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497)
너희들은 변호됐다-497화(497/641)
#497화
“오늘은 웬일로 조용하네.”
강민재가 우리 집에 들어오고부터 이렇게 조용한 오전은 처음이다.
주말이라 늘어지게 자느라 의도치 않게 조용해진 건가.
나는 정수기 아래 컵을 내려놓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 변 아침에 평창동 다녀온다고 나갔는데요.”
곧이어 부엌으로 들어온 태식이 컵을 들고 내 뒤에 줄을 서며 대답했다.
“평창동? 갑자기 왜?”
“옷이랑 다른 짐 좀 가지고 온대요. 그래서 큰 차 필요하다고 변호사님 차 키 달라던데요.”
“그래서 줬어?”
“네. 차 좀 쓴다고 닳는 건 아니잖아요. 강 변 차는 짐 이것저것 싣기엔 좀 작기도 하고.”
기가 막혔다.
태식이 나와 함께 지낸 이후로는 운전은 주로 그의 몫이 되었기 때문에 차 키를 넘기긴 했다.
그렇다고 나에게 묻지도 않고 차를 막 빌려주다니.
게다가 차는 쓰면 닳는다.
그렇기에 귀찮게도 소모품을 계속 교체해 줘야 하고 유지하는 데에 품을 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럼 내가 나가야 할 일이 생기면 나는 뭐 타고 나가라고.”
“자기 차 쓰라고 키 주고 가던데요.”
“보험 안 들었잖아.”
“에이, 두 분 다 돈도 많으면서. 그리고 저 베스트 드라이버라서 사고 안 나요.”
태식은 손을 휘휘 저으며 내가 비켜선 정수기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물을 받으며 덧붙였다.
“강 변이 정수기도 사 줬잖아요. 하루 렌트비라고 생각하세요.”
“정수기 없어도 상관없어. 강 변이 생수 먹기 귀찮다고 산 거잖아.”
“근데 변호사님도 지금 편하게 쓰시잖아요.”
물론 얼음을 직접 얼리지 않아도 계속 얼음이 나온다는 점에서는 편하긴 하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강 변 금방 온댔어요. 변호사님이 그사이에 나가실 일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강민재가 선을 넘는 것에 대하여 지적하고 싶은데 자꾸 적절한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안전 거리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강 변이 이따가 오면서 근처에 유명한 칼국수 집 있다고 포장해 온대요.”
“오는 사이에 다 불어 터질 텐데.”
“그냥 집에서 끓이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게 가져온댔어요.”
나는 칼국수보다는 소면파라서 그런다고 강민재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태식에게 뭐라고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조용히 컵을 내려놓고 씻으러 들어갔다.
떨어지는 물을 맞고 있으니, 문득 머릿속에 강민재가 아침마다 불러대는 노랫소리가 마치 환청처럼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샤워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지.
음악을 듣는 것도 아니고, 왜 본인이 노래를 부른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강민재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강 변은 평창동에서 언제 출발한대?”
머리까지 말린 뒤 거실로 나와 태식에게 물었더니, 그는 성의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모르겠는데요.”
“물어봐. 얼마나 걸리냐고. 늦게 올 것 같으면 밥 먹게.”
“뭐, 짐 싸고 뭐 하고 하다 보면 그래도 늦지 않을까요. 변호사님 일어나시기 한 30분쯤 전에 나갔는데. 배고프시면 뭐라도 먹을까요?”
“그럼 한참 걸리겠네.”
“뭐 거창하게 먹긴 좀 그렇고, 라면이나 먹을까요.”
라면 못 먹고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
저렇게 라면을 자주 먹는데 저 몸이 유지된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게다가 칼국수를 사 온다는데 라면을 먹자니.
그러나 딱히 대안을 제시하진 못할 것 같아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끓이고 불러. 서재에 있을 테니까.”
나는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가는 태식을 뒤로 하고 서재로 들어왔다.
당장 검토할 만한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최종현은 ICIJ에 가입하기 위한 서류를 준비하고 있고, 허민우는 최재훈이 9일 밤 어디에 있었는지 확인하는 중이고, 김미자는 도청 내용 중 우리에게 쓸모가 있는 것들을 추리고 있다.
결국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이 모아 올 정보를 기다리는 것뿐이었지만,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서 자꾸 컴퓨터 앞에 앉아 있게 된다.
나는 습관적으로 메일함으로 들어갔다.
내가 쓰는 메일 계정은 여러 개가 있지만, 항상 가장 먼저 들어가 보는 건 정도 공식 사이트에 공개되어 있는 계정이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제보 비슷한 거라도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막상 열어 보면 메일함에 쌓인 건 인터뷰 요청이나 광고 메일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크게 기대하진 않는, 말 그대로 습관에 불과하다.
