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 Return RAW novel - Chapter (91)
작가귀환-91화(91/250)
이런.
“죄송합니다.”
황급히 손을 놓았다. 나도 모르게 그만 감정이 격했던 것 같다.
‘보는 눈도 많은데.’
당황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내가 어색하게 웃었다.
“혹시 시간 되실 때 백숙 먹으러 갈래요?”
“……좋아요. 저도 가 보고 싶었어요.”
이건 그녀의 버킷리스트에 있던 거다. 일종의 치트키라고 할까?
“그러면 제가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다소 놀랐던 것 같지만 곧 분위기가 풀어졌고, 우린 가볍게 맥주를 마시곤 헤어졌다.
방으로 돌아와서 숙제를 하려고 앉았는데 머리가 백지상태가 되어 버렸다.
‘편지를 써 본 적이 없잖아.’
그렇다. 나는 소설을 수십 권 쓴 작가지만 편지는 처음이었다.
“와, 이렇게 어렵다고?”
첫 문장부터 막혔다.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더 쓰기 곤란했다.
다들 연애편지는 어떻게 주고받는 거지?
일단 어려우니까 쉬운 것부터 하자.
인터넷으로 근처 계곡을 찾았다. 그래도 분위기를 내려면 가평쯤은 가는 게 좋겠지? 운전은 힘드니까 택시를 타자. 나, 그 정도는 버는 남자다.
“이건 됐는데.”
다시 편지로 넘어왔다. 하기 싫어서 꾸역꾸역 미루던 방학 숙제를 마주한 초딩의 심정이었다.
“하…….”
아까 그녀의 표정을 봤다.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순한 스승의 날 편지를 준 게 아니었다.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충족시켜 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도 처음이니까 담백하게 가야겠지?
『많은 말이 떠오르지만 함축하려니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제 일상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나는 그녀에 대해 잘 알지만 그녀는 나를 모른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았다. 평소에 내가 무얼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누굴 만나는지. 그런 것들을 적다 보니까 어느새 편지지가 두 장으로 넘어갔다.
“소설 한 편 쓰는 것보다 더 오래 걸렸네.”
하지만 재미는 있었던지라 잘 밀봉한 뒤 핸드폰을 들었다.
【여기 어떠세요?】
링크와 함께 문자를 보냈다.
【와! 너무 좋을 것 같아요!】
【답장은 그날 드리겠습니다. 언제 편하세요?】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저기요. 혹시 자고 오나요?】
헉, 생각도 못 했다.
【아닙니다. 당일치기로 다녀와야죠.】
【아, 그러면 일요일 빼고 언제든 괜찮아요.】
【교회 다니세요?】
【아뇨. 봉사 활동 가요.】
심장이 철렁했다. 그냥 자고 오자고 할 걸 그랬나? 아니야. 그랬다가 망쳐 버리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우린 금요일로 약속을 잡고 대화를 끝냈다. 이미 시간이 꽤 늦은 상태라서 침대에 누웠다.
‘다음 주 금요일.’
오늘 밤은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일요일이지만 나는 여전히 쉬지 않았다. 어제 푹 자서 아침부터 좋은 컨디션으로 소설을 썼고 점심엔 산책도 했다.
누군가는 작가의 삶을 부러워할 수도 있겠지만 출퇴근이 없다는 건 반대로 끝나지 않는 일이 계속 잔류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오후에도 또 글을 썼다. 아직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내 글도 한참 후에나 세상에 나갈 것이다.
오후 4시가 지나가는데 전화가 왔다.
-내일, 4시 약속 아시죠?
이사라였다.
“알고 있습니다. 판교죠?”
-네. 덕분에 앞으로 1년간 선 안 봐도 되는데 한턱낼게요. 내일 미팅 끝나고 저녁 괜찮아요?
“선약은 없습니다. 근데 선 얘긴 뭔데요?”
-내일 말씀드릴게요.
시원하게 웃곤 전활 끊는 그녀였다.
뭐지?
다시 집중했다. 글을 쓰다 보면 시간이 참 잘 간다. 나는 이 분야에선 절정에 다다랐기에 5,000글자 분량의 1화를 쓰는 데 1시간 30분이 걸린다. 퇴고 포함이다. 2편 쓰면 3시간. 4편 쓰면 6시간이 훌쩍훌쩍 지나간다는 뜻이었다.
