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 Return RAW novel - Chapter (41)
작가귀환-41화(41/250)
쟤한텐 몇 년 내내 라면이란 말을 100번 넘게 들어왔다. 그런데 단연코 오늘처럼 저 말이 슬펐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꼭 그래야만 했어?’
그런데도 대들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입술을 꼭 깨물 때였다.
“친구분들이세요?”
예진 이사가 말했다. 그 말투가 너무도 따듯해서 도림은 예진을 바라보았다.
“작가님, 아는 분들이신 거예요?”
“……그. 학교에서…….”
“아, 그러셨구나.”
생긋 웃은 예진 이사가 여자애들에게 다가갔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다들 멍하니 바라만 봤다.
“저희 작가님이 중요한 미팅 중인데,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하? 그쪽이 뭔데 이래라저래라인데요?”
“별꼴이네? 야! 신도림! 뭘 보고만 있는데? 라면이랑 우유 가져오라고!”
“누가 작가? 신도림 쟤가?”
셋이나 되니 기죽을 필요도 없고 술도 마셨다.
하아.
예진 이사의 한숨이 나왔다. 양쪽 허리에 손을 얹더니 다리 폭을 조금 벌렸다.
“저는 회사 업무차 중요한 계약을 위해 여기까지 왔고 여러분이 그걸 방해하시면 서로 피곤해질 것 같은데요. 용무가 있으시면 나중에 하시죠? 저희 작가님도 난처한 상황 같은데요.”
또박또박 말하는 예진 이사의 말투는 매우 사무적이었으며 위압감까지 느껴졌다. 아까 도림에게 보이던 훈풍은 온데간데없었다.
“허얼? 뭐래?”
“보자 보자 하니까!”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여자애들이 죄다 일어났다. 하지만 예진 이사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저대로 치고받고 싸워도 무표정으로 이겨 버릴 것 같았다.
“계속 이러시면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요. 경찰을 부를까요? 변호사를 부를까요? 전자는 형사고 후자는 민사로 진행될 것 같은데.”
예진 이사가 도림을 돌아보았다.
“작가님, 이분들과 더 할 말 없으시죠?”
“……그, 그게.”
도림이 머뭇대자 예진 이사가 살갑게 눈웃음치며 그녀에게 말했다.
“앞으로 작가님은 저희 회사 소속이 되실 테니 저희가 보호해 드릴 의무가 있습니다.”
출판사에 그런 의무가 있다고?
“작가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지금 이분들과 하실 말씀이 더 남았나요?”
도림이 몇 년 동안 이렇게 큰 목소리로 반응해 본 적이 있었나?
“아니요! 없어요!”
외치고도 흠칫 놀랐다.
이때 냉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여자애들을 보며 예진 이사가 말했다.
“경찰? 변호사? 참고로 저희 대표님이 여기까지 오시느라 든 시간과 비용, 정신적 피해 보상까지 생각하면,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액수보다는 훨씬 높을 거예요.”
같은 편이 아니었으면 참으로 얄미울 수도 있었겠다 싶다. 심지어 메모리 작가가 옆에서 거들었다.
“으음……. 내가 워낙 심약한 편이라 정신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면 한……두 달 글을 못 쓸 것 같은데.”
“두 달이면 3억 이상 손실이 발생하시겠네요.”
“우리 작가님도 트라우마 때문에 글이 망가질 수 있잖아. 그건 입증이 되나?”
“변호사님 오시면 여쭤볼게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대화가 오고 갔다.
“…….”
“…….”
“…….”
얼마나 황당하면 여자애들이 대꾸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는데, 메모리 작가가 태연하게 다가와서 의자에 앉았다. 그러더니 다른 의자 하나를 잡아 도림을 불렀다.
“계약 진행하실까요? 이분들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신 것 같은데.”
손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저도 바쁜 사람입니다. 계속 거기 서 계실 거예요?”
“아, 아니요!”
3억이 왜 스치는진 모르겠지만, 도림은 반사적으로 테이블로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이사님.”
메모리 작가의 말에 예진 이사의 가방이 열렸다. 구김 하나 없는 봉투가 메모리 작가의 손에 잡혔다.
“…….”
“…….”
아직도 여자애들은 오도 가도 못 하고 서 있었다. 갑자기 화를 내는 것도 이상하고 대체 도림이 뭘 하는 건지도 궁금했다.
‘사기당하는 거지?’
‘이 새끼들 대체 뭐야?’
