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429)
너희들은 변호됐다-430화(429/641)
#430화
강수일은 나에게 강관웅이 남긴 문서 원본을 넘겨주기 전 모든 문서를 스캔해서 카피해 두었다.
강민재는 이 문서 스캔본을 최종현과 조봉준, 그리고 오 사무장에게 넘겼다.
비록 하룻밤 동안 본 것이지만, 몇 시간은 훑어봤는데도 나 혼자서 이 문서 중 피해자의 신상명세서 3분의 1밖에 보지 못했다.
각자 살펴보는 것보다는 여러 명이 자료를 나누어서 보는 것이 효율적이다.
물론 이렇게 초견이 끝나면 인원 모두가 전체 문서를 보긴 해야겠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카피본을 모두가 가지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에게 백업되니 자료를 유실할 걱정도 없다.
강관웅이 우리에게 남긴 문서는 크게 세 가지 틀로 나뉘어 있었다.
우신 측에서 어떻게 여성들을 꾀어내었는지에 대한 조사 자료와 출입국 기록, 그리고 그렇게 일본으로 보내진 사람들의 신상명세.
“봉준 형님이랑 종현 형님 있는 단톡방에 파일 보냈다고 했더니, 컴퓨터 화면으로 보려니까 눈 빠진다고 출력 좀 해다 주면 안 되냐는데요?”
“하긴 그렇겠네. 우리 것도 출력해야겠다. 종이는 넉넉해?”
“하나, 둘, 셋, 넷. 네 박스 남았어요. 충분해요.”
강민재는 인쇄 준비를 시작했고, 나는 커피를 내리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강수일이 나에게 강관웅이 보관하던 자료 원본을 주긴 했지만, 그걸 내가 가지고 있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강 변.”
“네?”
“이따 퇴근하는 길에 우리 집에 들러서 자료 원본 가져가.”
“네? 왜요? 그거 할아버지가 변호사님 주라고 하신 건데. 그래서 변호사님도 그날 가져가신 거 아니에요?”
강민재가 의아하다는 듯 묻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집에 두는 것보단 강 변 집에 두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아.”
보안 문제 때문에 큰돈을 들여 비싼 빌라로 이사하긴 했지만, 일전에 내가 납치되었던 일을 생각하면 대한민국 하늘 아래 우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비록 강관웅은 없지만, 그래도 전 대통령의 사저라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진 강민재의 집이 그나마 가장 안전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어르신은 청와대에서 그 자료 가지고 나오셔서 30년 동안이나 사저에서 보관하셨잖아. 개나 소나 털어 갈 것 같은 우리 집보단 낫지.”
“하긴. 전 몰랐는데 유품 정리하면서 보니까 제가 몰랐던 금고가 있더라고요. 저도 유서가 공개된 다음에야 알았어요. 수일이 형은 지금도 모르고요.”
“그런 게 있었어?”
“네. 거기다 둬야겠어요.”
“아, 그러고 보니 강 실장님은 상속도 포기하고, 이제 비서관 월급도 안 나올 텐데, 어떻게 지내세요?”
오 사무장이 프린터에서 갓 나온 출력물을 꺼내며 물었다.
그러자 강민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오 사무장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런 게 궁금하죠? 뉴스에서 안 알려 주는 이야기들.”
“아, 제가 실례한 건가요? 그냥, 그냥 아무 뜻 없이 한 말인데.”
오 사무장이 깜짝 놀라 안절부절못하자, 강민재가 오 사무장의 팔뚝을 치며 웃었다.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음……. 원래 할아버지가 수일이 형 앞으로 주식이랑 부동산을 꽤 남기셨거든요. 근데 수일이 형이 포기한 거고. 그러니까 저는 대번에 억만장자가 됐지만 그건 다 제 돈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렇네요.”
“그래서 형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형은 계속 안 받겠다는 입장이에요. 그냥 정 그렇게 신경 쓰이면 생활비나 하게 집사라고 생각하고 월급 달라던데요.”
“대단하시네요, 강 실장님도.”
