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73)
너희들은 변호됐다-73화(73/641)
“할아버지. 혼자 낭만을 즐기고 계신 거예요?”
돌계단을 올라 정원에 들어선 강민재는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조부를 발견했다.
테라스에는 겨울을 맞아 투명한 장막을 설치하고, 난로를 비치하여 훈기가 가득했다.
무릎 위에 담요를 덮은 채로 식사 직후의 여유를 느끼던 조부는, 지퍼를 열고 테라스로 들어오는 손자를 향해 괜히 핀잔을 주었다.
“안쪽에서 들어오지, 왜 자크를 열고 들어 와? 바깥바람 들어오잖아.”
“잠깐이잖아요. 근데, 날도 추운데 아무리 난로가 있다고 해도 좀 그렇지 않아요? 연세도 있으신데. 예전이랑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할아버지 이제 노인이에요, 노인.”
싱글벙글 핀잔으로 맞받는 손자를 보며, 그는 결국 너털웃음을 지었다.
“저녁 먹고 나서 맨날 여기 앉아서 책도 읽고 하는데, 네가 하도 집을 비우니 이제 와서 잔소리를 하는 거다. 태광 다닐 때보다 더 바빠진 것같아?”
“뭐, 그렇죠. 태광 때는 패러리걸 같은 사람들도 있고 해서 이렇게까지 일이 많진 않았는데, 사무실엔 지금 저랑 차 선배 둘뿐이니까요.”
강민재는 그를 발견하고 테라스로 나온 가사 도우미에게 커피를 부탁하고는 외투를 벗었다.
의자 등받이에 벗은 외투를 거는 그의 행동을 느리기 그지없었다.
마치 조부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알고 그것을 외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는 괜히 외투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 난 다음에야 조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재미있냐?”
“네?”
못마땅해하는 답변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던 그는, 예상외의 물음에 눈을 굴렸다.
“재미있냐고 물었다. 차주한이랑 같이 그렇게 고생하는 거.”
“고생 아니에요. 고생은 무슨!”
팔을 휘휘 저었지만, 왜인지 오늘 차주한에게 지금처럼 사는 게 뭐가 편하냐며 골 아프고 잠 못 잔다고 투덜댔던 게 생각났다.
강민재는 한숨을 푹 쉬며 팔을 내렸다.
“아, 물론 좀 고생이긴 하죠. 하지만 태광에서 일했을 때보단 훨씬 좋아요.”
“뭐가 좋은데.”
“태광 대표님이 계속 연락하세요? 다시 돌아오라고? 여기서 일한 지가 언젠데 계속 태광 얘기하시고.”
“흐음, 마치 그런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조부가 도리어 묻자, 강민재는 어깨를 으쓱였다.
지난 표절 사건 때 태광의 변호사가 슬쩍 그런 메시지를 전달한 적은 있었다.
남들은 못 들어가서 안달인 로펌인 만큼, 콧대가 높은 곳이다.
웬만해서는 이미 퇴사한 변호사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할 리 없으니, 자긍심을 가져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강민재의 입장에선 조금 달랐다.
“받았어도, 어차피 제 능력 때문에 다시 돌아오라는 건 아니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해?”
“할아버지 때문일 게 뻔하니까 그렇죠. 할아버지가 태광에 투자를 많이 하셨잖아요.”
“그 일과 너는 별개야.”
“그건 할아버지의 생각이고, 태광에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요. 뭐, 잘됐어요. 할아버지, 이참에 자금 빼시는 건 어떻습니까?”
강민재는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말했다.
“저 저번에 드라마 사건 있잖아요, 표절 사건. 그거 들어갔을 때 태광이랑 붙었어요. 저희 사무실이 하는 일이 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그런 게 많은데, 그런 사건이면 태광이랑 더 자주 붙을 수밖에 없잖아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는 말에 조부는 웃음을 흘렸다.
“호연지기도 그 정도면 지나쳐.”
“호연지기 아니고 그냥 진심입니다, 할아버지. 지금은 차 선배가 할아버지가 제 할아버지인 줄 모르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고요. 차 선배가 제가 할아버지 손자라는 걸 알았는데, 할아버지가 자꾸 적으로 만나는 태광에 크게 투자하고 있다는 걸 알면 기분이 어떻겠어요?”
손자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태광 입장에서는 차주한 변호사 사무실쯤이야 신경도 쓰지 않을 공산이 크다.
