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408)
414화 94. 무신(6)
잠자는 숲으로 가는 것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을 정리하고.
그러는 것에 걸음이 조금 더디기는 했지만, 마음먹는다면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법을 쓰거나, 무공을 쓰거나. 지금의 이성민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숲을 목전에 두었을 때, 밤이 되었다. 이성민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야영을 준비했다.
마을에 들어갈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확신이 부족했다.
인제 와서 뭔가를 더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명상은 더 이상 이성민을 성장시키지 못한다.
무공도, 마법도, 더 나아갈 곳은 없다. 뿐만 아니라. 이성민은 자신의 몸을 관조하면서 확실하게 알았다.
더 이상 검은 심장은 이성민을 성장시키지 못한다. 이성민에게, 더 이상 성장의 여지는 없었다.
사마련주의 무리도 습득했고 드래곤의 힘도 얻었다. 혈마의 무리도 가지고 있다. 아이네의 심장을 포식함으로써 얻은 성장력은 제니엘라와의 싸움에서 모두 소모했다.
뒤가 없다. 혹시 모를 무언가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내가.’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응시했다. 대충 위에 올려놓은 고깃덩어리의 지방이 끓는 소리를 냈다. 이성민은 고기 위에 소금과 후추를 뿌렸다.
‘위지호연을 막는다.’
할 수 있을지를 논해서는 안 된다. 무조건 해야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지호연을 막아야 한다.
제니엘라 때와 똑같으면서도 다르다. 이성민은 익은 고기를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뜯어 먹었다.
불안, 초조, 걱정…….
그런 익숙한 감정들이 들었다. 제니엘라와의 싸움을 준비했을 때와 똑같은 감정이었다.
대미.
위지호연과의 싸움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결말은 날 것이다. 큼직한 고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성민은 뼈를 와작와작 씹으며 다른 고기를 올렸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식사일지도 모른다. 대충 구운 고기를 최후의 만찬으로 삼으려니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성민은 아공간 포켓에서 허주의 호리병을 꺼냈다.
‘그러고 보면.’
술잔을 꺼냈다. 잔에 술을 가득 채워 맞은편에 두었다.
‘단둘이 술을 마셔본 기억이 적어.’
물론, 허주는 술을 마실 수 없는 몸이었지만. 그런 분위기라도 함께 즐겼던 기억이 적다.
이성민은 큭큭 웃으며 호리병의 술을 입에 부었다. 안주 삼아 고기를 뜯었다. 맞은편의 술잔을 보며, 계속.
이렇게 실컷 먹고 마시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니엘라와의 싸움을 앞두고 요정의 숲에서 연회를 벌였을 때, 꽤 많이 먹고 마시기는 했지만, 그때도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어마어마하게 먹었는데도 포만감은 없었다. 이성민은 술로 입가심을 하고서,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양손을 마법으로 씻어냈다.
“사저.”
이성민은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불렀다. 기척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요정의 숲을 나오지 못하는 오슬라를 제외하고, 모두가 이곳에 와 있었다.
“혼자 잘도 먹는다.”
투덜거리는 소리를 낸 것은 스칼렛이었다. 마법의 장막이 걷어졌다. 스칼렛은 똥 씹은 얼굴을 하고서 이성민을 노려보았다.
저 먼 요정의 숲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라는 의문은 들지 않았다. 오슬라가 요정마를 거두어 갔고, 아마 요정마는 스칼렛에게 귀속되어 있을 것이다.
“모습을 보이셨다면 같이 먹자 했을 텐데.”
“말은 참 잘해.”
“설마, 저 혼자 먹어서 서운하신 겁니까?”
이성민이 웃으며 묻자, 스칼렛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뭐라고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열었다가, 차마 욕을 뱉지 못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백소고가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이성민은 쓰게 웃었다.
“위지호연을 막으러 갑니다.”
많은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백소고의 표정이 굳었고, 뭐라고 궁시렁거리던 스칼렛의 입술이 닫혔다. 뒤편에 선 흑룡협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위지…… 호연을?”
