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376)
382화 90. 파티(2)
[모르는 척하느라 고생했다.]‘모르는 척 한 적은 없어.’
[직접 말하지도 않았잖냐. 그냥 가만히 다물고 있었으면 모르는 척하는 거지.]이성민은 허주가 이죽거리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잔치는 끝났다. 커다랗게 타올랐던 불은 자그마한 불씨가 되어 흔들렸고, 시끄럽게 떠들던 요정들도 자기들끼리 부둥켜안아 잠들었다.
창왕은 아직도 웅크려 자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잠든 흑룡협의 근처에는 테레사가 이불을 덮고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술을 마시는 내내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던 스칼렛은 마탑으로 돌아갔고, 백소고는 멀지 않은 곳에 누워 자고 있었다.
이성민은 무릎 위에 올라간 담요를 치워내며 몸을 일으켰다.
안다. 모를 리가 없다.
질문도 노골적이었고, 여태까지 보여주었던 행동들도 마찬가지였다. 앎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허주의 말대로, 모르는 척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고, 왜 나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슬라 님.”
이성민은 호숫가로 와서 요정의 여왕을 불렀다. 파티를 하는 동안에도 오슬라는 평소처럼 떠들지도 잘 웃지도 않았다.
조금 술을 홀짝거리다가 호수로 돌아가 버렸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슬라는 소멸한 정령의 여왕과 먼 옛날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교류가 거의 없었다고는 해도 함께 수천 년을 살아온 동격의 존재가 소멸한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호수 표면에서 머리를 쏙 내민 오슬라가 투덜거렸다. 그녀의 눈시울은 조금 붉었다.
“그냥, 좀, 응. 허탈하고…… 허무하고…… 그런 생각이 들고 있는 것뿐이야. 너무 쉽게 가버렸잖아.”
차라리 완전한 진흙탕 싸움이었다면. 싸우고, 발버둥 치고, 누구 하나 죽고, 그런 것이었다면 달랐을까.
정령 여왕의 소멸은 허무했다. 본래의 힘에 훨씬 못 미치는 힘을 가지고 강림한 탓에 싸우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그 마지막에는 신령이 개입하여 여왕의 존재를 완전히 소멸시켜 버렸다.
“나는 그게 무서워.”
슬픔보다는 두려움이 더 큰 거야.
오슬라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날개를 축 늘어뜨리고서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래 보여도, 나도 엄청 오래 살았어.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살아왔으니까…… 인제 와서 목숨이 아까운 것은 아니야. 그래도…… 너무 쉽잖아. 나라는 존재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너무 쉽게 소멸하는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소멸하는 것이 너무 두려워.”
그건, 모두가 똑같을 것이다. 신령이 개입한다면 저항할 새도 없이 소멸할 것이다.
신령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 더 불안하다. 수확의 때가 되지 않아서? 도대체 뭘 더 하려는 것일까.
너와 함께 있으면 개죽음이야. 그렇게 이죽거리던 프라우의 말을 떠올렸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프라우는 이기적이고 옳았다. 세상이 멸망하지 않게 된다 해도, 정작 자기 자신이 죽어버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불안해.”
수면 밖으로 나온 오슬라가 호수 위에 섰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보면서 어깨를 감싸 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사라헨느는 신령이 소멸시켰어. 하지만 왜 나는 소멸하지 않는 걸까. 너는? 다른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어서?”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요.”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오슬라는 무덤덤한 이성민의 얼굴을 힐긋거리며 물었다.
“너는 두렵지 않아?”
“두렵습니다.”
“그런데 왜 포기하지 않아?”
“내가 포기하면, 여태까지의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립니다.”
오늘처럼 술을 진탕 마시며 웃고 떠드는 날을 또 맞이할 수 있을까. 죽은 사람 없이, 모두가 종언이 오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남아서…….
그건 불가능하겠지. 너무 과한 욕심이다. 한 명도 죽지 않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고작 그 정도라면 종언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누가 됐든, 희생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자각하니 가슴이 욱신거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성민은 누구도 죽지 않기를 바라였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성민은 호수 근처에 쓰러져 있는 아이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다루기 쉬운 포로였다.
