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벽을 맞닥뜨리고 있었고, 이 벽을 넘는다면 지금 이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벽을 넘느냐, 넘지 못하느냐는 스스로의 문제다. 타인의 성취를 시기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정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네 주인은 대체 언제 나타나는 것이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광천마는 루비아에게 물었다.
야시장의 흥에 겨워 웃고 있던 루비아의 얼굴이 멈칫 굳는다. 그녀는 뾰족한 귀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남쪽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하셨으니까, 아마…… 머지않아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루비아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루비아의 주인인 엔비루스는, 루비아가 보기에도 여러 가지로 비밀이 많은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사정이 있으니 나타나지 않는 것이겠지만, 루비아는 혹시라도 엔비루스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조금은 두려웠다.
광천마는 우울하게 변한 루비아에게 뭐라고 말을 걸려 입을 열었다.
그 순간이었다.
콰앙!
멀리서 폭음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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