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35)
너희들은 변호됐다-35화(35/641)
푸른섬 미디어는 충무로 대로변 한가운데에 있었다.
엘리베이터 옆에 붙어 있는 안내판을 보니, 이 큰 건물에서 3층이나 임대해서 쓰고 있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대형 제작사였다.
그런 곳에서 하는 짓이 겨우 작가 지망생 원고를 표절하는 것이라니.
그것도 특이한 소스 몇 개 빼먹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대본을 그대로 갖다 쓰는 대범함까지 보인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방송계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도가 지나쳤다.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다는 뜻이거나, 너무 많이 해 온 짓이라 감각이 무뎌졌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변호사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강민재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내기하실래요?”
“무슨 내기.”
“저녁 내기요. 푸른섬 미디어가 합의 보려고 한다, 잡아땐다. 서로 다른 거에 거는 거죠.”
“내가 먼저 골라도 되나?”
“그러세요.”
“잡아땐다.”
“아이씨. 그럼 자동으로 제가 합의 유도네요.”
강민재는 선수를 빼앗겼다며 씩씩거렸다.
누구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의뢰인의 사건을 두고 내기를 하는 것은 썩 좋은 태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반대로 보면, 한낱 내깃거리가 될 정도로 이 상황이 기가 찬다는 뜻이기도 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푸른섬 미디어 로비 데스크 앞에 도착하자, 직원 한 사람이 일어나며 물었다.
“차주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왔습니다.”
강민재가 명함을 건네며 대답하자, 직원이 자신을 따라오라며 앞장서서 걸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사무실에는 직원들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오늘 갑작스레 발표된 고소 건으로 직원들이 모두 야근을 피할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이쪽입니다.”
세미나실 안에는 이미 푸른섬 미디어 측 사람들과 법무법인 태광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복장을 보니, 이쪽 두 명이 변호사들인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직원들인 것 같은데.
“안녕하세요.”
변호사 배지를 단 젊은 여자가 우리에게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나는 그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남자였으니 그녀의 곁에 앉아 있는 젊은 변호사일 것이다.
아마 어쏘일 것이고.
“차주한 변호사님, 반가워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활약상이 대단하시던데요. 듣던 대로 미남이시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간단히 명함을 교환하고 맞은편에 자리했다.
유정원 변호사라.
예상대로 저작권 전문이고, 나잇대는 나랑 비슷하거나 조금 아래가 아닐까 싶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간 접점이 전혀 없었던 모양이었다.
연수원 시기도 겹치지 않는 듯했다.
“강 변. 오랜만이야.”
“안녕하셨어요.”
유정원은 강민재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강민재 역시 한때 태광에 몸담았으니 서로 아는 사이인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음, 우선 간단하게 소개부터 할까요. 이쪽은 푸른섬 미디어 김현철 대표님. 그리고 이쪽은 정혜진 작가님이세요.”
“차주한입니다. 이쪽은 함께 사건을 맡은 강민재 변호사고요.”
“최 변. 블라인드 좀 내리고 올까?”
우정원이 곁에 앉은 어쏘 변호사에게 말하자, 그가 빠르게 세미나실 유리 벽에 블라인드를 치기 시작했다.
아직 직원들이 남아 있고, 오늘 나온 기사 때문에 정신없을 텐데 변호사가 드나드는 모습을 보여 좋을 것은 없겠지.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그녀는 대화의 주도권을 잡는 데에 능한 사람이었다.
별일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러한 일면들은 변호사에게 꽤나 중요한 포인트다.
특히 의뢰인 앞이라면, 자신이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으며 상대 변호사는 수동적으로 견인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 줄 수 있다.
한층 신뢰를 높이기에 좋은 전략이었다.
“그러죠. 우선, 시작하기에 앞서 의례적인 질문 한 가지씩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김현철과 정혜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변호사인 제가 대신 답변드리죠.”
“아뇨, 법리적인 지식이 필요한 부분은 아니라서. 앞서 말씀드렸듯 의례적인 질문입니다.”
“법리적인 지식이 필요하지 않더라도, 법률적인 대화를 나눌 때 변호사가 동행하는 이유가 있는 법이죠.”
유정원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작가님. 저희 사무실의 의뢰인인 나은성 씨의 시나리오, <우리 사이>를 표절하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이 갑작스러운 만남을 승낙한 이유는 두 가지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본래라면 피고소인의 애를 태우기 위해서라도 일정 시일이 지난 후 만났겠지만, 사실 확인이 급선무였다.
“작가님. 답변하실 필요 없습니다. 차 변호사님, 보도 자료 내보낸 대로입니다.”
“알고 있습니다만, 본 사안의 쟁점이니까요. 의례적인 질문이니 편하게 답변해 주십시오.”
정혜진은 유정원의 눈치를 보았다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런 적 없습니다.”
[거짓]역시.
