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419)
425화 96. 도서관(5)
투신전의 주인은 이성민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린 뒤에 뒤로 물러섰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을 통해, 명확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던 투신전은 첫 번째 영지를 갖게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가.”
“당신은…… 아니, 투신전은 에리아를 영지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 당신들이 존재하는 겁니까?”
“왜. 그게 싫냐?”
투신전의 주인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이성민은 당장 대답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에리아는 종언의 운명에서 탈출했다. 문제는 이다음부터다.
“……잘 모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 난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있어. 괜히 이곳에서 살 생각은 없다.”
투신전의 주인이 웃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영지로 삼기는 했지만, 이 세계에 살 생각은 없어. 내 목적은 투신전을 진짜 신계로 만드는 것이고, 이 땅은 투신전의 첫 번째 성역(聖域)이 되었을 뿐이다. 이곳에서 받아먹는 신앙이 얼마나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뭐,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하도록 하지.”
“투자…….”
“어렵게 생각하지 마. 결국, 네가 바라는 대로 된 거야. 더는 이 세상에 종언이라는 멸망은 없다. 어쩌면…… 먼 미래에, 다른 몇 개의 차원이 그러했듯이 이 세상도 자연스러운 멸망을 맞이할지도 모르지. 그것까지 내가 알 바는 아니고.”
투신전의 주인은 그렇게 말하며 도서관을 가득 채운 기록을 응시했다.
“요정계와 정령계도 너무 걱정할 것은 없다. 앞으로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곳 도서관에 기록될 것이고,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 세계에 간섭하고 있는 이들은 그 기록을 공유할 거야. 그게 불만인가?”
“아닙니다.”
“불만을 가질 것도 없지. 그것이 이 세계에 악영향을 주지는 않으니까. 좋게좋게 생각해라. 이 세계가 투신전의 성역이 된 이상, 너희는 그 어디보다 난폭한 신격들을 뒷배로 둔 것이다.”
그리고. 투신전의 주인이 덧붙였다.
“말했던 것처럼 대마계에 직접 시비를 붙이려는 의도도 있었고. 그건 투신전이 앞으로 보낼 영원에 좋은 자극이 될 거다.”
공간을 채우고 있던 도서관의 기록이 사라졌다. 투신전의 주인은 쭈욱 기지개를 켰다.
“전도나 열심히 해. 까놓고 말해서, 이곳이 투신전의 첫 번째 성역이라면 너는 나의 첫 번째 사도(使徒)다. 그렇다고 네가 나에게 어떤 힘을 받아먹을 수는 없겠지만.”
“당신이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 모든 절대자가 신인 것은 아니야. 신이 되려면 성역도 있어야 하고, 사도도 있어야 하고, 신앙도 있어야지.”
서로의 이해가 일치한 것이다. 이성민은 에리아를 종언의 운명에서 탈출시키고, 이 세상을 사육장이 아닌 진짜 세상으로 만드는 것을 바랐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도서관에 투신전을 직접 강림시키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난 간다.”
투신전의 주인이 몸을 돌렸다. 투신전과 함께 강림한 외길을 걷는 존재들이 투신전의 주인을 보았다.
“다음에 본다면 투신전이겠군. 너무 빨리 오지는 마라. 사도로서 최대한 많이 일하고, 신앙도 만들어 놓고. 그 뒤에 와. 대충하고 오면 죽는다.”
투신전의 주인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라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투신전의 존재들이 하나둘 사라져갔다.
이성민은 도서관과 이어져 있는 외길을 보았다. 어느새 투신전의 주인은 그 끝에 있었고, 외길을 걷는 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하나 묻자.”
투신전의 주인을 노려보고 있던 창왕이 입을 열었다. 그는 머리를 돌려 이성민을 보았다.
“무신은 강했냐?”
“그럭저럭.”
“쯧.”
이성민의 대답에 창왕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외길을 힐긋 보면서 투덜거렸다.
“무신과도 싸워봤어야 했는데…… 머저리 같은 놈. 설마 저곳에 오지도 못하고 뒈질 줄이야.”
그 말에 이성민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흑룡협.”
창왕이 중얼거렸다.
“그놈보고 열심히 하라고 해라. 나도 왔는데, 그 새끼도 와야지.”
“연애하느라 바쁩니다.”
