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509)
너희들은 변호됐다-509화(509/641)
오늘 일반 병실로 이동하는 강민재를 보기 위해 준비하다, 그가 심심할 때 읽을 만한 책을 가져다주기로 결심했다.
물론 지금 당장 책을 읽을 상태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는 앞으로 퍽 오랜 기간 입원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독서는 그런 의미 없이 흐르는 시간을 그나마 유의미하게 보낼 몇 안 되는 방법인 것 같아서였다.
책장을 하나하나 짚으며 강민재에게 추천해 줄 만한 책이 있을까 생각하다, 책장 가운뎃줄 끝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 구석에는 보기 드물게 노출 제본 형태로 제작된 책이 한 권 꽂혀 있었다.
오래전 어느 전시회에선가 구매한 도록이었다.
본격적으로 우신을 파기 시작하면서는 이런 문화생활에 신경 쓸 여유를 가진 적이 없었으므로, 어느 순간부터는 저 책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오랜만에 먼지가 가득 쌓인 책을 열었는데, 너무 긴 시간 방치했던 탓인지 실에 묶여 있던 내지 한 덩어리가 뭉텅 바닥으로 떨어졌다.
“…….”
그 순간 놀랍게도,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노출 제본, 그러니까 사철 제본의 장점은 흔하게 쓰이는 무선 제본과 달리 실로 내지를 엮은 뒤에 접착제를 칠했기 때문에 더욱 튼튼하다는 것 아니었는가?
사철 제본은 하드커버를 붙여 견장정으로 만들지 않으면 책등을 디자인할 수 없어서, 책장에 꽂혀 있을 땐 제목을 확인하지 못한다.
그런 단점을 감수하면서까지 작가가 굳이 사철 제본을 선택한 이유는, 견장정의 불편함을 줄이면서 무선 제본의 불안정함을 커버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어차피 책등이 없어도 사철 제본 방식의 도서가 흔치 않아서 이 책이 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특별함도 갖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도록을 처음 봤을 때 나는 지금의 두 번째 삶이 이 사철 제본된 책 같다고 생각하며 관심도 없는 도록을 샀다.
장점만 있지 않은가.
이전 삶에서 겪은 실패 요소를 제외했고, 장점만 취했다.
심지어는 누구라도 탐낼 것 같은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능력까지 얻었다.
물론 그로 인해 이미 한 번 살았던 삶을 더 살아야 하고 모두에게 숨겨야 하는 비밀이 생겼다는 사소한 단점은 있었지만, 장점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 사철 제본된 특별한 책이 뜯어지고야 만 것이다.
결국 책으로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못 하게 된 셈이 아닌가.
물론, 도록이야 다시 구하면 되고, 구할 수 없다면 도로 붙이면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내 삶 같다고 생각하면서, 변변찮은 자기 투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책이 망가져 버리지 않았는가.
심지어 내 삶은 책만도 못했다.
책은 다시 구할 수 있고, 도로 붙일 수 있지만 내 삶은 아니다.
또 죽는다고 해도 나에게 세 번째 삶이 찾아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마치 사기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장점만 취했다고 생각했던 이 특별한 삶이, 사실은 다른 평범한 삶처럼 망할 수도 있다는 걸 내 눈으로 봐 버린 것 같다.
물론 생각이야 많이 했다.
이 삶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고민하는 시간 속에는 그래서 이게 축복인지 아닌지 가늠해 보는 시간도 있었다.
단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이미 이번 삶을 시작해 버린 이상 의미가 없으니 애써 ‘진짜일 거고, 축복일 거야’ 하고 부정하며 지금까지 버텨 왔다.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본질에 가까워질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내가 괴물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워서 사유를 멈추고 몸을 굴리며 바쁘게 살아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언론에 진실이 괴물 같더라도 호도하지 말라고 한마디 하며 꼴값을 떤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정작 내 자신도 하지 못하면서 남에게는 하라고 하는 이상한 습관이 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하.”
인식하고 나니 헛웃음이 나왔다.
물론 우신을 잡는다는 목표 하나만 놓고 봤을 때 이번 삶은 아직까지는 사기당했다고 말하기엔 이르다.
확실히 이전 삶보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우신을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 삶에서 반드시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이 죽지 않도록 막았으니, 그것도 분명 사기가 아니다.
문제는 이번 삶에서 지켜야 할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새롭게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기당한 기분이긴 한데, 엄밀히 따지면 사기가 아니기는 한 것이다.
이전 삶에서 반드시 지키고 싶었던 사람을 지키게 해 준다고 했지, 이번 삶에 추가된 사람들까지 안전하게 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으니까.
이래서 계약서는 똑바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아닌가. 아무도 나한테 그렇다고 한 적 없는데.’
