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606)
너희들은 변호됐다-606화(606/641)
“윤세연! 왜 거기서 헤매고 있어?”
윤세연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잠깐 화장실을 갔다 왔을 뿐인데 사람에 치여 길을 잃기 직전이었던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니, 다들 자리 없으면 뒤에 빠질 것이지 왜 계속 책상 사이에서 버티고 서서 사람 지나가지도 못하게 한대요?”
윤세연이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기자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초유의 사태잖아. 자리가 부족한 걸 어쩌겠냐.”
“우리나라에 초유의 사태가 한두 번이었어요? 다들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
“이 정도 사이즈는 잘 없잖아.”
“그건 그렇죠.”
윤세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북 가방을 책상 위로 올렸다.
옆에 앉아 있던 기자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눈치를 보며 윤세연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윤세연이 쩝 입소리를 내며 그를 돌아보았다.
“뭔데요.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
“저기 뭐야, 윤 기자 예전에 최 선배랑 친하지 않았어?”
그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속내가 짐작되었지만, 그녀는 짐짓 모르는 체 되물었다.
“그건 갑자기 왜요?”
“왜냐니. 알면서 그런다.”
“뭐, 최 선배한테 들은 얘기 없냐고?”
“그래. 어차피 일중일보에서는 쓸 수 있는 내용이 그렇게 다양하지 않잖아. 근데 나는 사정이 좀 다르니까. 최 선배가 특종 다 쥐고 있는 거 모르는 사람 있어? 최 선배가 사건 전말 다 아는데 분위기 봐 가면서 풀고 있다는 얘기도 있는 마당에. 최 선배 이상의 빠꾸미가 어디 있어?”
윤세연은 한숨을 쉬었다.
최종현도 그렇고 차주한도 그렇고, 있는 그대로 다 알려 주는 스타일들은 아니다.
원래 최종현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차주한에게서 못된 것만 배운 것 같다.
그래도 윤세연이 나름대로 사건에 큰 도움을 줘 왔으니 남들보다 아는 게 많은 건 사실이다.
그녀가 일중일보 소속만 아니었더라도 최종현에게 조르고 졸라서 기사 몇 개쯤은 특종으로 썼겠지만, 그러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최 선배가 목숨 걸고 취재한 걸 제가 마음대로 흘리면 되겠어요? 그건 상도덕에 어긋나지. 그리고 선배는 월급 받지만 최 선배는 월급쟁이도 아니잖아. 이때 바짝 벌어 놓지 않으면 길거리에 나앉아야 한다고요.”
“이번에 번 걸로 몇 년은 놀겠더만. 그리고 같이 방송하는 조봉준 그 사람도 돈 많잖아.”
“조봉준이 최 선배 먹여 살릴 건 아니잖아요. 최 선배도 자기 먹고살 길 찾아야지.”
“아, 누가 큰 거 알려 달래? 그냥 사소한 거라도, 별거 아닌 거라도 좀 노나 먹자 이거지. 어차피 일중일보는 못 쓰는 거 우리가 좀 쓰면 어떠냐. 내가 너 대신 신랄하게 까 줄게.”
“선배 도경일보로 이직하더니 아주 그냥 펜이 날카로워지셨어?”
하지만 내가 우신 특종을 먹을 수 없다면 그 누구도 먹을 수 없다.
윤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진짜 몰라요. 최 선배 은근 얄미운 구석이 있거든요. 알잖아, 선배도. 나한테 빨아 가기만 하고, 내가 빨려고 하면 안 빨려.”
그래도 얼마 전 통화했을 때, 방송에서 다루기엔 너무 사소한 내용들은 믿을 만한 기자에게 넘겨주고 싶다고 하긴 했는데.
윤세연은 선배 기자를 은근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선배 딸이 예중 준비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학원비에 등골이 휜다고.
“몰라요. 이따가 얘기해요. 여긴 사람 너무 많아.”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이 대화했는데도 주변 기자들의 귀가 이쪽을 향한 게 느껴졌다.
가뜩이나 사람에 치여 죽을 지경이고, 통로에도 빽빽하게 서 있는데 여기서 입 잘못 놀렸다가는 무슨 소문이 돌지 모른다.
