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62)
‘검은 심장? 뭐야 이건?’
이성민은 크게 당황하여 자신의 몸을 내려 보았다. 마갑에 휘감긴 몸에 아무런 변화는 느껴지지 않는다. 귓가에 맴돌던 거슬리는 심장 소리도 조용히 가라앉아, 평소처럼 의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슴 한 구석에 무언가 꺼림직한 것이 차있는 이질감은 남아 있었다. 이성민은 왼쪽 가슴을 손으로 짓누르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성민은 우선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검은 심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킬을 익혔을 때처럼 목소리를 들었으니 상태창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생각대로였다.
-검은 심장.
리치 프레스칸이 바라던 비원의 궁극.
문제는 이것이었다. 상태창으로 확인할 수 있는 스킬은, 다른 스킬들이 그러하듯이 설명이 너무 모호했다. 프레스칸이 바라던 비원의 궁극이라고는 하지만, 도대체 그 비원은 무엇이고 궁극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성민이 기억하는 리치, 프레스칸에 대한 인상은 여자가 되고 싶다느니 자식을 낳고 싶다느니 하는 개소리를 늘어놓던 미친놈이었을 뿐이다.
“저… 로이드님?”
이성민은 머뭇거리다가 로이드를 불렀다. 로이드는 이성민에게 심장을 파괴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의도치 않게 파괴해야 할 심장을 취해 버렸다. 이성민은 난감함을 느끼며 로이드를 불렀다.
“로이드님?”
하지만 로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성민은 화들짝 놀라 로이드를 향해 다가갔다. 쓰러져 있던 로이드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성민은 급히 로이드의 맥을 짚어 보았다.
다행이도 로이드는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을 뿐이었다. 중상이라고 생각했던 상처는 막상 보니 크게 심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이성민은 눈에 보이는 속도로 재생되고 있는 로이드의 상처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이성민은 로이드의 몸을 부축하려다가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어 잠깐 멈췄다. 이성민은 몸을 돌려 제온을 향해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던 것일까. 제온의 눈은 부릅 뜨여져 있었다. 이성민은 짧은 한숨을 쉬며 제온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머뭇거리던 손으로 뜨고 있던 제온의 눈을 감겨 주고서, 이성민은 제온의 품을 뒤졌다.
자그마한 천 주머니가 손에 잡힌다. 이성민은 조심스레 그것을 빼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주머니였지만 입구를 열어 손을 집어넣으니, 팔까지 쑥 들어갔다.
안을 더듬어 보니 몇 가지 잡다한 물건들이 손에 잡혔다. 이성민은 그 중에서 하나를 잡고서 손을 빼냈다.
‘백보신권.’
낡은 책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이성민의 가슴은 쿵쾅거리며 뛰었다. 백보신권이라면 소림 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권법 중 하나로, 제온이 익힌 신공절학이었다.
내친 김에 안을 조금 더 뒤져보자 몇 가지 무공서를 더 꺼낼 수 있게 되었다. 이성민은 꺼내 놓은 달마심법과 나한보법을 내려 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모두가 소림의 절기였다. 자하신공과 무영탈혼을 익힌 이성민으로서는 달마심법과 나한보법에는 욕심이 가지 않았지만, 백보신권에는 욕심이 들었다. 창을 휘두를 수 없는 상황을 위한 권법을 익혀 둬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익힐 여유는 없겠지만…’
하지만 익혀 둔다면 위급할 때에 사용할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당장 익힐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성민은 세 개의 무공서를 자신의 아공간 포켓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제온의 아공간 포켓을 뒤졌다.
두 개의 목함. 그 중 하나는 눈에 익었다. 제온이 이성민을 코로나 용병단으로 끌어들이려고 할 때에 보여주었던 목갑이었다. 이성민은 꿀꺽 침을 삼키며 목갑을 열어 보았다.
소림의 비전 영약인 소환단이 얌전히 놓여져 있었다. 이성민은 너무 기뻐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그런 충동을 꾹 누르면서 다른 목갑을 열어 보았다.
