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96)
그 말에 불꽃의 웃음이 뚝 멈추었다. 불꽃을 노려보던 사역마도 머리를 돌려 이성민을 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뒤집어 쓰고 있던 로브를 뒤로 넘겼다.
“수인獸人?”
이성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중얼거렸다. 검은 머리카락 위에 삐죽하고 튀어나온 것은 고양이의 귀였다. 이성민의 말에 사역마가 호박색 눈을 가늘게 뜨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루비아라고 합니다. 주인님의 명을 받아,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 그런가? 그 빌어먹을 자식이 기다리고 있던 놈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저 녀석이 되돌아 온 자라는 말이로군.”
루비아의 말에 불꽃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불꽃이 말할 때마다 주변의 불빛이 일렁거린다. 이성민은 심드렁한 얼굴로 루비아를 보다가, 손가락을 들어 불꽃을 가리켰다.
“저건 뭡니까?”
“어린 놈의 새끼가 삿대질하는 것 보소.”
불꽃이 투덜거렸다. 진한 불쾌감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지만, 말만 그리 할 뿐 불꽃은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주변의 불빛들이 불꽃의 감정을 대변하듯이 빛을 부풀릴 뿐이었다.
“이 숲에 잠들어 있는 대요괴大妖怪의 잔재예요.”
“잔재라니. 그런 하찮은 존재는 아니지. 비록 내가 육체를 잃어 의식만이 남아 있다고는 하나, 나는 잔재 따위가 아니야.”
불꽃이 내뱉었다. ‘요괴’라는 말에 이성민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몬스터를 요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민이 아는 한 요괴와 몬스터는 큰 차이가 없었다. 결국은 인간이 아닌, 인간을 잡아 먹는 괴물일 뿐이다.
“한때는 백귀百鬼를 이끌던 요괴 두령이었지만, 지금은 육체를 잃었어요.”
이성민은 눈을 깜박거리면서 루비아의 말을 들었다. 불꽃은 불쾌한 듯 빛을 번쩍거리기는 하였으나 뭐라고 반발하지는 않았다. 이성민은 잠깐 동안 루비아와 불꽃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그래서. 당신들은 나한테 대체 뭘 말해주고 싶은 겁니까?”
이성민은 우선 루비아를 보았다.
“이렇게 묻기는 하지만, 당신들이 나한테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압니다. 엔비루스 본인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겠지만, 당신은 엔비루스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맞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기는 했지만, 당신이 궁금한 것에 대해서는 말씀 드릴 수가 없어요.”
“엔비루스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인님이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저와 함께 다닌다면, 언젠가 주인님이 찾아오실 거에요.”
루비아는 그것에 대해서는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이성민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결국 루비아도 엔비루스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는 것이니까. 이성민의 표정을 읽은 루비아가 급히 말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주인님도 약속하셨어요. 제가 어디에 있든, 언젠가 찾아오겠다고요.”
“확실한 겁니까?”
“물론이죠.”
루비아가 크게 머리를 끄덕거렸다. 이성민은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서 불꽃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허주.”
“나는 되돌아 온 자입니다. 당신은 무슨 볼 일이 있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까?”
“모른다.”
허주가 당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용은 어찌되었든 목소리가 너무 당당해서, 이성민은 되려 말문이 막혔다. 멀뚱히 보는 시선에 허주가 말을 덧붙였다.
“정말로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언젠가 네가 되돌아 온 자가 나를 찾아 올 것이고, 나는 너와 함께 이 숲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뿐이다.”
허주의 말을 듣고서 이성민은 루비아를 바라보았다. 루비아는 조금 내키지 않는 표정이기는 했지만, 이성민을 보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허주의 말은 사실이에요.”
“다를 것이 없군.”
이성민의 눈가에 짜증이 어렸다.
“여태까지 나와 만나고, 나에게 뭔가 특별함이 있다고 말한 사람들은 모두가 그랬습니다. 뭔가가 있지만, 그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해 줄 수는 없다고. 종언이며 종언의 사도가 어쩌고 하면서 대답을 회피했지요.”
“그건… 제 주인님이라면 확실하게 대답해 주실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당신의 주인인 엔비루스는 왜 나와 직접 만나지 않고, 이곳을 떠나 당신을 남긴 겁니까?”
“저도 잘 몰라요. 주인님은 바쁘신 분이니까요…”
“하!”