로이드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지워지지 않은 상처를 입은 그들을 보며, 이성민은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저들이 인간인 이상, 손실된 팔다리와 눈을 재생할 방법은 없다.
인외가 된다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성민은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재고의 가치가 없는 생각이었다. 인외가 되어 인간이 아니게 되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녀가 마지막 재앙이 되었거든요.”
“하하!”
이성민의 대답에 흑룡협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얄궂은 일이군. 소천마가…… 마지막 종언이라? 그 얘기를 누구에게 들었지?”
“신령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신령에게……? 어떻게?”
“방금 전에 무신을 죽였으니까.”
이성민의 대답에 흑룡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성민은 그런 흑룡협을 향해 머리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보기 좋은 죽음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에게 양보할 것을 그랬나?”
“아니…… 아니, 그럴 필요까지야. 내가 창왕 늙은이도 아니고, 빼앗겼다고 광분할 것 같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흑룡협의 목소리에는 허탈함이 깃들어 있었다. 흑룡협이 창왕과 함께 므쉬의 산에서 수행했던 이유는, 언젠가 무신을 만나 창왕과 합공했다는 치욕을 갚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스칼렛이 뽑힌 눈가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어느새 그녀는 그럴듯한 안대로 눈가를 가리고 있었다.
“너 혼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숲을 떠나서, 이런저런 많은 일을 하셨다?”
“휴잴 산맥의 마령정에 가서 야나를 만났습니다. 다행히, 무사하더군요.”
“……그래서?”
“그곳에서 무능한 마령을 만났습니다. 마령에게서…… 위지호연이 신령의 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잠자는 숲을 목적으로 두고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어. 네가 무턱대고 움직인다면 반드시 잠자는 숲으로 갈 것이라 생각했지.”
스칼렛이 투덜거렸다.
“휴잴 산맥을 들렀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뭐, 결과적으로 너와 다시 만나는 것은 성공했네.”
“여러분은 왜 이곳에?”
그런, 뻔한 질문을 했다.
“왜 당연한 것을 물어? 당연히, 혼자 마음대로 하려는 너를 돕기 위해서잖아.”
마찬가지로 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성민은 그 대답을 듣고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뻔한 질문과 뻔한 대답. 이성민은 심유한 눈으로 스칼렛을 보았다.
“……뭐야. 그 그윽한 눈은.”
스칼렛이 민망하다는 듯 턱 끝을 당기며 시선을 피했다. 백소고를 보았다.
흑룡협은 가만히 하늘을 보고 있었고, 로이드는 초조한 듯 입술을 잘근거리며 손가락을 비비고 있었다.
루비아는 스칼렛의 곁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테레사는 목에 건 새로운 로자리오를 꽉 쥐고 있었다. 그리고, 백소고를 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잘 읽을 수가 없었다. 백소고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눈동자와 어깨가 떨린다.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입술이 바들거린다. 아. 이성민은 어느 순간에 깨달았다.
백소고의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사저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성민은 천천히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사저는, 저를 안타까이 여기시는군요.”
“불쾌했다면…… 미안해, 사제.”
“전혀요. 불쾌하지 않습니다…… 그냥, 궁금한 겁니다. 왜 저를 안타까이 여기시는 겁니까?”
“……사제가 소천마, 아니, 위지호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니까. 둘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는지 아니까.”
역시.
백소고의 대답을 들으며 이성민은 가슴이 조금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다. 백소고는, 저런 사람이었다.
비틀린 신념에 잡아먹힌 괴물이기 이전부터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다.
천 년의 정신 수행 속에서 망가졌다고 해도. 극복할 수 없는 절망을 맞닥트리고 꺾여 부러졌다고 해도.
백소고는.
므쉬의 산에서 제 앞가림도 하지 못하고 죽을 위기에 처한 어린 소년을 돕던…….
