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31)
너희들은 변호됐다-31화(31/641)
“감독님, 많이 바쁘셨을 텐데 직접 시간도 내 주시고. 감사합니다.”
강민재가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자, 조감독이 쓰게 웃었다.
“별로 안 바뽑니다.”
“네?”
“감독한테 개기고 퇴사했거든요.”
감독의 폭언 수준이 사람 정신 망가트릴 정도로 극심했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방송계 생리가 다 똑같다며 참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소식이라니.
그와 친밀하지는 않지만, 꽤 갑작스럽다.
“전에 변호사님이 명예 훼손하고 모욕죄 얘기하셨잖습니까. 그렇게 법적으로도 걸릴 만큼 좆같은 일을 몇 년 동안 당해 왔는데, 내가 계속 버틴들 무슨 영화를 누릴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퇴사했죠, 뭐.”
“……그러시군요.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덕분에 정신 차린 거죠. 아는 선배가 하는 영화사에 들어가려고요. 여기보다는 좀 더 빡세겠지만, 돈도 더 많이 준다고 하고요. 경험 쌓기에는 영화사 쪽이 더 낫죠. 전화위복이랄까요. 하하.”
“다행이네요.”
어쩌면 나는 이렇게 또 한 명의 삶을 바꿔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순간 씁쓸해졌지만, 그의 말대로 조감독은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좋은 일 아닐까.
애써 나를 위로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보자고 하셨어요? 김연준 씨 사건 끝난 거 아니에요?”
“끝났는데, 다른 사건 때문에요.”
조연출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강민재는 그 틈을 타 커피 한 잔 쭈욱 들이켠 후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저, 혹시 방송국 쪽에 도는 소문에 대해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뭐.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요.”
“정혜진 작가 아시죠? 드라마 작가.”
“네. 알죠.”
“그분에 대해 얘기 도는 것 좀 없을까요?”
처음부터 표절 쪽으로 이야기를 모는 것보다는, 정혜진에 대한 나쁜 소문 따위부터 차차 수집하는 것이 좋다.
재판에 언제 어떻게 사용될지 알 수 없는 데다, 처음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면 말하는 사람도 다소 긴장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흠. 워낙 대박 작가니까 방송국 쪽에선 뭐 그 작가 말에 껌뻑 죽죠. 원로 배우들도 그 작가가 시키면 그냥 죽은 척하고 싫은 것도 다 한다고 하니까요.”
“그렇군요. 근데 원로 배우들이 못하겠는 걸 시키기도 합니까?”
“네. 뭐 예를 들면, 고상한 분위기의 원로 여배우를 캐스팅해 놓고 갑자기 집 망했다는 설정 넣으면서 억척 할머니 역할로 바꿔 버린다든지. 배우한테 상의도 안 하고요.”
“그게 방송 쪽에서는 무례하다고 여겨지는 문제군요.”
“당연하죠. CF도 있고, 본인이 평생 쌓아온 분위기라는 게 있는데요.”
“흠, 그리고요?”
“방송국에서 시작했다가, 지금은 푸른섬 미디어로 나가서 그쪽에 속해 있는데……. 푸른섬 미디어 대표랑 아마 부부일 겁니다. 그렇다고 들은 것 같아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네요. 처음 듣는 얘깁니다.”
“네. 공개하고 싶지 않은 건지, 쉬쉬하고 있더라고요. 그냥 다들 눈치로 아는 정도? 그 작가 자체가 다른 작가들처럼 공식 석상에 올라오는 사람도 아니고. 신비주의 전략인가 봐요.”
푸른섬 미디어 대표와 부부 관계라.
부부가 나란히 피고소인이 된다니, 재미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얘기도 있어요. 그 정혜진 작가가 첫 대박 낸 이후로 슬럼프에 빠지고, 시청률에 대한 공포가 생겨서 창작을 못 하고 있대요. 그래서 보조 작가들이 따로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대본 내놓으라고 해서 그거 갖다 쓰고, 그 보조 작가한테는 너부터 입봉시켜 줄 거라고 한다더라고요. 이건 제가 직접 보조 작가들한테 들은 얘기예요. 드라마 국에 있을 때. 얼른 입봉해서 자기 이름 걸고 드라마 내고 싶은 애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자기 대본 주는 거죠.”
나은성 씨와는 다른 사례지만, 어쨌든 남의 것을 갖다 쓴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아 참, 그리고 푸른섬 미디어에서 진행하는 공모전 있잖아요. 정 작가가 매년 거기 심사위원으로 있는데, 그 왜 작품 자체는 좀 별론데 아이디어가 좋은 것들 있죠. 이런 거 슬쩍 갖다 쓴다는 얘기도 있어요. 일부러 좀 조악한 것들에서 쓱쏙 뽑아서 쓴다고 하더라고요.”
