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517)
너희들은 변호됐다-517화(517/641)
고상준이 와도 모자랄 판에, 고작 그 아들놈 무릎 한번 꿇린 걸로 오노데라의 기분이 풀릴 리가 없었다.
오노데라는 고개를 숙인 고윤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곁에 앉은 통역사는 안절부절못한 채 고용주가 수모를 당하는 꼴을 꼼짝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통역사는 공항으로 떠나기 직전, 고상준에게 불려갔었다.
그때 고상준은 그들이 분명히 고윤수에게 굴욕을 줄 것이라 말하며, 혹시라도 고윤수가 상대의 비위를 거스르는 말을 한다면 반드시 잘 걸러서 전달하라고 엄중하게 지시했다.
통역사는 눈동자를 굴리며 오노데라가 고윤수에게 그만 일어나라고 말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오노데라는 고윤수의 뒤통수를 안주 삼아 술이라도 마실 요량인지, 말없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술병을 집어 들었다.
“…….”
이마 밑에 포개 놓은 고윤수의 두 손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고윤수 옆에 좌정한 통역사의 눈에는 그가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는 게 보였다.
그래도 고윤수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눈치도, 계산도 빠른 편이다.
만일 오노데라가 고윤수의 태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기라도 하면 아버지의 신뢰를 잃을 거라는 계산조차 하지 못할 리가 없다.
“얌전해지니 보기 좋군. 술 한잔 받게.”
오노데라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역사는 안도의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그 말을 고윤수에게 전하기 위해 자세를 조금 낮췄다.
“술 한잔 받으라고 합니다.”
드디어 일어나도 된다는 소리인가 싶어, 고윤수는 숙였던 고개를 들려 했다.
오노데라가 술을 술잔이 아닌 고윤수의 뒤통수에 따르기 전까지는.
“잘 마시는구만.”
오노데라는 비열한 짐승처럼 낄낄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다 사토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통역사는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지만, 가까스로 표정에 변화가 드러나지 않도록 안면 근육에 세게 힘을 주었다.
“…….”
고윤수의 뒤통수에 잠시 고였던 술이 다다미 바닥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무리 사리 분별이 명확한 고윤수라고 해도, 이 정도 굴욕을 견딜 수 있을지 통역사는 의문이었다.
고상준이 언질을 주었을 때 상상해 보았던 상황 그 이상이라, 만일 고윤수가 참지 못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고윤수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으로 바짓단을 세게 쥐었다.
고윤수를 흘긋대던 통역사는 한 줄기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무릎을 꿇으라고 했을 때도 분노를 감추지 못했던 고윤수가 아니던가.
끝인가.
“……감사합니다. 제가 먼저 한잔 올렸어야 했는데요.”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예상과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당황한 통역사는 숨 쉬는 것조차 잠시 잊고 얼어붙었다.
“뭐해. 전해, 씨발.”
그러자 고윤수는 이를 악문 채 재촉했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통역사가 재빨리 말을 옮겼다.
“아들이 애비보다 낫구만.”
고윤수의 말을 전해 들은 오노데라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고, 통역사를 향해 눈짓했다.
이제 일어나도 좋다는 뜻이었다.
통역사는 고윤수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그의 두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고 일으켜 주었다.
고윤수는 차분히 상체를 세우자, 머리에 아직도 고여 있던 술이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상황을 지켜보던 오다 사토시가 소리쳤다.
“수건 가져와!”
얼마 지나지 않아, 김미자가 조용히 문을 열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수건을 고윤수에게 건넸다.
고윤수는 잠자코 그 수건을 받아 들고 젖은 머리카락과 술이 흐른 얼굴을 닦았다.
김미자는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일말의 관심도 없는 척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이 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고윤수의 머리카락이 젖다 못해 그 끝에 맺힌 투명한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고, 다다미 바닥도 마찬가지로 흥건하게 젖은 것을 확인했다.
무릎 꿇린 뒤 머리에 술을 부은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단체로 교육이라도 받은 것처럼 조롱하고 싶은 대상에게 이런 저열한 행동을 하곤 했고,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도 이곳에서 수도 없이 보아 왔다.
게다가 고윤수가 빈방에 앉아 두 사람을 기다렸던 두 시간 동안, 오다 사토시가 넌지시 방에 술을 가져다 놓으라고 말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고윤수가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기가 찼다.
그들이 짓밟은 수많은 청춘에 미안한 마음조차 없으면서, 영문도 모르고 수술대 위에서 장기를 적출당한 사람들에게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면서…….
“…….”
장차 우신의 오너가 될 거라는 고윤수는 땅이 부서지도록 이마를 찧으며 사죄해야 할 대상이 진정 누구인지도 구별하지 못했다.
그는 또다시 구시대적인 역학 관계 속에 죄 없는 사람들을 몰아넣고 있었다.
“그만 나가 봐.”
그를 너무 빤히 쳐다본 것일까.
오다 사토시는 아직도 방안에 머물러 있던 김미자에게 툭 쏘아붙였다.
“네. 필요하실 때 불러 주세요.”
그녀가 고윤수에게서 젖은 수건을 받아 들고는 도로 방 밖으로 나가자, 고윤수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슬그머니 등 뒤로 숨기며 세게 주먹 쥐었다.
이런 굴욕적인 모습은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김미자는 눈치를 챈 듯하다.
기분 탓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묘하게 자신을 비웃고 갔다는 느낌도 들었다.
