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616)
너희들은 변호됐다-616화(616/641)
“변호사님하고 내 의견이 합치되는 지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우신이 낡고, 고루하고, 적절하지 못한 수단을 동원하는 체제를 개편하는 겁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거죠. 그러려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고윤수는 제스처를 쓰며 보다 적극적으로 말을 이어 갔다.
“아버지가 물러나셔야죠.”
한마디로 고상준은 내줄 테니, 여기서 멈추라는 소리다.
“2년, 3년 재판이 지루하게 이어지다 보면 사람들은 지칩니다. 본인들 삶과 연관 없는 연예계 사건에 더 관심을 기울이겠죠. 나와 아버지가 특사로 나오더라도 모를 겁니다. 심지어 감옥에 간 것도 잊어버리겠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우신에 사소한 위기라도 닥치면 총수의 부재 때문이라는 핑계로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변호사님의 목표는 우신에서 고작 몇 년 우리를 배제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의 예견이 틀린 것은 아니다.
방송할 때마다 틈만 나면 지속적 관심을 호소하는 이유도 이런 것 때문이었다.
내가 사건이 전개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터트릴 시기를 재고, 묵혀 두는 궁극적인 이유였다.
“결과적으로는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단 말입니다. 변호사님, 오랫동안 목숨 걸고 준비했는데 그런 아쉬운 성적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견이 합치되는 지점을 찾아, 현실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나도, 변호사님도 만족할 방법을.”
“사설이 길군요. 그러니까, 고상준 회장의 모든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넘길 테니 더 건드리지 말고 여기서 멈추라는 거 아닙니까.”
고윤수가 이러는 걸 보니 확실히 무섭긴 한 모양이다.
하긴.
아무리 물적 증거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믿더라도, 만약을 대비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
게다가 김미자가 전면에 나선 이상 그들은 성매매 폭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서 파생될 문제까지 생각하면 어떻게든 여기서 멈추는 게 우신에게는 이득이다.
그래서 나를 구태여 설득하면서까지 보험을 들려는 것이다.
고윤수가 보기에는 나 역시 증거가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을 테니까.
서로가 서로의 보험이 되어 리스크를 상쇄하자고 하면 구미가 당기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아서 얼른 위기에서 벗어나겠다는 태도.
확실히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는 고상준과는 다른 방식이다.
그래서 내가 손정민과 문역 살인 청부 사건을 터트렸을 당시, 플레이어가 바뀌었음을 대번에 느낀 것이다.
그 당시 고윤수는 천사의 집을 내줬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고상준의 인신매매 사업과 그 증거까지 함께 날리려고 했다.
고통스럽게 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윤수는 잃는 것 하나 없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방식이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결과적으로 고윤수 씨는 살고, 고상준 회장은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썩게 하겠다는 건데. 그럼 고윤수 씨는 뭘 잃습니까. 편하게 경영권까지 넘겨받으면서 순식간에 우신을 장악할 수 있는데, 대체 뭐가 나한테 만족스러운 결과라는 겁니까.”
“그래서 내가 약속하는 건 우신의 혁신입니다. 변호사님도 알겠지만, 혁신이라는 건 외부에서 들쑤신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내부에서 고쳐 나가야 하죠. 나는 내부에 있었으면서도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었고, 인정받으려 애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를 막을 수도, 혁신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감사 역할을 해 줄 인재가 필요합니다.”
구구절절 떠들어대지만 축약하면 한 줄이다.
제 밑으로 들어오란 소리다.
“그게 진정한 문제 해결 아니겠습니까. 변호사님은 재산도, 명예도 충분하니 그런 걸로 꼬드길 수 없다는 거 잘 압니다. 변호사님이 만족할 방향으로 우신의 문제점을 뜯어고칠 온건하고도 유일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고윤수는 언변에 능한 타입이었다.
그에 대해 알아보면 임원들과 토론을 즐긴다는 이야기가 자주 눈에 띈다.
강경한 태도였던 임원들도 고윤수의 설득에 넘어간 적이 있다고 말이다.
이러한 점마저 고윤수가 고상준의 자식 중 유일한 희망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겠지.
총수 일가는 우신 내부에서 전제 군주나 다름없는 권력을 누렸으니, 설득이라는 과정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찍소리도 않고 따랐을 테니까.
즉, 고윤수가 달변가가 맞다고 하더라도, 뽐낼 무대가 별로 없었을 거란 말이다.
나는 그 무대가 내 앞이 될 줄은 몰랐다.
“솔직히 터놓고 말해, 나는 정의라는 불확실한 개념을 실현하는 걸 목표로 삼을 순 없습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정의의 개념이 다르고, 모두의 입맛에 맞추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니까요.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정의롭지 않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말장난이다.
이건 법을 지키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다만 확실한 건, 나는 우신이 더 나은 모습으로 이 사회와 공생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진실]“반성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대면하고 보니 고윤수라는 인간을 좀 더 확실하게 알 것 같다.
엄밀히 말해 고윤수와 고상준의 지향점은 조금 다르다.
물론 기본 전제는 같다.
이 둘 모두 준법정신의 필요성에 크게 공감하지 못한다.
반인륜적인 행동이라도 자신에게 필요하다면 해도 된다고 여기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다만 사회가 이를 범죄로 규정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런 행동을 하면 스스로에게 문제가 생긴다는 것도 인지하고는 있다.
부자간의 차이점은 자신에게 생기는 문제를 대하는 태도에서 발생한다.
고상준은 초법적인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덮으면 그만이다.
사람들이 떠들어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고, 어차피 금방 잊고 착취당해 줄 테니까.
반면에 고윤수는 굳이 사람들에게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을 동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떠들어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지만, 앞으로도 원활하게 착취하려면 굳이 귀찮은 일은 안 만드는 게 나으니까.