이 숲으로 데리고 온 후로 한 번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아이네는 잘 살아 있었다.
오슬라의 권능 하에 완전히 제압되어서 긴 잠에 빠져 있다.
“뭐 하려는 거야?”
“아무것도 안 합니다.”
오슬라가 다가와 물었다. 이성민은 쓰러진 아이네의 몸을 발로 툭 건드려 돌렸다.
아이네의 가슴이 작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오슬라는 아이네의 가슴을 내려보는 이성민을 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위험한 생각은 하지 마.”
“가능성은 생각해 둬야죠.”
“너도 알잖아. 네 몸은 한계야. 포식으로는 더 강해질 수가 없어.”
“기존의 포식과는 경우가 다를지도 모릅니다.”
“위험성이 너무 커.”
“나는 재능이 없어요.”
이제는 그 말을 함에도 씁쓸함이 없었다. 너무 당연한 사실이었다. 이만한 경지에 오르고,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재능을 초월하는 운명과 타인의 도움, 가르침, 그 외에 여러 가지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능 없는 내가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최소한 이 정도의 힘은 갖추어야 한다는 운명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운명은 내가 학살포식을 소멸시키면서 함께 사라졌습니다. 지금의 나는 운명에 속해있지 않으니, 운명의 노선을 따라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성민이 성장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혈마가 말했듯, 이성민의 몸은 불완전하다. 무공의 경지와 몸뚱이가 균형을 이루지 않는다.
성장의 여지가 강제적으로 주어졌기에 이성민은 더 강해질 수가 있다.
경우가 다르다. 운명의 노선을 따랐을 때는 ‘무조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항상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시련을 겪었다. 시련에 맞서면서 살기 위해 성장했다.
지금은 아니다.
운명에서 벗어났으니 그 편한 운명의 가호를 받을 수도 없다.
“당장 해 볼 생각은 없습니다.”
아이네를 포식하는 것은 위험성이 너무 크다. 자칫하면 한계에 닿은 이 몸뚱이가 붕괴할지도 모른다.
벌써 그런 모험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아직은.’
그래, 아직은.
* * *
지금 제니엘라는 어디에 있을까.
어쩌면 요정의 숲으로 진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본래 이성민이 하고자 했던 것은 밤이 아닌 낮에 제니엘라를 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니엘라가 가진 마안의 마지막 능력이 만월을 띄우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런 식의 습격은 무의미해진다.
시간은 정하지 못해도 장소는 정할 수 있게 되었다. 요정의 숲은 오슬라의 영지다.
아이네를 포기하지 않는 제니엘라로서는 이 숲까지 올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 싸운다면 최소한의 승산을 더 챙길 수 있게 된다.
‘부족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아이네를 포식할 여지를 남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지금의 이성민이 제니엘라보다 압도적으로 나은 것.
그것은 속도다. 제니엘라가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봤자 요정마를 가지고 있는 이성민보다는 아니다.
다음 날.
이성민은 숙취로 고생하는 로이드와 스칼렛, 백소고의 협력을 얻어 트라비아로 향했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은 트라비아의 대청소였다. 무당산에 왔을 때 제니엘라는 트라비아의 다른 뱀파이어들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던 것은 제미니, 첸, 쿤뿐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다른 혈족들은 그대로 트라비아에 남아 있다는 말이다.
노리기 좋았다.
“어머.”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사라진다. 제니엘라는 우두커니 서서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녀는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혈족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죽은 혈족들이 가진 힘이 제니엘라에게 환원되어야만 한다. 제니엘라는 양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덮었다.
그녀의 시야가 트라비아에 있는 다른 뱀파이어와 연결되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 뱀파이어의 시야는 암전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봉인…… 그래. 그 방법이 있었지. 하지만 당신이라면 봉인하는 것보다 포식하는 것이 더 편하고 좋을 텐데?’