“그건 뭔 개소리냐?”
“성녀와 눈이 맞았어요.”
“X을 뽑아버려라.”
이성민의 대답에 창왕이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 일관적인 태도에 이성민은 헛웃음은커녕 오싹함을 느꼈다.
“새끼가, 뭔 연애야? 나이 차이가 몇인데……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해. 말 안 들으면 네가 나 대신에 놈 X을 뽑아버려라. 무인에게 여자는 필요 없다.”
“그럼 여자 무인은 어쩝니까?”
창왕이 무슨 대답을 할까 궁금해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창왕이 미간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뽑을 게 없잖아.”
“그건…… 그렇죠.”
“미친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창왕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떨떠름했다. 창왕은 콧방귀를 뀌며 몸을 돌려 외길을 올려다보았다.
인사말도 없이 창왕은 외길로 향했다. 이제 이 공간에 있는 것은, 신령과 마령을 제외하고 허주와 사마련주뿐이었다.
“잘 지냈느냐?”
사마련주가 툭 하니 질문을 던졌다. 그것에 이성민은 헛웃음을 흘리며 사마련주를 보았다.
그는 괜스레 눈가를 손끝으로 한 번 문질렀다. 아까 흘렀던 눈물은 이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빨리도 물어보십니다.”
“여태까지 살아있는 것을 보면 나름 잘 지낸 것이겠지. 죽지 말고 잘 살아남으라고 본좌의 시체까지 주었는데.”
사마련주가 큭큭 웃었다. 몇 번이고 보았던 유언장의 내용이 떠올랐다. 사마련주가 남겼던 유언장은 아직도 이성민에게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지낼 것이고.”
“그래야지요.”
이성민은 고개를 돌려 사마련주를 보았다. 사마련주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이성민과 눈을 맞대었다.
“……스승님은 잘 지내십니까?”
“잘 지내지. 이곳에서 살았을 때보다 즐겁더군. 저곳에는 본좌를 미치게 하던 무료함이 없으니까.”
이성민에게는 사마련주의 기억이 있다. 그렇기에 그는 사마련주의 말에 무조건적인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사마련주의 삶의 대부분은 무료함에 찌들어 있었다.
그는 속세의 삶에 거의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이전 세상에서 사마련주의 죽음은 언제나 자결이었다. 그리고 이번 세상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마련주가 외길을 올라 보았다.
“덧없다는 생각도 하지. 이 세상에서 본좌는 고금제일인이었다.”
“내가 더 강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허주가 끼어들었다. 사마련주는 그 말을 아예 듣지 않았다.
“하지만 저곳에서는 아니야. 그것이 본좌를 더욱 즐겁게 하였지.”
“그리움…… 은 무엇입니까?”
“본좌가 인간이었던 시절.”
그 말은 지금의 사마련주가 인간이 아니게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인간이었을 때도…… 사실 그리 인간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조금 그립기는 해. 요정의 숲에서 보내던 고요한 삶이 그립더군. 사실 그 숲의 생활은 그리 재미있지는 않았어. 하지만…… 본좌는 그 평온함이 좋았다. 저곳은 평온함과 거리가 먼 곳이다. 언제나 투쟁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말은 그렇게 하여도, 사마련주에게는 저 길을 내려가고 싶은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느슨한 마음을 가진 존재라면 필멸의 굴레를 벗는 것도 불가능하고, 저 길을 걷는 것도 불가능하다.
사마련주가 손을 뻗어 이성민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는 본좌가 가르친 유일한 제자였다. 본좌는 비교 대상도 되지 않고, 시골 마을에 있는 코흘리개를 데려다 키워도 네놈보다는 재능이 나았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어찌 되었든, 그런 네가 제자라서 말년에 즐거움을 느꼈다. 본좌는 평생 개를 키워 본 적이 없는데, 개를 키우는 느낌이었어.”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시골 마을의 코흘리개에서 키우는 개로 신세가 전락했다. 이성민은 눈썹을 찡그리며 사마련주의 말을 부정했다.
이성민에게는 사마련주의 기억이 있었다. 사마련주가 이성민에게 품고 대했던 감정은, 개를 키우는 감정은 아니었다.
“본좌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거짓말도 못 하겠군.”
