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85)
열린 문의 안쪽에는 자그마한 체구의 소년이 서있었다. 아니. 사실 이성민은 그가 소년인지 소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어찌 보면 남자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다르게 보면 여자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성민은 잠깐 동안 그, 혹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데니르?”
“맞아.”
데니르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외모로 성별을 알 수가 없듯이, 데니르의 목소리 역시 성별을 알 수가 없었다. 므쉬가 그랬던 것처럼 데니르도 어린 아이의 모습이었다. 왜 ‘신’이라는 존재들이 저런 미성숙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인지 이성민은 알 수가 없었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의문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므쉬. 왜 나한테 이런 귀찮은 녀석을 떠넘긴 거야?”
데니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홱하고 몸을 돌렸다. 이성민이 데니르의 등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 데니르가 크게 숨을 내뱉더니 다시 이성민을 돌아 보았다.
“너는 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려는 것이냐?”
“…예?”
“그것만으로 만족한다면 나야 좋은 일이지.”
그럴 리가 없잖은가. 이성민은 급히 데니르의 뒤에 따라 붙었다. 이성민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닫혔다. 데니르는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자그마한 시골집의 복도는 그리 길지 않았고, 얼마 걷지 않아 넓지 않은 거실에 도달했다. 이성민은 데니르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깨 너머에서 찰랑거리는 짧은 단발머리는 소년의 것 같기도 하였고 소녀의 것 같기도 하였다. 그것에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던 중에, 데니르는 빙글 몸을 돌렸다. 데니르는 가까운 곳에 있는 소파로 가서 털썩 앉았다.
“나에게 무엇을 바라지?”
데니르가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고, 대답을 준비하지 못한 이성민은 잠깐 동안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성민을 향해 데니르가 다시 말했다.
“인사차로 온 것은 아닐 테고. 나에게 무엇을 바라기에 이곳에 온 것이냐?”
“갑자기 그런 말을 들어 봐야 뭐라고 대답할 말이…”
“흠. 그것도 그렇겠군.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지. 너는 무엇을 바라느냐?”
지칭이 바뀐다. 이성민이 데니르에게 바라는 것에서, 이성민 본인이 바라는 것으로. 하지만 이성민은 그 질문에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성민의 침묵에 데니르가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를 냈다.
“너는 우유부단하군. 아니면 생각이 너무 많아서인가. 뭐, 좋아. 신은 자비로워야지. 이런 이야기보다는 조금 더 편하게 대화를 하도록 할까.”
데니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리를 꼬았다. 대화를 하자고는 해도 이제 처음 만난 것이고, 신을 상대로 무슨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잠깐 동안 입술을 다물고 있던 이성민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진지하게 한 질문은 아니었다. 단지 이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던진 농담 같은 것이었다. 그 질문에 데니르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상한 것을 신경 쓰는 군. 하긴. 인간은 그런 법이지… 신에게 성별은 존재하지 않아. 조금의 취향이 있을 뿐이지. 므쉬가 여성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은 그녀가 가진 고약한 취향일 뿐이야. 시련과 고행을 주관하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신. 고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런 관점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데니르의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멍하니 머리를 끄덕거리는 이성민을 향해 데니르가 말을 계속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내가 취한 모습에 성별은 존재하지 않아. 남자로 여기고 싶다면 남자로 여기고, 여자고 여기고 싶다면 여자로 여기어라.”
“…어린 모습을 취하는 것도 단순한 취향인가?”
“아니. 이건 취향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데니르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시가를 꺼냈다. 중성적인 모습을 한 어린 아이가 제 손가락보다 훨씬 두꺼운 시가를 무는 모습은 위화감이 가득했다.
“너는 시간을 거슬렀군.”
데니르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서 이성민의 뺨이 움찔 떨린다. 하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신인 데니르가 이성민이 인과율이 비틀어졌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므쉬도 눈치챈 것을 데니르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인과율이 비틀어져 있어. 뭐. 인과율이 비틀어진 존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네 경우는 독특하군. 시간을 거슬렀다. 죽음이라는 결과에서 되돌아 왔다… 후후! 아주 재밌어.”
