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43)
너희들은 변호됐다-43화(43/641)
이양구 삼창동에 위치한 달동네는 드라마에서 그려진 그대로였다.
차로 올라오는 길은 울퉁불퉁했고, 사람들이 오가는 계단은 그 가파르기가 낭떠러지를 연상시켰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펜스 아래 내리막 길에는 다닥다닥 오래된 빌라들이 붙어 있었다.
마치 80년대 같았다.
그러다 평지에 다다르면, 삼창동은 마치 다른 세상처럼 현대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대로변에는 간헐적으로 붉은 설치등이 깜빡이는 고층 빌딩이 늘어서있다.
그 뒷골목에는, 네온사인이 빛나는 상권이 발달해 있었다.
드라마에서 내내 비추어 주던 전경이라 그런지, 처음임에도 마치 몇번 와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게 영감 노트에 나와 있던 고층빌딩이고.”
펜스를 따라 걸으며 정혜진이 이노트를 작성했을 장소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분명 오래 전에는 세련된 초록색 벤치였을 이 나무의자는, 어느덧 칠이 벗겨져 남루했다. 굳은 페인트 자국이 나무껍질에 들러붙어 거치적거렸다. 나는 그 벤치에 앉아서 펜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주황색 가로등이 깜빡이는 길을 따라 걷자, 점점 노트 속 벤치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벤치에는, 누군가 앉아있었다.
“강 변?”
“……변호사님?”
벤치에 앉아 골몰하던 강민재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갑작스럽게 마주친 그를 보고 당황을 금할 수 없었다.
어쩐지 끝까지 따라오겠다고 우기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태식 역시 마치 귀신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그도 내가 강민재를 두고 태식에게 운전을 시킨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가 이곳으로 오는 내내 왜 자신에게 기사 노릇을 시키느냐며 투덜거리기에,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저는 그냥……. 변호사님은요?”
“그냥, 뭐. 대답 먼저 해.”
“혹시, 제 조사에 미흡한 점이 없었을까 싶어서 한 번 더 와 봤……. 변호사님도 마찬가지 시군요.”
강민재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역시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눈치였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해.”
“…….”
“내가 직접 여기 왔다고 해서 뭔가를 건지지 못할 수도 있어. 나도 사람이니까.”
나는 강민재가 불필요한 죄책감이나 무력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
강민재는 충분히 능력 있는 사람이다.
어쩌면 내가 얻으려는 ‘선한 변호사’ 타이틀에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무엇보다, 그는 언제나 밝은 사람이니 딱히 풀이 죽은 모습을 보고싶지 않기도 했고.
“변호사님이 찾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
“제 조사가 미흡했다는, 정혜진의 그 노트가 조작이라는 증거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변호사님이 찾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강민재는 벤치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여전히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럼 변호사님 밑으로 들어온 제 결정에 더 확신이 생기잖아요.”
배울 게 많다라.
나는 담배를 끄며 강민재의 뒷모습을 흘긋 바라보았다.
내가 생각만큼 좋은 사람이 아님을, 다른 어떤 것보다 내 목적이 가장 중요한 사람임을,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지금은 잠시 위장하며 쉬어 가고 있을 뿐임을 그가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처음엔 그를 잘 키워서 동료로 삼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에는 잘 모르겠다.
그런 위험한 일에 저런 놈을 끌어들여도 되는 것인지.
“저 건물이요. 정혜진 노트에도 가장 많은 비중으로 묘사돼 있어요.”
강민재는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나는 강민재가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가 계속 주시하던 것도 저 건물이었다.
“저기 꼭대기 전광판에 콜라 광고가 걸려 있었다는 대목이 있거든요. 그리고 제가 조사해 본 결과, 그때 정말로 그 콜라 광고가 걸려 있었대요.”
정혜진의 영감 노트에는 저 건물에 걸린 광고판 이야기가 꽤 많았다.
저 건물에 광고판은 총 다섯 개.
그중에 묘사된 것은 하나뿐이다.
나는 외울 정도로 많이 본 노트를 눈으로 읽어 내렸다.
[……15개의 붉은 빛이 깜빡이는 고층 빌딩에는 마치 색깔을 맞춘 듯 빨간색으로 점철된 콜라 광고가 흘러나오는 전광판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대로변 횡단보도에 놓인 신호등의 빨간 등. 자동차들의 빨간 불빛……]붉은색에 초점을 맞춘 정혜진의 노트는, 마치 여태까지 드라마에 나온 복선인 ‘화염’을 염두에 둔 듯했다.
복선을 그럴듯하게 설명하진 못했지만, 어쨌든 계속 등장한 이유를 만들어 내야 했기 때문에 일부러 넣은 대목이 아닐까 싶다.
인터넷 게시판에도 그런 추측글이 더러 올라왔었다.
“콜라 광고는 그렇다 치고. 자동차 불빛도 빨간색이 당연히 있을 거고. 신호등은?”
“신호등도 확인했어요. 작년에도 저 자리에 있었대요.”
계속 건물을 주시하며 강민재의 설명을 듣고 있는데, 건물 고층에 깜빡이는 불빛이 문득 거슬린다.
밤에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위해, 고층 빌딩에는 깜빡이는 붉은 등을 설치한다.
계속 불이 들어오는 것보다, 저 깜빡이는 것이 더 눈에 잘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 넷, 여섯, 여덟, 열, 열넷, 열여섯…….”