“일부러요?”
“네. 왜냐면, 아이디어가 없어서 못 쓰는 거니까, 아이디어만 있으면 자기 필력으로 다 커버칠 수 있잖아요. 원본이랑 비교 자체가 안 되니까, 그냥 그 원작자도 좀 찜찜한데? 이러고 끝나는 거죠.”
우리가 원하던 이야기다.
하지만 궁금한 점은, 이렇게 교묘하게 베껴 오던 정혜진이 왜 이번에는 이렇게 대놓고 도용했냐는 것이다.
내가 예상한 대로, 베낀 것들이 걸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다보니 점점 용감해진 것일까.
“말씀 감사합니다.”
“별거 없었는데요, 뭐. 도움이나 드렸을는지 모르겠어요.”
“아닙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다행이네요. 아휴. 아, 그리고 저 올해까지 쉬고 내년부터 영화제작사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재판 때 혹시 증인 필요하시면 그때까지 불러 주세요.”
“혹시 그럴 일이 생기면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강민재가 서글서글 웃으며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나는 그동안 녹음기를 껐다.
역시 방송국 쪽 사정은 방송계 사람들이 빠꾸미인 법.
조감독을 만나는 판단은 옳았다.
“보조 작가들한테 연락 한번 돌려보자. 정혜진 뒷배로 입봉한 애들 말고, 밑에 있다가 나가떨어진 애들로.”
“예, 알겠습니다.”
이제 서서히 필요한 자료들이 갖춰져 가고 있다.
* * *
“태식 씨!”
오늘도 출력소 앞에 똘마니들과 나란히 앉아 있던 태식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출력소 문 앞에 사장이 서있었다.
“예?”
“점심들은 했어? 우리 짜장면 시킬데 같이 시켜 줘?”
벌써 열흘째 출력소 주변을 ‘나비야~’ 하며 돌아다니는 세 사람을 안타깝게 본 듯했다.
이제는 하루도 안 빠지고 만나다보니, 커피도 타 주고 가끔 일손이 바빠지면 도와주기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하루는 이런 날도 있었다.
사장이 고양이 찾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며, 포스터를 만들어 오면 공짜로 인쇄해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태식은 있지도 않은 고양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흥신소 사무실 주변 길고양이들을 찾아다녔다.
괜히 사장에게 그 고양이의 생김새까지 전부 설명해 버리는 바람에, 그 고양이와 닮은 놈으로 찾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
결국엔 한 마리 겨우 찾아내었고, 외주까지 돌려서 포스터를 만들어 가져갔다.
그래서 이 골목 모든 벽과 전봇대에는 고양이 포스터 천지였다.
‘진짜 이건 그 악덕 변호사한테 꼭 돈 받아 내야 해.’
혼자 부들대면서 태식은 이를 갈았다.
생판 있지도 않은 고양이 찾은 비용, 그리고 포스터 외주 비용까지!
“아유, 그래 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안 그래도 우리 쪼꼬,”
“나비요, 나비! 형님!”
“……나비 찾느라 밥도 못 먹고 있었거든요.”
“그려, 그럼. 셋 다 짜장면으로 한다?”
“저는 짬,”
따악!
태식은 슬쩍 메뉴를 바꿔 보려는 대철의 머리를 강타했다.
“닥쳐, 이 새끼야. 셋 다 짜장면으로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일도 가끔 도와주고 내가 더 고맙지, 뭐.”
일을 도와주겠느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출력소 안쪽까지 진입하여 나은성의 시나리오 쪼가리라도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주로 탐색하는 곳은 그 출소가 인쇄한 것들을 포트폴리오용으로 보관해 놓은 책장이었는데, 그쪽에 푸른섬 미디어 대본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었다.
여러 유명 드라마 대본들이 착착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이쪽에 나은성의 대본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운 좋게도, 지금 방영 중인 <당신과 나의 거리> 대본도 회차별로 꽂혀 있었고 말이다.
“아~ 나 씨바 진짜 그 대본 어떻게 찾냐?”
짜장면을 먹은 뒤, 믹스 커피 한자씩 때리며 바깥에 서 있던 태식이 담배를 꼬나물었다.
“이거 못 찾으면 시바 그 악덕 변호사가 내 대가리 반으로 쪼갠 다음에 내 눈깔의 먹물을 쪽 빨아 버릴 것 같은데.”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형님!”
“힘내십쇼, 형님!”
응원을 받고 기분이 좋아졌던 태식이,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얼굴을 굳힌다.
“야.”
“예?”
