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 Return RAW novel - Chapter (126)
작가귀환-126화(126/250)
콰앙.
문이 거칠게 닫혔다. 방으로 돌아온 그가 피곤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6번에게 실망했지만, 그에겐 아직 5번이 있었다.
“…….”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도 5번은 미친 듯이 소설을 쓰고 있었다. 어떻게든 포인트를 따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화면에서도 느껴졌는데, 다른 작가들이 저놈 반만큼만 해 줘도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몰입도를 더 높일 방법이 있나?’
창작이 얼마나 어려운진 알겠다. 하지만 글밥 먹으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인풋이 부족한 3번을 제외하면 모두가 작가로선 기본을 갖췄기에 여기서 무얼 더 해야 생산적일지 고민했다.
‘식사권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인간의 기본 욕구를 떠올려 보자.
수면욕, 성욕, 식욕…….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먹고 싸고 자는 건데, 세 가지 외에 어떤 떡밥을 줘야 놈들이 그걸 물고 펄떡펄떡 뛸지.
‘5번처럼 소유욕이 강한 건 특이 케이스니까 패스하고.’
집필이 우선이니 지나치게 시간을 잡아먹는 취미 활동도 안 된다. 가령 기타 같은 거 넣어 줬다가 온종일 기타만 치면 곤란하다는 거다.
고민하는데 5번이 잠깐 쉬려는지 채팅을 걸어왔다.
【시스템. 식사권을 쓰겠다. 콜라, 1.5리터짜리로 넣어라.】
【콜라만으로 되겠습니까?】
【그래, 갈증 난다.】
【식사권으로 일주일 특식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콜라를 한 박스 넣으면 되잖아. 멍청한 자식! 내가 언제까지 일일이 설명해야 하나?】
울컥, 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콜라로 식사권을 대신할 수 있다면 그에게도 편했다.
‘콜라 한 박스.’
메모해 뒀다. 내일 마트에 들러서 구매하자.
“하, 성질 다 죽었네.”
그는 어느 시점부터 5번을 ‘오타쿠’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저놈은 상식 밖 인간이라서 이쪽이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하고만 살 그가 아니었다.
찰칵.
구석에 쌓아 둔 물건들의 사진을 찍어서 놈에게 전송했다.
그러면서 놈을 자극했다.
【이번 주에도 2등이었습니다. 이것들이 필요한 게 아닙니까?】
【너! 우리 애들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먼지가 쌓였잖아! 매일 닦아 줘도 모자랄 판에 방치냐!】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많은 물건을 장기간 보관할 수 없습니다. 이것들이 그렇게 소중하다면, 빨리 쟁취하세요.】
【코노야로! 네놈!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냐!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이노오오오옴!】
이 오타쿠는 진심인 걸까? 표정을 보니까 진짜로 분노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딱 기다려라, 시스템! 다음 주는 다를 거니까! 내 빌드업을 듬뿍 맛봐라! 후련하게 싸 주마! 네놈 가슴 깊은 곳에 말이지. 후후후.】
“…….”
묘하게 기분이 더러워져서 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자극은 된 것 같으니까 알아서 잘할 거다. 게다가 저 말이 틀린 게 아니라 놈의 이번 에피소드가 정말로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가 이번에는 1번에게 채팅했다.
【언제까지 고민만 할 겁니까? 영원히 여기서 살 생각입니까? 똑같은 밥 먹고 똑같은 소설 쓰면서 그렇게?】
6번 때문에 화가 나서인지 오늘은 다들 패 줘야겠다.
【기존에 쓰던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고리타분한 그 생각을 깨지 못하면, 절대 1등을 할 수 없을 겁니다.】
【나도 노력 중이라고.】
【노력만 하지 말고 남을 보고 배우라고요. 1번 작가님은 3번 작가보다도 고지식합니다.】
【3번하고 비교하진 말자. 넘지 말아야 할 선이란 게 있어.】
【같은 취급 당하기 싫다면 시궁창에서 기어 나와야죠.】
【알고 있다고! 그만해! 나도 할 거니까!】
마침 3번이 갑자기 느낌이 왔는지 보던 소설을 놔 버리고 집필을 시작했다.
그는 멍하니 3번 모니터를 봤다. 이상하게 저놈이 쓰는 스토리는 자꾸만 보게 된다.
【군대에서 축구한 썰】
‘저게 제목인가?’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스토리였다. 군대 얘기도 지겨운데 거기에 축구까지 더해 버렸다.
