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609)
너희들은 변호됐다-609화(609/641)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준홍 씨와 임현일 씨의 휴대폰에 저장된 NP. 비서팀에서 고상준 회장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코드명 맞습니다. 그들이 휴대폰에 김수찬 씨를 NP라고 저장한 이유는 김수찬 씨가 고상준 회장의 수족 같은 존재이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김수찬 씨는 현재 고상준 씨의 이름을 팔아서 장기 매매를 모의한 것에 무척 반성하고 있고, 혐의를 모두 인정합니다.”
변호사가 매끄럽게 혀를 놀렸다.
허민우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을 뻔했다.
분명히 한국어를 듣고 있는데, 심지어 두 번이나 들었는데도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오준홍과 임현일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던 NP가 고상준 씨가 아니라 김수찬 씨라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허민우는 기가 차서 한 번 더 물었다.
그러자 변호사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김수찬 씨는 고상준 씨의 측근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오준홍 씨와 임현일 씨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고상준 회장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전부 지원해 줄 것처럼 속였습니다. 오준홍 씨와 임현일 씨를 꼬드기기 위해, 조금 더 현장감 있는 단어를 사용하자 싶어 코드명을 들먹인 거고요. 그렇기에 오준홍 씨와 임현일 씨도 편의상 김수찬 씨를 그 코드명으로 저장했을 거라고 봅니다.”
변호사는 아나운서라도 되는 것처럼 매우 정확한 발음과 좋은 발성을 가졌다.
그래서 더 열받았다.
지금까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스스로 이해를 거부하고 있던 이 이야기들이 사실은 귀에 쏙쏙 박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민우는 잠시 할 말을 잃고 펜을 딸깍였다.
“그러면 오준홍과 임현일에게 지급된 페이퍼 컴퍼니의 배당금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그것도 김수찬 씨가 보낸 겁니까? 그렇다는 건, RND라는 페이퍼 컴퍼니 역시 김수찬 씨의 소유라는 뜻입니까?”
김수찬은 크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변호사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애매한 대답은 뭐죠?”
“……김수찬 씨의 단독 소유는 아닙니다. 오늘 함께 조사를 받으러 온 공원호 씨와 함께 설립한 페이퍼 컴퍼니입니다. 관련된 자료도 추후 제출하겠습니다.”
장기 매매뿐만이 아니라 RND까지 김수찬과 공원호 둘이 뒤집어쓰기로 했다는 건가.
물론 장기 매매만 인정하고 RND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건 이상하긴 하다.
어제 코드명을 공개하는 방송이 끝난 뒤 그들이 자수 전화를 하기까지 걸린 약 2시간은 김수찬과 공원호가 마음의 준비를 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단순한 경제 범죄도 아니고, 장기 매매까지 뒤집어쓴다는 건 보통 각오로 될 일이 아니니까.
“김수찬 씨가 임현일 씨, 오준홍 씨와 소통하기 위해 사용했던 대포폰입니다.”
변호사가 테이블 위에 낡은 휴대폰을 올려놓았다.
“함께 제출하겠습니다. 비밀번호는 0311입니다.”
온갖 흉악한 범죄를 뒤집어쓰기로 마음먹었다면 지금이라도 최선을 다해 형량을 줄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자수와 증거 자진 제출.
이 얼마나 감동적인 반성인가.
“알겠습니다.”
허민우는 대포폰을 상자에 넣고는 노트북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개소리긴 해도 어쩌겠는가.
조서는 써야 한다.
이런 헛소리를 받아 적고 있을 때마다 자신이 뭘 하고 있는 건가 싶긴 하지만 말이다.
“김수찬 씨는 진심으로 본인이 저지른 잘못에 반성하고 있습니다. 처음 현장에서 체포되었을 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묵비권을 행사했지만, 언론과 국민의 질책을 들으며 본인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 느끼고 공원호 씨와 함께 자수를 결심한 겁니다.”
허민우가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두고 있을 무렵, 변호사가 덧붙였다.
“그건 법정에서 말씀하세요.”