조금 더 솔직해져 보자면 애초에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없다.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았을 뿐이다.
내게 두 번째 삶을 준 자는, 불행하게 살았던 나에게 주어지는 보상으로써 이번 삶을 정초한 적 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멍청한 나에게 사기를 당한 셈이었다.
“변호사님, 아직 멀었어요?”
그때, 태식이 서재 문을 빼꼼 열고 그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으며 물었다.
“아니, 대충 됐어.”
나는 그 멍청한 도록을 다시 책장에 넣어 두고 밖으로 나왔다.
태식은 그새 강민재의 방에서 그의 물건을 다 챙겼는지, 가방을 들고 있었다.
“아니, 오늘 강 변 일반 병실 가는 날인데 왜 또 표정이 구려요. 오늘은 좀 좋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 아까 아침엔 괜찮았는데?”
“내 표정이 뭐가 어떻다고.”
“사기당한 사람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태식이 킬킬킬 웃었다.
하지만 나는 정곡을 찔려서 할 말이 없어졌다.
* * *
태식이 모는 차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다.
대한민국에서 1, 2위를 다투는 거대 병원이다 보니, 당연하게도 사람이 많았다.
세상에 아픈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가, 하는 한가한 감상이나 하면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는데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가슴께를 짚었다.
“뭐야, 왜 그러세요. 심장이 막 빠르게 뛰어요? 숨이 잘 안 쉬어져요?”
그러자 태식이 펄쩍 뛸 듯이 놀라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에게 발작이 올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심박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기분이긴 하지만 발작으로 이어질 느낌은 아니다.
혹시 모르니 발작이 있으면 20분만 버티자는 생각은 지금부터 반복하고 있지만.
“괜찮아. 가자.”
“뭔데요. 왜 그러는데요. 뭐 때문에요. 누가 쫓아왔어요? 저 못 봤는데. 혹시 우리 미행 붙었을까 봐요? 근데 강 변이 입원한 게 알려지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라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변호사님이 강 변 병실에 가 보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고요. 당연히 유추 가능한…….”
“아니, 그런 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니까 그냥 조용히 엘리베이터나 기다려.”
솔직히 말해, 나는 내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 것이다.
내 표면 의식은 ‘세상에 아픈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나’였지만, 무의식은 ‘사람이 많아서 불안하네’로 흘러간 게 분명하다.
아무리 무의식이라도 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흘러간 까닭이 이해되진 않지만, 굳이 유추해 보자면 아마 오노데라가 보낸 사람이 군중 속에서 툭 튀어나와 나를 죽일까 봐 무서운 게 아닐까.
그걸 대비하려고 이 개 같은 방탄, 방검 조끼까지 입고 다니는데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는 표면 의식의 지배를 받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으로 나는 명확하게 직감했다.
나는 멍청한 내 자신에게 사기를 당했고, 그 결과 강민재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그가 멀쩡히 생환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나는 이제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위협을 이전보다 더 예민하게, 편집증적으로 예비하려 할 것이다.
스스로 원치 않더라도.
“약은요?”
“항상 갖고 다니니까 괜찮고, 안 가라앉으면 먹을게. 됐어?”
“……네. 그래도 여기가 병원이라 다행이네요. 만일 변호사님한테 뭐 문제 생기면 바로 진료받을 수 있잖아요.”
웃자고 하는 소리 같았지만, 맞는 말이긴 하다.
어느덧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나는 만원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태식은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도록 울타리처럼 서 있었는데, 내가 암살 위협을 느낄까 봐 이러는 것 같다.
나름대로 배려심 넘치는 모습이었고, 나에게 폐소 공포증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변호사님!”
병실 문을 열자, 최종현과 조봉준, 그리고 오 사무장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들도 이것저것 싸 들고 온 것인지, 강민재의 침대 옆에는 과일 바구니나 주전부리가 가득했다.
“태식 씨는 뭘 그렇게 들고 왔어요?”
“강 변이 혹시 필요할까 싶어서 집에 있는 것들 몇 개 가져왔어요. 변호사님은 강 변한테 책 빌려준다고 서재 들어가시더니 그냥 나오시더라고요. 변호사님만 빈손이에요.”
“어, 저 변호사님이 읽은 책 읽고 싶은데. 왜요. 저 바보라 변호사님이 좋아하는 책은 이해 못 할 것 같아서 안 가져오신 거예요?”
강민재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시간이 없었어. 다음에 가져올게.”
“근데 민재 생각보다 말도 잘하고 기운차 보인다. 나는 되게 기운 없는 느낌일 줄 알았는데.”
“그러게. 차 변이 아주 그냥 벌벌 떨어댄 것치고 민재가 너무 멀쩡해 보여서 나 놀랐다니까. 솔직히 말해 봐. 너 안 아프지?”