“아, 우신 놈들 뭐 하는지 모르겠네. 미어터질 거 예상 못 했나? 더 넓은 데서 하든가, 아니면 교통정리를 빠릿하게 하든가 할 것이지. 산소 부족해서 머리가 띵하네.”
윤세연은 괜히 투덜거리며 차주한의 카드로 산 노트북을 폈다.
대충 준비를 하고 필요한 연락을 주고받고 나니 어느덧 예고된 시간이 되었다.
그새 붐비던 장내도 정리가 된 듯한 모습이다.
문이 열리고 복지 재단 이사진이 우르르 들어왔다.
모두 무거운 얼굴이었다.
기자들은 무슨 말이라도 나오면 바로 받아 적을 기세로 그들을 째려보고만 있었다.
단상 앞에 선 이들은 잠시 서로 눈짓으로 신호를 짧게 주고받더니 곧 한 사람이 마이크 앞으로 다가갔다.
“……최근 저희 우신 복지 재단을 둘러싼 의혹에 대하여 말씀드리기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우신 복지 재단 소명우 이사장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소명우가 마이크 앞에 섰다.
단지 병원뿐만 아니라 천사의 집까지 함께 엮인 사안이니 병원장보다는 재단 이사장이 직접 나서는 게 맞다고 판단한 듯했다.
몇 해 전에는 고상준이 직접 재단 이사장직을 겸하고 있었는데, 그랬다면 저 자리에 고상준이 있었으려나.
윤세연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하긴, 고상준이 이사장이었다면 병원장에게 맡겼겠지.
“저희 우신 복지 재단 산하의 서울 우신 병원 의료진 일부와 천사의 집 관계자가 불법 장기 매매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경찰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저희 우신 복지 재단의 임직원 관리가 미흡했던 탓에 크나큰 신변의 위협을 겪고 심적 고통을 받으신 피해자분들께 깊은 사과 말씀 드립니다. 또한 국민 여러분께 실망감을 안겨드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소명우가 스크립트를 읽기 시작했다.
끝까지 들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임직원 관리가 미흡했던 탓’이라는 말에서 그들의 메시지는 충분히 전해졌다.
“저희 우신 복지 재단에서는 사건 피의자 전체를 해직 조치하였습니다. 또한 경찰의 수사에도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다시는 우신 복지 재단 내부인이 이 같은 범죄를 모의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체적으로도 엄격히 조사하여 문제의 근원을 뿌리 뽑겠습니다. 관리 체계를 쇄신하겠습니다.”
소명우는 스크립트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다만, 우신 복지 재단이 재단 차원에서 장기 매매에 관여했다는 억측 및 왜곡성 보도에 대하여서는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장기 매매 사건은 피의자들이 개인적으로 병원에서의 지위를 이용해 공모자를 모집한 사건임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우신 복지 재단은 설립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국민 건강 증진 및 사회 공헌을 위해 노력을 이어 왔습니다. 또한…….”
구구절절 읊어대진 않았지만, 이후 이어진 내용을 축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우린 계속 장사해야 하니까 (특히 회장님은) 그만 욕해라. 우리가 이만큼이나 돈 썼는데 인정 좀 해 줘라. 앞으로는 이렇게 저렇게 대단한 거 더 할 테니까 대충 퉁치자.
2. 우리 잘못 아니긴 하지만 피해자들한테 보상할게. (돈 좀 찔러줄게)
“……저희 우신 복지 재단에 보내 주신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입장 발표가 끝난 뒤 이사진들이 나란히 서서 고개를 숙였다.
다만 거기서 끝이었다.
질의응답은 진행하지 않았다.
대단히 비장한 표정으로 입장했던 이사진이 발표장을 떠났고, 기자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비자금 얘기는 절대 안 하네.”
“하겠어요? 그 미성 불법 의료 시설 땅이 고상준 소유인 것도 언급 안 했는데. 나중에 검찰에 넘어가면 그때나 얘기하겠지.”
입장을 발표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된 내용이긴 했다.
그리고 이런 입장은 내 봤자 물어뜯을 거리를 제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신에게는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여러모로 나은 선택이었다.
그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뻐기고 뻐겼는데, 그럴수록 문제가 더 크게 번지니 어쩔 수 없이 입을 연 게 아닐까.
“주어가 계속 우신 복지 재단인 걸 보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 같기도 하네.”