‘오늘은 잘 써지네.’
나도 사람이라서 컨디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오늘은 베스트라 할 수 있었다.
오전부터 쭉 해서 10편을 썼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에 집필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마음이 이렇게 편하니까.’
그녀와 약속도 잡았고 편지도 썼다. 이것만으로 나는 평안했고 어떤 고민도 할 것 없이 몰입했다.
“후……. 오늘만 같아라.”
정말이지 오랜만의 평화였다.
***
월요일. 모두가 한 주를 시작하는 날이다. 예진은 유독 더 바쁜 사람이었다. 아카데미부터 웹소설 작가 관리, 웹툰팀 회의와 월말엔 정산까지 맡아야 했다.
“댕댕이 작가님 거 컷 몇 개 수정 요청했고요. 루크에서 넘어오는 구작, 다시 확인 부탁드려요.”
차 팀장이 없었다면 그녀는 몇 배로 힘겨웠을 거다.
“곧 재능마켓 정식 서비스 시작하니까, 결제 시스템 이상 없는지 미리 확인해야 하고요.”
“수시로 해 보고 있습니다.”
“좋아요. 일본 일정 나오면 바로 공유해 드릴게요. 저희 없어도 잘 부탁드려요.”
“염려 놓고 다녀오세요.”
예진은 한참을 차 팀장과 일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하…….”
입김이 나왔다. 아직 쌀쌀한 날씨 때문에 외부에 오래 있을 순 없지만 정신을 차리기엔 딱 좋았다.
“……건강하시겠지.”
전에 그러고 가서 부모님은 아직도 연락이 없으셨다. 자랑할 게 참으로 많은데, 아마 그것도 성에 안 차실 거다. 안정적인 직업과 평범한 가정을 꾸려 사는 거 이상을 바라시진 않으시지만, 누군가에겐 그게 가장 어렵다는 걸 왜 모르실까.
길게 감상에 빠질 여유도 없었다.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사장님.”
-좋은 매물 나왔는데 보실래요?
“언제 갈까요?”
-워낙 싼 값이라서 빨리 안 오시면 바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알겠어요. 1시간쯤 걸려요.”
-어서 오세요.
성수동 부동산 연락이었다.
그녀는 주차장으로 갔다. 그러면서 고시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참으로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었지만, 현재의 회사를 꾸리기엔 턱없이 비좁았다.
그녀는 곧장 차를 몰아 도로로 나갔다.
‘왜 성수일까?’
번창하는 회사를 보면 서울 어디든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대표님이 콕 집어 말씀하셨을 때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도착했다.
부동산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나왔다.
아저씨는 그녀를 안내하면서도 계속 정보를 줬다.
“위치가 아주 좋아요. 정식 도로는 아닌데 저기, 보이죠? 길이 쭉 뻗어서 드나들기 편하고.”
이면도로 양쪽으로 낮은 건물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작은 공장들이 많았고 식당 몇 곳과 카페가 있었다.
‘이런 낡은 곳이 괜찮을까? 지하철역이 가깝지도 않은데.’
그녀가 볼 땐 입지가 그리 좋은 것 같지 않았다.
“여깁니다. 어때요? 넓죠? 여기 사장이 지난주에 작업하다가 크게 다쳤어요. 그래서 급매로 내놨는데 이 가격, 다신 못 볼걸요.”
한성금속이라는 간판을 보면서 예진이 물었다.
“들어가 봐도 돼요?”
“물론이죠.”
월요일이지만 공장은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60년은 훌쩍 지났을 것 같은 건물은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면도로와 가깝고 부지가 넓은 걸 빼면 전혀 장점이 없었다.
“저긴 맹지인가요?”
“자재 쌓아 뒀던 곳인데, 지금은 치워서 그래요. 밀어 버리면 주차장으로 쓸 수 있겠네요.”
그가 건축물대장을 보여 주었다.
“땅값만 받아도 이것보단 비싸다니까요? 통으로 팔려고 내놔서 이 정도인 거니까, 고민할 것도 없어요.”
“다 치우고 건물 올릴 수 있죠?”
“그럼요!”
이미 주변 지가는 확인했던 터라 가격은 좋았다. 저 낡은 건물과 주변의 올드함이 문제였다.
그녀가 곳곳의 사진을 찍었다. 그러곤 곧장 전송했다.
