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110)
너희들은 변호됐다-110화(110/641)
[양진 F&B 고진아 전 전무이사는 정영준 씨에게 재산 분할액 440억과 30억 원의 위자료를 지급한 것으로 알려져 큰 화제가 되었는데요.지난 1심 공판에서, 조현석 씨는 고진아 씨가 지금까지 쌓아 온 자신의 이미지를 잃고 싶지 않아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진술하여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고진아 씨는 이에 대해 극구 부인한 상태입니다.] [고진아 씨는 지난 2003년, 대학선후배 사이였던 일반인 정영준 씨와 결혼하여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후 공식 석상에서도 금실 좋은 모습을 보여 혼맥을 위해서만 결혼한다는 재벌의 고착된 이미지를 깨는데 성공했었죠.
고진아 씨는 고상경 회장의 무남독녀로, 양진 그룹을 이끌 경영자로서의 능력을 계속해서 시험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정영준 씨와 결혼하며 국민에게 친밀한 이미지를 어필하였고,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지난 2005년에는 여대생이 뽑은 닮고 싶은 여성 기업인 1위에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1심 공판에서 조현석 씨는, 만일 고진아 씨가 성실히 결혼 생활에 임했던 정영준 씨에게 이혼을 요구했다면 분명히 소송으로 번졌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고진아 씨가 그간 쌓아 올린 이미지가 무너져 내릴 것을 극도로 걱정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래서 이혼의 책임을 정영준 씨에게 돌리고 자신의 이미지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범행을 계획했다는 것이……]
길었던 고진아의 1심 공판이 끝났다.
선고 기일인 오늘, 그녀는 징역형을 받았다.
물론, 고진아는 인정할 수 없다며 항소 의사를 밝혔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그다지 신경 써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그녀는 몇 개월에 걸쳐 정영준에게 470억을 전부 지급했고, 나 역시 정영준에게 수임료를 받았다.
한마디로, 내 손을 떠난 일이었다.
정영준은 이제 그 사건을 없는 셈 치고 살겠다고 말했다.
그녀의 앞으로의 삶이 어떨지, 조금도 관심 갖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그는 가족과 함께 해외로 이민을 떠날 예정이라고 말했다.
결혼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곳에서 작게 음식 장사를 할 생각인 듯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이민에 임형오를 동행한다는 사실이었다.
거기서 다시 한번 함께 비바 파스타를 운영하던 시절로 돌아가겠다는 심산 같았다.
사건이 끝난 뒤, 강민재가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단기간에 마음이 맞을 줄은 몰랐다.
임형오가 정영준의 회사로 찾아갔을 때 만나지 못했던 까닭은, 고진아가 그의 옛 지인들이 회사로 찾아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방문객을 전부 자르라고 지시해 두었기 때문이라고 하니, 오해가 빠르게 풀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정영준이 현명한 판단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의 삶은 빠른 속도로 재건되고 있었다.
아직 상처는 남았겠지만, 적어도 그가 선택한 새로운 정착지에서 그의 억울한 과거를 알아보는 이는 없으리라.
그리고.
-맞다, 차 변아. 너한테 할 말 있었다.
1심이 끝난 뒤 오랜만의 여유가 생긴 이예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하세요.”
나는 이예진이 한 시간이 넘도록 전화를 끊어 주지 않아, 스피커 폰으로 돌려놓고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할 말이 있었다는 그녀의 말도 설렁설렁 들어 넘겼다.
-여자 안 만나 볼래?
갑작스러운 말에 마시던 커피를 흘릴 뻔했다.
“네? 갑작스럽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나이가 서른다섯이니, 주변에서 결혼은 언제 하냐, 만나는 여자는 있냐, 물어 오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기는 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물론,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예진까지.
-아니, 내 남편이 차 변한테 소개해 주면 딱일 것 같은 친구가 있다고 해서. 업계 사람이야.
“별로 생각 없습니다.”
-아, 왜! 나 사진 봤는데 무지 예쁘단 말이야. 그리고 일도 엄청 잘 한대. 나이는 차 변보다 한 살 어려. 그 친구도 일하느라 시기를 좀 놓쳤거든.