“나만 찾냐? 나만 찾아? 니들도 같이 찾아야 할 거 아냐, 이 족팡매야. 이걸 확! 죽여 버릴 수도 없고.”
태식이 손을 들어 올리자, 두 똘마니가 머리에 가드를 올리며 움츠러들었다.
“죽고 싶냐? 힘내라고 하면 내가 오냐, 힘내마~ 이럴 줄 알았냐, 이 씨바 새끼들아?”
“죄송합니다, 형님! 저희는 그냥 형님 기운 내시라고…….”
“아가리 닥치고 빨리 쟤네 바쁜지 안 바쁜지 보고 와. 그래야 일 도와주는 척하고 또 책장 찾아볼 거 아니야!”
“예, 형님!”
형식이 고개를 꾸뻑 숙인 후 출력소 안으로 달려 들어가자, 태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씨벌~ 이 멍청한 새끼들을 데리고 뭘 하냐, 내가. 아오, 내 팔자야.”
* * *
“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읽어볼게요!”
사무실에 모여 인터넷에 게시할 글을 다듬고 있을 때였다.
나은성은 낮부터 커피를 들고 찾아와 지금 저녁까지 글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제 20화는 촬영이 종료되었을 타이밍.
오늘 안에는 올려야 한다.
그래서 종영 전에 여론을 타고 고소장을 넣었음을 알려야 한다.
우리를 보채던 나은성은 막상 시작하려니 조금 겁이 나는지, 자꾸만 글을 고치고 또 고쳤다.
“……괜찮은 것 같아요. 이 정도면.”
나은성이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 홀로 작성했던 비교문이 초안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추가로 찾아냈던 여러 유사점을 추가한 뒤, 법적인 문제가 없도록 문장을 바꾸고 첨언하는 식으로 글을 만들었다.
꽤 긴 글이라, 네티즌들이 읽다가나가 떨어질 것 같아서 요약본도 함께 만들었다.
이전 삶에서 나는 아무리 우신의 비리를 상세하게 글로 옮긴들, 너무 길다며 읽지 않는 네티즌들을 수도 없이 보아 왔다.
그래서 반면교사 삼아 네티즌 특성에 맞게 짧고 자극적인 문구, 그러나 사실과 다르지 않은 내용들로 비교문을 구성했다.
“방송사 드라마 게시판에 올리고, 나은성 씨 블로그에도 올리고, 대형포털 게시판들에도 올리죠.”
등록 버튼을 누르려는 나은성 씨가 힘겨워 보여서, 강민재가 대신 눌러주었다.
업로드는 순식간이었다.
조회수는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내가 태식이 사무실에 조회수를 조작하라고 말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 이제 어떻게 하죠?”
“기다려야 합니다.”
“언제까지요?”
“글쎄요. 적절한 신호가 올 때까지. 적어도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펴봐야 합니다. 대다수의 여론이 표절이라고 판단한다면, 증거 모인 상황까지 맞아들어 갔을 때 방송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할 겁니다. 이후에 고소장을 날리고. 동시에 날릴 수도 있겠죠.”
“바, 방송 금지 가처분이요? 그게 받아들여질까요?”
“안 받아들여질 겁니다.”
“그런데 왜……?”
“그냥. 겁주는 거죠.”
일개 지망생 따위가 이렇게까지 할 거란 생각을 차마 못 할 테니 말이다.
우리는 약 세 시간가량 인터넷 창을 여러 개 띄워 놓고 곳곳의 반응을 살폈다.
폭발적인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나은성이 혼자 글을 올렸을 때보다는 훨씬 반응이 컸다.
댓글도 나름대로 많이 달렸고, 여론도 나쁘지 않았다.
첨예하게 기다 아니다 싸우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내일 18화 방영이니까, 지금쯤 19, 20화는 다 찍었겠네.”
20화에서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과거에 만났던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다.
만일 고소에 겁먹고 대본을 고친다면, 재촬영에 들어갈 것이다.
쪽대본 드라마도 있고, 방영 당일까지 촬영하는 경우도 있으니 고친다고 해도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은 상황이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정혜진은 그런 선택을 할 만한 여자다.
“내일이나 내일모레쯤 주연 배우들 팬카페 들어가서 스케줄을 좀 보면 견적 나오겠는데.”
“팬카페요? 가입되어 있으세요?”
“변호사님이 배우들 스케줄 따려고 사건 수임할 때부터 가입하셨습니다. 등업 기준 맞추기 위해 계속 글 쓰고 댓글 단 건 저지만요…….”
강 변이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댓글 달기가 싫었나.
나름 재미있게 활동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는 가끔 댓글 달다가 킥킥 웃기까지 했다.
“잠시 통화 좀 하겠습니다.”
나는 윤세연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