확하고 밀려 온 청량한 향기가 이성민의 코를 뻥 뚫었다. 목갑 안에 놓인 것은 소환단보다 조금 크기가 큰 붉은 단환이었다. 대환단. 이성민은 대환단을 직접 본 적이 없었지만, 저것이 대환단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성민은 떨리는 손으로 목갑들을 닫고서 그것들을 자신의 아공간 포켓에 집어 넣었다.
“…너무 원망하지는 마십시오. 이대로 두는 것보다는 누군가가 챙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미 죽은 제온에게 그렇게 중얼거린 뒤, 이성민은 제온의 몸을 조금 더 뒤져보았다. 아쉽게도 아공간 포켓 외에 다른 물건은 집히지 않았다. 이성민은 제온의 아공간 포켓을 챙긴 뒤에 다른 용병들의 몸을 뒤져 그들이 가진 아공간 포켓도 챙겨 두었다.
챙길 것을 챙긴 뒤에, 이성민은 로이드의 몸을 부축했다. 그리고는 던전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았다. 제온이나 다른 용병들의 사체는 그대로 두었다. 본래의 생각은 베른이나 다른 용병의 사체에서 대형 아공간 포켓을 찾아 사망자들의 시체를 수습하는 것이었지만,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제온과 미라가 된 용병들을 제외한 다른 용병들은 시체조차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성민은 제온과 미라가 된 용병들의 시체를 로이드와 함께 짊어지고서 계단을 올라갔다.
던전의 다른 아티펙트를 챙기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대환단과 소환단에 소림의 비급까지 취했으니 절대로 손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던전 밖으로 나왔을 때, 해가 저물고 있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던전으로 돌입했었으니 못해도 반 나절은 넘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이성민은 한숨을 내쉬면서 등에 업힌 로이드를 힐긋 보았다. 로이드는 고른 호흡을 뱉으며 기절해 있었다.
다행히 던전과 머지않은 곳에 마차와 말을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마부들은 이성민이 기절한 로이드와 시체들을 데리고 돌아 온 것을 보며 경악했지만, 이성민이 대충 사정을 설명하자 일단은 납득해 주었다.
“베헨게르로 돌아갑시다.”
이성민은 피로에 절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던전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해야 반나절이었지만, 너무…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머릿속은 생각들로 인해 복잡하게 엉켜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안에서 이성민은 던전에서 알게 된 사실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품 안에 언제나 넣고 다니던 수첩을 꺼내 펜을 쥐었다.
1.인과율이 비틀어진 존재는 나 이외에 또 존재하고 있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강력하던 리치가 자신이 감히 어찌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 것을 보아 초절정고수 이상의 실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2.나에게는 인과율이 비틀어진 것 이외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 김종현은 그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있지만 나에게 말해 줄 수는 없다. 리치가 불러들인 존재는 나를 제물로 받는 것을 거부했다.
2-1. 하지만 므쉬와 네블은 나의 혼에 욕심내고 있다. 리치가 불러들인 존재와 므쉬, 네블이 무슨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2-2. 회귀한 뒤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상할 정도의 호의를 받고 있다.
3. 전생에서의 마갑은 삼류 용병을 절정고수로 바꾸었으나, 나는 아무런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4. 검은 심장이라는 것을 얻었지만 이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5. 본래는 죽었어야 할 로이드가 살게 되었다. 로이드는 그에 대한 보답을 해주기로 했으나, 무엇을 받게 될지는 모른다. 나 이외에 다른 용병들은 모두 죽었다. 제온에게서 대환단과 소환단, 소림의 비급을 얻었다.
이성민은 자신이 써 내린 글들을 쭉 보았다. 복잡한 생각을 글로 풀이하니 그나마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문제는 이렇게 글로 써봤자 저들 중 그 무엇에도 대답을 내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전생의 돌에 뭔가가 있는 건가?’
이성민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전생의 돌을 쥐었을 때는 대수롭지 않았다. 그냥 웬 돌인가 싶었고, 그 뒤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그나마 마갑이나 검은 심장 같은 것에 대한 답을 알려 줄 수 있는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이성민은 다행으로 여겼다.
베헨게르에 도착했을 때에는 밤이 깊었다. 이성민은 바로 용병 길드로 돌아가 던전에서 일어난 참상에 대해 알렸고, 그에 대?한 증거로서 제온과 미라가 된 용병들의 시체를 내려놓았다.