데니르가 다리를 휘저으면서 웃었다. 이성민은 그런 데니르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어 물었다.
“나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존재의 가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의 일부를 지워내기는 했지만 전부 지워지지는 않았습니다.”
“알아. 너를 어여삐 여기는 존재의 가호는 필멸자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일부의 가호를 지워냈다고? 후후. 그것은 지워낸 것이 아니라 지울 수 있게 해준 것에 지나지 않아.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닐 테니까.”
데니르가 웃음을 흘리며 대답한다. 이성민은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은 이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해줄 수 있습니까?”
“네 존재는 이질적이다.”
데니르가 대뜸 그렇게 말했다.
“죽음에서 돌아 온 너는 죽기 이전까지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너라는 존재가 없다면 이 세상은 네가 가지고 있는 기억대로 흘러갈 거야.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해. 하지만 ‘너’라는 존재 자체가 변수가 된다.”
“…무슨… 말입니까?”
“너는 이전 생과 똑같이 살았나?”
데니르가 물었다.
“그 어떤 차이도 없이 살아왔다고 할 수 있나? 전생에서 보낸 매일과 조금의 다름도 없는 매일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나? 전생의 매일과 똑같은 시간에 잠들고, 밥 먹고, 마시고, 싸고, 말하고, 만나고. 그렇게 했나?”
“그…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래. 그래서 네 존재가 변수가 되어버린 거야. 너는 네 전생과 다른 매일을 보냈기 때문에, 네 존재는 이 세상의 흐름에 대한 변수가 된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자그마한 나비의 날갯짓도 먼 곳에서는 커다란 소용돌이가 되는 법이지. 실제로 지금의 세상은 네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변했을 거야. 아닌가?”
그 말에 이성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짚이는 일이 있었다.
금색 마탑주인 로이드는, 이성민이 기억하는 전생에서는 행방불명 상태였다. 하지만 ‘이성민’이 그 던전에 있었기 때문에, 로이드는 행방불명되지 않고서 생환했다.
소천마 위지호연에 대한 소문이 다르다. 그녀는 전생보다 빠르게 위명을 떨쳐갔고, 남자가 아닌 여자로서 알려지고 있었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둘을 제외하고서라도 몇 십 몇 백 가지의 일이 이성민의 머리에 떠올린다. 전생과 똑같은 매일을 보냈는가? 그럴 리가 없다. 전생에서 살아 온 매일을 기억하지도 못하는데.
그때와 똑같은 시간에 잠들었냐고? 먹고, 마시고, 싸고, 말하고, 만나고.
불가능하다. 전생의 매일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하여도 그렇게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이성민은 전생의 이성민과 다르다. 다른 무공을 익혔고, 다른 삶을 살았고, 다른 만남을 가져왔다.
“너라는 존재가 변수가 되어 이 세상을 전생과 바꾸어 가고 있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모르겠…”
“네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의 모든 흐름을 헝?클고 있는 거야.”
데니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시간의 신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흐름이지. 네 존재는 이 세상을 흘러야 할 방향으로 흐르지 않게 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만들어가고 있어. 너를 가호하는 존재가 궁금한가? 내가 그를 어찌 대답할 수 있겠느냐.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에 대해 말해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신’으로 모셔지는 우리는 절대로 그에 대해 말할 수가 없어.”
“어째서…?”
“그것은 반드시 함구해야 할 ‘종언’이기 때문이지. 언급한 순간 우리는 소멸을 각오해야 해. 므쉬처럼 자신의 성지를 가지고 신도를 가지며 신앙되는 신이라면 ‘종언의 사도’와 공멸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불가능해. 나는 성지도 갖지 못했고 신도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
종언. 종언의 사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이성민은 싸늘한 한기를 느꼈다. 이전에 느껴 본 적이 있는 감각이었다. 므쉬의 혼잣말을 들었을 때. 그리고 김종현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한기를 느껴 본 적이 있었다.
