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82)
너희들은 변호됐다-82화(82/641)
태식이 모는 차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번화가를 지나, 구불구불한 골목에 다다랐다.
번화가에서 많이 온 것도 아닌데도 순식간에 인적이 드물어졌다.
골목에 빼곡하게 주차된 차량들 사이로 어렵사리 지나간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름한 상가 앞에 멈췄다.
“여기가 국정원이랑 저번 주에 막창 먹은 뎁니다. 그렇게 맛있진 않지만, 싼 맛에 가죠.”
상가 1층에는 쓰러질 것 같은 입간판이 놓인 막창집이 하나 있었다.
그 외에도 철물점과 작은 호프집이 들어서 있었는데, 썩 깨끗한 모습은 아니었다.
나를 따라 차에서 내린 강 변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국정원이 누군데 여기까지 만나러 옵니까?”
“만나 보면 알아.”
태식은 앞장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로 향하는 길 천장에는 노래주점이라고 적힌 불 꺼진 네온사인이 붙어 있었다.
벽에는 노래방 선곡표 따위가 업체별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09년 3월에 이른 지금, 08년 2월이 최신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관리를 안 하는 듯했다.
혹은, 장사를 하지 않거나.
“아, 국정원 그 새끼 자기 나와바리에 누구 데려온 거 알면 지랄 안하려나. 걔가 삐쩍 꼴아서 멸치 같은 게, 한번 지랄하면 진짜 용천지랄을 떨거든요.”
노래주점 입구 앞에 선 태식이 중얼 거렸다.
내가 대답 대신 문을 열라고 턱짓하자, 태식은 한숨을 쉬며 발로 문을 쾅쾅 걷어찼다.
철로 된 문이 부딪치며 시끄러운 소리를 울려댔다.
강민재가 두 귀를 틀어막을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려오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빼꼼 열렸다.
“저희 장사 안 해요. 다른 데 가세요.”
그리고 꾀죄죄한 인상의 마른 남자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방금 일어난 건지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국정원은, 태식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시 문을 닫으려는데, 태식이 문틈에 발을 끼워 넣었다.
“얌마. 눈 떠라. 해가 중천인데 아직도 처자고 지랄이야.”
“엉? 장태식이?”
그제야 국정원은 눈을 비비며 눈곱을 떼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국정원을 처음 봤을 때는 장발이었는데, 지금은 어깨까지 오는 단발이었다.
아마도 기르는 중인 모양인데, 진지하게 장발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해 주고 싶어졌다.
그의 입장에선 초면인 내가 무슨 참견질을 하는가 싶겠지만 말이다.
“뒤에 저 말도 안 되게 잘생긴 양반은 뭐냐. 너랑 어울릴 급이 아닌 것 같은데. 영화배우냐?”
국정원이 몹시 견제하며 태식에게 물었다.
태식은 나를 흘긋 보더니, 국정원에게 속삭였다.
“솔직히 내가 더 잘생기지 않았냐?”
“지랄 마. 어쨌든, 뭔데.”
“이분이 널 좀 보자고 해서. 언제까지 밖에 세워 둘 거냐? 비켜. 네 나와바리 심하게 누추한 거 아니까 부끄러워할 건 없다.”
태식이 문을 확 열어젖히자, 국정원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비쩍 마른 몸으로 껑껑대며 일어선 그는, 태식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힘만 무식하게 세서는. 우라질 새끼. 저거 언제 뒤지나. 에휴,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들어오세요.”
국정원은 껌껌한 내부에 조명을 밝혔다.
주황색 전구 하나 들어오자 사물을 식별할 정도로는 밝아졌다.
지금도 노래주점으로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내부는 노래방 그 자체였다.
카운터였던 것으로 보이는 곳에는 컵라면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업소용 냉장고 안에는 팩 소주가 가득했다.
“어쨌든 거기 잘생긴 양반은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하셨는데요? 보니까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데 말 놔도 되나?”
국정원이 성냥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나에게 물었다.
“너보다 여섯 살 많아, 위아래도 없는 싸가지 없는 새끼야.”
