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95)
이성민은 살인을 즐기지 않는다.
그것은 전생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타인을 죽이는 것에 유쾌함을 느낀 적은 없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살인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살인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성민에게는 당연했다.
하지만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날카로운 살의를 느낀다. 마을의 모두가 이성민을 적으로 인식하고 죽이려 들고 있었다. 이성민은 나자빠진 쿠로마루의 시체를 힐긋 보았다. 구해 줄 의리가 없기 때문에 내버려 두었다. 구해줬어야 했나? 이성민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기에는 늦었다. 그는 호신강기를 몸에 두르고서 성큼 앞으로 걸었다.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러 호신강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성민이 절정 고수였던 시절에도 무리하여 강기는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때 사용할 수 있던 강기와 지금의 이성민이 펼치는 강기는 질적으로나 효율적으로나 비교가 안 된다.
“들립니까?”
이성민은 목소리에 공력을 담아 물었다. 커다란 목소리가 멀리까지 울린다. 덮쳐오는 살의의 방향은 변하지 않았으나, 이성민은 연이은 공격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아주 무식한 야만인들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나는 당신들과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가급적이면 대화로 풀어내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이성민이 소리를 내어 말했다. 잠시 뒤 쏘아지던 살기가 누그러들었다. 그리곤 한 사내가 목책을 뛰어넘어 이성민의 앞으로 떨어졌다.
‘고수야.’
이성민은 사내의 다듬어진 기도를 보고서 그렇게 판단했다. 반박귀진을 완성한 초절정고수다. 다만 반로환동까지 한 초월적인 무인은 아닌 듯 싶었다. 중년의 사내는 이성민의 얼굴을 들여 보면서 물었다.
“자네는 누구인가?”
“이성민이라고 합니다.”
포권을 취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이성민은 살짝 목례하면서 대답했다. 사내는 이성민의 눈동자를 들여보며 이성민의 경지를 엿보려 들었다.
“자네는 기묘하군. 기와 체가 이미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서 있는데, 심은 더 먼 곳을 보고 있는 듯 해.”
사내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성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서 사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카즈야.”
카즈야가 대답했다. 기억에 있는 이름이었다. 전생의 기억이 아니라, 바로 방금 전에 쿠로마루에게 들었던 일족의 가주를 맡은 자의 이름이 카즈야였다.
“말했던 것처럼, 나는 당신들과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야 고맙지. 자네가 전력으로 덤빈다면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거야. 많지도 않은 일족인데 더 이상 머릿수를 줄이고 싶지 않군.”
“쿠로마루는 왜 죽인 겁니까?”
“처벌은 필요한 법이니까.”
카즈야가 표정을 바꾸지 않고서 대답했다.
“노부히로 장로는 죽었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실력의 차이를 알았을 텐데, 그를 무시하고 싸움을 걸었으니 스스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해. 하지만 눈앞에서 장로의 죽음을 보고도 자결하지 않고, 저항하지도 않고. 원수를 마을로 직접 데리고 온 어린 녀석은 처벌해야 하는 것이야.”
카즈야는 쿠로마루의 시체를 내려 보면서 말했다. 그것이 이 폐쇄된 마을에서 우선으로 세우는 법도인 모양이었다.
“자네를 마을의 손님으로 받도록 하지.”
카즈야가 손을 뻗었다. 이성민은 멀뚱히 그 손을 보다가, 카즈야의 손을 맞잡았다.
“들어오게.”
일족의 가주인 카즈야와 동행하여 마을에 들어가니 아무도 이성민을 제지하지 않았다. 이성민은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우선 카즈야를 따라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는 중에 본 마을의 집들은 대부
분이 초라하여 빈궁해 보였다.
“카즈야님 정도의 고수라면 밖에서도 대접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자네는 나보다 어려. 그러면서 나보다 강하지. 나는 넓은 세상에 절망하고 싶지 않네. 그래서 이 좁은 숲에서 살아가는 것이야.”
카즈야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카즈야가 이성민을 안내하는 것은 일본식의 가옥이었다. 이성민은 카즈야가 말한, 넓은 세상이라는 것에 대해 잠깐 동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품은 생각에 대해 카즈야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엔비루스를 알고 있습니까?”
카즈야와 함께 들어 온 방에서, 이성민은 카즈야와 마주 앉았다. 대뜸 한 질문에 카즈야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알고 있지.”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미 두 달 쯤 전에 숲을 떠났네.”
카즈야가 대답했다. 그 말에 이성민은 미간을 찡그렸다. 에레브레사를 통해 구입한 정보대로 엔비루스의 흔적은 쫓아 왔지만, 이곳에서 엔비루스와 쉽게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모르네.”