조사 때부터 엄청나게 반성하는 티를 내야 기자들 귀에도 들어가고, 훗날 판사 귀에도 흘러들어 가겠지.
“잠깐 쉬었다 하시죠.”
시계를 확인한 허민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사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휴대폰으로 기사부터 확인했다.
[우신 고상준 회장 비서, “장기 매매 내가 사주했다”] [“고상준·고윤수 짓 아니다, 두 분께 죄송” 비서팀장의 고백] [우신 복지 재단 거짓말한 적 없어… 장기 매매 진범은 비서들] [수족에게 배신당한 고상준·고윤수]오전 10시쯤 기사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기자들이 엠바고를 깼기 때문은 아니었다.
김수찬과 공원호가 경찰청 앞으로 기자들을 불러 모았기 때문이다.
전화로 자수한 뒤, 내일 조사받으러 나오라고 하자 곧바로 기자들에게 연락을 돌린 게 분명하다.
‘내가 내일 자수하러 가니까 찍으러 오시고 대문짝만하게 실어 주세요’ 했겠지.
실제로 그들이 아침에 경찰청 앞에서 벌인 쇼는 코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초췌한 모습으로 벌 떼처럼 모인 기자들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진심으로 반성합니다’, ‘사죄드립니다’,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습니다’, ‘저 대신 곤욕을 치르신 회장님과 사장님께 죄송합니다’ 이 네 마디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재벌을 향한 질투심이 섣부른 의심으로 비화된 대표 사례 TOP5] [잘못은 무조건 재벌 총수가? 의심부터 하고 보는 비뚤어진 관심] [대중의 섣부른 낙인… 고상준 회장 심정은?] [끼워 맞추기 식의 의심 이제 그만, 루머에 고통받는 유명인] [2000년대 루머로 고통받다 세상을 등진 연예인 누구 있나?]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진범은 고상준과 고윤수가 아니라 그들이 수족처럼 부리던 비서라는 기사가 나기가 무섭게 온갖 옹호 기사가 등장했다.
심지어는 루머로 고통받다 생을 마감한 연예인들과 고상준을 비교하기에 이르렀으니 말 다 하지 않았는가?
수많은 증거를 기반으로 고상준과 고윤수를 범인이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근거 없는 루머를 믿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을 비판하던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이 추락하는 꼴을 보고 싶은 추악한 대중으로 취급받았다.
정작 김수찬과 공원호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대중에 공개된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환장하겠네.”
당연히 이것이 진짜 국민의 목소리라고 여기진 않는다.
우신이 언론에 뿌린 돈, 여론 조성을 위해 고용한 알바들이 열심히 날뛴 결과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모습을 보면 진이 빠지는 건 사실이었다.
“허 경위.”
조사실 매직미러 뒤에서 몇 시간 내내 팔짱 끼고 서서 조사 내용을 모니터하던 현병주가 그를 붙잡았다.
“본부장님.”
나오자마자 휴대폰부터 확인하느라 현병주가 가까이 있는 줄도 몰랐다.
“잠깐 나 좀 봐.”
허민우는 현병주를 따라 그의 방으로 갔다.
아직 조사는 끝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대화를 통해 대충 그들의 전략은 파악되었다.
“나오자마자 기사 찾아본 것 같은데. 맞아?”
현병주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여론을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요.”
“여론 신경 쓰지 마. 우리가 파악한 사실 그대로 밀고 가.”
“본부장님.”
“앞으로 고생 좀 할 거야. 알겠지만, 공원호도 김수찬하고 똑같이 말했어. 둘이 입을 맞추고 들어왔으니 그랬겠지. 그리고 임현일하고 오준홍 대포폰에서 확인한 문자 내용에서도 NP하고 BB1한테 회장님, 사장님 하진 않았잖아. 웬만하면 전화로 얘기했고. 자기들도 꿀릴 게 없으니까 제출했을 거라고. 저 둘, 고상준하고 고윤수 차명이었을 거야. 계좌도, 페이퍼 컴퍼니도 저 둘 명의로 된 거 엄청 많을 거고.”
“네. 처음부터 이런 상황이 올 때를 대비하고 작업해 놨을 겁니다.”