“그러게요. 그리고 형 말로는 비서관 월급 나온 거 차곡차곡 고대로 모아 놨다가 할아버지가 거래하는 자산 운용사에 맡겨놨는데 돈이 많이 불었대요. 진짠지는 모르겠지만?”
강민재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하자, 오 사무장은 그간 강수일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는지 하나둘씩 묻기 시작했다.
“강 실장님은 결혼 안 하신대요? 인물 좋으시던데.”
“왜요? 소개해 주실 분 있어요?”
“아니, 지금 당장은 생각 안 나지만 결혼할라치면 못할 것도 없겠던데요. 이제 어르신도 안 계시고, 변호사님만 있잖아요. 변호사님도 나중에 결혼해 버리면 혼자 덜렁 남는 건데, 아까워서 그러죠.”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보면 오 사무장도 아저씨는 아저씨다.
“제 생각인데, 저도 왠지 수일이 형이랑 같이 그 집에서 늙어 갈 것 같아요.”
“예? 아니, 변호사님이 어디가 어때서요. 변호사님이야말로 인물 훤칠하지, 학벌 좋지, 직업 좋지, 재산 많지, 집안 좋지, 키도 크고.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는데? 만나자는 사람 없어요?”
“저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좀 부끄러운데, 만나자는 사람은 있긴 하죠. 근데 별로 만남이 이어지지 않더라고요. 좀 귀찮기도 하고……. 때가 되면 좋은 짝 만나겠죠. 그리고 그 말씀은 저보다 우리 대표님한테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우리 변호사님은 저보다 나이도 많은데 아직 독신이잖아요.”
강민재가 데스크에 기대서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나를 돌아보자, 오 사무장도 나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따갑게 나를 향해 날아오자, 나는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렇지. 우리 변호사님도 인물 심하게 좋지, 학벌 좋지, 직업 좋지, 재산 많지, 키도 크지……. 아니, 뭐 장점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데 대체 장가를 왜 안 가요?”
하.
요즘 부모님이 조용해지니까 갑자기 오 사무장이 난리구나.
“저는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이미 해 봤습니다.
……라고는 못하겠고.
이전 삶의 결혼 실패로 나는 처절히 깨달았다.
물론 조아영의 잘못이 더 컸지만,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때 최종현은 나에게 내가 조아영을 아주 열렬히 사랑했더라면 일보다 우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나는 솔직히 전처를 열렬히 사랑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녀와 결혼했던 까닭도 반은 적당한 혼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와 함께 살고 싶다는 마음도 분명히 있었다.
만일 가치관 차이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조아영의 외도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이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랬다면 그 결혼 생활은 복수에 미쳐 바쁜 나와는 달리 조아영에게는 단조롭고 외로운 시간이었을 테지만.
처음에 나는 내가 복수에 미쳤기 때문에 한 사람의 배우자라는 또 다른 역할을 수행할 여유가 없었던 거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다르다.
나는 그냥 결혼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다.
복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애정을 쏟고, 내 시간을 나누는 법을 모르니까.
감정 표현도 잘 못 하고, 매력을 어필하는 방법도 모른다.
여러모로 섹슈얼한 측면에서의 남성으로는 꽝이다.
“아니, 왜 없어요? 저, 저는 가끔 변호사님들 중에 한 분 사위로 맞는 상상도 하는데…….”
오 사무장이 부끄럽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오 사무장의 둘째 딸이 직장 생활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사위가 된다니…….
도적이 되라는 소린가?
“저랑 변호사님 중 누구를 더 사위로 맞고 싶으신데요?”
강민재가 경쟁심을 느낀 듯 오 사무장에게 은근히 물었다.
그러자 오 사무장은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흠……. 두 분은 조건 부분에서는 다 완벽해서 차치하고, 성격만 생각한다면……. 우리 강 변호사님은 성격이 좋으셔서 우리 딸이랑 알콩달콩 잘 살 것 같고.”
“그죠? 변호사님은 표현을 너무 안 해 줄 것 같아요.”
“우리 딸이 좀 외로워할 것 같기도 해요.”
“그럼 저 낙점이에요?”