“기, 길드장님은 어떻게 된 건가?”
베른이 자리를 비웠을 때에 길드장 대리를 맡는 중년의 용병이 다급히 물었다. S급 용병인 조영이었다. 몇 번 보기는 하여 안면을 익히기는 했지만, 이성민과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돌아가셨습니다.”
베른의 죽음은 이성민도 씁쓸함과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다. 베른은 이성민에게 제법 호의적이었기 때문이다.
“마… 말도 안 돼.”
“자세한 것은 나중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뭐? 어디를 갈 셈인가! 이보다 급한 일이 어디에 있다고…!”
“금색 마탑의 탑주, 로이드님이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제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로이드님이 흑마법사의 던전에 나타나, 흑마법사를 던전에서 쫓아내 준 덕분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로이드님은 큰 부상을 입으셨고요.”
“금색 마탑의 탑주…? 저, 정말인가?”
조영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금색 마탑의 탑주라면 베헨게르 용병 길드 지부장보다 급이 높다. 애초에 마탑이라는 것은 마법사 길드 안에서도 특별 취급을 받는 곳이다. 마탑의 탑주라면 마법사 길드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과 명성을 가진 대마법사라는 뜻이니, 조영이 경악하는 것도 당연했다.
“예. 그러니 우선 로이드님을 마법사 길드로 모셔다 드리고 싶습니다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알겠네.”
결국 조영이 태도를 굽힐 수밖에 없었다. 조영은 마차에 실린 제온의 시체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코로나 용병단의 단장인 제온이… 이렇게 죽을 줄이야. 베른님도… 후우!”
이성민은 한숨을 내쉬는 조영을 뒤로 하고서 로이드를 등에 업었다. 마법사 길드는 용병 길드와 머지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이동하는 것에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이성민이 로이드를 데리고 마법사 길드를 방문하자 길드는 뒤집어졌다. 금색 마탑주인 로이드가 부상을 입고 업혀 들어왔다는 것은 베헨게르의 마법사 길드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이미 늦은 밤이었지만 마법사 길드에 소속된 마법사들은 부산히 움직이며 로이드를 회복시키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다.
“오버하기는.”
어느새 다가 온 스칼렛이 투덜거렸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서있던 이성민은 다가 온 스칼렛을 향해 살짝 목례를 해주었다.
“보니까 상처도 이미 다 재생되었던데. 저건 마력이 고갈되어서 기절한 것 뿐이야. 어느 정도 마력이 돌아오면 멀쩡하게 눈 뜰걸.”
“그러면 따로 치료는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지. 그래도 보여주기 식은 필요한 법이잖아. 뭐라도 바쁘게 하는 척을 해야, 나중에 저 대단하신 금색 마탑주가 눈을 떴을 때 체면치레를 하지.”
스칼렛이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말하는 것에서 전해지는 태도로는, 스칼렛은 ‘마탑주’라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듯 했다.
“모든 마법사는 마탑주를 존경하지 않습니까?”
“존경은 무슨. 나는 마탑주라는 늙은이들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아. 그 늙은이들은 비밀 투성이거든. 제자도 안 들이고. 자기들이 익힌 마법과 알게 된 지식을 남들과 공유하지도 않지.”
앞으로 몇 년 지나지 않아 레시르 학파를 창설하고, 붉은 마탑의 주인이 되는 스칼렛에게서 저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겠지만, 앞으로 몇 년 동안 스칼렛에게서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
“그보다 너… 갑옷이 멋진 걸. 어디서 난 거야?”
“…우연히 기회가 있었습니다.”
“듣자 하니 다른 용병들은 다 죽었다며? …운이 좋았네. 다행이라고 생각해. 네가 죽었으면 꿈자리가 사나웠을 거야.”
“저를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꼬맹이가 징글맞은 소리 하기는. 그냥 아는 사람이 죽으면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이 당연하잖아.”
스칼렛이 투덜거리면서 이성민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야밤에 뭐 이리 시끄러운가 했더니.”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성민은 뒤를 돌아보았다.
새하얀 가운을 입은 김종현이 하품을 하며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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