문제는 이것이다. 기껏 이곳까지 왔는데, 엔비루스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면 이후에 이성민이 엔비루스를 추적하는 것에 문제가 생긴다. 에레브리사를 통해 구입한 정보에서 엔비루스의 최신 위치는 바로 이곳, 잠자는 숲이다.
“…엔비루스는 이 숲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자네는 왜 엔비루스를 쫓고 있는 것인가?”
질문에서 질문으로. 되묻는 말에 이성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카즈야를 노려 보았다. 그 시선에 카즈야가 낮은 웃음 소리를 냈다.
“너무 그렇게 보지는 말게.”
“…만나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 이유인데.”
“대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자네는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궁금한 것만 질문하여 대답해 달라고 하는 군.”
이성민은 말없이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런 이성민을 물끄러미 보던 카즈야가 닫고 있던 입을 벌렸다.
“엔비루스가 말한 손님이 자네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예?”
“엔비루스가 떠나기 전에 나에게 말했었지. 앞으로 언젠가, 누군가가 이 숲을 찾아와 엔비루스에 대해 물을 것이라고. 그때가 되면…”
카즈야가 앉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빨리 끝내고 싶은데. 바로 움직여도 되겠는가?”
“상관없습니다.”
이성민은 머리를 끄덕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카즈야가 이성민을 데리고 간 곳은 마을의 바깥이었다. 목책을 지난 카즈야는 뒤에서 따라오는 이성민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일족의 비원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나?”
“묻는다고 해서 알려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정확히 말하자면 알려줄 수 없는 거야. 우리는 비원을 추구한다고 말하면서, 그 비원이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도 모르고 있거든.”
이성민은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카즈야의 뒤통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서… 왜 이 숲에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까?”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 우리의 혼은 이, 잠자는 숲에 얽매여 있네. 이 숲에서 태어난 이들은 절대로 이 숲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저주입니까?”
“그것과 비슷해. 이미 우리 일족은 이 숲에서 몇 세대를 살았네. 거듭된 근친교배로 육체는 나약해졌지. 이어져 온 일족의 비기와 무공은 희미해져서 제대로 전수조차 되지 않아. 조만간 우리 일족은 자멸할 걸세.”
그에 대해 말하는 카즈야의 목소리는 오히려 평온했다. 마치 그런 결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일족의 비원이 무엇인지는 가주인 나도 몰라. 어쩌면 처음부터 비원 같은 것은 없었을 지도 모르지. 후대에 태어날 어린 것들을 위해, 억지로 목적의식을 부여하기 위해 비원이라는 단어를 쓴 것일지도.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 일족은 이 숲에서 나갈 수 없고, 이 숲의 끝에 있는 무언가를 수호하고 있다는 것일세.”
“…수호…?”
“아니. 이것을 수호라고 해야 하나?”
카즈야는 스스로도 알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귀명은 나약한 자들을 미치게 해. 일신의 무위가 절정의 벽을 넘지 못했다면 이 숲에서 살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하지. 어린 것들은 귀명에 저항하기 위해 약을 복용하며 듣는 것을 모르게 되었어. 숲이 깊어질수록 귀명은 더 강해지네. 자네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후후! 초절정 고수라고 하여도 귀명에 저항하는 것은 힘들어. 이것은 정신에 작용하는 공격이니까. 엔비루스와는 약속이 있기에 자네를 안내 해 주는 것이지만… 자네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카즈야의 걸음이 멈추었다.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얽히고 얽힌 나무들이 거대한 벽을 만들고 있었고, 그 벽은 거대한 숲을 반으로 가르고 있었다. 그를 물끄러미 보던 이성민은 카즈야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이건 뭡니까?”
“벽이지. 보면 모르나?”
“벽이라는 것은 나도 압니다.”
“일족의 가주의 동의가 없다면 이 벽을 지날 수 없어. 한 번 시험해 보겠나?”
카즈야가 이성민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카즈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악동처럼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만약 자네가 이 벽을 강제로 뚫는 것에 성공한다면…”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음. 생각해 보니 줄 수 있는 것이 없군. 시험 삼아 해보는 것이 어떤가?”
노골적으로 권하는 말에 이성민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는 등에 메고 있던 창을 들어 카즈야를 지나쳤다. 이성민이 창을 들어올렸을 때, 자색의 강기가 창을 휘감았다.
꽈아앙! 창을 앞으로 찌르자 거대한 폭음이 터졌다. 하지만 나무의 벽은 조금도 부서지지 않고 건재했다. 전력은 아니었어도 나름의 힘을 실었는데도 결과가 이렇다. 이성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무의 벽을 보았다.