좋은 사람이었다. 편협한 정의를 품고서 이 세상에서 악을 멸하겠다는 것을 신념으로 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냥, 백소고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스칼렛을 보았다. 언제나 투덜거리고, 입이 거칠고, 결국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자칭하면서도.
스칼렛은 함께 겪는 위험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요정의 숲에서도 스칼렛은 도망치고자 한다면 도망치려는 시도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제니엘라에게 싸움을 거는 것을 택했다.
한때 적이었던 흑룡협은 사마련주의 죽음을 계기로 동료가 되었다.
다시 만나는 것에 10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흑룡협과 이성민 사이에는 그리 큰 유대는 없었다.
그럼에도 흑룡협은 이곳에 와 주었다. 제니엘라와의 싸움에서 팔을 잃었음에도.
로이드와는 프레스칸의 던전에서 처음 만났다. 아벨에게서 그리에스를 계승받은 그는, 자신의 수명을 아까워하지 않고 그리에스의 마법을 사용하여 종언에 저항하고자 했다.
비록 그리에스 자체가 신령이 안배한 물건이라고는 해도. 그리에스를 통해 종언을 막고자 했던 아벨과 마찬가지로, 로이드는 진심으로 종언을 막는 것을 바라며 이성민에게 도움을 주었다.
생각해 보면 루비아는 허주 다음으로 이성민과 많은 여행을 했다. 그녀에게는 여러 가지고 미안한 일이 많았다.
엔비루스의 죽음에 이성민이 관여했단 것은 결국 사실이었으니. 루비아는 제니엘라와의 싸움을 두려워했지만, 도망치지 않고 이성민과 함께 싸웠다.
테레사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많았다. 무턱대고 찾아가 도움을 청했음에도, 테레사는 오해와 편견 없이 이성민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종언에 대해 알게 된 후에도 고민하지 않고 숲에 남아 도움을 주었다. 겁에 질려 울면서도 제니엘라를 막기 위해 결계를 유지하던 그녀는 훌륭한 성인이었다.
이곳에 없는 오슬라에게도 감사를 느끼고 있다. 종언의 때가 온다면 가장 끔찍한 일을 겪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오슬라다.
그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오슬라는 사마련주의 제자인 이성민을 도와 종언과 맞서는 것을 선택했다.
그 모든 것을 생각하며, 이성민은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솔직하게 감사를 말했다.
“저를 도우려 와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오그라드는 소리 하지 마. 종언을 막아야 하는 게 중요해서니까. 그래, 위지호연이 마지막 재앙이라고 했지? 그럼 위지호연을 끝내면 종언도 끝나는 거네.”
“그럴지도 모르죠.”
“뭐야? 그 애매한 대답은. 아, 됐어. 계속 그렇게 있을 거야? 숲으로…….”
“아니요.”
스칼렛이 재촉하는 말에, 이성민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숲에는 저 혼자 갑니다.”
“……왜?”
백소고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사저가 좋은 사람이니까요.”
“뭐……?”
“스칼렛 님도, 흑룡협 님도, 로이드 님도, 루비아 님도, 테레사 님도. 다들 좋은 사람이라서…… 그래서 저 혼자 가려는 겁니다.”
“……대체 무슨 소리야?”
스칼렛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여러분을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이성민은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더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말로 해서 얌전히 듣지 않을 것임은 알았다. 풀려나온 괴력난신과 프레셔가 바닥을 진동시켰다.
백소고는 거대한 압박감에 표정을 굳히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제 혼자서는 힘들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지요.”
“알면서…… 왜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거야?”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고.”
“어차피 네가 실패하면 종언이 우리 전부를 죽여. 그런데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니, 뭔 말도 안 되는…….”
“여러분이 더해진다고 해서 불가능이 가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냉정하게 보자면, 그것이 사실이었다.
“내가…….”
백소고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우리가…… 약해서? 방해라는 거야?”
이성민은 크게 숨을 삼켰다.
“네.”
그 대답에 백소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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