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57)
너희들은 변호됐다-57화(57/641)
[진실]강 변의 머리 위에 드러난 글자에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그가 왜 이 사건을 맡기를 계속 꺼렸는지 알 것 같았다.
강 변은 자신의 잊고 싶은 과거와 같은 모습을 한 진철의 일을 맡는 것이 마음 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진철을 돕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어디까지나 이 일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들추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 뭔 개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저 그런 뻔한 멘트로 갑자기 믿음 가지는 그런 애새끼 아니에요. 다른 데 가서 알아보세요.”
잠시 동요하는 듯했던 진철은 곧 차갑게 대꾸했다.
강 변의 말이 자신을 회유하기 위한 거짓말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강민재는 그런 진철을 바라보며 짧게 한숨 쉬었다.
그리고 재킷을 벗은 뒤, 셔츠 소매를 걷었다.
그는 자신의 손목 근처에 둥글게 남은 흉터를 가리켰다.
“나 괴롭히던 놈들이 담배빵 놓은 흉터야. 나머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옅어지더라. 그래도 이건 남았어.”
진철은 자신의 눈앞에 들이밀어진 팔목을 바라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 잘못 안 했는데, 괴롭힘 당하는 거. 어떤 기분인지 아저씨가 제일 잘 알아. 아, 그래. 나도 조금은 잘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그 정도로 내가 맞고 조롱당했어야 했나 싶어, 지금도.”
강민재는 다시 소매를 내리며 말했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능글거리던 그에게 이런 과거가 있을 줄은 나도 생각지 못했다.
그가 스스로 잊고 있던 상처를 들추며 대화를 시도했으니, 나는 끼어들지 않고 지켜보기로 했다.
“지금도 거짓말 같니? 그럼, 더 자세히 얘기해 줄게. 아저씨가 널 도와주고 싶은 거랑은 별개로, 어쨌든 진철이 네가 우리를 믿어 줘야 가능한 일이니까.”
진철의 얼굴에 잠시 당황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하지만 진철은 여전히 믿기 힘들다는 눈빛이었다.
드러나려는 표정을 고집스럽게 감추며, 그는 강민재를 흘끗 바라보았다.
“17살 때, 미국에 유학 갔었어. 어쩌다 보니 미국 사립 학교에 가게됐는데, 그 학교에 동양인은 나 하나였어. 모두가 백인이었고, 집안이 괜찮았지.”
강민재는 착잡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난 나름대로 공부는 좀 잘했지만, 어쨌든 걔네 눈에는 내가 하는 영어는 어색하고, 발음도 우스꽝스러웠을 거야. 처음 갔을 때부터 배척당하고 있다는 걸 느꼈어.”
“…….”
“그렇게 외롭게 학교생활을 이어갔지. 그땐 홈스테이 하고 있을 때라, 미국에 가족은 없었어. 한번은 너무 힘들어서 한국에 전화했더니, 전학 간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거라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하더라고.”
강민재의 말에 진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까 이곳에 오기 전, 진철의 모친과 대화 중에 그가 보였던 태도 역시 이 대목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강민재가 겪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시험 기간이 됐지. 나는 시험을 꽤 잘 봤어. 한국에서도 공부는 좀 했거든.”
강민재가 슬쩍 웃었다.
진철은 그런 강민재를 뚱하게 바라보다 시선을 외면했다.
“그게 거슬렸던 건지, 같은 반에서 좀 먹어 주던 놈이 나를 따로 부르더라. 그리고 그다음은 예상한 대로야. 그 뒤로 학교생활은 지옥이었어.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공공연히 조롱당하고, 학교 끝나면 맞기도 하고. 몸 성할 날이 없었어. 이 손목의 흉터도 그러다가 생긴 거고. 근데 더 힘들었던 게 뭔지 알아?”
진철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였지만, 강민재의 말을 전부 귀담아듣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더 힘들었던 게 뭔지 아냐는 그 질문에 대답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 참담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한테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거야. 선생은 걔네들 편이었거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선생도 동양인인 나를 받고 싶지 않아 했고, 어쩔 수 없이 받아 줬던 거더라고. 그래서인지 내가 그런 문제로 상담 신청하니까 선생은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넘기더라. 너희 담임은 어땠을진 모르겠지만……. 난 그랬어.”
나는 머릿속에 조용히 진철의 담임을 떠올렸다.
응급실에서 처음 만났던 그녀에게 달리 나쁜 인상은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진철이 따돌림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진철의 모친에게 아들의 학교생활엔 조금도 문제가 없다며 못을 박았다는 것도 의심스러웠고.
아마 그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만일 담임이 적극적으로 도와줬거나, 괴롭힘당하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면 진철은 강민재의 대답에 조금은 놀란 반응을 보여야 했다.
하지만 진철은 그러지 않았다.
“도와줄 사람도 없어서 그렇게 버티다가, 결국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나를 만나러 아버지가 미국에 오셨을 때. 그때가 되어서 아버지가 모든 사실을 아셨어. 내가 폭행당한 것도.”
그 말을 끝으로 강민재는 잠시 숨을 골랐다.
진철은 천천히 강민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아버지가 아셔서요. 어떻게 됐는데요.”