태식이 국정원의 머리를 가격하며 그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국정원은 태식에게 맞은 것보다 내가 자신보다 연상이라는 게 놀라웠는지, 입을 벌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놀랍게도, 이전 삶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흠흠. 죄송합니다, 형님. 형님이라고 해도 되죠?”
“무슨 형님이야, 변호사님한테. 변호사님이라고 해. 확 그냥.”
평소에 나를 싸가지라고 불렀던 태식이 왜 군기반장 노릇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언제까지 의미 없는 대화로 시간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니까 나보다 여섯 살 어린 것 같은데 말 놔도 되나?”
“아, 예. 변호사님.”
어느덧 공손해진 국정원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아니고, 동영상 하나 분석해 줬으면 해서. 화질을 좀 올렸으면 좋겠는데.”
“흠, 화질을 올린다라. 좀 고난도긴하네요. 동영상 제대로 봐야 알겠지만, 10분 미만은 최저가가 100만원부터 시작하고, 그 이상은 제가 부르는 게 값입니다. 에누리 안 되고요. 그리고 기한도 동영상 상태를 봐야 말씀드릴 수 있고요. 그래도 최소 보름은 주셔야 합니다.”
“보름 있어도 2주 놀고 마지막 날에 몰아서 하잖아? 하루만 줘도 되는 거 아닌가?”
내 물음에 국정원은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렇게 눈을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태식을 흘겨보았다.
“네가 말했냐? 죽고 싶냐?”
“아니? 아나, 이번에는 진짜 억울하거든? 변호사님은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찍었어.”
국정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흘긋 돌아보며 물었다.
“동영상 가져오셨어요?”
내가 안주머니에서 USB를 들어 올리자, 국정원이 고개를 까딱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국정원은 룸이 빼곡하게 들어선 복도를 지나, 가장 끝 라고 적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조명은 없었지만, 커다란 노래방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모니터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니터 뒤에 즐비하게 늘어선 본체들에서는 눈이 아플 정도로 파랗고 붉은빛이 터져나왔다.
이곳에 잠깐 있었을 뿐인데도 시력이 떨어질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과자 봉지와 구겨진 팩소주, 그리고 내용물이 남아 있는 컵라면에 핀 곰팡이는 보기만 해도 비위가 상했다.
이전 삶에서 만났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몇 년 앞 당겨 만났다고 이런 꼴을 봐야 한단 말인가.
“우욱!”
강민재는 내부를 둘러보다가 정말로 헛구역질을 했을 정도였다.
“동영상 줘 보세요.”
쓰레기 더미 사이에 미묘하게 남아있는 공간에 궁둥이를 붙인 국정원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 위에 USB를 올려 주자, 그는 본체에 꽂은 뒤 동영상을 열었다.
“어, 이거! 정영준 동영상이네요? 아, 내가 이거 어제 보내줬잖아, 인마. 네가 구해 달라고 하도 지랄해서!”
국정원이 낄낄거렸고, 태식은 한숨을 쉬었다.
대철 핑계를 댄 것이 생각나 부끄러운 모양인데, 처음부터 그의 궁색한 변명을 믿은 적은 없었다.
“근데. 여기서 뭘 분석해 달라는 겁니까? 변호사라고 해서 뭐 재판에 필요한 CCTV인가 했더니, 혹시 야동 좋아하는……?”
“사람을 뭘로 보시고. 그건 아니고요. 정영준 씨가 저희 의뢰인입니다. 동영상 속에서 단서가 될 만한 게 없을까 싶어서 화질을 올려서 보려고 하는 겁니다.”
강민재가 씩씩거리며 말하자, 국정원은 까슬까슬한 턱수염을 문질렀다.
“흐음. 정영준이 본인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고 있다더니, 그 사람 변호하시나 봐요?”
“네, 뭐. 그렇게 됐습니다.”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싶으신 게 뭔데요? 그래야 그 부분 집중적으로 화질 작업하죠.”