[차주한 님 | 수신 메일 6]어제 잔뜩 지웠는데 또 메일이 쌓였다.
이번엔 무슨 광고려나.
여태까지 가장 많았던 건 서초동 로펌을 검색했을 때 상위에 뜰 수 있도록, 연관 검색어가 생성되도록 작업해 준다는 업체들이었다.
공식 메일이다 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계속 스팸 메일함에 처박아 놔도 끊임없이 메일이 온다.
[변호사님.. 도와주세요.. ㅠㅠ (천사의집 문제)]하나둘씩 메일을 지워 나가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메일 제목이 하나 있었다.
메일을 보낸 시간은 어제 새벽이었고, 발신자의 이름은 손정민이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괄호 안에 있는 천사의 집이라는 단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변호사님 안녕하세요..저는 천사의 집에서 지내고잇는 손정민이고 승위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제가 지금 천사의집에서 도망나온 상태인데 혼자서는 어떡해해야할지 잘모르겟고,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라서 검색해보다가 변호사님에 대해서 알게됫습니다..
혹시 변호사님은 천사의집에서 애들한테 영재테스트를 한뒤에 일본으로 유학 보내고잇다는걸 아시나요?ㅠ 이번에 제가유학을 가게됫는데 저는 가기싫거든요ㅠ
저는 일본어도 못하고 별로 공부하고싶은생각도 없거든요ㅠ 그리고 친구들도 없는 대로 가서 살고싶지않습니다..ㅠ 그래서 선생님한테 가기싫다고햇는데 자꾸 않된다고 해서 싸웠는대도 계속 가야한다고 합니다.. 전 너무 가기싫은데..
그래서 일단 무작정나온건데 지금 제가 돈이별로없어서 터미널로 가서 젤 싼거 찾다가 강원도 호정 가는 버스를 발견하고 그걸 탓어요.. 그래서 지금 거기 근처 피방에서 멜 쓰고있는건데.. 혹시 저를 도와주실수잇다면 010–1234–1234로 전화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 제가 계속 이 피방에 잇을수가 없어서 이제 나가야하거든요..폰으로 연락주세요.. 평생 이 은혜 잊지않을께요..]
유학을 가기 싫다고 했는데 강제로 보낸다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오노데라가 나를 죽여 줄 때까지는 유학이 재개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시기가 빨랐다.
물론 이 메일 속 주인공이 정말로 손정민이라는 학생이 맞다면 말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일단 메일에 적힌 전화번호를 대포폰에 받아 적었다.
전화를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위험해질 일은 없을 테니, 통화를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만일 저 메일 내용이 사실이라면 휴대폰으로 연락하는 것보다는 메일로 연락을 주고받는 게 낫다.
유학 대상으로 선발된 천사의 집 아이가 갑자기 사라졌다면, 천사의 집에서는 분명 위치 추적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손정민이 강원도 호정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고, 손정민을 잡기 위해서 이미 호정으로 향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당장 휴대폰을 끄고 장소 이동을 하라고 답장을 보내 주고 싶은데, 내용상 PC방에서 나오기 직전에 메일을 보낸 것 같아서 바로 확인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무리 스마트폰의 시대가 열렸다고는 해도, 지금 2012년에는 데이터 요금이 비싸서 천사의 집 아이들에게는 데이터양이 지극히 제한된 청소년 요금제로 제공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데이터가 없어서 메일을 확인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와이파이를 잡을 수 있는 곳이 제한적이니…….
[기자님 손정민이라는 학생에게서 본인이 천사의 집에서 유학 강요를 받아 도망 나왔고, 도와 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승위 고등학교 1학년이라고 합니다. 봉사 나가는 학생들이 출석을 확인할 수 없는 주말이라서 따로 보고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지금 당장 천사의 집 아이와 연락할 수 있는 봉사자가 있다면 손정민이라는 학생이 사라진 게 사실인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 넣어 주세요.]나는 최종현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그는 곧바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제 최종현이 사실 확인을 위해 움직일 테니, 나는 그동안 손정민에게 연락해 보는 게 좋겠다.
천사의 집에선 이미 GPS 추적을 통해 손정민이 호정에 있다는 걸 파악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시라도 빨리 연락을 취해서 잡히기 전에 내가 먼저 접촉해야 한다.
─여보세요?
전화를 걸기가 무섭게,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히 앳된 목소리였다.
“손정민 학생 휴대폰 맞습니까?”
─아, 네. 혹시 차주한 변호사님이세요?
“맞습니다. 손정민 학생, 현재 가진 돈이 얼마나 있습니까?”
─예? 갑자기요? 돈이요? 어……. 지금 11,600원 있어요.