이성민은 기가 차서 웃음을 내뱉었다. 그는 루비아에게서 시선을 때고 허주를 보았다.
“허주. 당신이 이 숲에서 살아가는 일족들이 바라는 비원입니까?”
“숲의 일족이라. 그래. 몇 세대에 걸쳐 근친상간을 거듭하고, 그 대가로 죽어가고 있는 미련한 원숭이들을 말하는 것이냐? 나는 그들의 비원이 아니야. 그들의 비원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 그들의 존재가치는 핏줄을 이어가는 것뿐이다.”
“핏줄?”
“그 피를 가진 자 중에서 선택된 이가 가주가 되고, 가주만이 숲의 벽을 열 수 있다. 나는 그 길의 도중에 존재하고 있을 뿐.”
허주의 말대로였다. 허주가 불꽃의 형태로 존재하는 뒤편에는 구불구불한 길이 아직 끝나지 않고 이어져 있었다.
“이 숲은 뭡니까?”
“오랜 괴물들의 혼이 묶여 있는 장소지. 그 원숭이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 숲의 봉인을 지속시켜.”
그 말을 듣고서 이성민은 허주를 노려보았다. 잠깐의 생각 끝에 이성민은 허주에게 질문했다.
“나와 함께 나간다. 어떤 형태로 나간다는 겁니까? 당신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아니었습니까?”
“다 방법이 있지.”
허주가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성민은 루비아를 힐긋 보았다. 루비아는 허주를 힐긋거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에요. 제 주인님도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으셨어요.”
“돌아가겠습니다.”
이성민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뭔지도 모를 대요괴를 몸 안에 깃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성민이 빙글 몸을 돌리자 루비아가 재빨리 이성민의 곁으로 다가왔다.
“같이 가요.”
“언제까지?”
“제 주인님이 찾아 올 때까지.”
루비아가 대답했고, 이성민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숲의 안쪽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요괴의 혼이 봉인된 장소로 가봐야 뭔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으하하하!”
이성민이 루비아와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허주가 대뜸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성민이 뭔가 싶어서 머리를 돌렸을 때.
바위 위에서 일렁거리던 허주의 불꽃이 크게 부풀더니 폭발했다. 안개 속에서 흔들거리던 수백 개의 불씨들이 일제히 이성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루비아가 놀란 소리를 냈고, 이성민은 즉시 무영탈혼을 펼쳤다.
하지만 이성민이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수백 개의 불씨들이 이성민을 덮치는 것이 더 빨랐다. 몸에 닿은 불씨들에게는 그 어떤 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가 의식을 덮쳐온다. 이성민은 아랫입술을 뿌득 씹으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뭐, 뭐냐?!]의식을 덮쳐 오던 무언가가 밀려난다. 곧이어 잔뜩 당황한 허주의 목소리가 이성민의 머릿속에 울렸다.
[너…! 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정신방벽이 이리도 견고한 거냐?!]허주가 외칠 때마다 몸이 웅웅거린다. 이성민은 짚이는 것이 있어서 입고 있던 무복을 벗었다. 그러자 이성민의 곁에 있던 루비아가 놀란 소리를 내면서 홱하고 머리를 돌렸다.
“가,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루비아가 그러건 말건 이성민은 자신의 몸을 내려 보았다. 숲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셀게루스에게 미리 받아 입어 두었던 마갑이 웅웅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마갑에 옅은 붉은 색이 덧칠되어 있었다.
[이런 병신 같은… 이 허주가 인간의 의식 하나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아무리 되돌아 온 자라고 해도…!]“그건 내가 할 말인데. 이게 뭔 병신 같은 짓입니까?”
이성민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마갑을 두드렸다. 허주의 빙의가 실패한 것에는 몇 가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과거 프레스칸은 이성민을 정신을 지배하기 위해 마법을 걸었다가 실패했었다. 김종현은 그를 두고서 이성민을 수호하고 있는 가호가 프레스칸의 마법을 반사시킨 것이라고 했었다.
‘아니면 정신세계의 수행으로 내 정신력이 강해진 것일지도 모르지.’
아마 둘 중 하나인 듯싶었다. 결과적으로는 허주가 이성민의 몸에 깃드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대신에 허주의 의식은 이성민의 몸이 아닌 마갑에 깃들어 버렸다.
“그 안에 허주가 들어간 건가요?”