“하하… 봐라. 가벼운 언급 정도임에도 사도의 기척이 다가오는 군. 더 이상 말할 생각은 없으니 물러서 주시길.”
데니르가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에 싸늘함이 멀어진다. 이성민은 막혔던 호흡을 터트리며 목을 어루만졌다.
“바, 방금 그건 대체?”
“사도가 다가오려 했을 뿐이다. 더 이상 말해줄 수는 없어. 그래도… 대화가 통하는 상대이기는 한 모양이군.”
데니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네 질문에 대답해 줄 수는 없다. 모든 신도 네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없어. 우리 역시 필멸의 굴레를 벗지 못한, 종언의 앞에서는 무력하기 그지없는 존재니까.”
“그렇다면 누가 대답해 줄 수 있다는 겁니까?”
“필멸의 굴레를 벗은 존재를 찾아라.”
“그게 누구인지 말은 해 줘야 알지 않겠습니까…!”
“엔비루스.”
이성민의 낮은 외침에 데니르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워낙 떠돌아다니는 녀석이니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군. 그 녀석이라면 네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거야. 그 녀석은 너와는 다른 의미로 인과율이 비틀어진 존재니까.”
엔비루스, 엔비루스… 이성민은 그 이름을 머릿속에 기억했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보아도 엔비루스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슬슬 이야기를 들어 보도록 할까. 너는 나에게 무슨 부탁을 하고 싶은 거냐. 므쉬는 왜 너를 이곳에 보낸 것이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므쉬가 말하기를, 죽음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왔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걸맞는 존재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렇군. 그래서 그 빌어먹을 므쉬가 너를 나에게 보낸 것이었어.”
데니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성민을 바라보았다. 잠시 이성민을 보던 데니르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안 돼.”
“…예?”
“안 된다고 했다. 나는 너에게 나의 ‘시련’을 줄 수가 없어.”
“잠깐… 시련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당신이 나에게 시련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줄 수는 있지. 하지만 너는 감당할 수 없을 거다. 미쳐서… 죽어버릴 거야. 이건 내가 너를 위해 하는 충고이니 새겨듣도록 해.”
“나는 므쉬의 산에서의 시련도 견뎌냈습니다. 고통에는 익숙…”
“이건 네가 알고 있는 고통과는 달라. 므쉬의 고행과 시련과 금제는 굉장히 상냥하지. 므쉬 본인이 시련과 고행을 주관하는 신이면서도 말이야. 결국 금제라는 것은 너희가 선택하는 것이고, 도중에 포기할 수도 있잖아.”
데니르는 그렇게 말하고서 쿡쿡 웃었다.
“하지만 내 시련은 달라. 내 시련은 므쉬의 것과는 다르게 ‘반드시’ 무언가를 얻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어디까지나 너 자신에게 달린 일이기 때문이지. 그러면서도 끔찍하게 고통스럽고 지루해. 여태까지 나를 만나고, 나에게서 시련을 받아낸 존재는 열 명이다. 그리고 그 중 셋만이 시련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냈지.”
“…나머지는?”
“모두 죽었다. 아. 시련이 그들을 죽인 것은 아니야. 그들 스스로 포기해서 자살한 것뿐이거든. 내 시련에 도전한 열 명 중에서 너보다 못한 녀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열정과 노력과 근성과 독기를 가지고 있었지. 하지만 그 중에서도 셋만이 시련을 극복했어.”
데니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우선 조금 머리라도 식히도록 해라. 언제라도 찾아와 시련을 요구한다면… 그래. 네가 자살하고 싶다면 말이야. 그렇다면 시련을 주지 못할 것도 아니니까.”
“머리를 식히라니…”
“잠이나 자고 오란 말이다.”