“그럼 내 말대로 해요. 천사의 집에서는 손정민 학생이 호정에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네? 그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휴대폰 위치 추적하면 금세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천사의 집에 있는 다른 친구들에게 연락한 적은 없습니까?”
─한 번도 없어요. 연락 다 씹었는데…….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배터리가 계속 닳고 있어요.
“그럼 다행입니다.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고, 여태까지 해 왔던 것처럼 아무 연락도 받지 말아야 합니다. 가급적 빠르게 휴대폰 전원을 끄고 날 만나기 전까지는 절대 다시 켜지 말아요. 그리고 지금 학생은 호정에서 다른 장소로 가야 합니다.”
나는 그 말을 하면서, 호정 터미널에서 11,600원 이하의 돈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서울로 오라고 할 순 없을 것 같고, 강원도 근처 지역으로 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지금 호정 터미널 근처에 있습니까?”
─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예요?”
─네. 10분 내로 갈 수 있어요.
“그러면 호정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문역 시외버스 터미널로 갈 수 있는 차편이 있습니다. 5,000원 정도 하는 것 같은데, 이걸 타고 문역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하세요.”
─문역이요? 어, 여기서 멀어요?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습니다. 당장 탈 수 있는 가장 빠른 버스를 타요. 그리고 문역 터미널에서 내리면 근처에 문역 보건소가 있습니다. 바로 옆에 있어요.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문역 보건소요. 네.
“문역 보건소 안에 공중전화 부스가 있습니다. 거기에 있으면 데리러 가겠습니다. 여기서 출발하면 세 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차가 많이 밀릴 것 같아서요.”
─기다릴 수 있습니다!
“배가 고프진 않아요?”
─아……. 조금요. 근데 괜찮아요.
“그러면 지금 문자로, 음……. 아. 호정 터미널 맞은편에 패스트푸드점이 있어요. 모바일 상품권 보내 줄 테니까 포장해서 바로 문역 터미널로 출발해요. 아, MMS를 전송받을 데이터는 있어요?”
─데이터가 쪼끔 남아 있어서 아껴 쓰고 있긴 한데, 아, 그렇게까지는 안 해 주셔도 되는데……. 너무 죄송해서요……. 그리고 버스표가 오천 원이면, 돈 조금 남으니까 그걸로 계란 같은 거라도 사 먹으면 돼요. 어차피 변호사님이 와 주실 거잖아요.
“남는 돈은 혹시 모르니까 비상금으로 갖고 있는 게 좋습니다. 상품권 문자 받았어요?”
─네, 변호사님……. 정말 감사합니다…….
손정민의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라, 괜히 울게 만든 건가 싶었지만 시간이 없으니 다음 얘기는 만나서 하는 게 좋겠다.
“모바일 상품권 쓰고 나서 바로 휴대폰을 꺼요. 반드시 꺼야 합니다. 문역 보건소에서 기다리는 동안 불안하면, 휴대폰은 쓰지 말고 지금 이 번호를 적어 뒀다가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요. 휴대폰은 절대 켜지 말아야 합니다. 손바닥에 적으면 지워질 수도 있으니까, 패스트푸드점에서 영수증을 받으면 펜을 빌려서 영수증에 적어 둬요.”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럼 바로 출발할 테니까 손정민 학생도 움직여요. 이만 끊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은 뒤, 최종현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고등학생 수업 담당하던 학생 중 하나가 지금 천사의 집에 있는 아이한테 전화해 봤는데, 손정민이라는 아이가 어젯밤에 사라져서 지금까지 안 보여서 천사의 집이 다 뒤집어졌대. 데리러 갈 거야? 같이 갈까?]그리고 최종현은 사진 한 장을 첨부했다.
[여기 오른쪽에서 두 번째 남자애가 손정민이래.]사진을 확대해 보니 외모를 확실히 식별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나는 최종현에게 답장했다.
[손정민 학생은 지금 강원도 호정에 있다고 합니다. 휴대폰을 끄고 문역 터미널로 이동해서 문역 보건소 공중전화 부스 안에 있으라고 전해 뒀습니다. 지금 가 보려고 합니다.]그러자 최종현에게 빠르게 답장이 도착했다.
[강원도 문역 말하는 거지? ㅇㅇ우리도 문역 보건소 찍고 출발할게.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면 내가 보낸 사진으로 얼굴 잘 확인하고 접촉해. 혹시 모르잖아.]나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서재에서 나오자, 그 사이 집안에 라면 냄새가 가득 퍼져 있었다.
“아, 변호사님. 마침 나오시네요. 라면 다 됐는데.”
“우리 지금 나갈 거야. 라면 버리고 나와.”
“아씨, 또 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