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492)
너희들은 변호됐다-492화(492/641)
#492화
박영기를 만난 뒤로는 마음이 많이 가벼워진 한편, 모순되게도 무거워지기도 했다.
내가 잘 준비하기만 하면 계획대로 될 거라는 안도감과 더불어, ‘잘 준비하기만 하면 된다’는 전제조건을 달성할 수 있을지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란 사실은 안다.
제대로 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 아닌 막연한 걱정은 불안을 낳을 뿐이고, 그 불안감은 일을 그르치게 만들기 마련이다.
“오늘은 좀 늦잠 주무셨네요.”
어제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터라, 오전 느지막한 시간에 일어났다.
얼마 전에 병원에 가서 요즘 과수면이 있어 복용량을 줄이고 싶다고 했더니 약을 바꿔 주었는데, 이번엔 뭐가 문제인지 잠이 오지 않아서 해가 뜬 다음에서야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따지면 오래 잔 것도 아니다.
한 5시간 잤으려나.
“그렇게 됐네. 근데 그건 뭐야?”
태식은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 종이 가방이 놓여 있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며 묻자, 태식이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방탄, 방검 다 되는 조끼요. 경찰에서 쓰는 것보다 더 등급이 높대요. 이거 하나에 백만 원이 넘어요. 존나 비싸죠?”
들어 보니 꽤나 묵직했다.
어림잡아 3kg은 될 것 같은데.
“총까지 쏠까 싶긴 한데, 혹시 모르잖아요. 더 높은 등급도 있긴 한데, 그건 또 방탄판이 들어가서 되게 무겁다나 봐요. 변호사님은 매일 입으셔야 하니까 너무 무거우면 또 힘들 것 같아서.”
처음 오노데라가 나를 대신 죽여 주겠다는 내용의 도청 음성을 전달받았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내가 방탄, 방검복을 입어야겠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정말로 사 올 줄은 몰랐다.
경찰들도 특공대에 속해 있거나 특수한 상황이 되어야 입는 것을, 매일 입고 지내야 하는 꼴이 되었다니.
직접 눈으로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입어 보세요. 옆에 허리랑 어깨 조절할 수 있거든요.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무게인지 한번 봐야죠. 저라면 이 정도 무게는 안 입은 거나 마찬가지지만, 변호사님처럼 비리비리한 사람들한텐 무거울 수도 있으니까. 감당하기 힘들면 아쉽지만 좀 더 가벼운 놈으로 바꿔 오게요.”
“내가 3kg를 못 견디겠냐. 게다가 몇 번을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비리비리한 게 아니라 네가 과도하게 큰 거라니까.”
나는 한숨을 쉬며 조끼를 걸쳤다.
그러자 태식이 다가와서 내 체형에 맞게 허리와 어깨 부분을 조절해 주었다.
“흠,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답답하세요?”
“좀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
답답한 것이야 느슨하게 풀면 되지만, 생각보다 무겁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지만, 어깨를 누르는 느낌이 왠지 키가 작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금은요?”
“적당해.”
하지만 자꾸 나를 비실비실한 놈으로 생각하는 태식 앞에서 좀 무거운 것 같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입다 보면 적응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항상 입고 계세요. 주무실 때도.”
“잘 때도?”
“혹시 모르잖아요. 그때처럼 집에 쳐들어오면 어떡해요. 물론 상길이가 있겠지만, 상길이보다 더 쩌는 닌자가 나타나서 상길이를 쓱 그어 버리고 변호사님 방으로 뛸 수도 있는 건데.”
“……상길이가 그렇게 되면 안 되지. 그리고 현관문이랑 방범 장치도 갈았잖아.”
“그야 그런데, 만일이라는 게 있잖아요. 상길이도 이거 입힐 거라 당하진 않을 거예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만, 잘 때까지 이 무거운 걸 입고 자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온몸이 뻐근하다.
“알았어.”
하지만 나도 죽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전기 충격기도 샀거든요. 변호사님이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이건 내가 가방을 들고 다녀야 갖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 더 작은 건 없어?”
2018년엔 사이즈가 훨씬 작은 전기 충격기가 있었는데, 이때는 없었나.
내가 전기충격기를 받아 들며 살피자, 태식이 어깨를 으쓱였다.
“가방을 들고 다니면 되죠.”
“그럼 만일의 순간에 왔을 때 가방을 뒤적여서 전기 충격기를 꺼내야 하잖아. 그사이에 제압당하지 않겠어?”
“그러니까 조끼가 있는 거죠. 만일 닌자가 왔어요. 그래서 변호사님 배때지에 칼을 꽂았어요.”
태식이 내 배에 칼을 꽂는 시늉을 하며 시연을 시작했다.
