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 Return RAW novel - Chapter (83)
작가귀환-83화(83/250)
나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 웃었다. 이빈은 낯설었지만, 이명한은 내 애착 작가여서 동네 형을 만난 것 같았다.
“언제든 궁금한 게 있으면 고 이사님께 여쭤보세요. 저보다 나을 겁니다.”
우리 예진이는 최고니까.
“저…… 대표님,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무식하게 글을 쓰고 있긴 한데, 이게 맞는지 계속 답답해집니다.”
그럴 수 있다. 그리고 그건 모든 신인 작가가 겪는 문제였다.
“다른 대안이 있나요?”
“네?”
“글 쓰는 거 말고 뭘 해야 실력이 늘까요?”
“음…….”
“인풋도 중요하고 고민도 필요하겠지만, 단기간에 웹소설 작법을 능숙하게 하는 건 일단 쓰는 것밖에 없어요.”
이명한은 나보다도 더 빨리, 많이 쓸 수 있는 작가로 거듭날 것이다. 그 능력을 아직 본인이 모르고 있다는 게 안타깝지만.
이번엔 이빈이 물었다.
“제가 식당에서 일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런데 그건 이미 임자가 있어서 두 사람이 상의하셔야 할 거예요.”
진성이가 점점 더 바빠지니까 이빈이 그 일을 나누면 한결 수월해질 것이었다. 지금도 고시원 어르신 몇몇 분이 도와주시지만, 그런 날은 맛이 확 차이가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예진이 코코아를 줬다. 우유도 넣은 것 같았다.
“고마워.”
내가 이명한에게 말했다.
“주말에 시간 되시면 저희 모임에 오세요. 작가님들 몇이 함께하실 건데 도움이 될 겁니다.”
“저야 무조건 좋죠!”
나는 이걸 애착 작가 모임이라고 부를 거다. 공식적으로 말하진 못하겠지만, 내 버킷리스트라고 해 두자.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용건은 해결했으니까 이제 비켜 주자.
***
코코아 가득 담긴 컵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신작을 잡아 볼 생각이었다.
곧 사상 최강의 아이돌 1시즌 원고도 끝날 테고, 여러 일정도 있어서 이렇게 온전히 온종일 고시원에 있을 때 짬을 내야 했다.
“왜란…….”
대체 역사를 쓰기로 했으니까 사람들이 가장 잘 아는 사건을 다뤄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임진년은 모두에게 가슴 아픈 해지만 그래서 더 임팩트 있게 바꿀 수 있다.
“주인공을 누구로 하면 좋을까?”
시대와 시기를 정하면 이제 그곳에서 가장 빛을 낼 수 있는 캐릭터를 짜야 한다.
‘넘어가?’
현대인을 조선 시대로 보내면 미래 지식을 이용할 수 있다. 육체를 고스란히 가지고 가면 이계진입물처럼 도입부를 짤 수 있을 것이고, 누군가의 몸에 들어가면 빙의 코드와 회귀했을 때 사용하는 두 가지 클리셰를 쓰겠지.
근데 이미 회귀, 빙의, 환생은 해 봤다. 좀 다르게 해야 하지 않을까?
‘꼭 똑같을 필요는 없잖아.’
핵심은 미래의 일을 아는 것, 그것만 이용할 수만 있으면 된다.
대체 역사니까 역사를 바꿀 힘이 있어야 하고, 답답한 초반부를 시원하게 바꾸려면 지위가 있는 주인공이 편했다.
‘대체 역사라는 장르를 독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면, 현대 배경에서 시작하는 게 좋을 거야.’
고민했다. 도입부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 또 주인공은 어떻게 해야 매력적일까?
“음.”
이런 구상은 끝이 날 때까지 혼자 해결해 왔었다. 10년간 혼자 했었고 그게 익숙했다.
스윽.
그랬던 내가 핸드폰에 손을 뻗었다.
오후 3시 21분.
【혹시 서점 가실래요? 필요한 책이 있어서 나갈까 하는데요.】
인터넷으로 조사해도 되긴 하지만, 서점에 가면 일목요연하게 현대적으로 정리된 ‘조선왕조실록’ 같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만화면 더 좋고!
【아! 좋아요!】
3초 만에 답이 왔다. 음, 여자들은 관심 없으면 바로 답장 안 한다던데.
【6시 건대입구. 괜찮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4시 30분도 안 돼서 대형 서점에 도착하고 나니까 어이없게도 내가 이런 곳에 처음 와 본다는 걸 깨달았다.
“대박이네.”
