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42)
너희들은 변호됐다-42화(42/641)
“이것은 방영된 <당신과 나의 거리> 19화, 20화 대본입니다.”
나는 강민재가 렌즈 아래 내려놓은 대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미리 찍어 두었던 방영되지 않은 19, 20화 대본입니다.
그 옆에 나란히 제본된 대본이 놓였다.
그러자 정혜진과 유정원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당연하다.
이것은 준비 서면에서 일부러 빼놓은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답변서에 영감 노트를 넣은 순간부터, 나는 이것을 미리 까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의 있습니다! 사전에 제출되지 않은 증거입니다.”
“오늘 서증 제출하였으니, 재판이 끝난 후 서면으로 다시 제출하겠습니다. 그럼,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계속하세요.”
급히 준비된 증거라며 내밀었다면, 재판장은 대번에 기각했을 것이다.
표정이 몹시 떨떠름했다.
재판장이 협조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니, 새삼스럽게 불만을 표할 것은 없지만 말이다.
“<당신과 나의 거리>는 전주에 미리 다음 주 방영분을 찍어 놓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19, 20화는 급하게 촬영되어, 배우들은 방영 당일까지도 현장에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띄운 것은 출연 배우들의 촬영 스케줄이었다.
곧이어, 떡밥이 회수 되지 않았다며 공방을 벌이던 게시판 캡쳐가 화면에 떠올랐다.
“19, 20화는 원고가 입장을 밝힌 뒤 다급하게 수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18화까지 극중에서 자주 노출되던 이른바 떡밥. 즉, 복선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은 채로 결말을 맺었습니다. 방영된 19, 20화는 분명 원고의 대본과는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사이의 어린 시절의 구원 서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나는 먼저 쓰여진 19, 20화 대본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본래 촬영되었던 19, 20화는 원고의 대본과 똑같이 흘러갑니다. <당신과 나의 거리>의 여자 주인공은 ‘당신이었어요? 그때, 나를 칠흑 같던 빙하 속에서 꺼내 준 게 당신이었냐고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원고의 대본에서 여자 주인공은, ‘사장님이었어요? 나를 빙하처럼 두껍고 단단한 불길 속에서 꺼내준 게 당신이었냐고요.’라고 말합니다.”
나는 대본을 내려 놓았다.
불길을 빙하로 비유하는 것은 결코 흔치 않다.
지옥 따위로 비유하면 모를까.
나는 그 부분을 설명하며 변론을 이어 갔다.
“그리고 이 내용으로 갔다면 복선은 완벽하게 설명되며 완결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피고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미 끝난 촬영을 다시 시작해서 이제라도 핵심 과거 서사를 바꿔 보자는 수작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 더.”
법정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정혜진과 유정원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피고는 공모전에 출품한 원고의 작품은 1차 선발에서 떨어져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원고 역시 공모전 외에는 대본을 공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피고는 어떻게 하필 원고의 각본과 내용이 같은 것을 알고 방영 전에 다급히 수정할 수 있었을까요?”
방청석에 앉아 있던 기자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피고는 원고의 각본을 미리 접한 것이 틀림 없습니다. 들키지 않을 줄 알고 계속 베끼다가, 후반부에 다다라 원고가 고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히자 다급하게 각본을 수정한 것입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 기자들은 빠르게 수첩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무거워 보이는 노트북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리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다시 착석했고, 강민재는 내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변호사님, 멋있어요.”
곧이어, 유정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어쏘 변호사가 빠르게 강민재가 있던 자리로 나가 렌즈 아래 서류들을 분주히 준비했다.
그동안 유정원은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훑더니, 나를 흘긋 바라보았다.
입술이 묘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제 그 증거들이 나올 때가 됐다.
준비 서류가 여러 장 오간 재판은 이미 내보인 증거들을 확인하는 자리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까.
아직도 미스터리를 풀지 못한 그 증거를 어떻게 맞받아쳐야 할지, 아직도 감이 오지 않는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원고 대리인의 주장은 터무니 없는 추론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피고는 원고의 각본을 보기 전에 <당신과 나의 거리>의 원안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을제2호증, 제3호증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화면에는 이미 접하여 익숙한 증거들이 올라왔다.
PD와 함께 만든 시놉시스 제작 일지, 그리고 영감 노트.
“시놉시스 제작 일지 파일을 보시면, 파일 생성일자가 2006년 7월입니다. 또 영감 노트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피고는 2006년 9월 경 <당신과 나의 거리>의 배경이 되는 이양구 삼창동을 지나다가 우연히 이 풍경을 보고 노트에 수기로 묘사하였습니다. 피고는 큰 줄기만 있던 드라마의 세부 설정을 이날부터 제대로 짜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답변서에서는 사본이었지만, 화면에서 보이는 것은 원본이었다.
노트 표지에는 2006년이라고 적혀있었다.
플래그로 표시된 9월로 페이지를넘기자, 그 사이에서 이양구 삼창동에 방문해 묘사한 부분 드러났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육안으로 보아서는 중간에 종이를 끼워 넣은 것 같지는 않다.
노트 제본 본드를 녹였다가 종이를 삽입한 뒤 다시 굳히는 방법을 썼다고 가정하더라도, 이상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종이에 옅은 때가 묻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앞 페이지에서 묻은 볼펜 잉크까지 번져 있는 것으로 봐서는 정말로 순차적으로 쓴 일기 같다.