“근데 어라? 칼이 안 꽂히겠죠? 조끼를 입었으니까. 그러면 닌자가 당황한 틈에 불알을 확 차 버려요. 대충 차는 시늉 해 보세요.”
내가 태식의 다리 사이로 무릎을 쳐올리는 시늉을 하자, 태식은 정말로 내가 찰 거라고 생각했는지 다급하게 두 손으로 그곳을 가렸다.
나를 향한 태식의 믿음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 건가 싶어서 조금 실망했다.
“아, 진짜 차려고 했죠?”
“내가 왜 진짜로 차.”
“무릎 각도가 예사롭지 않았는데. 저 아직 가정도 못 꾸렸다고요. 조심해 주세요. 하여튼, 변호사님한테 불알이 까였다고 쳐요. 그럼 이제…….”
태식은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우며 그곳을 두 손으로 쥐고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그럼 이렇게 닌자가 ‘앗, 빠가야로!’ 하면서 바닥을 구를 거라고요. 지금처럼.”
나는 계속해서 좌우로 구르는 태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태식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내 손에 쥔 전기 충격기를 향해 눈짓했다.
내가 여기서 시뮬레이션까지 해야 하는 건가.
“자, 이렇게 데굴데굴 구르고 있을 때 가방에서 존나 빨리 전기 충격기를 꺼내요. 지금 꺼냈다고 쳐요. 그럼 이제 더는 2세를 만들 수 없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닌자의 목덜미를 딱 봐요.”
나는 전기 충격기의 전원을 켰다.
이렇게 전원을 켜고 지지면 되는 건가.
“아니, 전원을 왜 켜요! 절 지지려고요?”
“그냥 잘 되는지 궁금해서.”
“잘 돼요! 이미 테스트해 봤다고요.”
“……누구한테?”
“생물한테 테스트 해 본 건 아니지만 전압 체크 다 했어요. 아무튼 존나 빠르게 지지면 되는 겁니다. 그럼 꼴까닥 기절하겠죠?”
태식은 바닥에 대 자로 드러누웠다.
“그럼 이제 변호사님은 존나 빠르게 튀면 되는 거예요. 어디 숨든지.”
“어차피 너나 상길이가 항상 있을 텐데, 이런 상황까지 올까?”
“당연히 안 오겠죠. 닌자가 100명이 와도 저희는 1대 100이 가능하기 때문에, 변호사님은 우리가 100명을 상대하고 있을 때 존나 빨리 튀면 되니까. 근데 혹시 변호사님이 영화 속에서 개빡치게 하는 캐릭터처럼 우리를 걱정한 나머지 꾸물거리다가 위험해지는 상황이 올 수도 있잖아요.”
태식은 벌떡 일어나며 손을 툭툭 털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대비를 해야 하는 거니까.”
“근데 소지 허가는 받은 거야? 소지 허가 없이 유통하는 전기 충격기는 기절시키진 못할 텐데.”
“저요? 저는 테이저건 살 때 이미 받았죠. 제 이름으로 사서 그땐 문제없었는데, 쓰는 건 변호사님이 쓸 거니까 허가받아야죠.”
“그래야겠네. 준비물이 뭐지?”
“아, 제가 신청했으니까 곧 경찰서에서 연락 올 거예요.”
태식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허가받으려면 못 해도 신분증은 필요할 텐데 그걸 어떻게 태식이 대신 신청한단 말인가.
“언제 신청했어?”
“그냥 사진이랑 운전면허증 보내면 된다길래 변호사님 지갑에서 꺼냈는데요.”
“대체 언제?”
“변호사님 주무실 때요.”
“나한테 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럼 변호사님 깨워야 하잖아요.”
“그게 싫으면 다음 날 달라고 하면 되잖아.”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제가 깜빡하고 달란 소리 안 할 것 같아서요. 아무튼 경찰서에서 연락 오면 허가증 받아 오세요.”
앞으로는 지갑을 다른 데에 둬야 할 것 같다.
지갑에 대단한 게 들어 있지도 않고, 태식이 내 돈을 훔쳐 갈 것도 아니라 상관없긴 하지만 태식이 내 지갑에서 내 운전면허증을 꺼내며 묘한 쾌감을 느꼈을 걸 생각하면 괘씸하다.
“내 지갑에 손대지 마.”
“참나, 제가 저 좋으라고 그랬어요?”
“그래도 대지 마. 그리고 꺼내 갔으면 꺼내 갔다고 말을 하든가.”
“그래서 지금 말하잖아요.”
“진짜 짤리고 싶어?”
“웃기시네. 변호사님이 저를 어떻게 짤라요?”