“어, 그 동영상 찍는 남자가 누군지 확인하고 싶고요. 그 동영상 속 장소가 어딘지,”
“그냥 24분 전부 다 화질 올려서 줘.”
내 말에, 국정원이 별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예? 저기요. 변호사님. 뭘 모르시나 본데, 이 업계에서는요. 원판불변의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신의 손이라고 해도요, 동영상 화질 자체가 낮으면 복구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요.”
“이봐. 국정원. 지금 못 하는 척하면서 흥정하려는 것 같은데.”
“……예?”
“할 수 있잖아? 물론 기한은 아까 말한 하루로는 부족하겠지만. 잠자고 밥 먹는 시간 빼고 하면 일주일 내로 할 수 있지 않나? 그 정도 실력은 되잖아.”
“예? 아니, 아니…….”
국정원은 진심으로 난감해 보였다.
‘아니,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옆에 서 있던 태식에게 그 불똥이 튀었다.
“씨발! 대체 뭐야, 이 사람! 장태식, 네가 다 말했지? 엉? 오랜만에 손님 꽂아 주나 했더니 이렇게 엿을 먹여?”
“아니라고, 미친놈아! 나 저 사람한테 네 얘기 한 적도 없어! 근데 갑자기 오늘 너 만나게 해 달라고 해서 데려온 거라고!”
“근데 어떻게 다 알지? 오반데?”
국정원은 혼란스러운 듯 때가 낀 긴 손톱을 자근자근 씹었다.
“걱정하지 마. 돈은 넉넉히 줄 생각이니까. 결과만 좋다면.”
“……진짭니까?”
“장 대표. 내가 입금 밀리거나 제대로 안 한 적 있나?”
내가 태식을 향해 묻자, 태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흠, 저 수전노 새끼가 저러는 걸 보면 믿을 만한 것 같은데. 일단 100만 원 선금부터 주시죠.”
사람 못 믿고 선금부터 받는 건 여전하다.
이전 삶에서는 전에 데인 적이 있어서 그렇다고 했는데, 지금은 벌써 데인 후인가 보다.
어차피 그럴 것 같아서 미리 은행을 들러서 준비해 두었다.
나는 지갑 속에서 100만 원짜리 수표를 꺼냈다.
테이블 위의 과자 봉지를 대충 옆으로 밀어 놓고, 자리를 확보한 후 수표에 서명했다.
“정확히 일주일 줄게. 동영상 받자마자 나머지 지불할 건데, 늦으면 하루에 20만 원씩 깔 거니까 알아서 기한 맞추고.”
“예?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아니, 이 양반 웃기는 양반이네. 잘생겨서 내가 좀 봐주려고 했더니만. 누구 맘대로 20만 원씩 깝니까?”
“안 늦으면 되잖아.”
“아니, 그렇긴 한데……. 애초에 그런 조건이 붙어 있으면 부담이 돼서 어디 일이나 하겠냐고요. 그런 조건 있으면 일 못 합니다, 저.”
“그래? 그럼 지금 구청에 신고해서 장사 접게 해 줄까? 여기가 무슨 구였더라. 영등포구였나?”
“죄송합니다. 일주일 뒤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가 수표를 스윽 자신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볼일은 끝났다.
안 그래도 시간을 많이 지체했으니,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야 한다.
“살펴 들어가십쇼, 변호사님.”
고분고분해진 국정원은 노래주점 문 앞도 모자라, 건물 입구까지 따라와 우리를 마중해 주었다.
태식이 모는 차가 출발하자, 나는 휴대폰을 열었다.
정영준으로부터 새 문자 알림이 와있었다.
[변호사님, 정영준입니다. 강 변호사님은 형오 형을 의심하는 것 같은데… 심적으로 많이 불안하네요… 아닐 거라 믿고 싶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든 해결됐으면 합니다. 잘 해결되겠죠?]무척이나 불안해 보이는 내용이었다.
정영준은 이 문자를 나에게 바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낼까 말까 여러 번 망설이고, 말을 고르고 골라 전송했겠지.
‘동영상이든, 임형오 쪽이든. 뭐라도 나와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