하지만 지금 건물에서 깜빡이는 설치등은 16개다.
정혜진이 15개라고 한 것과 달리.
나는 강민재가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다가 휴대폰 문자로 보내 준 저 건물 사진을 열었다.
이 사진에서도 정혜진의 영감 노트에서처럼 붉은 설치등이 15개다.
사각형 건물의 네 꼭짓점마다 하나씩 불이 들어오는 구조고, 그게 총 4세트.
총 16개의 불빛이 들어와야 한다.
강민재가 사진을 찍어 준 것은 그 영감 노트를 받아 본 다음의 일이다.
정혜진이 영감 노트를 조작한 날에서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이곳에 왔다는 뜻이다.
하지만 저렇게 항공법에 의거해 설치한 등을 오랫동안 고치지 않고 방기할 리가 없지 않은가.
평소에는 지금처럼 정상적으로 16개의 불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정혜진의 노트 속 2006년 그날.
저 불이 16개 모두 깜빡이고 있었다면?
“변호사님, 뭐 하세요?”
“저기 깜빡이는 붉은 조명.”
“항공법 때문에 설치한 등이잖아요?”
나는 건물을 가리켰다.
“잘 봐. 원래는 16개가 들어 와야해. 4X4는 16이니까.”
“어? 그러네요? 하나가 안 들어오네요?”
“정혜진의 노트에도, 강 변의 사진에도 15개만 들어 오고 있어. 그런데, 2006년 그날, 16개가 다 정상적으로 깜빡였다면 어땠을 것 같아?”
“하……. 조작이라는 증거네요.”
정혜진이 이곳 시야에서 보이는 등만 세었기 때문에 설치등 개수를 하나 누락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 반대편 모서리에 설치된 4개가 전부 보이지 않아야 했고, 그렇다면 12개의 등이라고 했어야 한다.
“휘어어어어!”
그때, 갑자기 강민재가 함성을 질렀 다.
그리고 소리를 내지르며 골목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변호사님.”
그런 그를 뒤로하며, 태식이 문득 입을 열었다.
“저, 찾아보겠습니다.”
“뭘.”
“출력소에서, 증거요. 인쇄했다는 증거.”
“됐어.”
나는 잘라 말했다.
이것이 표절했다는 증거는 되지 못되지만, 적어도 피고 측에서 영감 노트를 조작했다는 증거로는 쓸 수있다.
그것으로 다시 한번 본질에 집중해서 붙을 수 있을 것이다.
태식은 이미 오랜 시간 출력소에서 시간을 많이 썼고, 그동안에도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깔끔하게 손을 털어야 하는 것이다.
미련만 남을 뿐이니까.
“아닙니다. 찾아볼게요. 두 분도 이렇게 노력하시는데, 저는 왠지 노력을 덜한 기분이라 찜찜합니다. 언제까지 시간이 있는 겁니까?”
나는 재판장이 고지했던 판결 기일 날짜를 떠올렸다.
그가 굳이 찾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그게 있다면 힘이 실리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니까.
“일주일.”
* * *
“변호사님!”
그로부터 며칠 뒤, 강민재는 사무실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나에게로 달려왔다.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나는, 하마터면 컵을 놓칠 뻔했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저 엄청난 걸 알아낸 것 같습니다.”
그는 서류 가방 안에서 제본된 종이 다발을 꺼내 들었다.
푸른섬 미디어에 요청했던 정혜진의 영감 노트 전체 사본이었다.
“그건 이미 설치등 그날 16개 다들어 와 있었다는 답 받았잖아.”
내가 대답했다.
이미 그것으로 그 영감 노트의 역할은 끝났다.
태식에게 주었던 일주일의 시간 사이에 인쇄본을 찾지 못하면, 바로 변론 재개 신청을 넣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영감 노트에서 새삼스럽게 더 알아낼 일이 있단 말인가?
“정혜진한테 버릇이 있었어요. 이 노트 사본 쭉 보면, 볼펜 똥이 뒤 페이지까지 번진 경우에는 뒤 페이지를 안 써요. 깨끗한 면만 쓴다고요.”
강민재는 플래그로 표시해 놓은 페이지를 모두 넘겨 보여 주었다.
과연, 잉크가 종이 뒤까지 번진 페이지는 모두 비어 있었다.
“……잠깐, 근데 그 페이지에도 잉크 묻어 있었잖아.”
내가 그에게서 사본을 받아 들며 물었다.
수백 번도 넘게 들여다보았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나는 그 자국 때문에 사용감이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네. 그 빈 페이지에 채워 넣은 것 같습니다. 제본 본드를 녹여서 중간에 삽입한 것도 아니고, 그냥 빈 페이지. 빈 페이지가 있어서 거기에 적어 넣은 거라고요!”
강민재가 마치 춤이라도 출 기세로 소리쳤다.
“하, 제가 오늘 새벽에 이거 발견하고 진짜 바로 전화드릴까 하다가 변호사님 주무실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요. 겨우겨우 시간 때우다가 바로 사무실로 왔다는 거 아닙니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설치등은 충분한 조작의 근거였지만, 이것까지 있다면 더욱 완전무결 한 근거가 된다.
이 증거물의 페기는 물론, 그들의 신뢰성까지 모조리 의심하게 만들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