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234)
“오래도 기다리게 하는군.”
토벌대가 헤도르를 떠났다.
그 소문을 듣고서 김종현은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이 숲에 똬리를 틀고서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야 토벌대가 출발할 줄이야.
‘쓸데없이 신중하군. 그만큼 나를 높게 평가한 건가?’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리모어를? 김종현은 피식 웃으면서 곁에 둥둥 떠 있는 그리모어를 보았다.
시커먼 색의 마도서가 불길한 빛을 뿜는다. 김종현은 애정을 듬뿍 담은 눈으로 그리모어를 보고서, 머리를 돌려 아래를 보았다.
깊게 판 구덩이에는 오천에 달하는 심장이 쌓여 있었다. 적출한 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심장은 조금도 썩지 않았다.
아직 의식은 시작하지 않았다. 토벌대가 이 숲에 들어온 순간이야말로 그리모어의 의식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럼에도 김종현은 그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다.
만약에 실패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몸을 빼고, 대체 왜 실패한 것인지 나름대로 분석하고서, 실패 요인의 보강이 끝나면 다시 한번 의식을 시도해 보면 된다.
어차피 김종현은 잃을 것이 없었다. 흑색 마탑주? 세간의 평판? 그에게 있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나흘 정도 걸리겠군.’
이미 준비는 되어 있다. 그렇지만, 김종현은 나흘 동안 다시 한번 이 숲에 설치해 놓은 것들을 점검해 볼 생각이었다.
나 따위를 잡기 위해 과분할 정도로 많은 준비를 해주셨으니, 그만큼 이쪽에서도 공을 들여야 하지 않겠나. 김종현은 로브 자락을 끌며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 * *
모용세가의 무인 50, 무림맹이 70. 마법병단이 60에 적색 마탑주, 녹색 마탑주, 백색 마탑주, 금색 마탑주. 교회의 성기사와 신관들이 100이고 매드독 용병단이 200.
김종현 하나를 토벌하기 위해 모인 병력은 500에 달했다.
흑마법사 하나를 토벌하기 위해 이만큼 많은 병력,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세상 어디를 가도 인정을 얻을 수 있을 만한 이들이 모였다.
이성민은 스칼렛의 곁에서 말을 탔다. 헤도르에서 김종현이 숨어 있는 숲까지는 넉넉히 잡아 나흘이 걸린다.
[오래도 걸렸군.]헤도르에 도착하고서 일주일이 지나고서야 헤도르를 떠나게 된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출발이 늦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그에 대해서 크게 불만을 갖지는 않았다.
지금 그의 신경은 모조리 스칼렛에게 향해 있었다.
이성민의 곁에서 말을 타는 스칼렛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이 토벌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녹색 마탑주와의 약속이 없었더라면 토벌전에 참가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뭔가 알아내셨습니까?]` [뻔히 알면서 묻지 마요.]이 토벌전에 참가한 것은 무림맹의 백결무혼단(白潔武魂團)이다.
백결무혼단의 단주를 맡은 취걸은 뒤쪽에서 말을 타고 오는 이성민을 의식하며 당아희에게 전음을 보냈다.
취걸의 전음에 당아희가 미간을 찡그리며 취걸을 흘겨보았다.
[자존심도 버리고 노골적으로 굴었는데, 눈 하나 깜빡 안 하던걸요.]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뜻이로군.] [내 잘못이라고 할 생각은 아니죠? 나는 최선을 다했어요. 참 이상하단 말이야, 유별난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내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리가 없는데…….]스스로의 미모에 꽤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당아희였기에, 거듭된 유혹과 청에도 이성민이 넘어오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동성애자나 소아성애자 아닐까요?] [나한테 그걸 왜 물어보는 겁니까?] [대답해 달라고 물어본 것은 아니에요. 나도 자존심이 상하니까 투덜거리는 것뿐이지. 그래서, 취걸. 당신은 뭘 알아냈죠?]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당아희의 질문에 취걸이 뻔뻔스런 얼굴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당아희는 순간 말문이 막혀서 취걸을 바라보았다. 취걸은 그녀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이 제가 알아낸 정보입니다.] [그게 뭔 개소리에요?] [이민철.]취걸이 이성민의 가명을 불렀다.