‘내 음료수…….’
먹다 남은 음료를 잡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도림은 바짝 앉은 메모리 작가를 보며 수줍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장님 빼고 남자랑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
메모리 작가가 봉투에서 계약서를 꺼내며 말했다.
“작가님께서는 70%의 비율로 정산을 받게 되십니다. 모든 유통과 마케팅은 저희가 전담할 테니, 집필에만 몰두하시면 됩니다.”
슬쩍 여자애들을 본 것 같은데…….
“작가님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할 의향도 있습니다. MG가 필요하실까요?”
‘MG가 뭐죠?’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켜보는 눈들 때문에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예진 이사가 어떻게 알고 부드럽게 말했다.
“선인세입니다. 작품이 세상에 나가기 전에 일정 금액을 먼저 받아서 사용하시고, 나중에 매출이 나오면 공제하시는 방식이에요.”
아직 작가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뭔가 대단한 걸 쓴 것도 아닌데…….
멀뚱멀뚱 바라보자 메모리 작가가 말했다.
“작가님이라면 천만 원의 MG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요.”
“처, 천만 원이요?”
예진 이사가 거들었다.
“이자 같은 건 없으니까 부담 없이 사용하셔도 돼요. 선인세라는 건 어디까지나 작가님이 집필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회사에서 투자하는 거랍니다.”
회사의 투자라는 말이 또 나왔다. 그게 왜 이렇게 기분이 좋으면서도 무거운지 도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천만 원이면 당장 알바를 하지 않아도 1년은 버틸 수 있는 큰돈이었다.
메모리 작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장 결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중요한 건 다 여기에 있으니까, 집에 가셔서 천천히 살펴보세요. 궁금한 건 언제든 연락하셔서 물어보셔도 됩니다.”
택시가 아직 떠나지 않았다. 기사 아저씨도 궁금한지 택시에 기대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엔 정식으로 대접하겠습니다. 오늘은 줄이는 게 좋겠네요. 자택으로 가시지요?”
“네? 저요? 아, 네. 집에…….”
“거기까지만 모시겠습니다.”
메모리 작가의 말에 예진 이사가 택시 아저씨에게로 걸어갔다.
공주님이라도 된 것처럼 도림은 메모리 작가가 열어 주는 조수석에 탔고, 택시는 이내 거짓말처럼 떠나 버렸다.
“…….”
“……허…….”
남겨진 여자애들은 태어나서 처음 겪는 투명 인간 취급에 입술이 바르르 떨렸지만, 대체 이 모멸감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찾지 못하고 있었다.
*
*
*
신도림 작가를 집에 데려다주고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길.
“원래 MG 없잖아요. 우리 회사는요.”
“가끔은 필요할 때도 있지.”
아까의 상황은 딱 보고 알아챘다. 나도 쭈구리 인생을 오래 살아 봐서 눈치 하난 S급이다.
“회수 안 되면요? 완결 경험도 없는 작가님이시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니까 투자지. 그리고…… 잘할 거야.”
“……걔들이 괴롭히지 않을까요?”
“당분간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앞으론 달라지겠지. 깔보던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위치까지 올라가는 걸 지켜보는 것도 꽤 고문이거든. 이런 시골에선 소문도 금방 퍼지니까.”
학교에서 계속 마주쳐야 하는 상태라면 내 방식도 달랐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성인이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싸움이란 건 일단 돈이 많은 쪽이 유리하고 사회적인 신분이 갖춰지면 목소리는 더 커진다.
“근데 우리 변호사 있어?”
내 말에 예진이 가방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 그 이름을 보자 ‘아!’ 하고 생각났다.
“장례식장에서 받았어요.”
행복고시원 건물주 할머니 아들!
“경찰 오면 뭐라고 하려고 했는데?”
“일단 부르면 다들 도망갔을 거예요. 그럴 나이니까요.”
부모님은 학교에서만 모시고 오라는 게 아니다.
“역시 우리 이사님, 빈틈이 없어.”
내가 흐뭇하게 웃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고맙습니다…..】
신도림 작가다.
피식 웃자 예진이 물었다.
“작가님이세요?”
“어.”
“후……. 잘 쓰셨으면 좋겠네요.”
나쁜 친구들에게도, 편의점에서도, 이제까지의 악몽에서도 다 벗어났으면 좋겠다.
그러한 것들이 글에 묻어난다면 신도림 작가는 머잖아 여성향 웹소설 쪽에서 우뚝 설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완숙하면?
