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69)
기었다.
걸었다.
뛰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느렸다. 몸은 무겁지 않았으나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시간이 늘어지는 것인지 의식이 늘어지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모호한 감각의 연속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성민은 기다가, 걷다가, 뛰었고, 더 빨리 뛰기를 바랐다.
하지만 더 빠르게 뛸 수는 없었다. 스치는 풍경이 느리다. 애초에 풍경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이성민이 뛰고 있는 세계는 시커먼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빛 한 점 없는 밤과 같았고, 이성민이 므쉬의 산에서 익숙해졌던 어둠과 닮아 있었다.
뛰고 있음은 알았다. 이성민은 날고 싶다고 바라였으나, 날 수는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성민은 뛰지 않고 멈췄다. 그리고 창을 휘둘렀다. 란나찰에서 구천무극창. 이미 익숙한 창로를 손과 창으로 따랐다.
한 번만 더.
간절하게 그를 바라였다. 이성민은 자신이 펼쳤던 강기를 떠올렸고, 그것을 다시 펼치기 위해 몇 번이고 시도했다. 내공을 불어넣어 창두에 자색의 불꽃을 입히고 싶었다.
되지 않았다.
감각 자체를 모르겠다.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몇 번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다. 단전에 웅크리고 있는 내공은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대체 왜. 그때의 강기는 단순한 우연이었나? 거듭된 실패 속에서 이성민은 절망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는 창을 쥐지도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주저앉는 시간이 많아졌고 좌절은 의욕을 뭉개 놓았다. 그렇게 썩어간다고 생각했다.
눈을 떴을 때에는 시끄러운 빗소리가 가득했다. 이성민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 보았다. 마차의 천장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입술을 벌려 잠깐 동안 호흡을 더듬었고, ‘방금 전’까지 겪었던 일들이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어났어?”
스칼렛의 목소리가 들렸다. 창가에 둔 의자에 스칼렛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콧잔등에 걸치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너. 사흘 동안 쓰러져 있었어. …죽는거 아닌가 싶었는데. 그래도 죽지는 않았네.”
“…여긴… 어딥니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전신이 나른하고 뻐근한 것이 사흘 동안 쓰러져 있었다는 것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것으로 스칼렛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을테고.
“그냥 어디에나 있는 마을이야. 도시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꽤 부족해서.”
“스칼렛님이 마차를?”
“나도 몰수는 있어. 하기는 싫지만. 뭐 어쩌겠어? 마차를 몰아야 할 네가 쓰러졌으니, 내가 해야 할 것 아냐.”
스칼렛은 투덜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창 밖에 내리는 비를 힐긋 보았다.
“오늘 아침부터 내리더라. 내일이면 그칠 것 같기는 한데… 비온 뒤에는 땅이 안 좋잖아. 빨라야 모레가 되어야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너도 오늘 막 눈을 떴고.”
스칼렛은 그렇게 말하면서 이성민을 향해 다가왔다.
“이 마을의 의사를 불러보기는 했는데… 그리 실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말이야. 치유 마법사나 프리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포션을 써서 외상을 어떻게든 치료하기는 했는데… 일단 확인해 봐.”
정신이 조금 몽롱하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일단 스칼렛의 말을 따라 양 팔을 움직여 보기로 했다. 기억하는 상처는 양 손바닥과 팔꿈치 관절, 왼쪽 옆구리와 늑골의 상처였다.
이성민의 양 팔에는 부목이 대어져 있었다. 이성민이 스칼렛을 힐긋 보자, 스칼렛이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했어. 응급처치 법은 나도 아니까.”
이성민은 부목의 아래에서 조심스레 팔을 움직여 보았다. 약간 뻐근하기는 했어도 움직이는 것에 큰 무리는 없었다. 포션이라고 해서 상처를 완벽하게 회복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찰과상이나 베어진 상처에는 효과가 빠르지만, 골절상이나 내상은 포션만으로는 완전히 회복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큰 통증없이 뼈가 붙었다는 것은 운이 좋은 경우였다.
‘아니. 어쩌면 이것도 심장의 능력인가?’
이성민은 자신의 몸 안에 있는 검은 심장이 정확히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나마 확인했던 것은 영약을 복용할 때에 정제과정 없이 단전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 그 외에 다른 것은 모른다.
이성민과 같은 심장을 가지고 있는 아이네는, 여러 가지로 이성민과 달랐다. 아이네는 이성민이 할 수 없는 다양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었다. 백보신권을 펼치던 것을 보니 제온의 심장을 통해 제온의 무공을 빼앗은 것 같았다.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외에도 아이네는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팔다리는 계속해서 형태를 바꾸었고, 단단한 갑각으로 전신을 감싸기도 했다. 육체 능력은 이성민보다 뛰어났고 상처를 순식간에 재생해내기도 했다. 어떤 점을 보아도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능력들이었다.
이성민과는 다르다. 이성민은 팔다리를 바꿀 수도 없었고, 경이적인 재생력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네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재생력을 갖추게 되었을 수도 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내상 쪽은 어때?”
스칼렛이 다가와 이성민의 양 팔에 묶인 부목을 풀어 주었다. 이성민은 팔을 조금 움직여 보고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아이네와의 싸움에서 내상을 제법 크게 입었다고 생각했는데… 사흘 사이에 내상은 이미 회복되어 있었다. 포션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해도 기이할 정도로 빠른 회복력이었다.
“왜 도망치지 않으셨습니까?”
내공을 살짝 움직여 보고서, 이성민은 스칼렛을 향해 물었다. 의자를 끌어다가 이성민의 곁에 앉은 스칼렛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싶지 않았으니까.”