그때, 머릿속에 방금 들은 것과 정확히 동일한 목소리, 하지만 좀 더 낡은 듯한 목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미리 사진 봤는데 정말 예뻐. 일도 되게 잘한대고. 한번 만나봐라. 차 프로보다 한 살 어린데, 혼기가 꽈아악 차긴 했지? 차 프로처럼 일하느라 시기를 놓쳤대.]나는 문득 달력을 바라보았다.
2009년 9월 20일.
이전 삶에서, 나는 결혼이 조금 늦었다.
서른여섯 겨울에 일 년 정도 만났던 여성과 식을 올렸다.
그녀는 로펌 장영의 변호사였고, 이예진의 소개로 만났다.
“혹시, 상대 여성분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뭐야, 뭐야. 관심 있는 거야?
“혹시 아는 사람일까 싶어서요.”
-그 친구는 차 변 잘 모르는 것 같던데? 연수원 시기도 안 겹치고. 조아영이야.
나는 작게 웃음 지었다.
전처였다.
물론, 그녀와의 끝은 조금도 좋지 않았다.
우리의 결혼은 이미 이혼 1년 전에 파탄에 이르렀고, 거의 남처럼 살았다.
그녀는 이미 만나는 남자가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을 못마땅해하기도 했고, 복수를 놓지 못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의 이혼은 아주 빠르고 깔끔하게 진행됐다.
나도, 그녀도 법조인이었기에 모든 과정은 상식을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나는 그녀의 외도를 모른 체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만날 생각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엉?
그녀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나는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꺼내 물며 대답했다.
“시간, 날짜 정해서 알려 주세요.”
-오, 그래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알았어. 그럼 남편한테 얘기해서 자리 마련해 볼게. 피해야 하는 날짜있어?
“없습니다.”
-적극적이구만. 그런 자세 좋아! 차 변도 장가가야지! 그때 집도 보니까 여자가 몸만 들어가면 딱 되겠던데.
혼자 신바람이 난 이예진은, 그녀에 대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몇 가지를 힌트처럼 던져 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며칠 뒤.
“변호사님, 태식 씨가 오늘 저녁에 소주 한잔 하자는데요. 어떠세요?”
6시가 다 되어 갈 즈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강민재가 물었다.
“난 오늘 시간 안 돼.”
“변호사님 약속 없으시잖아요. 같이 한잔하시죠. 국정원 씨도 온다던데.”
강민재는 소주잔 넘기는 시늉을 했다.
내가 사적인 약속을 거의 안 잡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간 안 된다는데 대놓고 약속이 없을 거라 단언하다니.
내가 그렇게까지 친구가 없어 보인건가.
“오늘은 정말 안돼.”
“무슨 약속이신데요?”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강민재가 내 책상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그리고는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캘린더를 집어 들었다.
“어, 정말 오늘 동그라미 되어 있네요? 혹시…… 여자분 만나세요?”
내가 대답하지 않자, 강민재는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진짜 여자분 만나세요? 와, 소개팅?”
“알 거 없잖아.”
“알 게 왜 없어요. 변호사님 소개팅하는데. 잘되시면 꼭 저도 소개해 주세요. 아셨죠?”
그 뒤로, 그는 내가 지금 이 나이가 되도록 애인이 없는 게 말이 안되는 이유를 한 시간 동안이나 떠들어 댔다.
방송 타면 입질이 올 줄 알았다느니, 돈도 많아서 1등 신랑감이라느니.
대부분 헛소리였다.
이제 그의 헛소리를 무시하는 데도 도가 터서, 나는 그의 말소리를 배경 음악 삼으며 업무를 보았다.
“파이팅입니다. 오늘 코디도 좋고, 머리 스타일도 굿.”
퇴근하는 길에, 내 차에 올라타려는데 강민재가 옆으로 지나가며 엄지를 치켜올렸다.
“그냥 가라.”
“여자분 앞에서 뻣뻣하게 굴지 마시고요. 유연하게. 유머러스하게. 예?”
“가.”
나는 그를 외면하며 차 문을 닫았다.
약속 장소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장영 역시 우리 사무실과 같이 서초동에 위치한 로펌이기 때문에, 약속 장소는 당연히 이 부근이었다.
미리 예약해 둔 레스토랑은 아직 6시 반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럼에도 시끄러운 분위기는 아니라, 소개팅하기에 적절해 보였다.
이예진이 예약해 준 곳인데, 이곳에서 수많은 법조인 커플이 탄생했다고 한다.