설마 인제 와서 포식이라는 행위를 하고 싶지 않아졌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는 것은, 포식하지 못할 이유가 있다는 것일까. 목소리는 계속해서 사라지고 있다. 제니엘라는 두 눈을 덮고 있는 손을 아래로 내리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왜 그래?”
제미니는 웃고 있는 제니엘라를 보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트라비아가 공격당하고 있어.”
“귀창이야?”
“응. 정말이지, 여러모로 나를 짜증 나게 만드는걸. 이렇게 되면 협상할 마음도 없어지잖아.”
처음부터 그럴 마음은 없었으면서. 제미니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렇지도 않아?”
“내 자식들이 몰살당하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잖아. 화가 많이 나.”
“그런 것치고는 평온해 보이는군.”
입을 다물고 있던 주원이 입을 열었다.
주원이 합류한 것은 며칠 전이었다. 남쪽의 깊은 숲에 틀어박혀 있던 주원은 다짜고짜 찾아온 제니엘라를 따라서 숲을 떠났다.
예전, 호원 세대의 강력했던 웨어베어인 브룩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제니엘라가 주원을 만났을 때, 브룩은 이미 주원의 배 속에 있었다.
“어차피 다 죽을 운명이었는걸.”
제니엘라는 사라지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쉽고, 아깝고, 슬프고,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저들의 죽음에 끔찍한 분노를 느낀다 한들, 이곳 남쪽에서 트라비아까지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인제 와서 북상하자니 수개월은 걸릴 것이다.
“그것보다, 너는 괜찮아? 트라비아 다음에는 체페드일 걸. 그곳에는 네가 다스리는 라이칸슬로프들이 있잖아.”
“그렇겠지.”
주원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복수는 해 줘야지.”
주원은 먼 북쪽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예전, 호원이 라이칸슬로프의 두령이었을 때.
호원에게 도전한 주원은 그를 쓰러트리고, 잡아먹는 것으로 라이칸슬로프의 새로운 두령이 되었다.
그러자 호원의 심복이자 오랜 벗이었던 브록은 무리를 떠나 먼 곳으로 떠났다.
네로만은 주원의 곁에 남아 심복이 되어 주었다.
주원은 네로를 믿고 있었다. 그래서, 브록을 찾아 죽이러 가기 전에 체페드를 네로에게 맡겨두었다.
네로는…… 도시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주원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히려 의욕이 나지 않아?”
제니엘라가 빙글 웃으며 말했다. 머릿속에 목소리가 거의 남지 않았다. 제니엘라는 갑판 위에서 몸을 빙글 돌렸다.
짠 내 나는 바닷바람을 맡으며 그녀는 양 손바닥을 하늘 위로 두고서 천천히 팔을 들었다.
“정말 죽여 버리고 싶게 해주잖아.”
쿠우웅……!
붉은 마력이 배를 휘감았다. 서해를 떠돌던 유령선은 볼란데르가 소멸했음에도 아직 남아 있었고, 게르무드 전투 때 살아남은 데스나이트들도 이 유령선에 함께 있었다.
제니엘라는 유령선과 데스나이트들을 거두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프레데터 소속의 요괴 중 특히 강력한 놈들을 배에 태웠고, 아르베스와 김종현을 거쳐 지금은 주인이 없는 리치들까지 데리고 왔다.
‘아이네.’
로브를 뒤집어쓴 리치들의 중앙에서, 프레스칸은 가슴에 손을 얹고서 결의를 다졌다.
‘내 목숨과 바꿔서라도 너를 구하고 마리라.’
제니엘라의 마력에 휘감긴 배가 파도 위로 떠올랐다. 그녀는 양손을 천천히 앞으로 향하며 요정의 숲까지의 방향을 가늠했다.
“닷새 정도 걸릴까?”
예전, 이성민이 배를 타고 요정의 숲까지 향하는 것에는 한 달이 걸렸다. 단순한 배라면 그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 배는 단순한 배가 아니다. 원래부터 파도나 바람과 상관없던 유령선이었는데, 거기에 제니엘라의 끝없는 마력까지 더해졌다.
하늘에 뜬 유령선이 바다를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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