“발표 타이밍을 잘 맞췄죠. 고상준이 수사받을 때가 되면 저 입장문 주어에 고상준도 포함되었을 텐데, 아직 고상준은 언론에서만 떠들고 있지 경찰에서 직접적으로 지목한 적은 없잖아요.”
수사 기관에서 대놓고 고상준이 연루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았고, 그는 아직 조사를 받지도 않았다.
우신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뭐라고 좀 떠드는 걸 가지고 총수의 해명이 나오면 가오가 죽는다.
게다가 한 번 입장을 내면 앞으로는 무슨 일만 생겨도 입장을 내라고 난리일 게 뻔하지 않은가.
그러니 언젠가 입장문을 내야만 한다면, 고상준이 피의자가 되기 전에 내는 게 그나마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근데 최 선배가 방송에서 공개한 증거 경찰에 넘겼잖아. 페이퍼컴퍼니랑 계좌. 그런데 왜 아직도 소식이 없어?”
“최 선배가 넘긴 증거들 못 보셨어요? 그거 다 해외 문서잖아요. 진위 여부도 파악해야 하고 번역도 돌려야 하고, 전문 인력도 있어야 하니까 아무래도 오래 걸릴 것 같긴 하네요.”
윤세연의 말에 기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거 검찰로 토스하려는 건 아닌가 몰라. 미성에서 잡힌 의료진들 검찰 송치한다며. 검찰 우신 장학생 밭 아니야. 사건 전체가 넘어가면 고상준도 검찰에서 첫 조사 받을 텐데, 장기 매매 관련 혐의는 떼고 비자금 조성 정도에서 마무리 지을 수도 있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윤세연도 기자의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기자들은 최종현과 조봉준이 가진 정보를 다 풀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여태 풀지 않고 들고 있는 정보들이 더 알짜배기라는 건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 이상의 정보를 갖고 있는데도 아직도 안 푼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법도 했다.
그사이에 다른 언론사에서 냄새 맡으면 특종을 뺏길 수도 있으니, 제약이 없다면 얼른 기사화하고 싶은 게 일반적이니까.
기자들은 최종현과 조봉준의 목표가 ‘가장 먼저 엄청난 걸 터트린다’가 아니라,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건을 터트려서 수사 기관에 넘긴다’에 있다는 걸 모르기도 하고.
“그러게요.”
윤세연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였다.
* * *
“우신 놈들이 자꾸 방송을 도와줘서 곤란하네, 이거.”
조봉준은 우신 복지 재단 입장 발표 영상을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경찰에서 NP, BB1이라고 불리는 배후가 존재한다고 밝히긴 했지만, NP, BB1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NP, BB1이 누구인지 밝혀지기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하지만 모든 기다림이 그렇듯이, 설렘으로 시작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특히 대중에게 설렘이 지루함으로 전환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매우 짧다.
따라서 우리는 경찰 브리핑이 나오면 곧장 방송을 켤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신이 입장을 낸다고 하지 않은가.
그래서 기다리기로 했다.
일방적으로 진실을 떠드는 것보다는 우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걸 입증하는 게 보는 사람들에게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아, 우리한테도 그게 더 재미있다.
“오늘은 방송 일찍 켜자. 나름대로 오래 안 하려고 노력하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꾸 예상 시간보다 오래하게 돼. 일찍 시작해야 일찍 끄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시청자들과 장난치거나, 헛소리하는 사람들 비꼬느라 오래 걸린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건가.
“대박집 몇 시까지 하지?”
“갑자기 대박집은 왜.”
“오늘은 대박집 가서 오랜만에 소곱창 좀 먹어 줘야겠다. 끝나고 대박집 갈 수 있을 정도의 시간에 맞추려고.”
“주문을 9시 반쯤에는 해야 여유롭게 먹고 나오겠던데.”
“그럼 6시에 하자.”
예전에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끌어모을 시간에 켜기 위해서 퇴근 시간도 분석하고, 이런저런 조건들을 고려했었는데.
이제 시청자 3만도 넘겨 보니 배가 부른 모양이다.
“공지 올렸다.”
최종현의 말에 나는 휴대폰으로 공지를 확인해 보았다.
[오늘 6시에 방송합니다.주제 : NP하고 BB1은 누구일까?
재밌겠죠?]
배가 부른 게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