옛날에도 여기서 그녀를 만났던가.
그것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안내된 테이블에 앉았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십여 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책을 꺼내 읽었다.
리셉션에 내 이름을 말해 두었으니, 그녀가 도착하면 이곳까지 안내 받을 것이다.
그렇게 책의 한 챔터를 읽었을 무렵.
“저, 안녕하세요.”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녀는 예전 나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달 모양 팬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앉으시죠.”
“제가 좀 늦었나요. 서둘러 온다고 온 건데.”
“아닙니다. 제가 일찍 온 건데요.”
식사 메뉴를 주문한 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모습보다는 확실히 앳되었다.
결혼 이후 언제부턴가 그녀는 단발을 고수해 왔는데, 지금은 어깨선을 넘는 장발이었다.
“변호사님 뉴스 나오신 것 봤어요. 방송 출연은 처음이시라고 들었는데, 정말 자연스러우시던걸요.”
“그랬습니까.”
“네. 하하……. 실물이 훨씬 좋으시네요.”
그녀는 뺨을 붉히며 작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 뒤로 이어진 대화는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웃을 만한 화제를 선정할 수 있었다.
물론,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사형 집행에 대한 의견이라든지.
나는 그녀가 사형을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찬성하는 쪽이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더 틀린 점이 많았다.
내가 이전 삶에서 가정에 지극히 소홀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였던가 싶었다.
새삼스럽게 그녀가 왜 나와 사는 게 재미없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주한 씨.”
2차 장소였던 와인바를 나서며 그녀가 말했다.
벌써 시간은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많이 바쁘실 텐데 제가 너무 아영 씨를 오래 붙잡아 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그녀는 대로변에 줄지어 서 있는 모범택시를 흘긋 보며 말했다.
“주한 씨 대리 기사 올 때까지 같이 기다릴까요?”
“아닙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가시는 거 보고 가겠습니다.”
그녀는 아쉽다는 듯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나는 그녀와 함께 가장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택시 가까이로 갔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흘러내리는 옆머리를 잡으며, 그녀가 묵례했다.
그녀가 택시 손잡이를 잡았을 무렵, 나는 입을 열었다.
“아영 씨.”
“네?”
“아영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
문을 열려던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내 말의 의미를 해석하려는 듯, 잠시 입을 다물고 눈을 굴렸다.
“……음, 애프터 생각이 없으시다는 뜻인가요?”
속으로 생각하고 적당히 넘길 법도한데, 그녀는 직설적으로 물어 왔다.
“저와 만나시면 불행하실 겁니다.”
“……. 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럴 거면 결혼은 왜 했니? 결혼기념일? 내 생일? 다 필요 없어. 그런 거 안 챙겼다고 이러는 거 아니야, 나. 당신은 기본이 안 돼 있어. 나 정말……. 너무 불행해. 당신 만난 게 내 인생 최대의 실수야. 만일 내가 다시 8년 전으로 돌아가면, 나 절대 당신 안 만나.]신경질적으로 나에게 쏟아 내던 그녀의 목소리가 잠시 귓가에 스쳤다.
[당신 혼자만 법조인이야? 당신 혼자만 정의 지켜? 오바 좀 하지 마, 제발. 당신만 옳은 거 아니야. 세상을 좀 넓게 봐. 당신은 계란이야. 그리고 우신은 바위고. 등신 같은짓 좀 그만해. 제발, 부탁이다.]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는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내 목적의식은 이전 삶에서보다 더욱 견고해졌지만, 그녀는 아직 그대로다.
그렇기에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처는 나에게 짐이었고, 걸림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누군가의 짐과 걸림돌로 정의되기에는 아까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맞지 않았고, 서로의 가치를 빛내 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럼에도 오늘 이 자리에 나왔던 까닭은, 어쩌면 치졸한 복수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원인은 나에게 있었다고 한들, 결국 버림받은 것은 나였으니까.
이번에는 내 손으로 끝내고 싶다는, 그런 호승심일 수도 있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주한 씨 생각은 잘 알겠어요.”
“좋은 분 만나실 겁니다.”
“주한 씨도요. 그럼 들어가 볼게요.”
그녀가 오르자, 택시는 지체 없이 출발했다.
나는 택시가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응시하다 돌아섰다.
아닌 인연은 끝맺어야 한다.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인연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