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527)
너희들은 변호됐다-527화(527/641)
키리하라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건 전체를 설명하는 데는 무려 3시간이나 걸렸다.
허민우에게 처음 사안을 공유했을 때는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진 않았는데, 확실히 문화와 언어 차이가 있으니 질의를 생략하고 설명만 했는데도 품이 많이 든다.
사실, 질의를 생략했다고 하기도 애매하다.
정확히는 키리하라가 너무 놀란 나머지 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여도 모자랐다고 보는 게 맞다.
“……말도 안 되네요, 정말.”
키리하라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오카시마 병원을 운영하는 게 오다 사토시의 동생이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곳이 그런……. 그런 일을 벌이는 곳이라고는, 정말, 조금도…….”
그녀는 계속해서 슬라이드들을 넘겨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스탄불 선언이 발표된 게 고작 4년 전이에요. 참여한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이 장기 매매는 물론이고 이식 관광까지도 규제하는 데에 동의했다고요. 물론 그런다고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뻔뻔하게! 한국도, 일본도 자랑스럽게 선진국이라고 하고 다니는 나라들이잖아요.”
그녀가 말하는 이스탄불 선언은, 세계의 과학자와 의학 전문가, 각국의 정부 관료, 윤리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이 모여 장기 이식이 윤리적이고도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될 수 있도록 규제하고 감독할 것을 결의한 전 세계적 합의다.
이에 따르면, 장기 이식의 상업주의를 금지하고, 이식받을 장기는 국가 내에서 수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를 의식하여 이전 삶의 2017년에 우리나라 정부는 장기 기증자에게 지급하던 위로금 제도를 폐지했다.
이 역시 상업주의의 일부라는 해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신은 이런 걸 신경 쓸 놈들이 아니다.
뭐든 안 들키면 그만이고, 들킬 것 같으면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을 전부 없애면 된다는 사고회로를 지니지 않았는가.
이러한 자신감은 그들이 대한민국에서 오랜 기간 초법적 혜택을 누렸기 때문에 생겨났을 것이다.
“오카시마 병원 부지를 소유한 RND라는 법인이 고상준 회장 거라고, 그 누가 알았을까요. 애초에, 오카시마 병원이 오다 사토시의 동생 소유라는 걸 아는 사람도 몇 없으니 눈여겨보는 사람도 별로 없었겠죠…….”
RND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이전 삶에서 ICIJ는 2013년 초가 되어서야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에 차명 계좌를 가진 이들의 목록을 공개한다.
이제 고작 2012년 3분기에 들어섰으므로, 아직 받아 보긴 어렵겠지만 시간을 당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혹시 키리하라는 이에 대해 알고 있을까?
“아까 보셨겠지만, RND는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에 설립한 페이퍼 컴퍼니입니다. 고상준은 거기에 계좌도 여럿 만들어 뒀을 겁니다.”
“보통 그렇게 조세 회피처에 계좌를 만드는 사람들은 본인 명의로 해요. 여기까지는 안 들킬 거라고 생각해서겠죠.”
“네. 하지만 RND는 외국인의 명의로 설립했습니다. 다만 RND의 자금이 든 계좌들은 고상준의 명의로 되어 있을 겁니다. 이미 법인 설립부터 다른 사람의 명의로 진행했으니 소량이나마 돈을 떼 줬을 텐데, 계좌까지 다른 사람 명의면 그 사람에게 또 떼 줘야 할 테니까요.”
“그렇겠죠.”
“이건 제 예상이지만, 아마 오다 형제도 거기에 계좌가 있을지도 몰라요.”
최종현이 덧붙였다.
맞는 말이다.
고상준은 이정찬이 차기 대통령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KDL 컴퍼니라는 이름으로 법인을 굴리던 시절 이정찬에게도 지분을 나눠 주었다.
하지만 이정찬도 몰랐을 정도로 깊숙한 곳에서는, 오다 사토시와 거래하고 있었다.
그러니 분명 오다 사토시도 RND와 사소하게라도 접점이 있을 것이다.
오노데라까지 걸려 나오면 좋겠지만,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 오노데라는 고상준과 그리 관계가 돈독해 보이진 않았다.
“아직 최 기자님에게는 공유되지 않은 사안이겠지만, 지금 ICIJ에서는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했거나 차명 계좌 가진 사람들의 목록을 입수해서 분석하고 있어요.”
키리하라는 내가 기다리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몰랐던 최종현은 깜짝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그런데 그 목록이 국가별로 잘 정리된 형태가 아니라, ICIJ 소속 기자들이 자료들을 살피고 분류하는 중이에요. 다만 일본이나 한국은 한자 문화권이다 보니 이름이 독특해서 어느 정도 분류가 된 상태예요. 최 기자님 오시기 전까지는 ICIJ에 가입된 한자 문화권 국가의 기자는 저뿐이어서, 한자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름들은 저한테 올 예정이었거든요.”
“만일 저에게도 분류 작업을 할당해 준다면 완성 시기가 좀 더 앞당겨지겠네요.”
“네, 그렇죠. 개인적으로 저는 이번 총재 선거 전에 데이터가 왔다면 오노데라를 막을 수 있었겠다, 하고 아쉬워하고 있었어요.”