그런데도 이 기괴한 혼종 이야기에 관심이 가는 건 왜일까?
【아침에 똥을 싸러 화장실에 갔는데 선임이 자살해 있었다. 폐급이라서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짬당하던 병장이었는데, 막상 죽은 걸 보니까 불쌍했다. 근데 끼요오오오오!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내 안에 뭔가가 훅 들어왔다. 그러더니 어떤 음성이 뇌를 강타했다.
-미션을 수행하지 못하면 죽음.
저 병장도 미션이란 걸 못 해서 죽은 것 같았다. 자살이 아니었던 거다.
-첫 번째 미션 : 사단 대회에서 우승하라.
청천벽력 같은 얘기였다. 그는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몸으로 하는 건 뭐든 못하는 타입이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사단 대회는 ‘축구’였다. 저 병장도 우리 부대 대표로 한창 훈련 중이었다.】
“이놈은 맨날 이런 것만 생각하고 사는 건가?”
아무튼 더 봤다.
【내가 속한 56사단은 굉장히 규모가 컸다. 소속 부대만 100여 개가 넘었고, 그 100여 개의 부대들이 매년 축구로 경합을 벌인다. 우리 부대가 올해 예선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도 죽은 병장 놈 덕분이었는데, 이젠 내가 그 뒤를 이어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후임들에게 짬당할 정도로 병신이었지만, 축구 할 땐 눈빛이 달라지던 사람. 이제 그 이유를 알겠다. 목숨 걸고 뛰었으니까 된 거다. 나도 훈련해야 했다. 하지만 마냥 축구만 하게 놔두질 않았다. 일과라는 게 있었고 나는 일이 존나게 많은 일병이었기에 사방에서 찾아 댔다. 그래도 죽긴 싫어서 틈이 나면 무조건 연습했다. 이대로라면 병장 놈 대신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가는 것도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흐음, 조금 늘었나?”
저번에 떡볶이 어쩌고였다면 벌써 끝이 날 각이 나왔어야 하는데, 오늘 건 호흡이 길다.
【초등학교 때 발야구 정도만 해 본 게 전부인 나였기에 드리블부터 익혀야 했다. 그냥 공을 차고 달리는 게 이렇게 어렵다니! 그래도 했다. 또 하고 더 했다. 일주일쯤 지났나?
-축하합니다! 근성 포인트가 일정 수치까지 쌓였습니다.
-체력이 +1 늘었습니다.
오오오! 능력치가 올랐다! 죽으란 법은 없는지 미션을 수행할 수 있는 체력이 늘어났다. 이후로도 킥력, 주력, 순발력 같은 것들이 소소하게 올랐고.
-매의 눈 : 필드를 멀리서 관조할 수 있다.
필살기도 생겼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우리 부대 대표에 뽑혔고 사단 대회 나가서 우승했다. 마침 사단장 딸이 결승전을 보러 왔다가 내게 반해서 결혼했다. 이후로 나는 사회에 나와서 국가 대표가 되어 승승장구했고, 애를 열한 명 낳아서 내 자식들로만 한 팀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서 나는 감독으로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잘나가다가 흙을 뿌리네.”
그는 ‘우리 부대 대표에 뽑혔고’까지만 복사해서 1번 작가에게 보내 줬다. 뒤는 볼 것도 없었다. 애를 열한 명 낳아? 전부 아들만 낳을 확률을 알고 있긴 한 건가?
【이런 생각, 해 보긴 하셨습니까?】
【……3번하고 비교하지 말랬는데.】
【작품만 평가하세요. 이 축구, 어때요? 재미있습니까?】
【내가 쓰면 더 잘 쓸 수 있어.】
【그럼 쓰세요. 왜 못 합니까?】
자존심이 상했는지 1번 작가는 꾹 다문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이 스토리, 왠지 잘만 쓰면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그걸 1번 작가도 느꼈는지 더는 채팅을 하지 않았다.
‘군대에서 축구한 썰이라…….’
장르가 스포츠이긴 해도 군대 얘기랑 교묘하게 잘 섞으면 남자들에게 흥미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사단 대회로 한정해 버리면 사회에선 주인공이 아무리 성장해도 잘 모를 수밖에 없다.
우승하고 전역하면? 남성향에서 흔히 쓰는 먼치킨이다.
‘반대로 군대에서 아무리 잘했어도 밖에서 프로가 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지.’
그걸 가능케 하는 게 또 재미 포인트겠다.