그렇다면 2006년이라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은가.
“특히 삼창동의 야경에 많이 보이는 붉은색에 영감을 많이 받은 피고는, 드라마에도 붉은 색감을 많이 활용해 줄 것을 당부했고, 실제로 드라마 역시 그렇게 제작되었습니다.”
화면은 바뀌어 붉은 색감이 많이 활용된 드라마 화면이 나왔지만, 나는 그곳에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내 눈은 오로지 그 영감 노트를 향해 있었다.
“또한, 이 노트가 정말로 2006년에 피고가 실사용하던 노트가 맞다는것을 증명하는 영상입니다. 을제9호증입니다.”
어쏘 변호사는 2006년에 방영되었던 정혜진 각본의 드라마 메이킹 영상을 틀었다.
촬영 현장에 방문한 정혜진이 감독과 이야기하는 중이었고, 그녀에 손에는 저 노트가 들려 있었다.
화면 속의 노트는 모서리에 접힌 자국과 때, 볼펜 긁힌 자국 따위가 있어 사용감이 물씬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법정에 증거품으로 나온 저것도 동일했다.
“원고가 푸른섬 미디어 공모전에 각본을 제출한 것은 그 다음 해, 2007년 3월입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피고는 원고의 각본을 표절할 수 조차 없었음을 주장합니다.”
* * *
인터넷은 전부 재판 이야기로 도배되었다.
긴 재판에 지친 나는 사무실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다리를 올려놓고 있었고, 강민재는 정신 없이 사무실을 빙빙 돌아다녔다.
그 모습이 눈에 거슬려서,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가만히 좀 있어.”
“……낌새가 안 좋아요.”
“뭐가. 기사가 나쁘게 났어?”
“아뇨? 그냥 푸른섬에서 돈 주고 쓴 것 같은 기사랑 우리 불쌍하다는 기사랑 비율 비슷하게요.”
“그런데?”
“재판이 찝찝하게 끝났잖아요. 결국에 우린 그 영감 노트가 제대로 된 증거가 될 수 있는지, 조작 가능성은 없는지 이의 신청만 하고 판결 기일 잡혔으니……. 아. 미치겠네, 정말.”
나는 눈을 감고 법정에서 보았던 증거 노트를 떠올렸다.
굳이 능력을 쓰지 않아도 그 증거가 조작되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대체 어떻게 그것을 입증해야 할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었다.
“변호사님, 지금 잠이 오세요? 재판장도 가뜩이나 그쪽 편인데! 판결 어떻게 날 줄 알고 그렇게 잠을,”
“잠을 자려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거니까 조용히 해.”
“꼭 자려다가 들킨 사람들은 생각하는 중이라고 하지.”
강민재가 구시렁거렸다.
이제 좀 길게 봤다고 말대꾸까지 한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어쨌든, 그 노트가 조작임을 밝혀내는 것이 키 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 영감 노트를 자세히 봐야겠어.”
변론 재개 신청을 할 생각으로 그 영감 노트 사본을 요청했으니, 그쪽에서도 켕기는 티를 내기 싫어서라도 보낼 것이다.
“……그리고 태식이, 이 자식은,”
쿵!
그때, 갑자기 문이 강하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강민재가 그쪽을 바라보았고, 나 역시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가 보고 와.”
“네.”
강민재가 사무실 문을 열자, 그 앞에 커다란 덩치 하나가 서 있었다.
태식이다.
“사장님?”
“아니, 저기, 뭐냐. 변호사님 기분이 더러우신 것 같아서 다른 날 오려고 했는데요…….”
“들어 와.”
나는 소파에 당겨 앉으며 말했다.
아직도 벗지 못한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했다.
피곤했지만, 어쨌든 태식과 정산해야 할 일도 있다.
“재판이 좀, 별로였나 봅니다.”
태식이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강민재는 말도 말라며 나 대신 재판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이게 다 제가 그 인쇄본을 못 찾아서 일어난 일입니까?”
어울리지 않게 죄책감을 느낀 듯, 태식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쇄본이 있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없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오늘 제대로 눌러 주었어야 했다.
그 영감 노트. 영감 노트만 아니었더라도.
“태식아.”
“예, 변호사님.”
“운전 좀 해라. 강 변은 지쳤을 테니까 이만 퇴근하고.”
나는 책상에 높게 쌓인 서류를 뒤져 그 안에서 우선 확보해 둔 영감노트 사본을 집어 들었다.
강 변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감 노트가 수상하니 내가 직접 삼창동에 가 볼 생각이었다.
태식이 어리둥절한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자, 강민재가 우리 뒤를 따라오며 물었다.
“어디 가시는데요?”
“퇴근하라니까.”
강 변에게 삼창동에 또 간다고 하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빠트릴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사항이 없었는지 체크하고 싶을 뿐이다.
“따라 와.”
내가 태식에게 차 키를 던져 주자, 강민재 역시 더 우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따라오겠다고 우길 줄 알았는데, 웬일이지.
그 역시 많이 지쳤을 테니,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충분히 바쁘게 달려왔다.
강민재는 이제 조금 쉬어야 한다.
“삼창동으로 모셔다 드리면 됩니까?”
“그래. 달동네 쪽으로 가.”
나는 태식이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실으며 삼창동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