한 공간에 이렇게 많은 책이 있다. 사람들은 조용히 책을 고르거나 서서 읽고 있었고, 인문, 철학, 일반, 교양, 아동까지 신세계였다.
나는 뉴비가 아닌 척 역사 쪽으로 걸었다. 자연스럽나?
‘여기 있네.’
임진년을 배경으로 잡았으니 이제 내가 공부해야 할 건 선조와 이순신이었다.
나도 기반 지식은 있었지만 그게 참으로 얄팍해서 이순신 장군이 몇 세에 전사했는지도 모른다.
선조?
조선 역사상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최악의 왕 정도?
‘아, 선조가 광해군의 아버지였구나.’
책을 들춰 보는데 내 무식이 바로 탄로 났다.
사실 나는 공부와 담쌓고 살았던 학생이었고, 관심 없는 분야는 숙면으로 일관했다.
그랬던 내가 이런 멋진 곳에 와서 역사책을 보고 있다는 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괜찮은데? 얘깃거리가 많겠어.’
서점에 오길 잘했다. 책이란 건 누군가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이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 작가는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을까?
‘고맙습니다, 선생님.’
요약의 정수를 읽으며 나는 그럴듯한 스토리를 그릴 수 있었다. 특히 깨알 같은 정보들이 많았는데, 이 시대까지도 감자와 고추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이었단다. 그 전까지 김치는 모조리 고춧가루가 빠졌었다는 거다.
‘잘 써먹겠습니다.’
작가가 정보를 받아들일 때는 에피소드로 연상할 수 있는 연습을 해야 했다.
가령 이 감자만 봐도 조선의 백성은 늘 굶주렸으니 감자가 있다면 구황작물로서 좋을 것이고, 그러면 주인공은 이 감자를 어떻게 써먹어야 멋질까? 이야기로 만들어 보는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조선의 백성이 배불리 먹어서 좋았다가 아니라, 주인공이 그걸 해냈을 때 그 공로를 찬란하게 인정받는 거다.
작품의 모든 소재와 설정은 주인공을 위한 밑밥이었고, 특히 대체 역사니까 주인공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대리 만족을 줘야 했다.
“대표님?”
“아, 작가님.”
이 책은 사자.
“역사책이네요?”
“차기작 자료 조사 하려고요.”
“역사 소설을 쓰시려고요? 이제 웹소설 안 하시는 거예요?”
그래, 누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대체 역사 소설을 처음 봤을 때는 이게 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더랬다.
“그럴 리가요. 계속합니다, 웹소설.”
그녀는 오늘도 내가 아는 모습보다 더 상큼하게 나타났다. 이래서 환경이 중요한 거다. 그 지옥에서 모니터로 볼 때보다 100배 더 생기 있었다.
뭐 그렇다는 거다. 나는 이제 병을 이겨 낸 남자다. 이런 사소한 거에 흔들리지 않는다.
“서점 자주 다니세요?”
“가끔요…….”
등신아, 왜 거짓말을 하냐?
“저도 서점이 좋아요. 평생 여기서 살고 싶을 만큼요.”
오, 그건 몰랐네. 그녀와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했는데 아직도 내가 모르는 것투성이라니. 이렇게 사람 속은 모르는 거다.
그녀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
나도 모르게 물러날 뻔한 대참사를 가까스로 견뎠다.
“이따 만나요.”
까치발을 들고 내 귓가에 속삭이는 그녀였다. 신난 듯 돌아서서 저쪽으로 걸어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혀 낫지 않았잖아.
***
도입부는 많은 사람들이 시위하는 장면이었다. 각자의 이유로 대한민국 곳곳에서 모였고, 한뜻으로 거기 있었다.
“으음…….”
그러다가 깨어났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전하!
어떤 연유에서인지 미래를 보았다. 그냥 본 게 아니다. 후손의 기억과 경험이 생생했다.
“그는 어디에 있느냐?”
선조는 물었다.
“이순신! 어디 있느냔 말이다!”
대체 역사 장르를 처음 본 예진은 격동이라는 말을 제대로 느꼈다. 고작 5편이었지만 뜨거운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와……!”
내가 물었다.
“어떤데?”
“잘 모르겠지만 궁금해요! 제목은 지으셨어요?”
“사상 최강의 군주.”
“사상 최강의 아이돌하고 비슷하네요?”
“응. 아무래도 대체 역사가 독자에겐 낯설 테니까. 조금이라도 유입을 늘리려고.”
“메멘토모리 작품이다. 누가 봐도 알 수 있게요?”
“그렇지.”
예진의 표정을 보면 초반부는 잘 뽑은 것 같았다. 여자인 그녀가 봐도 읽힌다는 건 가독성은 확보했다는 뜻이다.