“근데 막 그렇게……. 그렇게 엄청나게 아픈 것 같진 않아요. 그냥 뭐, 수술했으니까 아픈 정도? 별거 아닌데 다들 호들갑인 건 아니었을까 싶어서 저도 경막하 출혈에 대해서 찾아봤는데 무서운 말이 진짜 많더라고요.”
“후유증 하나도 없는 게 진짜 대박이긴 하지. 대박이 아니라 거의 뭐, 기적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처음 너 헬기에 실리기 전까지는 의식도 없었잖아.”
“그러게요. 저 은근히 맷집 좋은가 봐요. 그리고 뭔가 신이 있나? 싶기도 해요.”
“왜? 의식 잃은 사이에 염라대왕하고 인사라도 했냐.”
“아니, 그게 아니라……. 선생님들도 그렇고, 동진 형님도 그렇고, 간호사분들도, 경미한 후유증도 없이 낫는 건 기적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하셔서요. 그럼 제가 뭐, 신의 가호라도 받은 게 아닐까 싶어서요. 이대로 죽기엔 불쌍하구나. 그래, 일단 고상준은 조지고 죽어라. 이런 느낌으로.”
강민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의 가호.
정말 그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 신이 나에게 두 번째 삶을 시작하게 했고, 이전 삶에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강민재를 이 정도의 부피로 내 옆에 던져 놨다면, 당연히 가호 정도는 줘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강민재는 아무 잘못도 없이, 이번 삶에서 하필이면 내 마음에 들어 버리는 바람에 이런 일까지 겪었는데.
만일 강민재에게 후유증이 남았더라면, 나는 정말로 계속 거절해 왔던 상담 치료라는 것을 내 의지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후유증 없는 건 맞아?”
나는 강민재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경막하 출혈 환자에게 자주 있다는 후유증 위주로 몇 가지 테스트를 해 보기로 했다.
나는 먼저 그의 눈앞에 손가락 두 개를 펴고 빠르게 흔들었다.
“이거 몇 개야.”
“……뭐예요, 초딩도 아니고.”
왜 대답을 안 하지.
뇌출혈 환자에게는 복시가 나타나는 경우가 꽤 많다고 했다.
대답을 회피하는 건 아닐까.
나에게 후유증을 숨기려고.
“몇 개냐고.”
“두 개요.”
“한 쪽씩 눈 가리고 다시 해 봐. 이건 몇 갠데.”
“세 개요. 이번엔 한 개. 아, 저 진짜 후유증 없어요!”
“그럼 이제 손가락 움직여 봐.”
강민재는 헛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마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중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모두 접어 보였다.
“이 자식이 깨어나자마자 형한테 욕부터 박네.”
“아, 실수. 아직 온전치 못한가 봐요.”
“환자라서 봐줬다.”
“근데 왜 자꾸 가운뎃손가락이 안 접히지?”
그러면서 강민재는 중지를 치켜든 손을 흔들었다.
“이거 장난치는 거 보니까 다 나았네.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그러게.”
“아, 왜요. 저 걱정해 줘요. 환자잖아요. 저 아픈데……. 아야, 너무 아파요.”
“쟤는 아픈 척도 드럽게 못해. 학창 시절에 꾀병 조퇴 시도하면 족족 실패했을 놈이야.”
“쟤가 꾀병 조퇴를 하려고 했겠냐. 서울대 법대 나온 놈인데. 전교 1등이었을 거 아니야.”
“1등 아니고 2, 3등 정도 했어요.”
“그거나 그거나. 재수 없네, 진짜로.”
“형님도 명문대 나왔잖아요.”
“그치. 알지? 우리 학교 서울대 진학률 높은 거. 다들 등록해 놓고 반수 해서 서울대로 튀더라. 하긴, 여기 있는 사람들 싹 다 서울대라서 내 마음 모르겠지. 나도 어디 가서 학벌로는 꿀린 적이 없는데.”
“봉준 형님이 옛날에 계시던 증권사에 서울대 별로 없었어요?”
“있었다. 있었어, 인마. 있었다! 그러고 보니 종현이 형도 서울대잖아. 이 전교 1등들과 전교 2, 3등 놈아. 평생을 서울대에 둘러싸여 사는 팔자인가 보다. 태식아, 역시 내 마음의 안식처는 너뿐이다.”
“뭐래요. 형님도 대학 졸업했잖아요. 갑자기 가만히 있는 사람 건드리시네? 저 중졸인데.”
“크크크, 아, 미안.”
“하나도 안 미안해 보여.”
강민재가 다 나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웃고 떠들었다.
나 역시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억지로라도 입꼬리를 끌어 올려 보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