윤원형은 차주한에게 러브콜을 몇 번 보낸 적이 있었다곤 하지만, 어차피 그에게는 인재가 썩어 넘칠 정도로 많지 않은가.
어찌 되었든, 태광과 어느 정도 긴밀한 위치에 있는 자신의 손자가 자꾸 태광의 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손자는 지금 그러한 상황에 놓일 할아버지보다 배신감을 느낄 차주한을 더욱 걱정하고 있었다.
“너, 태광 돌아갈 생각이 조금도 없구나? 차주한이랑 일하는 게 아주 좋은 모양이야.”
“네. 전 지금이 좋아요.”
“앞으로도 계속,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 같아?”
“네. 차 선배가 절 내쫓지 않는다면요.”
조부는 침음하며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차주한은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법조인이었다.
그의 검사 시절은 완벽에 가까웠다.
그대로 잘 밟아 올라가서 줄만 잘탄다면 고위직도 넘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를 가르쳤던 서울 법대와 사법연수원 교수들도 차주한의 이름을 모두 기억할 정도였으며, 그들은 차주한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초반부터 때 묻어서 술자리 따라다니며 딸랑거리는 검사도 아니었다.
훗날 정치를 해 보겠다고 나서더라도 청백리 이미지로 밀고 나가도 될 만큼이었다.
그는 좋은 의미의 유명 인사였다.
그가 갑자기 5년 차에 사표를 쓰고 변호사가 되기 전까지는.
“차주한이 법정에서 검찰을 비판한 뒤로, 그 행보에 대해서 비난하는 법조인들이 많다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조부의 말에 강민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설핏 웃었다.
“할아버지, 차 선배에 대해서 알아보셨군요? 뭐, 안 그러신 게 더 이상하긴 하지만요.”
강민재는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를 마시며 조부와 눈을 마주쳤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할아버지는 차 선배가 왜 검찰을 그만뒀는지도 아십니까?”
강민재의 물음에 조부는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끼었다.
“너는 모르는 모양이구나.”
“……모릅니다. 차 선배가 말을 안하니까요. 하지만 차 선배도 제가 무언가 숨기는 걸 알면서도 안 물어보니까, 저도 물어 볼 수가 없어요.”
“차주한이 검찰에 있을 땐, 눈에 띄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검찰을 뜨기 직전에 맡았던 조진태 사건만 해도, 기자들의 연락이 쇄도했는데도 제대로 통화한 사람이 하나 없다고 하고.”
조부의 말에 강민재는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그의 밑에서 시보를 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충분히 차주한이 눈에 띄는 것을 즐기지 않는 성격이라는 사실쯤은 알 수 있었다.
분명히 눈에 띄는 사람이었음에도, 딱히 출세 욕심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인상이 맞았다는 걸 증명해 주는 게 윤세연이었다.
검사 시절 연락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고 시근덕거리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은 맡는 사건마다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지. 아마 법조인 중에는 차주한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라던데.”
처음 김연준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엎은 것도 그랬고, 두 번째 표절 사건도 그랬고.
물론 이번 시험지 유출 사건에 자신의 입김이 크게 닿았다는 것을 알릴 생각은 없는 것 같았지만, 일단 진철의 재판이 시작되면 몇몇은 유추할 지도 모른다.
이 사건이 처음 점화된 것은 포털에서였지만, 뉴스에 오르내리는 규모로 키운 것은 일중일보의 윤세연 기자였다.
윤세연 기자는 전부터 차주한이 관련된 기사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물론, 차주한 입장에서는 그녀가 편하기 때문에 이용하는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사건을 처음 기사로 써낸 사람이 다름 아닌 윤세연인 것을 보고, 차주한을 관심있게 지켜보는 사람들은 시험지 유출 사건 자체가 차주한의 손으로 밝혀졌음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갑자기 사람이 바뀐 이유가 무엇일 것 같으냐.”
조부가 다시 물었다.
강민재는 대답을 망설였다.
대신, 조부가 차주한을 수상하게 여겨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될 것을 염려했다.
“차 선배가 눈에 띄는 걸 좋아하는게 아니라, 제가 좋아하는 겁니다. 차 선배는 프로보노 같은 것도 많이 진행하려고 하지만, 제가 사무실 규모도 키우고 싶고 하니까 계속 유명한 사건들을 맡자고 했어요.”