나는 안도했다.
대본을 보고도 충분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지만, 만일의 경우는 있는 법이다.
심증이 확신으로 바뀌는 때.
사실을 검증하는 이 순간처럼 만족스러울 때가 없다.
내가 사건을 맡아도 될지, 내지는 사건을 계속 맡아도 될지.
그 해답이 나오는 순간이니까.
“한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두 분께 같이 질문드리죠.”
“차 변호사님.”
“역시 의례적인 질문입니다. 예, 아니오의 대답으로 제가 무언가를 확인할 수는 없으니까요.”
나는 경계하는 유정원을 진정시켰다.
물론 예, 아니오의 대답으로 나는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녀는 알지 못하는 영역이다.
“나은성 씨의 시나리오 <우리 사이>가 2차 선발까지 올라간 적이 있습니까?”
“차 변호사님? 굉장히 무례하시다는 거 알고 계신가요?”
우정원이 책상을 두드리며 물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들이 보도 자료로 내놓은 대답들이었고, 그들은 이미 말을 맞춰 놓은 상태였다.
얼마든지 대답해도 상관없는 질문들이고, 정혜진은 몹시 불쾌해하며 대답할 것이다.
“올라간 적 없습니다. 분명히 선발되지 않아서 제가 그 시나리오를 살펴볼 수 없었다고 보도 자료에 낸적이 있는데요.”
[거짓]양혜진은 몹시 불쾌하다는 듯 딱딱하게 대답했다.
2차 선발에 올라간 작품은 모두 인쇄소로 보내진다.
적어도, 태식이가 무의미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제 질문 끝나셨나요, 차 변호사님.”
“네.”
유정원은 단순히 보도 자료와 같은 대답을 내놓는지 체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길 것이다.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더라도 상관없을 정도의 이득을 취했다는 것을 알지 못할 터.
나는 당장 태식에게 연락해서 하루라도 빨리 인쇄 이력을 찾아내라고 채근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았다.
“방송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신 거로 알고 있는데. 사실상 의미 없는 신청이라는 건 알고 계시겠죠?”
유정원이 제법 여유로운 말투로 물었다.
시사 뉴스 프로그램에서 인권을 침해한 것도 아니고, 당연히 일주일안에 금지 처분이 날 리가 없었다.
설마, 내가 그것도 모르고 가처분 신청을 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거, 꽤 많이 얕보이고 있는 모양이다.
“계속하시죠.”
“재판 역시도, 솔직하게 다 까고 말씀드리죠. 저는 저작권 분쟁만 10년째 맡고 있습니다. 제가 들어간 크고 작은 재판만 해도 300건이 넘고요. 이 재판이 무리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실만한 분이, 이렇게 무리하게 상황을 크게 벌이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나은성 씨만 상처 받을 겁니다.”
유정원은 노골적으로 신참 변호사인 나를 깔보고 있었다.
변호사도 신참에, 민사 재판도 처음인 내가 10년 경력의 그녀에게는 우스워 보일 만도 했다.
“푸른섬 미디어에서 제작한 <당신과 나의 거리>는 고소인 나은성 씨의 작품 <우리 사이>를 표절하지 않았습니다. 재판에 간다면, 보다 명확히 밝혀지겠지요.”
“그렇다면 푸른섬 미디어 측에서는 나은성 씨의 시나리오 <우리 사이>와 <당신과 나의 거리> 사이에서 발생한 수많은 유사점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내 물음에 유정원이 싱긋 웃었다.
“전부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일부 비슷한 점들도 있다고 여겨집니다만……. 어디까지나 장르상의 클리셰라는 틀 안에서, 같은 설정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빚어진 유사점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들을 제외하면 완전히 다른 작품이죠. 지망생인 나은성 씨가 표절을 당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합니다. 잘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초보 작가의 흔한 자의식 과잉이라고 해야 할까요.”
만일 나은성이 이 자리에 나와 있다면, 분명 유정원의 말에 크게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녀를 데리고 오지 않기를 천만다행이었다.
“나은성 씨가 시놉시스를 탈고하신 게 언제죠?”
“2006년입니다.”
“보도 자료에서 설명한 대로, 정혜진 작가님이<당신과 나의 거리>에 대해 처음 PD와 논의한 것도 2006년입니다. 2006년에 나은성 씨가 외부에 시나리오를 공개하신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네. 그렇다면 역시……. 정혜진 작가님이 하필이면 연고도 없는 작가 지망생 나은성 씨의 컴퓨터를 해킹한 뒤 파일을 뒤져서 <우리 사이>의 시놉시스를 본 게 아니라면, 표절이 성립될 수 없겠군요.”
유정원이 안타깝다는 듯 웃었다.
비꼬는 투가 썩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 저런 것도 나름 대로의 작전이라는 것을 아는 이상 타격은 없었다.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강민재는 좀 다른 것 같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