루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었다. 이성민은 짜증을 느끼면서 입고 있던 마갑을 벗었다. 그래도 꽤 괜찮은 갑옷이라 아끼고 있던 것인데, 허주의 개수작 때문에 입을 수 없게 되었다.
[자, 잠깐, 잠깐! 기다려!]허주가 급히 이성민을 불렀다.
[갑자기 빙의하려고 한 것은 사과하마!]“이미 해놓고서는.”
[나도 급했단 말이다! 더 이상 이상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그건 내가 어떻게 믿습니까?”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테니까…!]“맹세 하나로 퉁치려 하지 마십시오.”
[그럼… 그… 보물을 주마. 내가 예전에 모아 두었던 보물을!]그것은 조금 구미가 당겼다.
“보물이라면 어떤 보물입니까?”
[그걸 말해 줄 수는 없지.]“지금 상황파악이 잘 안되시나 본데. 되도 않는 개소리를 한다면 갑옷을 여기에 벗어두고 가겠습니다.”
[나도 내가 모은 보물이 얼마나 많은지 다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아 설명하겠느냐?!]허주가 답답하다는 듯이 외쳤다.
“허주가 뭐라고 하나요?”
루비아가 눈을 빛내면서 물었다. 딱히 숨길 이야기도 아니기에, 이성민은 루비아에게 허주가 한 이야기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러자 루비아가 오히려 놀란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허주의 보물이라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대단한 것이기는 해요. 허주가 300년 전에 가장 강력하고 유명했던 요괴 중 하나였던 것은 사실이고, 허주가 긁어모은 보물도 허주만큼 유명했었으니까요.”
[봐봐! 내 말이 맞지?!]루비아의 말에 허주가 급히 외쳤다. 이성민은 벗은 마갑을 내려 보다가 다시 입었다.
“앞으로 내가 말을 걸지 않는 한 닥치고 있으십시오. 만약 개소리를 늘어놓았다가는 벗어서 화장실 똥통에 버리고 갈 테니까.”
[이 대요괴 허주가 이런 꼴이 되다니…!]“자업자득인데 왜 한탄하고 지랄이십니까.”
이성민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무의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였는데, 나무의 벽은 길을 막고 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길이 이어진 곳은 이성민이 카즈야와 함께 왔던 입구가 아니었다.
“신기하군.”
길이 끝나면서 안개도 사라졌다. 이성민은 잠자는 숲 밖에 와 있었다. 이성민의 옆에 서있던 루비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대답했다.
“저 숲은 강력하면서도 다양한 주술로 얽힌 곳이에요. 평범한 상식으로 이해하려 들지 마시죠.”
“이해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허주가 깃든 마갑이 웅웅거리면서 몸을 떤다. 이성민이 해둔 말이 있어서 목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숲 밖으로 나오게 되어 감격한 모양이었다. 이성민은 허주가 갑옷에 깃들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허주의 보물이라는 것을 얻게 될 때까지는 동행할 생각이었다.
“정말로 날 따라다닐 겁니까?”
허주는 그렇다 치고. 이성민은 루비아를 보며 물었다. 그 질문에 루비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까도 말했잖아요? 주인님이 저를 찾아 올 때까지, 저는 당신과 함께 다닐 거에요.”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아도?”
“당신은 제 주인님과 만나고 싶은 것 아니었나요? 저를 해하거나 버리고 간다면, 주인님과 당신이 만나게 될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루비아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내가 어디로 갈지 알고 나와 함께 다니겠다는 겁니까?”
“어디로 가려는 건데요?”
“소천마와 만나러 갈 겁니다.”
이성민이 대답했다. 그 말에 루비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소천마… 소천마라면. 그… 위지호연? 그 괴물이랑은 왜…?”
“만나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이성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걷기 시작했다. 머뭇거리던 루비아가 정신을 차리고서 이성민의 뒤를 쫓아왔다.
“그냥, 어디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쉬면서 제 주인님이 오는 것을 기다리면 안 될까요?”
“댁의 주인이 바빠서 싸돌아디는 것처럼, 나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바쁩니다.”
이성민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 대답에 루비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 가기 싫은데…”
“그럼 억지로 데려 가겠습니다. 당신과 있어야 엔비루스를 만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이성민은 손을 들어 올렸다. 길게 세운 손가락은 루비아의 대답 여하에 따라 망설임없이 혈도를 점하겠다는 굳건한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루비아는 그것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냥 따라 갈 게요.”
루비아가 귀를 축 늘어트리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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