“앉게.”
고윤수가 좌정하자, 오노데라는 이제야 그의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는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에게 마찬가지로 술을 따라 주었고, 그들이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들이켰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말해 보게.”
“곧 총재 선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의원님께 공연한 피해가 없으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원님께서 야쿠자를 통해 그 트럭 기사를 섭외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한국 사채 시장에까지 관여하고 있는 잔뼈 굵은 놈들이라 맡겼더니 그런 머저리 같은 새끼를 붙여 줘서는……. 쯧! 성공했다면야 돈이 아깝지 않았겠지만, 결국 실패했잖아. 게다가 죽은 전 대통령 손자를 받아 버리기까지 했으니……. 자네 아버지는 그 변호사 놈이 미쳐 날뛸 걸 생각하면 또 벌벌 떨지 않겠어?”
오노데라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고윤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차주한은 보기 드문 캐릭터였다.
여태까지 우신의 비리를 척결하겠다며 설치던 기자나 검사는 시절을 불문하고 끈질기게 생겨났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젊고 창창하던 시절에는 형형한 눈을 빛내며 고상준의 면상에 먹칠하는 데 앞장서던 놈들도, 결국 한풀 꺾이는 시기가 찾아왔을 때 슬쩍 한자리 줄 테니 인생 편하게 살아 보는 게 어떠냐고 말을 흘리면 고민하는 척하다가 손을 덥석 잡곤 했다.
그런데 차주한은 구워삶을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돈이 아쉬운 놈은 아니다.
하고 다니는 짓을 보면 분명히 명예욕이 있는 놈 같은데, 그렇다기엔 행보에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많았다.
정말 명예를 바랐다면 이정찬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벗은 직후부터 선전을 하고 다녔어야 했다.
대중은 그를 매우 흥미롭게 여겼고, 빠져나올 방법이 없어 보이는 함정에서 보기 좋게 탈출한 점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청와대에 들어앉은 이세화가 당 대표 시절부터 그를 몹시 탐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따로 조사하지 않아도 귀에 들어올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는 의식적으로 이세화와 거리를 두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차주한을 회유하려면 그놈이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지만 고윤수가 보기에는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는 우습게도, ‘우신의 몰락’ 그 자체처럼 보였다.
처음 차주한이 눈에 띄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신은 대체 무엇 때문에 그가 이렇게까지 물고 늘어지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의 과거나 주변을 털어 봐도 죽음을 넘나들면서까지 덤빌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더욱 까다로운 적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벌벌 떨고 계신 건 아닙니다.”
“벌벌 떨고 있는 게 아니라고? 그럼 대체 그깟 변호사 놈 뭐가 무서워서 이렇게까지 몸을 사려.”
오다 사토시가 비웃었다.
고윤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남들 눈에는 그렇게 비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미친놈은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된다.
얕보고 건드렸다가 역풍을 직격으로 맞아 보았기 때문에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제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듯 달려드는데, 약점을 손에 쥘 때까지는 전면전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약점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만에 하나 없더라도 만들어 주면 그만이지. 대충 세무 조사라도 해 보면 먼지 하나쯤은 날릴 텐데.”
그걸 안 해 봤을 거라고 생각해서 훈수를 두는 건가.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차주한이 크기 전에 싹을 잘라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가장 먼저 했던 것이 세무 조사였다.
약점은 한 톨도 흘리지 않겠다는 듯 경비 처리조차 하지 않고 무식하게 신고하는 놈이라, 세무 법인 장부까지 조작했다.
청와대 떠난 지 한참이나 지났던 퇴물 노인네가 개입할 줄은 몰랐기에, 안타깝게 실패로 돌아갔던 일이다.
그 뒤로 살인 누명도 씌워 보았지만, 징그러우리만큼 멀쩡히 살아 돌아와서 그대로 우신을 공격했다.
죽이려고도 해 봤으나, 기가 막히게도 배에 구멍이 뚫린 채로 바다에서 기어 나왔다지 않은가.
이렇게까지 사람 하나 처리 못 해 본 것도 처음이라, 그때는 고상준도 평정심을 잃었을 정도였다.
“뭐, 그깟 변호사 놈은 됐고. 그 운전수 놈은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일본으로 내보내겠습니다. 그 운전수를 섭외한 건 의원님의 신뢰를 저버린 그 야쿠자 놈들 아닙니까. 결자해지하라고 하시죠. 의원님께서 그놈들에게 일을 맡기신 이유도, 그놈들이 어디 가서 쓸데없이 떠들고 다니진 않을 거라 생각하셨기 때문 아닙니까.”
“떠들 수가 없지. 가뜩이나 작년부터 폭력단 배제 조례까지 시행돼서 설 자리를 잃은 놈들인데. 나한테까지 버림받으면 그놈들도 결국 끝이야. 자네가 운전수 놈을 잘만 배달하면, 그놈들이 알아서 할 테지.”
오노데라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고윤수는 아버지 고상준에 비해 일본 사정에 밝진 않았지만, 야쿠자들이 정치에 꽤나 긴밀히 유착되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차주한을 죽여 주겠다고 공언한 건 오노데라 아니었던가.
뒤처리까지 우신이 맡아 줄 이유는 없었고, 그 사실은 오노데라가 가장 잘 알 것이다.
“하기야……. 도쿄만에 담가 버리면 그만이지.”
오다 사토시도 이 점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럼 이제 오노데라 의원님 손자분의 수술 계획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