사마련주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본좌의 모든 것이 너에게 도움이 되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네가 본좌의 제자라 다행이었고, 본좌가 네 스승이라 다행이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되어 좋구나.”
그의 말을 들으며, 이성민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사마련주의 기억이 지금의 그가 하는 말과 섞였다.
사마련주가 이성민에게 품었던 감정이 진해졌고 그 감정을 느끼며 이성민은 두 눈을 감았다.
“느긋하게 오거라.”
사마련주의 존재가 희미해졌다.
“저곳은 먼 길이야. 한 번 오르면 다시 내려오는 것도, 돌아가는 것도 힘들다. 아니, 할 수야 있지. 그렇게 되면 다시는 저곳에 들어갈 수 없을 뿐이지.”
“알고 있습니다.”
“후회를 남기지 말고 오거라. 본좌는 조금 후회를 남겼어. 그래서…… 가끔 그리운 것이지.”
그것이 사마련주가 가지고 있는 최후의 인간다움이었다. 이성민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희미해지는 사마련주를 보며 말했다.
“당신이 나의 스승이라 좋았습니다.”
“오슬라와 예화에게 안부를 전해다오.”
사마련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사마련주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성민은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씁쓸함, 안타까움, 그리움. 이성민의 감정을 동요시켰던 사마련주의 기억이 사라지고, 오롯이 이성민만의 기억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거 참.”
홀로 남은 허주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이성민을 보았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보게 되어서, 뭐라 할 말도 없군.”
그 말에 이성민은 큭큭 웃었다. 언제나 의식 한편에 있던 허주가 이성민을 떠나고, 투신전으로 향한지 아직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다.
“어르신이 보고 싶어 울진 않았느냐?”
“울었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허주는 두 눈을 끔벅거리다가 큰 소리로 웃었다.
“징그러운 새끼.”
“약속도 하나 지켰다.”
“뭔 약속?”
“똥통에 들어가는 거.”
그 말을 듣고서 허주가 더 큰 소리로 웃었다. 배를 잡고 웃어대던 허주가 끅끅거리며 물었다.
“기분이 어떻더냐?”
“끔찍하더군.”
“알았으면 됐다. 개 같은 새끼, 진즉에 똥통에 담가 버렸어야 했는데. 이제야 이 어르신의 고초를 알겠느냐?”
“그런데, 그때는 네가 똥통에 들어갈 짓거리를 했잖아.”
“농담 몇 마디 한 것으로 정색하고 똥통에 담그겠다고 한 네놈이 쓰레기인 것이다.”
허주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좋은 경험 하나 했다고 생각해라. 살아서 또 똥통에 들어갈 일이 언제 있겠느냐?”
“없겠지.”
“크크크! 농담 삼아 던진 약속을 진짜 지킬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나 말을 잘 들을 줄이야. 그렇다면 앞으로도 걱정할 것은 없겠구나.”
허주가 손을 뻗었다. 그 큼직한 손이 이성민의 머리 위로 올라왔다. 허주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성민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너는 혼자다.”
허주가 말했다.
“하지만 네 곁에는 앞으로 쭉, 다른 누군가가 있겠지.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어르신이 직접 볼 수도 없고, 예전처럼 네 머릿속에 자리 잡아 함께 느낄 수는 없어도.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허주가 빙그레 웃었다.
“그때도 말했지만, 너와 함께 있던 것은 즐거웠다. ‘저곳’에서의 삶도 즐겁지만, 가끔…… 그래. 양일천, 저 녀석이 말했던 것처럼. 과거가 그리움이 되더구나.”
죽기 직전에 미련이 없다고 생각해도.
정말로, 아무 미련을 두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모두가 많건 적건 간에 미련을 두고서 죽는다.
“내 미련은 너였다.”
머리를 헤집던 허주의 손이 멈추었다.
“네가 너무 머저리 등신 같은 놈이라서. 너에 대한 걱정이 참 많았지. 그래도, 너를 믿었다. 너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너를 떠나면서…… 나는 너를 믿었다. 네가 절망하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 죽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한 믿음이 허주가 이성민을 떠날 수 있게 만들었다.
“행복했던 적이 없다고 했었지.”
이성민의 머리에서 허주의 손이 떨어졌다.
“앞으로는 행복해라. 개 같은 세상도 끝났어. 여전히 개 같을지도 모르지만, 이전보다는 아니겠지. 너는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너는 세상을 종언에서 탈출시켰다.”