“내가 말했잖아. 제대로 뭘 할 수가 없었다고. 아버지 나름대로의 루트로 학교에 진상 규명을 요청하려고 하셨는데, 결과적으로는 내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어. 왜냐고? 나를 괴롭힌 그 백인 놈들도 그 주에서는 꽤나 먹어 주는 집안 자식들이었거든. 우리 아버지가 어디 대통령이었어도 그 선생들한텐 그 주의 영향력 있는 사람이 더 대단하게 여겨졌겠지.”
강민재의 대답에, 진철이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결국, 어른이 알았어도 별 소용없다는 거네요.”
“아니, 아버지는 더 해 보려고 하셨어. 돈을 찌르든, 변호사를 쓰든. 근데 내가 너무 지쳐서, 더는 그 땅에 발붙이고 살기가 싫어서 그만하자고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어.”
“그래서, 아저씨는 괜찮아졌어요?”
강민재는 진철을 보며 작게 웃었다.
“응. 다시 다니던 곳으로 돌아오니까 좋더라. 근데, 웃기지만 그게 아주 잠깐이었어.”
“……잠깐이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
“다시 돌아온 학교는 내가 원래 잘지내던, 내 친구들이 있던 곳이었지만……. 그 친구들하고 원래라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을 작은 트러블이 생기거나, 그 친구들이 평소보다 조금만 더 시큰둥하면 미친 듯이 불안해지더라.”
“…….”
“내 친구들이 그 백인 놈들로 변해서 나를 린치하는 악몽도 꾸고, 몸에 남은 흉터를 볼 때마다 힘들고. 후회가 많이 남았어. 어떻게든 거기서 그 자식들 엿 되는 걸 내가 보고 왔어야 했는데. 변호사를 쓰자는 아버지 말에 그냥 잠자코 따랐어야 했는데 말이야.”
강민재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며 옅게 웃었다.
“그래도 한 10년 버티니까 좀 옅어지긴 했어. 근데, 얼마 전에 날 제일 심하게 괴롭혔던 놈이 하버드 로스쿨 졸업해서 미국에서 제일 좋은 로펌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진짜 속이 뒤집히는 것 같더라고. 저런 새끼가 누굴 변호하겠다는 건지. 만일 그때 내가 법적 조치를 취했다면 저 새끼는 절대 저렇게 승승장구할 수는 없었을 텐데, 이런 생각도 들고.”
강민재의 말을 듣고 있던 나 역시 결국 한숨을 토해 내고 말았다.
나를 이루던 것들을 파괴해 버린 누군가가 떵떵거리며 사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마음은 나도 잘 알고있었다.
“진철아. 우린 네가 그렇게 안 살았으면 좋겠다. 네가 네 상황을 설명해 주면, 그다음은 변호사 아저씨들이 알아서 할 거야. 네가 어떤 상황인지 가장 잘 아니까, 너한테 피해 없게 할 거고. 너를 괴롭힌 그 애들이 그만큼 벌 받게 할 거고, 다시는 너를 이렇게 만들지 못하게 할 거야.”
강민재의 말에 진철은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진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입을 다문 채 한참을 있었다.
우리는 진철을 기다렸다.
“……그 약속, 정말 지킬 수 있어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입을 연 진철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코끝이 붉어진 진철은 고개를 떨구며 숨을 골랐다.
“정말, 저한테 아무런 피해가 없을 거라고 약속하실 수 있냐고요.”
강민재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약속할게.”
“하, 씨발 진짜…….”
진철은 외로 고개를 틀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눈물이 흘러내린 자리를 붕대가 감긴 손으로 어렵게 닦아 냈지만, 울음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진철은 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혁민이 새끼가, 그 새끼가……. 저를 진짜, 맨날, 맨날 못살게 굴고, 괴롭히고, 웃음거리로 만들어요. 저를, 개 패듯이 패고, 저를, 진짜 병신처럼 취급해요, 으흑, 흑.”
진철은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나는 강민재에게 협탁에 놓인 휴지를 향해 턱짓해 보였다.
강민재가 그 말을 알아듣고 그에게 휴지를 떼어 건넸다.
“하…….”
한참을 울고 난 뒤에야 진철은 코를 풀며 진정했다.
강민재는 그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았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이제 대화할 준비가 된 진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진철도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강민재의 아버지가 쓰려 했던 수단, 하지만 강민재의 거부로 쓰지 못했던 수단.
그 수단이 지금 진철의 눈앞에, 제발 나를 써 달라며 스스로 찾아왔다.
“진철아. 저 변호사님은 원래 형사부 검사였어. 청소년 범죄 담당하신 적도 있었고.”
강민재가 말했다.
내가 청소년 범죄를 담당한 적이 있었던가.
형사부에 있었으니, 담당했어도 이상하지는 않다.
강민재가 시보로 들어왔을 당시 그런 사건을 맡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강민재에게는 고작 몇 년 전 기억이지만, 나에게는 10년도 넘은 일이다.
기억이 온전하지는 않았다.
“아저씨 상사인데, 좀 성격이 까칠해. 네가 이해해. 그래도 능력 하나는 대한민국 제일이야. 너한테 너무 까칠하게 굴면 아저씨한테 뒷담해. 같이 뒷담 까 줄게.”
강민재의 말에 진철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분위기도 풀어졌고, 진철도 이제 입을 열 준비가 되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조사에 임할 때였다.
나는 잠자코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진철아, 이제 말해 줬으면 좋겠다. 대체 교실에서 왜 떨어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