‘리더북스 매출 1위 작가가 되는 거지.’
8번. 이제 그녀에게 강제로 붙은 번호는 없다. 대신 그녀의 꿈을 이뤄 줄 내가 들러붙었다.
‘서칭을 더 열심히 해야겠어.’
내가 ‘알던’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
*
*
한동안 미친 듯이 바쁘게 지냈다.
신도림 작가가 계약을 했고 원고를 보내왔다.
편의점을 그만뒀다고 했다. 그간 모아 둔 돈이 조금 있어서 일단 MG는 받지 않겠단다.
예진을 통해서 그녀의 집에 한우 세트를 보냈다.
이건 내 사비로 샀다. 국거리, 구이용 적절하게 섞인 거니까 할머니와 맛있게 먹을 거다.
혹시라도 못된 애들이 못된 짓을 하면 바로 연락하라고 했다. 회사가 이럴 의무는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모르는 동료애가 있었다.
“후우우…….”
오늘로 그간 써 오던 작품을 완결했다. 당연히 연재는 한참 더 진행될 거다.
‘사상 최강의 아이돌’에 집중하려고 ‘조폭집 막내아들’에 열을 올렸다.
이제 ‘파혼이지만 괜찮아’도 틈날 때마다 써야 했다.
로맨스 판타지를 쓰는 데 신도림 작가의 작품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지난 생에서 남성향 1위를 했던 나다. 지금도 최고의 자리에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엔 이렇게 배울 게 많다.
“슬슬 춥네.”
더위가 완전히 물러갔다. 신도림 작가의 작품이 어느덧 1권 분량이 찼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까…….”
나는 이 고시원에서 겨울을 나 본 적이 없었다.
“난방은 되는 건가?”
타 죽을 것 같은 여름을 막 보내서인지 추위에 대해서 무방비했다는 걸 깨달아 버렸다.
옥상에서 바로 예진을 소환했다.
“각 방에 히터가 전부예요.”
군대에서 보던 그 누런 것과 비슷한 구동 방식인 건가?
“작년엔 어땠어?”
“의외로 나쁘지 않아요. 여름엔 힘들지만, 겨울은 견딜 만하고, 이번에 창문도 싹 갈았으니까 단열이 훨씬 나아졌을걸요.”
우리가 앉아서 이야길 나누자 진성이 차를 타서 우리 앞에 뒀다.
“어? 맛있네? 이거 뭐야?”
호로록 마시니 목구멍 깊은 곳까지 열기가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도라지예요. 가을엔 이런 차를 마셔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세뇌당했거든요. 근데 진짜 효과는 있어요. 나중에 한가해지면 산에 가서 칡도 뽑아 올게요. 겨울엔 또 칡차가 보약이거든요.”
……얜 대체 정체가 뭐냐?
설탕인지 꿀인지 뭘 넣었는진 몰라도 단맛이 있어서 또 한 모금 마셨다.
진성이 그런 나를 보며 말했다.
“대추 향도 나죠?”
“어, 나도 그 생각 하고 있었어.”
대추였냐…….
“저도 겨울엔 춥단 생각은 안 했어요.”
너는 눈이 펑펑 내려도 상의 탈의하고 뛸 애고.
“다들 전기장판 하나쯤은 있잖아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보고 있으니 겨울이 성큼 오고 있단 체감이 됐다.
그렇다는 건…….
“민 팀장님, 일정 잡고 계셔?”
우리 디엠의 데뷔가 슬슬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요즘 계속 외부 활동을 하시는 걸 보면 관계자들 만나고 있는 것 같아요.”
소설이나 웹툰도 주력이라 할 수 있지만, 엔터 사업은 둘을 합친 것보다도 큰 시장이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겠지만, 애들 자존감을 위해서라도 스타트를 잘 끊어야 했다.
‘뭐 하나만 삐끗해도 난장판이 되겠지.’
특히 모든 비용이 내 소설에서 나오고 있어서 실패라도 하면 애들 뮤직비디오 퀄리티에 영향이 간다. 돈을 확실하게 써야 할 곳엔 아끼면 안 된다.
“바람이 머무는 궁 표지 의뢰했지?”
“네, 돈값은 해 줄 거예요.”
신도림 작가의 작품이다. 제목도 내가 직접 지어 줬다.
또 할 말 없었나? 생각하는데 예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예진이 이렇게 놀라는 건 오랜만에 봤다.
“네? 드라마요?”
드라마라. 빠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