[나이는 스물일곱. 사문은 없고, 출신지가 어디인지도 모릅니다. 무공은 중급 이상의 초절정으로 추측되는데, 이것도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지요.]취걸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이성민과 처음 만났을 때, 악수를 나누었던 손이었다.
[맨손을 쓰는 무공은 아닙니다.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틀림없어요.] [내 은신술도 쉽게 간파했어요.]당아희가 덧붙였다.
취걸은 그런 추측을 말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개방의 거지들은 에리아 전역에 퍼져 있지만, 그런 거지들이라도 건드릴 수 없는 땅이 있다.
뱀파이어 퀸이 다스리는 북쪽 트라비아. 요괴가 들끓는 남쪽 지역에서도 개방의 거지들은 활동하고 있지만, 트라비아만큼은 개방의 거지가 활동하지 못한다.
너무 많은 거지가 죽었기 때문이다. 혈천마의 몰락 이후로 트라비아에서 치안은 완전히 사라졌고, 몇십 년 동안 활동하지 않던 뱀파이어 퀸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의 명을 따르는 뱀파이어들은 밤이면 밤마다 개방의 거지들을 습격, 물어 죽였다.
굳이 뱀파이어들만이 거지들을 죽인 것은 아니다. 그 미쳐버린 도시에는 온갖 흉악한 마인들과 범죄자들이 기어 들어왔고, 개방의 거지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즐거운 사냥감이었다.
트라비아에서 거지들에게 개방의 후광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 거지들은 매일같이 죽어나가, 결국 개방은 트라비아에서 완전히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주 묘하지 않습니까. 소문 하나 없던 초절정 고수가, 뱀파이어 퀸이 다스리는 트라비아에서 남하해 이 도시에 왔고…… 토벌대에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이 토벌대가 사냥하려는 것은 흑마법사 김종현.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뱀파이어 퀸의 영역인 북쪽에서 일을 벌이는 것으로 보아…… 뱀파이어 퀸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지요.] [……그 말은. 이민철이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것인가요?]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생각됩니다. 이민철, 저 남자가 김종현을 돕기 위해 뱀파이어 퀸이 보낸 사람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당장 죽여야 하는 것 아닌가요?] [확신이 없지 않습니까. 약간의 가능성만을 두고서 그를 죽이는 것은 너무 섣부른 일입니다.] [확신 없다고 해서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요? 취걸. 당신의 추측에 대해 아는 사람은 더 없나요?] [저 역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무르잖아……! 당장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해요. 이민철이 뱀파이어 퀸이 보낸 사자일지도 모른다고!]당아희가 취걸을 노려보았다.
취걸은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다. 당아희의 말은 옳다. 의심이 간다면 그만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그럼에도 취걸이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독박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철민은 적색 마탑주와 친분이 있습니다.] [적색 마탑주도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건가요?] [글쎄요……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 봅니다만.] [교회는 어때요?]당아희가 눈을 빛내며 묻는다. 제법 머리를 쓴 모양이다. 뱀파이어 퀸의 사자일지도 모르니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빠르다.
마침 이곳에는 토벌대에 지원 온 교회의 성기사와 신관들이 있다.
[제가 다녀오겠어요.]당아희가 성급히 움직임을 보였다. 미혹의 숲에서 죽을 뻔한 이후로, 당아희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필사적이게 되었다.
취걸은 말을 끌어 교회 쪽으로 향하는 당아희의 등을 지그시 보았다.
취걸은 무엇 하나 확신하지 않았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 라면서 애매하게 말을 흘리기만 했을 뿐.
그것으로 충분하다. 미련한 당씨 세가의 아가씨가 마음대로 확대해석하고 움직이는 것뿐이다.
대뜸 교회의 성기사들을 찾아간 당아희는, 이번 토벌전에서 성기사들을 이끌고 있는 성기사단장을 찾아가 취걸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알려 주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취걸이 ‘그럴 가능성이 있다’라고 한 것과는 다르게 당아희는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며 확신에 가득 차 있었을 뿐이다.