데니르가 미간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아. 그래도 이곳에서 자는 것은 안 돼. 여긴 내 집이니까.”
집 밖으로 꺼지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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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르와의 대화를 통해 이성민은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종언과 종언의 사도. 말하면 내가 죽는다. 김종현이 그렇게 말했을 때, 이성민은 의아함을 느꼈었다. 대체 누가 김종현을 죽이려 드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므쉬가 했던 혼잣말 또한 이성민이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므쉬와 김종현을 위협했던 것은 ‘종언의 사도’다. 그렇다면 종언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데니르와의 만남은 이성민에게 해야 할 일을 확실하게 제시해 주었다.
엔비루스.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이성민과는 다르게 인과율이 비틀어진 존재. 에리아가 넓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름 하나 가지고 사람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에레브리사의 회원인 이성민은 다른 사람들보다 쉽게 정보를 접하는 것이 가능했다.
‘나로 인해 흐름이 바뀌고 있다고…’
교외를 떠나면서, 이성민은 착잡한 기분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것을… 크게 의식해 본 적은 없다. 느낀 적은 있되 심각한 일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성민은 회귀하고서 자신이 살아 온, 14살부터 새로이 시작한 8년의 세월을 떠올려 보았다. 현재의 이성민은 전생의 이성민과 이름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보아야만 했다.
‘나라는 존재가… 흐름을 바꿀 정도로 대단하단 말인가?’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성민은 복잡한 생각을 이어가면서 가까운 여관 방을 잡았다. 생각은 데니르가 말한 ‘시련’으로 이어졌다. 데니르의 시련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것에 대해서는 데니르도, 므쉬도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데니르가 축객령만 내리지 않았어도 그에 대해서 진득하게 물어보았을 텐데. 그것이 크게 아쉽기는 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기에는 늦은 일이었다.
자하신공을 대주천하고서 잠들었다. 언제나 일어나던 이른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성하 도인이 죽었다.
여관의 1층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성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이성민은 화산의 장문인인 성하 도인과 독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하 도인은 늙기는 했지만 기운은 정정했고 두 눈은 정기를 가득 담아 맑았었다.
그런 성하 도인이 죽었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데.
“검귀가 그렇게 강했단 말인가?”
반나절만에 병에 걸린 것이 아니다. 검귀 독비준이… 성하 도인을 죽였다. 1층 식당에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성민은 큰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전생의 기억.
전생의 이성민은 대단한 위치에 선 존재가 아니었다. C급 용병이었던 이성민이 접할 수 있는 소문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시절에 적극적으로 정보 수집을 하였던 것도 아니었으니, 이성민이 접할 수 있었던 소문은 정말로 ‘유명한’ 것들 뿐이었다.
검귀 독비준이 화산파 장문인인 성하 도인을 살해했다는 것은 에리아 전역에 퍼질 만한 큰 소문이다. 하지만 전생의 이성민은 그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전생에서 성하 도인은 죽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생에서는 성하 도인이 죽었다.
이성민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손님들에게 다가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물었다. 이성민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고 흘러나오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기 때문일까. 그들은 숨김없이 간밤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이성민에게 설명해 주었다.
검귀 독비준이 심야에 화산의 산문을 넘었다. 독비준은 은밀하게 화산 장문인인 성하 도인의 침소를 침입했고, 성하 도인을 깨워 비무 할 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성하 도인은 독비준의 무례를 꾸짖으며 물러가라고 하였지만, 독비준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결국 먼저 출수하여 성하 도인을 공격했고, 갑작스러운 급습을 시작으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서로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지 않는 비무를 벗어난 생사결로 이어져, 성하 도인은 독비준에게 죽임을 당했다.
화산의 도사들이 뒤늦게 찾아왔지만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후였다. 성하 도인은 싸늘한 주검이 되었고, 독비준은 그곳에서 도망쳐 버렸다.
‘대체 왜.’