“위험한 상황 아니었습니까? 자칫했다가는…”
“별로 그렇지도 않았어. 실제로 위험하게 되지도 않았고. …도망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게 전부야. 널 버리고 가고 싶지도 않았고.”
자세하게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모양이라, 이성민은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 괴물 꼬맹이는 대체 뭐였던 거야? 왜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를 공격한 거지?”
“…저 때문일 겁니다.”
이성민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에 스칼렛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뜻이야?”
스칼렛에게는 빚이 있다. 그녀는 이성민을 버리고 도망칠 수도 있었으나, 이성민을 위해 남는 것을 선택했다. 스칼렛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성민은 아이네를 상대로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이성민은 한숨을 쉬면서 자신과 아이네의 관계에 대해 말해주었다. 스칼렛은 입술을 꾹 다물고 이성민의 이야기를 들었다. 던전에서 있었던 일과 이성민이 갖게 된 검은 심장, 그리고 아마 그와 같은 심장을 갖고 있는 아이네의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스칼렛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어쩐지. 네가 김종현, 그 싸이코 자식이랑 이상하게 자주 만난다 싶더라니. 그 심장 때문이었던 거야?”
“아… 예.”
“너도 참 재수 더럽게 없다. 아니. 이 경우에는 재수가 좋다고 해야 하는 건가? 어찌 되었든 몸이 예전보다 더 좋아진 것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적당한 대가라고 보는데.”
“죽을 뻔 한 것이 말입니까?”
“세상에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기연을 얻고 싶어하는 놈이 넘치도록 있어. 앞으로도 안 죽으면 되는 거잖아.”
스칼렛은 투덜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넌 운이 좋은 줄 알아. 나랑 같이 다니게 된 덕에 목숨 부지하기 더 편해졌을 테니까.”
“…앞으로도 저랑 같이 다니시겠다는 겁니까?”
“왜? 내가 이 말 들으면, 내 목숨 아깝다고 너랑 같이 안 다닐 줄 알았어? 너 나를 잘못 봐도 한참을 잘못 보고 있었구나? 나 그렇게 정 없는 사람 아니야.”
스칼렛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창가에 놓인 테이블 위에 두었던 안경과 책을 들어 올렸다.
“어쨌든. 몸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야. …원래는 비가 그치고 땅이 좀 마른 뒤에 떠날까 했는데. 네 사정을 들으니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는 없을 것 같아. 내일 비가 그치는 대로 바로 떠나도록 하자.”
“아… 예.”
“내 생각은 안 해도 돼. 아무리 위험해도 내 목숨 지킬 방법은 가지고 있으니까.”
쉬고 있어. 스칼렛은 그렇게 말하고서 방을 나갔다. 당연히 그렇겠지만, 스칼렛은 다른 방에 묵고 있었다. 단지 이성민을 간호하기 위해서 이 방에서 지내고 있었을 뿐이다.
스칼렛이 떠나자 이성민은 방 안에 홀로 남게 되었다. 이성민은 스칼렛이 남긴 말을 생각해 보았다. 왜 스칼렛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성민과 같이 다니려는 것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스칼렛 본인도 알려줄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캐물어봤자 이유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성민이 느끼기에는, 스칼렛의 말과 태도에는 감정적인 이유가 깃들어 있었다. 그 감정은 남녀 사이의 애정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그에 대한 생각은 그만두었다. 이성민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제법 오랫동안 누워있던 탓인지 몸이 나른하고 뻐근하였다. 그것은 꿈 속에서 느꼈던 무거움과 닮아서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벽에 기대어 세워 놓은 창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이성민은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의 대부분은 꿈에서 느낀 절망에서 기인한 것들이었다. 창을 쥐었을 대, 이성민은 크게 숨을 삼켰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이성민은 기절하기 직전에 느꼈던 것을 떠올려 보았다. 사실… 방법은 이성민 스스로도 잘 알지 못했다. 방법을 알고서 강기를 쓴 것이 아니다. 지긋지긋한 상념과 자기혐오의 끝에서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고… 거기서.
갑자기 강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느꼈던 것을 더듬어 보면서, 이성민은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 올렸다. 창에 불어넣은 내공은 자주색의 안개가 되어 창간과 창두의 주변을 떠돌았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이성민은 계속해서 내공을 불어 넣었다. 흔들리던 안개의 색이 진해지며 서로 뭉치기 시작했다. 조금 더. 감각을 기억하려 애쓰면서 이성민은 내공을 더 불어넣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안개가 완전히 뭉쳤다. 이윽고 그것은 흔들거리는 불길이 되었다. 아이네와의 싸움에서 도달했던 강기보다는 색이 엷고 크기가 작기는 했지만, 단순히 기를 덮는 것을 넘어 강기의 수준에 도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이성민이 절정의 가장 크고 단단하며 높은 벽을 뛰어넘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강기를 쓴다고 해서 초절정고수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초절정고수는 강기를 사용한다. 즉, 강기는 초절정의 경지에 가까워졌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미숙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강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정신집중이 필요하다. 내공의 소모도 많아 남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선 강기를 형성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이성민이 해야 할 최우선과제일 것이다.
이성민은 창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조금 울었다. 아이네와의 싸움에서 강기를 처음 사용했을 때. 이성민은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전생에서는 꿈에도 꾸지 못했던 경지에 들어선 것에 감격했다. 그런 눈물이었다. 나는 조금 앞으로 나아간 것일까. 얼마나 앞으로 나아간 것일까. 한 걸음? 어쩌면 반 걸음일지도 모른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성민은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계속해서 울었다.
창 밖에서는 빗줄기가 가늘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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