“그렇지? 힘으로는 뚫리지 않아. 엔비루스도 뚫지 못했지.”
“그런데 어떻게 들어간 겁니까?”
“내가 들여보내 줬어. 들여보내라는 말을 들었으니까.”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카즈야가 이성민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나무의 벽을 향해 손을 뻗었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자그마한 소리는 알 수 없는 언어로 된 주문이었다.
얽혀 있던 나무의 벽이 사라졌다.
“나는 이 이상 들어갈 수 없네.”
카즈야가 뒷짐을 지고서 몸을 돌렸다. 이성민은 마을로 돌아가는 카즈야의 등을 잠시 동안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렸다. 벽이 사라진 곳에는 구불구불한 길이 있었다. 이성민은 잠시 그 길을 보다가 발을 앞으로 뻗었다.
아.
아아.
아아아아.
귓가에 소리가 울린다. 귀명. 잠자는 숲에 들어서는 자들의 의식을 잃게 만드는 그 알 수 없는 소리가 더, 더, 더 커져서 이성민의 정신을 두드리고 있었다. 앞으로 향하는 걸음의 수가 많아질수록 귀명은 더욱 커졌다. 단순히 의식을 잃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신을 미치게 만드는 소리였다. 그 지독한 불길함이 이성민의 정신을 잡고서 미친 듯이 흔들어대고 있었다.
“후욱.”
이성민은 숨을 삼켰다. 견디기 힘든 것은 아니었다. 단지, 견디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이것은 강력한 정신공격이었다. 초절정고수라고 해도 귀명에 저항하는 것은 힘들다. 카즈야가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성민은 뼈저리게 느꼈다. 심, 기, 체가 초절의 경지에 오른 고수라고 하여도 이 지독한 귀명에 저항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성민은 아니었다. 정신 세계에서 보낸 2100년은 이성민의 정신을 몇 번이나 무너트렸고 재구축시켰다. 그 과정에서 이성민은 광기를 얻었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광기를 얻은 정신은 이전보다 수십 수백 배 견고해졌다.
무너지지 않는다. 계속해서 걷는다. 짜증을 느끼면서도 폭주하지는 않는다. 구불구불한 길은 외길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상하게도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희뿌연 안개만이 진하게 퍼져 있었다.
“헷갈렸음이라.”
심드렁한 목소리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이성민은 걸음을 멈추었다.
“인과율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 그것이 비틀린 존재는 흔하지 않지. 그래서 헷갈린 것이다. 얼마 전에 찾아 온 놈도 인과율이 비틀려진 놈이라, 착각하여 안에 들이고 말았어.”
안개가 날뛴다. 이성민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앞으로 향했다.
“대답하라. 인과율이 비틀어진 존재여. 너는 되돌아 온 자인가?”
목소리가 묻는다. 이성민은 계속해서 걸었다. 들끓던 안개 속에서 불빛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수백 마리의 반딧불이가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이성민의 걸음이 멈추었다. 거대한 바위 위에 시커먼 불길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말입니까?”
이성민이 물었다. 그 말에 바위 위에서 흔들리던 불길이 크게 부풀었다.
“되돌아 온 자인가 물었다.”
“되돌아 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너는 죽음을 알고 있느냐?”
불꽃이 묻는다. 이성민이 대답하려는 순간, 공간에 파직하고 전류가 흘렀다. 그를 보면서 불꽃이 껄껄거리며 웃는 소리를 냈다.
“시답잖은 수작질. 내가 이리 몰락하지만 않았어도 저따위 수작질을 부리지 않게 두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제 주인님은 이 숲에서 벗어나지 못하셨겠지요.”
흐르던 전류가 뭉쳐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것은 로브를 뒤집어 쓴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이성민은 눈을 끔벅거리며 소녀를 보다가 질문했다.
“당신은 또 누구입니까?”
“엔비루스님의 사역마예요.”
실체는 아니었다. 이 공간에 새겨 놓은 마법을 통해 의식만을 이곳에 전이시켰을 뿐이다. 엔비루스의 사역마를 향해 불꽃이 불쾌하다는 듯 내뱉었다.
“짜증나는 군. 단 둘이 대화도 하지 못하게 만들다니.”
“당신은 사악한 존재니까요.”
“으하하! 한낱 장난감 인형 주제에 나를 판단하느냐? 네 주인조차 나에 대해 판단할 수 없을 텐데!”
불꽃이 웃음을 터트렸다. 불꽃의 목소리가 커졌고, 안개 속의 불빛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다.
“우선 내가 좀 알아먹게 해주면 안 됩니까?”
보다 못한 이성민이 그렇게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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