“좋아요. 더 써 주세요.”
내 것이라서가 아니라 나는 사람의 얼굴이 어떤 표정으로 변하는지 지켜보면 속을 짐작할 수 있다. 평소에 그러면 따귀라도 맞을 만큼 노골적이겠지만, 책을 읽는 사람은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당장은 안 돼. 공부해야 해서.”
“히잉…… 그러면 언제 나와요, 다음 편?”
“다음 주?”
“으윽, 괜히 봤다.”
내가 예진의 머릴 쓰다듬으며 웃었다.
“쓰면 너한테 바로 보내 줄게.”
“네에!”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왔다. 식당엔 진성이가 빈이와 함께 앞치마를 매고 있었는데, 제법 죽이 잘 맞았다.
진성이 내게 물었다.
“역사 소설도 사람들이 봐요?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다고 하지 않고요?”
“그 지점을 재미로 바꾸는 거야.”
나는 이 분야의 장인과 참으로 오래오래 시간을 공유했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것밖에 못 합니다. -29】
그는 지옥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내였다. 모두의 나이를 몰랐지만, 아무튼 그럴 거다.
29번 작가는 새치 성성한 머리칼을 눈 아래까지 덮은 스타일이었다. 구성원 중엔 무협만 파는 작가도 있었지만, 29번은 대체 역사만 썼다.
그를 지켜보다가 어느 날 내가 이렇게 물었다.
【무협이랑 비슷하지 않아요?】
【다르죠. 무협은 낭만과 멋, 분위기라면, 대체 역사는 그보다 자세히 써야 합니다. -29】
이땐 그가 뭐라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린 다들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졌었지만, 어떤 장르에 심취하느냐에 따라 판이한 가치관을 지녔었다.
【쉽게 말하자면 무협이 액션 게임이라고 쳤을 때 대체 역사는 도시 건설 게임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잘한 것들이 모여서 한 방 터뜨리고, 또 자잘한 걸 빌드업해야 하죠. 그래서 독자층도 갈립니다. 무협 좋아한다고 다 대체 역사를 보는 건 아니라서요. -29】
그는 3년 만에 대체 역사로 1위를 차지했고, 자신을 증명해 냈다.
팀장 새끼가 나중에 말해 줬는데, 그때부터 우리나라 대체 역사의 부흥기가 시작되었단다.
돌이켜 보면 나는 참으로 많은 스승과 지냈던 거 같다.
“형님.”
“어, 듣고 있었어.”
무슨 얘기 중이었지?
진성이 한숨을 쉬며 내게 말했다.
“간 맞으시냐고요.”
“훌륭해.”
진성이랑 빈이를 보며 말하다가 퍼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예진아, 나중에 얘들 여기서 요리하는 거 찍어서 올려.”
“디엠 채널에요?”
“어디든. 그런 다음 그 요리를 먹는 사람들 반응 올리고. 당연히 괜찮다는 분만 동의 얻어서.”
나중에 우주 대스타가 될 예정이라도 지금은 디엠 애들 자존감이 바닥이라서 인기를 얻어야 했다.
“알겠어요. 그런데 그게 효과가 있을까요?”
나는 진성이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림 나오잖아. 핵심은 요리하는 진성이겠지만, 그걸 먹는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내냐는 거야. 다들 맛있다고 하겠지만 그걸 보는 맛이 또 있거든.”
특히 이곳엔 온갖 인간 군상이 다 있었다. 새벽밥 먹고 나가시는 일용직 아저씨부터 점심때쯤 일어나 머리 긁적이며 앉는 웹툰 작가도 있었다.
“자막 꼭 넣고.”
상업을 우선으로 하는 식당이 아니란 점도 유니크했다.
“진성식당. 타이틀도 박고.”
내 말에 진성이 ‘으악!’ 하며 웃었다.
“그게 뭐예요!”
“뭐긴, 재미있는 거야. 넌 그냥 하던 대로만 해. 자연스럽게.”
이 식당의 희소성은 사회 밑바닥 계층으로 치부당하는 고시원 사람들만 먹을 수 있다는 거다. 누가 억만금을 싸 와도 진성이 밥은 못 먹는다.
게다가 진성이가 세상에서 제일 유명해지면?
‘가장 높은 곳에 화려하게 떠 있는 사람이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에게 손수 밥해 주는 그런 그림인 거지.’
돈으로 신분을 나눈다는 건 아니다. 세상이 그렇게 볼 거란 뜻이다.
‘빌드업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부터.’
그게 대체 역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