“…….”
언뜻 보면 고윤수가 좀 더 나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고윤수가 저런 생각을 갖게 된 까닭은 명확하다.
고상준이 오래전부터 쌓아 놓은 기득권이 2012년 현재 충분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또, 그는 고상준에 비해 대중이 보다 많이 알고, 보다 목소리가 커진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는가.
고윤수는 문제가 생기면 얼마나 골치 아픈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만일 고윤수가 고상준과 같은 시대를 살았더라면,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결국, 고윤수가 나에게 말하는 혁신은 도덕적인 우신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니다.
개돼지들을 조용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의 ‘반성’이란, 개돼지들이 그런 모습을 바란다는 걸 인지하고 있고, 그런 척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반성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묻자, 고윤수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럼 말을 꺼냈으니 한번 들어 보죠. 고상준 회장, 고윤수 씨, 그리고 우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열거하고 잘못된 이유를 말해 보십시오. 그 반성이 얼마나 진심인지에 따라 내 결정도 바뀔 것 같습니다.”
“…….”
“아, 참. 뭐라고 하더라. 도게자인가. 무릎 꿇는 거 말입니다. 그것도 한번 해 보시죠. 그러면 좀 더 진심이 전해질 것 같네요. 오노데라 마사오의 마음도 그렇게 돌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생떼 부리는 노인네 달래 보겠다고 쉽게 꺾는 무릎인데, 진심으로 반성한다면 더 쉽겠네요. 고윤수 씨가 아무리 거래인 것처럼 포장한다고 해도, 결국 살려 달라고 빌러 온 거 아닙니까. 오노데라보다는 내 앞에서 꿇는 게 더 효율이 좋은 것 같은데요.”
고윤수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모멸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뭐, 나도 고윤수가 무릎을 꿇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럼 잘못한 점을 열거하는 건 할 수 있을까.
“…….”
당연히 못 하겠지.
지금 당장 생각해도 그 이유는 무려 세 가지나 있다.
1. 열거하는 순간 자백이 될 것이고, 범죄의 증거 중 하나가 될 테니까.
2.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서, 뭐가 그렇게 잘못인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으니까.
3. 굴욕적이니까.
이런 생명체와 똑같이 인간이라는 종족적 범주 안에 묶인다는 것에 모멸감을 느낀다.
“못 하네요. 당연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진심으로 반성한다면 이런 방식으로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생각도 안 합니다. 지금 상당히 화가 나겠네요. 왜 아니겠습니까. 무려 고윤수 씨가 나같이 미천한 것을 설득하겠다고 모처럼 오랫동안 떠들었는데도 결과가 이렇잖습니까.”
나는 생수병을 까서 목을 축였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할 말이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떠오르는 문장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고상준이 만든 폐단을 끊기 위해 그 일부가 되어 버렸다고 했죠.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하다면, 고발은 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습니다. 전제 자체가 틀렸습니다. 고윤수 씨는 본인이 고상준과 다르다고 선을 긋고 싶었던 모양인데, 오히려 같은 사람이라는 걸 입증한 셈이 되었네요.”
고윤수는 미동도 않고 나를 쳐다보았다.
사람들 앞에 끊임없이 노출되는 삶을 살았으니 감정을 숨기는 것에도 익숙해 보였다.
꽤나 분노했을 텐데도, 처음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을 때를 제외하면 그렇게 티가 나지 않는다.
“목표가 뭐냐고 물었죠. 이 사회에서 당신 같은 사람 배제하는 겁니다. 우신이라는 기업의 경제적 존망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니까. 당신과 당신 아버지, 이 구조를 떠받들던 인간 부품 전체를 우리 사회에서 격리하면 내 목표는 달성됩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우신이라는 기업 집단도 사실상 해체될 겁니다.”
“…….”
“나와 말이 잘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니 매우 유감입니다. 그것도 틀렸습니다. 말이 통할 수가 없습니다. 고윤수 씨의 저능한 사고력으로는 평범한 사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능하다는 단어가 나왔을 때 고윤수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어서 안면근육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고, 동공이 확장됐다.
그러나 분노보다는 얼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내가 고윤수가 떠드는 내내 기가 막혀 끼어들지 않았듯이, 고윤수도 지금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우신 총수 일가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그들은 언제나 이 사회 안에서 우월하기에, 정확히는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공산이 컸다.
“고윤수 씨 말이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하던 가신들에게 둘러싸여 살다 보니 현실 감각이 없는 것 같은데. 고윤수 씨의 그 시혜적인 태도로는 그 누구도 설득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나름대로 양보라는 걸 하면 상대방은 응당 감읍하며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나와의 거래도 당연히 성사되리라 믿었겠지.
고윤수는 우신의 소시오패스적인 사고방식과 선민의식의 집약체다.
마땅히 아버지와 나란히 추락해야 한다.
“나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생각했다면서 결국 한다는 제안이 고작 이 정도라니……. 역시 사고력에 큰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서울 우신 병원에서 검사 한번 받아 보시죠. 요즘 환자도 별로 없어서 편안하게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카우치에 걸쳐 놓은 재킷에 팔을 꿰며 일어났다.
직원들과 강민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객실을 나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변호사님.”
등 뒤에서 고윤수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습니까.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신이 나에게 기회를 주거나 빼앗을 수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지금껏 기회를 만들어 온 건 나다.
고윤수는 아직도 착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어차피 더 말해 줘도 고윤수 씨는 못 알아들을 것 같은데, 몸으로 부딪치면서 익히는 것도 방법이겠네요.”
“…….”
“아니면 그냥 외워요. 고상준 회장도 끝날 거고, 고윤수 씨도 끝날 겁니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머리 굴리지 말고 얌전히 본인 차례 기다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