만일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에 오노데라의 계좌도 있다면, 분명히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총재 선거는 얼마 남지 않았고, 키리하라는 아직 데이터를 받지도 못한 상태니 사용할 순 없겠지.
“오노데라 마사오의 계좌는 없더라도, 최 기자님과 차 변호사님 말씀을 들으면 오다 사토시의 계좌는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고상준의 계좌는 분명히 있겠고요. 하지만 고상준 계좌만 보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다른 한국인들……. 심지어는 북한 사람도 있을 거예요. 타이밍이 너무 좋으신데요? 어떻게 이럴 때 딱 가입하셨지?”
키리하라는 호호 웃었다.
동시에 최종현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또냐?’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오늘 키리하라와 헤어지고 나면 최종현은 또 내가 장군 신의 도움을 받은 게 분명하다며 떠들겠지.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으며 강민재는 역시 자신의 추측이 정확했다며 뿌듯해 할 것이다.
“최 기자님이 저한테 연락하신 건, 우신이 벌이고 있는 이 끔찍한 일들을 ICIJ가 프로젝트화하길 바라기 때문이겠죠?”
“그렇습니다. 저희의 목적은 우신 오너 일가가 적절한 처벌을 받고, 대한민국 사회에 뿌리내린 우신의 부역자들을 전부 솎아내는 겁니다. 기자님에게는 장기 매매와 성매매 위주로 말씀드렸지만, 우신의 만행은 단지 그뿐만이 아닙니다.”
키리하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았어요. 그래서 기자님이 저한테 먼저 연락하신 거군요? ICIJ에서 사건을 취급하게 되면 일본인인 제 역할이 많아질 텐데, 보안이 유지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되셔서.”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기자님에게 상당히 신뢰감을 느끼고 있고, 그래서 저희의 자료를 오픈한 겁니다.”
“두 분이 준비하신 건 정말……. 정말 엄청납니다. 어떻게 이런 걸 다 준비하셨나 싶을 정도예요. 같은 기자로서 반성도 되고, 많이 배웠어요. 게다가 경민회 놈들……. 오노데라 마사오나 오다 사토시 쪽 이야기는, 일본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는데도 전혀 몰랐다는 게 충격적이네요.”
키리하라는 쓸쓸한 눈으로 슬라이드 속 자료들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다 사토시의 아내가 한국계잖아요. 연결 고리가 있을까요?”
우리는 키리하라에게 설명하기 위한 자료를 준비하면서, 일부러 김미자의 이야기는 제외했다.
김미자는 아직 오다 사토시와 부부 관계고, 전보다는 소극적이지만 종전과 같은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키리하라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나 역시 그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다.
“오다 토미코 씨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네, 맞아요.”
“……그분이 저희에게 협력해 주셨기에 이만한 자료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겁니다.”
키리하라는 내 말에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오다 토미코가요?”
“네.”
“믿을 수 없네요. 물론 어느 정도 이미지를 고려해서 오버하는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둘 사이는 아주 좋을 줄 알았는데…….”
“오다 토미코 씨, 그러니까……. 한국 이름은 김미자입니다. 김미자 씨는 우신에 의해 13살 때 일본에 끌려가 성매매를 강제당한 분입니다. 우신은 김미자 씨에게 가족이 그분을 버렸다고 거짓말했고, 김미자 씨는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 왔습니다. 그러다 저희와 만나게 되었고, 지금은 누구보다 큰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압축적으로 설명했지만, 키리하라는 그 정도만으로 김미자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지 추측한 듯했다.
순식간에 슬픈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그 도청도 토미코 씨가…….”
“네.”
“혹시라도 발각되면 아주 위험해지시겠어요.”
“그래서 지금 부탁을 드리려고요.”
“무슨 부탁이요?”
“말씀하신 것처럼 김미자 씨는 적진에서 홀로 싸우고 계십니다. 저희는 이제 김미자 씨의 안전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김미자 씨를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저만 해도 몇 번 죽을 뻔했고, 이미 희생자도 있으니까요.”
“……네.”
“그래서 ICIJ 본부가 있는 미국에서 김미자 씨를 보호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생각해 봤지만, 연이 닿은 곳도 없고 비자 문제도 있어서 불안합니다.”
“확실히 그렇겠네요.”
“이스타 비자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요. 학업 비자나 구직 비자도 지금 상황에서는 불가능하고요.”
내 말을 들은 키리하라는, 앞서 ‘13세에 일본으로 끌려갔다’는 부분을 그제야 주의 깊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잠시 당황한 듯 입을 벌리더니, 곧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겠네요. 13세에 끌려오셨다고 했으니, 학위도 그러면…….”
“그 점에 대해서는 김미자 씨도 상응하는 책임을 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학력 위조는 부차적인 문제고 김미자 씨의 안전을 담보해야 합니다.”
“맞아요. 애초에 토미코, 아니……. 김미자 씨가 도움을 주지 않으셨다면 이런 어마어마한 진실이 드러나지 못했을 수도 있겠죠. 김미자 씨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럼 저도, 최 기자님도 함께 ICIJ 측에 김미자 씨를 미국에서 보호할 방법을 모색해 달라고 요청해 보기로 해요.”