“아, 근데 강 변호사님은 좀 우리 딸이 귀찮아할 것 같기도 합니다. 차 변호사님처럼 담백한 사람을 더 좋아할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귀찮아한다니요! 저 담백하거든요?”
강민재가 발끈해서 소리치자, 오 사무장이 진심이냐는 듯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솔직히 강 변호사님은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굴잖아요. 우리 딸은 너무 들이대는 남자는 싫대요.”
“제가요? 하, 제가 언제요.”
“모르시면 됐습니다. 아무튼, 몰라요. 두 분 중에 누구라도 우리 딸 좋다고 하면 저야 가문의 영광이죠.”
“강 변이면 몰라도, 저는 따님하고 결혼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내 말에, 오 사무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쓰읍, 변호사님 정도면 나이 차이가 좀 나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액면가는 별로 차이도 안 나고요.”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비행기 그만 태우십시오.”
“아무튼 우리 딸은 됐고, 두 분 다 장가가셔야죠. 딸, 아들도 낳아서 오순도순 살아야지. 자식 키우는 재미가 또 쏠쏠해요.”
“전 저 같은 자식 키우기 싫은데요.”
“저도 그렇습니다.”
나와 강민재의 말에 오 사무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전 변호사님들 같은 자식들이면 100명도 키우겠습니다. 워낙 두 분 다 주변에 대단하신 분들이 많아서 잘 모르시네요. 두 분 다 이렇게 잘 크셨잖아요. 공부도 잘하셨고, 돈도 많이 버시고. 결혼을 안 하는 게 좀 걱정거리가 될 것 같긴 하지만 그 정도야, 뭐.”
“몰라요. 아무튼 저는 그냥 수일이 형이랑 늙어 죽을 팔자 같아요, 가만 보니까. 연애 안 한 지 너무 오래됐어요.”
“제가 어디 소개 자리라도 알아보겠습니다. 차 변호사님도요. 아, 그러고 보니 이 검사님이 그때 그 태광 다니시던 조 변호사님? 이라는 분이랑 뭐 소개팅하셨다고 하시던데. 뭐 진전 없었어요?”
“태광 조 변호사요? 혹시 그 김화영 씨 사건 때 변호인단에 있던 사람? 그때 소개팅하셨던 분이 그분이에요?”
강민재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리고 태광의 인간과 만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불쾌하다.
본인은 태광에 몸담았던 주제에 나를 태광 사람 만난 취급하다니.
“진전 없었습니다. 조 변호사는 저랑 안 맞습니다.”
“잠깐. 가만 보니까 두 분 다 눈이 너무 높으신 거 아니에요?”
“저 눈 하나도 안 높아요.”
강민재가 손을 마구 저으며 말했다.
나는…….
나는 잘 모르겠다.
내 눈이 높은지, 낮은지.
연애를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내가 먼저 상대가 마음에 들어서 대시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참나. 진짜 이해가 안 가는 분들이네요.”
“뭐가 됐든 저는 지금 연애할 때가 아닙니다.”
내가 프린터로 다가가 어느덧 높이 쌓인 서류들을 들어 올렸다.
“고상준 감방 보내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도요.”
강민재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와, 프린터에서 불날 것 같아요.”
뜨겁게 달궈진 종이들을 뱉어내고 있는 프린터를 만져 보던 강민재가 손을 털며 말했다.
“12퍼센트 남았대요. 이거 인쇄 다 하면 퇴근할까요?”
“그러자.”
강민재는 인쇄된 종이들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분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 사무장은 이상하게, 강민재를 도와주지 않고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사무장님, 저 안 도와주세요?”
“잠깐만요.”
오 사무장은 무언가 타이핑하는 데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강민재는 오 사무장의 뒤로 슬쩍 다가가 오 사무장의 휴대폰 화면을 훔쳐보았다.
“뭐야! 왜 사모님한테 우리 소개팅 이야기를 하고 계세요!”
“제가 너무 아까워서 그럽니다. 두 분의 젊음이. 내가 두 분이었으면 지금쯤,”
“싫다니까요!”
나와 강민재는 모처럼 동시에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