석고상처럼 각진 얼굴을 한 성기사단장은 당아희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지 않았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 성기사단장은 직접 고위 사제를 이끌고, 말을 타고서 이성민 쪽으로 다가왔다.
[뭐야?]다가오는 성기사단장과 고위사제를 보고서 허주가 투덜거렸다. 이성민도 머리를 갸웃거리며 다가오는 둘을 보았다. 이성민의 곁에 있던 스칼렛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잠시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성기사단장이 질문에 답했다. 갑작스러운 일에 토벌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스칼렛은 눈가를 찡그리며 다시 질문했다.
“뭘 확인하겠다는 것이죠?”
“저 남자가 뱀파이어 퀸이 보낸 사자일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성기사단장은 그것을 알려준 것이 당아희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 당아희를 배려한 것이었다. 스칼렛은 성기사단장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뱉었다.
“그게 뭔 개소리예요? 뱀파이어 퀸의 첩자? 지금 이…… 철민이가 뱀파이어일지도 모른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저희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겠지요.”
성기사단장이 대답했다. 그는 이성민을 힐긋 보며 말했다.
“하지만. 뱀파이어가 아니라고 해서 뱀파이어 퀸의 사자가 아니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뱀파이어 퀸이 가진 강력한 매혹은 굳건한 신앙자마저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이니, 아무리 뛰어난 고수라고 해도 그 괴물에게 매혹된 꼭두각시가 아니리라는 보장은 없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정말 결백하다면 저희가 확인해 보아도 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만약 저희에게 착오가 있었던 것이라면, 제가 직접 머리를 숙여 사과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기사단장이 말했다. 이성민은 오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침묵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이성민이 입을 열었다.
“근거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그 어디에도 소문이 나지 않았던 인물이지요. 물론 그것이 의심의 전부는 아닙니다. 의심하게 된 이유는…… 당신이 트라비아에서 남하해 왔기 때문이지요.”
그 말에 이성민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나는 뱀파이어 퀸에게 매혹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을 겁니다.”
성기사단장이 곧바로 말을 받았다.
[일이 귀찮아졌군.]허주가 중얼거린다. 성기사단장과 고위사제는 이성민을 바라보며 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성민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어떻게 확인하시겠다는 겁니까?”
“마법적인 절차입니다.”
“해보시지요.”
여기서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성민은 우선 머리를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그러자 고위사제가 앞으로 나서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 눈부신 백색 빛이 어렸다.
[들키겠군.]허주가 말했다.
[디스펠이다. 마법을 무효화하는 신성 마법이지. 네가 뒤집어쓰고 있는 인피면구도 마법이 가미된 것이니, 디스펠이 네 몸에 닿는다면 가면의 마법이 풀려 네 맨얼굴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렇겠지.]이성민은 동요하지 않았다. 정체가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언제나 하고 있었다.
이성민은 곁에 선 스칼렛을 힐긋 보았다. 스칼렛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고위 사제의 디스펠이 어떤 마법인지 잘 알고 있었고, 저 마법이 펼쳐질 때에 이성민의 정체가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이성민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디스펠이 펼쳐지려는 순간이었다.
이성민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바로 곁에 있는 스칼렛의 등 뒤로 돌아가, 자비 없이 스칼렛의 뒷목을 내리쳤다.
“윽?!”
아무리 스칼렛이 뛰어난 마법사라고 하여도, 설마 이성민이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성민은 기절해 축 늘어진 스칼렛의 몸을 붙들고서 수도를 세워 그녀의 목덜미에 갖다 댔다.
갑작스런 이성민의 행동에 성기사단장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이성민의 행동은 직접 말하지는 않았어도, 자신이 뱀파이어 퀸의 사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뱀파이어 퀸의!”
“아니야.”
이성민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이성민의 얼굴을 덮고 있던 가면이 천천히 벗겨졌다.
“헉……!”
당아희가 가장 먼저 이성민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귀창……?!”
그 외침에 모용대운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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