긍정적인 답을 주어 다행이다.
그녀가 동의한다고 해서 ICIJ 측이 받아들이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가능성은 커지는 것 아니겠는가.
“만일 ICIJ 측에서 거절한다면, 저도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언니가 스위스에 있다고 했잖아요. 미국에서 ICIJ의 보호를 받으면서 3개월 동안 머물고, 스위스에서 3개월 머무는 식으로 한다면 적어도 6개월은 벌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김미자 씨한테 사과하고 싶어지네요. 저 사실 약한 개……. 아, 오다 사토시하고 묶어서 비판 기사 썼었거든요.”
키리하라는 머쓱해진 듯 뺨을 긁적였다.
“이해해 주시겠죠?”
“괜찮습니다. 김미자 씨는 기자님의 약한 개 발언을 즐거워하셨고, 또 저와 잘 맞을 것 같다고 하셨거든요.”
키리하라는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오노데라 손자 수술 말인데요. 오카시마 병원에서 진행하기로 되어 있다고 하셨죠?”
“네, 그랬습니다.”
“최 기자님과 차 변호사님은 하야시 켄이치와 천사의 집 아이가 한국을 뜰 수 없게 하겠다고 하셨지만, 만일의 상황에 대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오카시마 병원 쪽을 감시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능하다면 감시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일본에 인력이 없어서 감시에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임현일이나 소은이가 출국하지 못하게 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 거고요.”
“그럼 오카시마 병원 감시는 제가 맡겠습니다. 오노데라의 손자를 감시하는 게 가장 확실하고 좋겠지만, 발각 위험이 있을 것 같아서요. 특히 오노데라 마사오가 총리가 되고 나면 더욱 그렇겠죠. 총리 가족은 SP의 경호 대상이 아니긴 하지만, SP는 아니더라도 분명 경호 인력이 잔뜩 붙을 거예요.”
그녀가 말하는 SP는 국가 중요 인물의 경호 임무를 수행하는 경찰관으로, 총리의 경호를 맡는다는 점에서는 우리나라의 대통령 경호실과 비슷하다.
“감시를 기자님이 직접 하시진 않을 테고……. 물론 믿을 만한 분들에게 맡기시겠지만, 보안 쪽은 문제없겠습니까?”
“네. 오랫동안 같이 일해 왔던 사람들이고, 단 한 번도 정보가 샌 적 없었습니다.”
[진실]이제 와서 키리하라가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았지만, 혹시 몰라 능력을 써 봤다.
“어차피 오카시마 병원에 제일 먼저 당도하는 건 오노데라의 손자 아니겠어요? 입원 전에 이것저것 검사해야 할 테니까요. 오카시마 병원 구조를 파악한 뒤에 어떻게 감시할지 최 기자님께 말씀드릴게요.”
“이렇게까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최종현이 고개를 숙이자, 키리하라가 두 손을 휘저으며 함께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전혀 감사하실 일 아니에요. 저야말로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우신만 다뤄도 바쁘실 텐데, 어쩌다 이렇게 엮여 버리는 바람에 저희가 할 일을 최 기자님이 하게 되신 것 같아서 죄송할 뿐이에요.”
키리하라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니, 오노데라 마사오와 오다 사토시가 일본에서 어떻게 되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면 된다고 말했던 게 떠올라 조금 미안해졌다.
“아, 혹시 예약해 주신 비행기 티켓 시간을 바꿔 주실 수 있으세요?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대화가 마무리되는 분위기가 되어 노트북을 닫으려는데, 키리하라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내일 저녁에 출국하기로 되어 있었다.
“네. 언제로 바꿔 드릴까요?”
“여기서 인천공항까지 얼마나 걸리죠?”
“2시간 정도 잡으셔야 할 겁니다.”
“그럼 한 8시나 9시 비행기로 변경될까요?”
“내일 오후 7시 비행기로 예약되어 있어서,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은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아, 내일 말고 오늘이요. 오늘 일찍부터 이 객실을 쓸 수 있었던 걸 보면 어제부터 내일까지 연박으로 예약해 두신 것 같은데, 죄송해서 어쩌죠…….”
키리하라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이 호텔로 와서 우리와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바로 가겠다고?
“급한 일이 생기신 겁니까?”
“사실 여기 왔을 땐, 모처럼 공짜로 한국까지 왔는데 맛있는 거 잔뜩 먹고 구경도 하다 가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사안을 보니 제가 여기서 놀고 있으면 안 되겠어요. 하루라도 빨리 가서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수술 날짜는 아직 모르시는 거잖아요. 그럼 당장 내일 수술할지 어떻게 알아요.”
그녀의 말에 일리는 있지만, 오늘은 수요일이다.
오늘 오전에 확인했을 때, 임현일은 여전히 목요일에 외래 일정이 잡혀 있었고, 오늘도 우신 병원으로 출근했다.
당장 내일 수술하진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빈틈없이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알아보겠습니다.”
김미자의 말이 맞다.
키리하라는 나와 단짝이 될 상당한 자질을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