“그랬겠지. 하지만 진짜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을 거야. 그러니까 분명히 틈이 있을 거라고. 저 둘은 모든 걸 다 인정하고 처벌받겠다는 것처럼 굴고 있으니까 우리가 요청하는 자료들은 다 내놓을 거야. 뭐, 분실했다는 소리도 가끔 하긴 하겠다만. 그 자식들이 주는 자료, 거기서 틈을 잘 찾아야 해. 그럼 돼.”
김수찬의 직함은 비서팀장이지만, 직급은 상무다.
대기업 총수의 비서팀장은 흔히 실세라고 표현된다.
늘 총수의 지근거리에 있기 때문에 자식들보다도 더 총수의 의중을 잘 알고 있다.
총수의 의사 전달은 항상 비서팀장을 통해 내려오고, 총수에게 전달되는 말도 언제나 비서팀장을 통한다.
그렇기에 계열사 전체적인 사정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는 데다, 계산은 슈퍼 컴퓨터급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 무지막지한 범죄를 다 떠맡기로 했다면, 오랫동안 설계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을 것이다.
해외 계좌나 페이퍼 컴퍼니만 봐도 그렇다.
해당 국가에 공조를 받는 게 쉽지 않아 수사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경찰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증거들만으로는 자수한 김수찬과 공원호를 제치고 고상준과 고윤수가 이 수많은 범죄의 수괴라는 걸 입증할 수 없을 공산이 크다.
“원래 우리는 욕먹는 존재였어. 장기 매매 수사본부 웬일로 빠르게 꾸렸냐, 특공대 보내서 전원 검거한 거 잘했다, 브리핑에서 피의자 착착 특정한 거 속 시원하다, 이런 칭찬이 오히려 별스러웠던 거지. 그래도 오랜만에 칭찬 좀 들었으니까 기분 좋았잖아? 이걸 동력으로 삼아서 어떻게든 파자고. 파고 또 파면 틈 발견할 수 있어. 이런 사건 수사하면서 압력 안 받는 것만으로도 이미 좋은 환경이다.”
현병주가 손바닥으로 허민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맞는 말씀입니다.”
“실세들이 무려 이 흉악한 범죄를 떠맡았는데, 얼마나 엄청나게 보상받았겠어? 계좌 열심히 뒤지다 보면 또 자수하는 대가로 지급받은 것들이 나올지도 모르지.”
“예, 최선을 다해서 찾아보겠습니다.”
“댓글 같은 거 보지 마. 그게 진짜 국민 모두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 같아? 다들 아이디 대신 주민번호 쓰는 거 아니고서야 어떻게 확신해? 몇 놈이 아이디 수백 개 만들어서 물량 공세하는 걸 수도 있어.”
“네, 그 점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허 경위는 허 경위가 직접 파악한 사실만 믿고 나가.”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가. 이거라도 주워 먹고 조사실 들어가. 알았어?”
현병주가 책상 한쪽에 놓여 있던 검은 비닐봉지를 허민우에게 건네며 말했다.
비닐을 열어 보니 은박지로 포장된 김밥 두 줄이 있었다.
“나 먹으려고 산 건데 양보하는 거야. 다른 애들한텐 말하지 마. 삐칠라.”
“감사히 먹겠습니다.”
“허 경위가 제일 예뻐서 주는 건 아니다. 제일 밥 많이 굶는 사람이 허 경위 같아서 주는 거야. 착각하면 곤란해.”
“착각 안 합니다.”
허민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현병주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얼른 나가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허민우는 허리 숙여 보인 뒤 방을 나섰다.
그 길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는 먼저 온 사람은 없는지 옥상 구석구석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최근 통화 내역에서 차주한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차주한입니다.
차주한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제 음식점에서 김수찬과 공원호가 자수했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고, 오늘 오전에 기사가 잔뜩 났으니 아무래도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을 터였다.
“변호사님.”
─네.
“이제 슬슬 도청한 거 깔 준비 하셔야겠습니다.”
허민우의 말에 차주한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요. 아무래도……. 때가 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