이성민은 여관을 뛰쳐 나왔다. 이성민은 새하얗게 질린 머릿속에서 의문만을 끊임없이 품었다. 전생의 독비준은 성하 도인을 죽이지 않았다. 아마 전생의 독비준도 화산을 찾아갔겠지만, 끝내 비무는 성립되지 않고 독비준은 성하 도인과의 비무를 포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 년 후의 던전에서 위지호연에게 죽는다. 그것이 본래의 흐름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뀌었다. 데니르가 했던 말이 이성민의 마음을 짓누른다.
-너라는 존재가 변수가 되어 이 세상을 전생과 바꾸어 가고 있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네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의 모든 흐름을 헝클고 있는 거야.
‘나 때문인가?’
생각은 그곳으로 향한다. 전생과 지금의 차이라면 그것밖에 없다. 전생의 독비준은 화산의 산문에서 이성민을 만나지 않았다. 이성민은 바로 어제 독비준과 만났다. 독비준과 만나, 왜 성하 도인이 비무를 거절하는 것인가에 대해 일러주었다. 그것이 독비준의 행동을 바꾼 것인가?
그렇다면.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성하 도인의 죽음은 이성민에게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화산파는 장문인을 살해한 독비준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독비준이 화산을 탈출한 순간부터, 화산은 독비준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규정지었다. 이미 화산파는 드리무어의 많은 길드에게 협력 요청을 보내 천라지망을 독비준을 맹추격 중이었다.
이성민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성민이 살아오면서 그렇게 크게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민은 그 감정이 낯설다고 하여 주저할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성민은 달리고 있었다.
여관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독비준은 화산을 넘어 북쪽으로 오르고 있다고 했다. 습격하여 성하 도인을 살해하는 것은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독비준의 행동 또한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독비준이 북쪽으로 향하는 것에는 그곳에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단지. 화산을 피해 도망치고 있는 것 뿐이다.
전력을 다해 펼친 경공은 이성민을 단숨에 북쪽 성문을 지나게 만들었다. 이성민은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르는 것 같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책임감.
낯선 감정이다. 용병이었을 적의 이성민에게, 책임감이라는 것은 ‘돈’이었다. 의뢰를 받아놓고서 수행하지 않는다면 의뢰금을 내뱉어야 한다. 당시의 이성민이 가지고 있던 책임감이라는 것은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죽어서, 되돌아 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은.
여태까지 책임감이라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있던가?
없다. 모르겠다. 자각한 적도 없다. 책임을 져야 할 상황에 처했던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이성민이 살아 온 8년은 자기 자신을 위한, 그런 시간이었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위지호연과의 재회만을 멀찍이 두었고, 그 사이에 ‘해야 할 일들’을 끼워 넣어 살아왔다.
그런 삶에서 책임감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사실 지금의 일도 이성민이 정말로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일인 것인지, 그에 대해서는 이성민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와 검귀가 만났기에 죽지 않아야 할 성하 도인이 죽었다.
‘나’라는 존재가 본래의 흐름을 어그러트리고 있다.
지금만이 아니다. 이성민의 머릿속에 여태까지 자신이 보낸 8년이 스쳤다. 이성민의 존재로 인해 본래의 삶과 벗어난 이들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책임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래. 이성민은 이기적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손에 닿는. 그런 이들만 생각할 뿐이다.
그러니 검귀에게 책임감을 느낀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에 책임감을 느낀다. 동시에, 검귀에게 묻고 싶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멈추시오.”
화산의 근처까지 달려 온 이성민의 앞을 다섯 명의 도사가 가로막았다. 모두가 매화의 문양을 옷에 새긴 화산의 도사들이었다.
“이 앞으로는 갈 수 없소.”
“…어째서입니까?”
“이 앞에는 천라지망이 펼쳐질 예정이오. 그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괜한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다른 길을 찾아 주시오.”
“…검귀를 쫓는 겁니까?”