조부는 열정적으로 차주한을 싸고도는 손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차주한이 검찰을 나가기 전까지 하루 만에 사람이 변한 것 같다던 사람이 많던데. 아, 그렇지. 총애를 듬뿍 받던 부장하고 갑자기 불화가 생겼다고 하던가.”
“……그런 것까진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불화가 생길 수도 있고 그런 거죠…….”
강민재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자, 조부는 그저 웃었다.
“네 말에 따르면, 그렇게 완벽한 차주한이 갑자기 자기 부서 부장검사와 사이가 확 틀어진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사회인이라는 건, 아무리 더러운 꼴을 보더라도 자신을 위해서라면 참는 거거든. 너처럼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사는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촌철살인에 강민재는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이미 그전부터 검찰청을 나가고 싶었나 보죠. 갑자기 검찰에 신물이 났을 수도 있고요. 저도 검찰이 저랑 맞지 않는 것 같아서 1년 하고 때려 치웠잖아요.”
“너는 비빌 언덕이 있지만, 차주한은 아닐 텐데? 보아하니,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서 개천에서 용 난 사례 같던데.”
조부와 계속해서 대화하다 보니 자꾸 말리는 기분이었다.
이 대화를 더 이어 가다간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 싶어, 강민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사람마다 사정은 있어요. 저도 있고, 차 선배도 있을 거예요. 차 선배가 갑자기 급전이 필요해서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든, 검찰에 신물이 나서 차렸든, 저는 상관없어요. 저는 차 선배랑 일하면서 제가 여길 선택한 게 옳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거든요. 많이 배우고요. 이번 사건만 해…….”
빠르게 쏟아 내던 강민재가 잠시 멈추자, 조부는 온화하게 미소지었다.
“급우에게 괴롭힌 당한 그 아이 사건 말이냐?”
“……네.”
무언가 화제를 꺼낼 때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조부가 얄미웠지만, 강민재는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저 처음에 시보로 들어갔을 때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차 선배가 학교 폭력 사건을 맡았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학교 폭력은 부가적인 거고, 조폭 하수인 노릇을 하는 고등학생들이 입건된 건데…….”
강민재는 천천히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그 사건을 조사하는 도중, 그 학생들이 학교 폭력을 일삼아 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하지만 검찰에서는 학교 폭력은 사안이 번거롭고, 이미 다른 범죄로 입건되었으니 그 부분은 적당히 넘기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거기서 유일하게 그들이 지은 죄를 모두 엄정히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 차주한이었다.
“차 선배하고 계장님이, 가뜩이나 부족한 잠 다 줄여 가며 학교 폭력사건까지 전부 조사했더라고요. 피해자 진술도 따고, 경찰에 요청해서 전수 조사까지 하고. 관련 부서에서 왜 니들이 나대냐고 하니까, 아무런 조건 없이 그 부서에서 진행한 걸로 하고 소년 재판 열어 달라고 했어요. 차 선배가.”
강민재는 이마를 짚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차주한의 진면목을 보기도 전에, 학교 폭력을 당했던 자신의 과거를 투영하여 그를 흠모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덮으면, 피해자 학생들은 영원히 그 상처를 안고 살 거라고. 그 트라우마가 쉽게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법이 그 가해자들을 심판해 줘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야 나라가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말이 단순한 성문법이 아니라는 걸 알 거라고 했어요.”
지금도 차주한이 그 말을 뱉던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했다.
차주한의 검사실로 찾아와서 왜 남의 일을 들쑤시고 다니냐고 소리지르는 상대 부장검사에게 하나도 지지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거기서 위로를 얻었다면, 그게 이상한 걸까.
“…….”
강민재가 안고 살았던 상처를 가장 잘 알고 있던 조부는 결국 핀잔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그는 어색해진 분위기 사이에서, 괜히 허허 웃으며 조부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손자 사람 보는 눈 믿어 주세요. 저는 너무 피곤해서 씻고 자야겠어요. 할아버지도 얼른 들어가세요. 아, 얼마 만의 칼퇴근이냐~”
강민재는 테라스를 벗어나 집 안으로 사라졌다.
조부는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강민재가 홀린 그 차주한이라는 놈이, 정말 제대로 된 놈인지 아니면 검은 속이 있는 구렁이 같은 놈인지는 더 지켜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