3번 작가가 거기까지 생각한 건 아니겠지만 이 스토리엔 살릴 수 있는 기점이 많았다.
‘이걸로 1번이 각성해 주면…….’
5번의 아포칼립스를 이을 작품이 탄생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그가 다시 3번의 소설을 봤다. 어떤 것을 추가하면 좋을지 생각하면서.
*
*
*
“어때?”
“재밌어요!”
작가에겐 최고의 찬사였다. 그러나 피드백은 좀 더 디테일해야 한다.
“어렵지 않아?”
“전혀요.”
오늘 ‘서자의 반지’ 10화까지의 초고를 예진에게 보여 줬다.
그간 지리산 엘프를 쓰며 틈틈이 도토리처럼 비축한 건데, 아직 초고라서 고칠 부분이 많았지만 여자가 봐도 좋을지가 궁금했다.
옆엔 진성이와 진국이도 있었다. 글을 읽는 속도가 다르기에 두 녀석은 아직 끝까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방해하기 싫어서 예진과 좀 더 기다렸다.
“후우…….”
진성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옛날 생각이 나서 손이 떨리는데요?”
“그래?”
“형님 소설 중에 최곱니다.”
“내 소설 뭐뭐 봤는데?”
“곤륜방생이랑 무한환장 이후론 바빠서 못 봤지만, 아무튼 최곱니다.”
“…….”
군대 얘기라 그런지 무조건 좋은가 보다. 진성이가 10화까지 본 것도 대단하다면 대단했기에 진국이 다 보길 기다렸다.
“오! 더 없어요?”
“어, 거기까지야.”
“이야, 좋네요! 좋아!”
두 사내는 군 시절 향수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추억 삼매경에 들어갔다.
“형님, 그 더덕밭 멧돼지 있지 않습니까?”
“음, 그놈을 못 잡고 전역한 게 가장 아쉬웠지.”
“그러니까요! 이 소설 주인공 같은 능력이 있었으면, 그놈도 잡을 수 있었을 건데 말입니다.”
당최 뭔 추억을 떠올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예진에게 말했다.
“호흡은 어땠어?”
“좋아요! 특히 재벌집 서자란 설정이 흥미진진해요. 근데 군대에선 진짜 이래요? 막 시키면 다 해요?”
나 포함 남자 셋이 동시에 대답했다.
“까라면 까지.”
“이것보다 훨씬 심해.”
“당연하죠! 군대니까!”
우릴 보며 풋, 웃은 예진이 다소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변했다.
“그런데 군대 얘기가 웹소설에서 성공한 적이 있어요?”
“없지.”
나도 이게 마음에 걸렸다.
옆에서 진성이가 버럭 외쳤다.
“아니, 왜 없어요? 군대 얘기가 얼마나 재미있는데!”
너는 웹소설을 안 보잖아. 더 재미있는 거 많아, 진성아.
“맞죠!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곳이 군대인데요!”
응, 그건 아니란다, 진국아.
두 녀석을 깔끔하게 무시해 주며 예진에게 말했다.
“지리산 엘프도 거의 다 써서 이제 슬슬 연재해 볼까 해. 반응 보면, 더 이어 갈지 말지 결정이 나겠지.”
완결까지 가려면 6개월은 더 연재되겠지만, 나는 4월 안에 비축분이 마무리가 된다. 공백 기간을 만들지 않으려면 다른 작품도 슬슬 무료에 넣을 때가 됐다.
“‘파혼이지만 괜찮아’부터 쓰시는 거 아니었어요?”
“웹툰 나오려면 3개월은 더 필요하다며. 그 3개월이면 한 작품 더 할 수 있어.”
“하긴 대표님 속도면 그렇긴 해요. 그런데 군대 얘기라서 로맨스 요소 넣을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지 않나요? 히로인 없이 끝까지 가요?”
“나올 거야. 군인들만 상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종교 활동 시간에 피아노 치는 연대장 딸이라든지 위문공연 온 아이돌이라든지. 할 건 많다.
“에엑? 그게 말이 돼요?”
내가 몇 가지 예시를 들어 주자 예진이 웃었는데, 원래 말이 안 되니까 재미있는 거다. 그걸 잘 설득하는 게 내 일이고.
“일단 해 보자. 반응은 며칠이면 나올 테니까.”
모험이었다. 군대를 소재로 웹소설을 쓰는 미친놈은 나밖에 없었기에, 독자가 어떤 판단을 하는지 두고 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