이성민이 물었다. 그 말에 말을 하던 도사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렇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떤 행동이 정답인 것일까. 이성민은 말없이 도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이성민이 물러서지 않는 것을 보고서 허리춤의 검을 잡았다.
이대로 물러서야 하는가. 검귀를 만난다고 해서… 이성민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어가 있을까. 아니. 애초에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가. 검귀를 구하고 싶은 건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검귀는 성하 도인을 죽였다. 화산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빚을 갚으려 할 것이다. 검귀의 행동을 두둔할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비켜 주십시오.”
이성민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이성민을 가로 막고 있던 도사들 중 하나가 검을 뽑았다. 스릉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뽑힌 검이 창백한 빛을 발했다. 그를 시작으로 다섯 명의 도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면서 등 뒤에 비껴 메고 있던 창을 잡았다.
도사들이 달려 들었다. 가장 빠르게 접근한 것은 중앙의 도사였다. 이성민은 화산의 검을 겪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을 모르지는 않았다. 소림의 칠십이종절예를 익힌 지학은 검술 또한 달인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고, 지난 4년 간 이성민은 지학과 매일매일 쉼없이 비무를 해왔다.
그렇기에 ‘검’은 안다. 검이라는 무기가 어떻게 쓰이는 것인지. 검법이라는 것은 검이라는 무기를 보다 다양하고 위력적이게 쓰이게 하는 것이다. 결국 검이라는 무기를 완전히 초월하지는 못한다.
횡으로 다가 온 검을 란의 수법으로 거두어 낸다. 살초를 쓸 수는 없다. 그렇게 하였다가는 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이성민은 구천무극창을 쓰지 않았다.
사실 쓸 필요도 없었다.
이성민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다섯. 그들은 모두가 화산의 검법을 정통으로 익힌 제자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뛰어난 천재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성민보다 나이가 조금 어렸고, 실력은 훨씬 뒤떨어졌다. 사방에서 휘둘러지는 검의 소리를 듣는다. 눈으로 볼 것도 없이 이성민은 공격을 느끼고 있었다.
제압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이성민과는 다르게, 이성민을 공격하는 도사들은 이성민을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성민은 이렇게 되어버린 상황에 착잡함을 느꼈다. 어쩌면, 만약 나에게 그 ‘가호’가 남아 있었더라면. 저들을 설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버린다. 그런 것에 기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불영 대사에게 부탁해서 가호를 없앴던 것 아닌가. 이성민의 손 안에서 창이 빙글 돌았다. 창두가 아닌 창준으로. 이성민이 휘두른 창은 묵직한 둔기가 되어 지척에 있던 도사의 어깨를 때렸다. 도사는 비명과 함께 검을 놓았고. 이성민은 그 즉시 공격의 대상을 바꾸었다. 파바박! 빠르게 뻗어져 나간 창두가 도사들이 쥐고 있던 검을 떨어 트렸다.
“그만!”
버?럭 지른 외침이 이성민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이성민은 흠칫 놀라 발을 뒤로 끌면서도 육감의 경고에 따라 창을 들어 올렸다.
꽈아앙! 손아귀가 얼얼해질 정도의 충격과 함께, 이성민의 몸이 크게 뒤로 밀려났다. 난입과 동시에 이성민에게 검을 찌른 것은 짧은 수염을 가진 중년인이었다. 막아내는 것 자체는 좋았으나, 이성민은 내장이 진탕되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난입한 중년의 도사는 이성민보다 반 수 정도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민은 낭패다 싶어서 중년 도사를 노려 보았다. 이성민을 물러서게 한 도사는 쓰러져 있는 어린 도사들을 힐긋 보았다.
“…그대는 누구시오?”
이성민의 실력을 인정한 것인지, 도사는 이성민에게 어느 정도 말을 높여 주었다. 사실 실력의 인정 뿐만이 아니라, 이성민에게 쓰러진 도사들이 거의 상처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이성민님?”
의외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중년 도사의 뒤쪽에 이성민이 알고 있는 얼굴이 서있었다.
김종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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