많은 감정이 떠올랐다. 여태까지 만나고, 떠나보낸 이들.
종언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이성민과 함께 여행하고…… 세상이 정해 둔 한계에 가로막혀, 끝까지 자신이 가진 운명의 한계를 넘지 못해 죽었던 광천마.
종언을 막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바치고, 죽일 수 없던 김종현은 시공간에서 추방시키고. 결국에 수명이 다해 죽었던 아벨.
아끼던 제자 청명을 잃고, 복수심으로 제니엘라를 가로막으며 이성민을 보내 주었던 검선.
그 외에 다양한 일들이 이성민을 스치고 지나갔다.
“후련해 해도 된다.”
허주가 말했다.
“너는, 너에게 주어진 미련과 기대에 보답했다. 그러니까…… 이제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 행복했던 적이 없다고 했으니, 이제는 행복하게 잘 살아라. 즐기고 싶은 것을 다 즐기고, 최대한…… 아무 미련도 없이.”
“……응.”
“이 어르신의 미련은 너였다.”
허주가 외길을 보았다.
“네가 만족스럽게 산다면, 내 미련은 없어지는 거야.”
“……잠깐.”
허주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성민은 급히 허주를 붙잡았다. 마지막 대화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허주가 눈썹을 찡그렸다.
“뭐냐. 떠날 분위기 다 잡았는데.”
“야나에게 남길 말은 없냐?”
그 말에 허주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며 이성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령정에서 서럽게 울며, 감정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던 야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음…….”
“개새끼…….”
허주는 이 순간까지 야나에 대해 별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성민이 원망 어린 시선을 주자, 허주가 머뭇거리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하다고 전해줘라.”
“그리고.”
“어…… 행복하게 잘 살라는 말도.”
“그리고.”
“나 같은 놈 잊고…… 음…… 괜찮은 요괴나…… 인간 하나 낚아다가 낳을 수 있으면 애도 낳고…….”
“진심이냐?”
“이런 씨발, 그럼 내가 대체 뭔 말을 하란 말이냐?”
허주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역정을 냈다.
“미안하고, 감정에 보답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잘 살아라. 끝이다. 더 해줄 말도 없어.”
“나중에 다시 보자는 말은 해줄 마음 없냐?”
“빌어먹을, 여기가 뭐 오고 싶다고 아무나 올 수 있는 동네 식당도 아니고…….”
허주가 투덜거렸다.
“볼 수 있음 보자고도 해.”
“그래.”
그 대답을 듣고서야 이성민은 만족하여 머리를 끄덕거렸다. 이제 야나를 만나도 뭔가 격려해 줄 말이 생겼다는 것이 이성민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오지랖도 넓은 새끼…….”
“나 말고는 전해줄 사람도 없잖아. 저번에 떠나기 전에, 네가 야나에게 말 몇 마디라도 남겨 주었으면 이럴 일도 없었어.”
“그때 그런 생각할 겨를이 있었겠냐?”
허주가 투덜거리면서 쏘아붙였다.
“어쨌든. 할 말 다 했다. 빌어먹을, 괜한 얘기를 해서 떠날 기분이 아니게 되었잖아.”
“고맙다.”
이성민이 풋 웃으며 말했다.
“그때도 말했지만, 고맙다. 전부…… 전부 다.”
“알면 됐다.”
허주가 마주 웃었다. 허주의 몸이 사라졌다. 도서관은 여전히 투신전에 연결되어 있었지만, 외길을 걷는 이들 중 더 이상 도서관에 남아 있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저 길의 끝에 선 투신전의 주인이 있는 곳까지 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후우.”
이성민은 멀리 보이는 외길을 보았다. 그 끝에 선 투신전의 주인과 길을 걷는 이들을 보며 가슴에 드는 충동을 억눌렀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어느새 저만치 앞으로 나아가는 허주와 사마련주와, 초입에서 천천히 나아가는 창왕을 보면서.
명확한 목표를 갖고 그를 뛰어넘기 위해 나아가는 삶을 상상해 보았다.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더 크게 느껴졌다.
‘아니.’
아직은 안 된다. 이성민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자아, 그럼.”
마령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이성민을 보고 있었다. 이성민은 마령을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신령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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