이 자식이 어떻게 알았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하고 싶지만, 근거가 있어서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전기 충격기를 내려놓고 시계를 확인했다.
“됐고, 배고프니까 뭐라도 먹…….”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인터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태식이 쪼르르 인터폰 앞으로 달려가더니,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강 변인데요?”
“강 변? 연락 온 거 없었는데.”
“강 변이니까 그냥 문 열어 줄게요.”
태식이 버튼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내가 태식과 조끼와 전기 충격기를 구경하는 사이에 강민재가 연락이라도 했던 건가 싶어서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불안해서 안되겠어요ㅡㅡ]뭐가 불안해서 안 되겠다는 거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나 역시 문을 열어 주러 간 태식을 따라 현관문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열린 현관문 사이로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들어오는 강민재와, 그 뒤에 쭈뼛쭈뼛 서 있는 정혁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저 캐리어는 뭐고, 정혁의 저 걱정스러운 표정은 뭐란 말인가.
강민재는 대답 대신 커다란 캐리어를 내 집 안에 들여놓으며 운동화를 벗었다.
“정혁 씨, 뭐 해요. 들어와요.”
들어오란 말도 안 했는데, 강민재는 제멋대로 정혁에게 손짓했다.
“변호사님이 싫어하실 것 같은데요…….”
정혁은 내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뭔가 내가 되게 싫어할 만한 행동을 하려는 것 같은데, 저 커다란 캐리어를 보니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 스친 이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었으면 좋겠다.
“뭔데?”
내가 뻔뻔하게 캐리어를 밀며 저벅저벅 거실을 향해 걸어가는 강민재를 보며 묻자, 강민재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저 오늘부터 여기서 살 겁니다.”
강민재가 드디어 돌았나?
“무슨 헛소리야?”
“변호사님이 위험하실 것 같아서 안 되겠어요. 닌자가 오는데, 우리는 카게무샤로 대응해야죠.”
“카게무샤?”
“모르세요? 대역 있잖아요. 총알받이 대역.”
카게무샤가 뭔지는 안다.
신변의 위협을 받던 과거 일본의 영주들이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본인과 닮은 대역으로 내세운 사람을 카게무샤라고 한다.
그런데 강민재는 내 카게무샤의 조건에 해당되지 않는다.
“강 변이 어떻게 내 카게무샤야? 애초에 닮은 구석이 없는데.”
“꼭 닮아야 카게무샤예요? 옛날에 신라 김춘추도 신하랑 옷 바꿔 입어서 살아남았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나 대신 강 변이 죽는 건 좀 아니잖아.”
“그럼 누가 대신 죽어요!”
강민재가 소리쳤고, 그 순간 우리 모두의 시선은 조용히 태식을 향했다.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정말 나도 모르게 그런 것이다.
“아니, 저는 그래도 좀 좋은 체격 정도라서 불 끄고 보면 크게 차이는 없으니까 변호사님인 줄 알 수도 있지만, 태식 씨는 너무 커서 실루엣만 봐도 변호사님 아닌 줄 알 거라고요.”
“하. 나 대신 누굴 죽게 할 생각 없어. 그건 태식이 체격이 나랑 비슷했어도 마찬가지야.”
“근데 왜 방금 전에 저 쳐다봤는데요!”
태식은 대단한 배신감을 느낀 듯 소리쳤다.
이에 대해 할 말은 없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우리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 변호사님이 죽는 것보단 제가 죽는 게 나으니까 그런 줄 아시고 오늘부터 변호사님 방에선 제가 잘게요. 변호사님은 손님 방에서 주무세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됐으니까 집에 가. 그리고 만일 위험에 처한다고 해도 우리가 같은 공간에 있어서 같이 죽는 것보단 한 명은 사는 게 낫잖아.”
“그럼 누가 카게무샤 해요! 상길 씨가 할 순 없잖아요! 상길 씨도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인데!”
“너도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야.”
나는 강민재가 잊고 있던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자 강민재는 할 말을 잃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저 주짓수도 배우고 있다고요. 누가 나타나면 제가 더 빠르게 대처할 수도 있고, 하여튼……. 여러모로 그게 좋으니까 그렇게 해요. 알았죠? 그럼 전 변호사님 방 쓰겠습니다.”
강민재는 논리적으로 나를 설득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다.
그는 할 말을 끝내고 막무가내로 캐리어를 밀고 내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캐리어를 한 쪽에 세워놓고 내 침대에 앉으려고 했다.
“잠깐.”
“아, 왜요!”
“앉으려면 옷 갈아입고 앉아.”
외출복 차림으로 내 침대에 앉는 건 하늘이 두 쪽 나도 허락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