대표님은 오늘 판교 일정이 있으셨다. 미팅 들어가셨다면 바로 답이 안 올 수도 있었다.
그런데 보내자마자 연락이 왔다.
【계약해. 내가 원하던 거야.】
‘정말?’
여기라고? 이 누추한 동네가?
서울치곤 확실히 싸지만, 콘텐츠 회사가 들어서기엔 후줄근하지 않을까?
노파심에 다시 확인했다.
【계약금 넣어요?】
【응. 그리고 이왕이면 너도 그 근처 매물 좋은 거 있으면 집 한 채 사 둬. 그 이면도로 근처로.】
대표님이 이렇게까지 추천하는 건 처음이었다.
‘집을 사라고?’
그간 월급을 모아 둔 것도 있고 회사 지분도 있어서 전세금 정돈 마련했다고 생각했는데, 집을 사려면 대출을 많이 받아야 가능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 저 낡은 집에?
‘고시원에도 살았는데 못 할 것도 없겠지만…….’
회사가 이쪽으로 이전하면 가까운 곳에 집이 있는 것도 좋을 거고.
“사장님.”
“네.”
“계약할게요. 근데 이 근처에 갭으로 살 만한 집도 있어요?”
“매물 여럿 있긴 하죠. 전세 끼고 사신다는 거죠?”
“네.”
“이왕 오신 거 오늘 보고 가시죠.”
***
내 미래 지식을 남과 공유하는 걸 즐기진 않았지만, 예진이니까 작은 선물 하나쯤은 괜찮을 것 같았다.
【계약금 넣고 최대한 늦게 잔금 치를 수 있게 해 줘. 우리가 급한 건 아니니까.】
지금은 다 쓰러져 가는 동네지만 몇 년 안에 서울에서 가장 핫플레이스로 변모할 것이다.
30명 넘는 작가의 글을 10년간 봐 왔기에 서울 곳곳을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나 설정을 흔히 봤는데, 이미 비싼 강남엔 파고들 여지가 별로 없지만 몇 곳은 사 두면 돈이 된다.
“계속하시죠.”
오늘 미팅도 마찬가지다.
남 대표는 나와 이사라를 앞에 두고 PPT를 이어 갔다.
그는 자신이 기획한 게임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이것만 보곤 투자하기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사라가 그 점을 파악하고 손을 들었다.
“기존 게임과 다른 점은요?”
“저희는 오픈 월드가 상당히 광활합니다. RPG 게임에 서바이벌 슈팅 게임을 접목했다고 생각하시면 되는데, 기존의 게임과 차별점이 바로 여기에 있죠. 정해진 좁은 맵에서 플레이를 하는 게 아니라서 자유도가 상당합니다.”
이사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게임 쪽엔 별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물었다.
“언제쯤 출시가 가능합니까?”
“자금난만 해소되면 2년 안에 오픈할 수 있습니다.”
“얼마의 자금이 필요하시죠?”
“연간 5억이면…….”
“총 10억 원이네요. 그 정도 투자면 얼마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습니까?”
“20% 이상은 어렵습니다.”
“연간 5억이라는 말은 3년이 될 수도 4년이 될 수도 있다는 거고, 그러면 계속 자금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뜻인데요.”
“거의 다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게임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2조 원대의 회사로 성장할 예정이니까, 20% 지분이면 4천억 원.’
국내에서도 흥행하지만, 해외에서 대박이 터지는 게임이었다.
‘10억 넣고 4천억 원이면 미친 거지.’
무조건 해야 하는 사업으로 들리겠지만 나는 이 정도 돈이면 코인이라는 대안도 있었다.
‘코인은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어.’
이 게임도 2조 원의 가치를 지니기까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일단 게임이 출시하면 그때부터 수익이 생긴다.
‘2년이면 나쁘지 않아.’
나는 고갤 끄덕이며 이사라를 보았다. 성수동 매물도 사야 해서 나 혼자 덥석 투자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어때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그녀가 눈짓으로 의견을 물었다.
‘저는 좋습니다.’
‘그래요? 알겠어요. 이번에도 정 대표님 촉을 따라 볼게요.’
내가 일어나며 남 대표에게 손을 내밀었다.
“2년 안에 출시를 목표로 잘 부탁합니다.”
“제 목숨을 걸고 해낼 겁니다!”
우린 손을 맞잡고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