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84)
너희들은 변호됐다-84화(84/641)
정영준이라는 말에 임형오는 급속도로 차분해졌다.
빚 독촉이라면 갖은 난동을 피우는 그가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정영준에게 돈 빌린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변호사가 정영준, 그 새끼에 대해서 뭘 물어보고 싶은 건데요?”
임형오가 어깨를 툭툭 털며 말했다.
빈 소주병이 모양 없이 널브러진 바닥을 손으로 휘휘 치우며 그는 똑바로 앉았다.
강민재는 주변을 둘러보다, 신문지를 들고 와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앉았다.
나에게도 신문지를 권했으나, 나는 대충 손을 저어 거절하며 임형오를 바라보았다.
“정영준 씨에게 원한이 깊으신 것 같은데, 사연을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정영준한테 원한? 그건 왜.”
내가 곧바로 대답하지 않자, 임형오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양진 그룹 쪽 변호사신가? 마누라가 이혼 소송할 거라는 얘기는 얼핏 들었는데. 정영준 구린 이야기 같은 거 캐는 모양이네요?”
협조적으로 변한 그는, 갑자기 존댓말까지 하며 태도를 바꾸었다.
제대로 오해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원한이 깊다면 우리가 정영준을 변호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침묵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실, 가장 빠른 방법은 다짜고짜 임형오에게 ‘정영준의 비디오를 찍어 유포했느냐’고 묻고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강민재가 지켜보는 상황이라, 판단의 이유가 합당하지 않으면 무슨 수로 알아냈느냐고 추궁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강민재를 떼어 놓고 올 것을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그랬다고 해도 그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귀찮게 캐물어 댈 것이다.
시간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 전체적인 사연을 들어 보기로 했다.
비디오 유포 여부를 떠나, 사건 진행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알고들 왔겠지만. 제가 7년 전까지 정영준이랑 같이 동업을 했거든요?”
“한국대 앞에서 운영하던 양식당 말씀이시군요.”
“그렇죠. 근데 정영준이 이제 재벌가에 장가를 가게 돼서 장사를 정리 해야 할 것 같다고 하는 겁니다. 나는 엄마한테 미리 유산 받는 셈 치고 엄마 집 담보로 대출받아서 육천 맞춘 거라 사활을 걸고 있었는데. 진짜 맥 빠졌죠.”
“하지만 정영준 씨가 빠지는 과정에서는 별다른 갈등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죠. 대출로 전환하는 것에도 큰 문제는 없었고. 지금처럼 신용도가 개판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어쩌다가 갈등이 발생한겁니까?”
임형오는 쓰게 웃으며 구겨진 담뱃갑에서 비틀어진 담배를 꺼냈다.
한 번 길게 빤 후, 그는 연기와 함께 한숨을 뱉었다.
“그 새끼가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만일 자기가 빠지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 달라고 했단 말입니다. 재벌집에 장가가는데, 친형제 같은 형한테 도움 하나 못 주겠냐고 하면서요.”
임형오는 정영준의 말을 자신의 입으로 내뱉으며, 어이가 없는지 실실 웃었다.
정영준에게 들은 이야기 중 저런 내용은 없었지만, 임형오의 말은 사실이었다.
“뭐, 그러다가 2년쯤 지나서 임대 계약 만기일이 다가왔는데. 그새 건물주가 바뀌었더라고요? 근데 갑자기 임대료를 말도 안 되게 올려 달라고 하는 겁니다.”
갑작스러운 임대료 상승은 소상공인에게 가장 큰 고통이다.
이전 삶에서도 임대료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대두되었다.
임대료 때문에 크게 번화했던 거리도 순식간에 상권이 붕괴되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그때가 막 정영준이 양진 F&B에 입사했을 적인데, 건물주가 누군지 찾아보니까 양진 F&B 이사더라고요. 제가 그 집 사람은 아니지만 정영준하고 연줄이 있잖습니까? 그래서 정영준 그 새끼한테 부탁 좀 하려고 문자를 보냈었죠. 큰 부탁 할 생각도 아니었습니다. 임대료 올리는 건 좋은데 조금만 깎아 달라고 할 생각이었어요.”
“그랬더니요?”
“답장이 없는 겁니다. 전화를 해봤어요. 근데 없는 번호라네? 그때 배신감이 팍 들었죠. 동업 깨면서 나한테 했던 말들이 다 진심인 줄 알았고, 솔직히 그 말 듣고 나도 비빌 언덕이 없진 않구나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씨발, 비빌 언덕이 사실은 없는 거였지.”
강민재는 임형오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영준 역시 직접 결혼한 뒤에는 임형오와 연락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임형오의 말을 들어보면 마치 정영준이 일부러 무시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다고 그의 머리 위에 잠시도 꺼지지 않고 떠 있는 [진실] 두 글자를 온전히 믿기도 애매했다.
임형오가 굳게 믿는 진실이 그것이니, 정영준이 의도적으로 그를 외면한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과는 [진실]로 출력되니까.
“대출 없이 장사하다가, 갑자기 대출이 육천이나 생겼으니 매달 이자 돌아오지. 원금도 같이 상환해야 하지. 게다가 대학교 앞 장사라서 비싸게 받을 수도 없고, 애초에 염가로 파는 걸 목표로 했으니까 쭉 싸게 팔아야 하거든요? 재료비가 하도 오르니까 한두 번 오백 원, 천 원 인상했더니 손님이 뚝 끊기더라고요. 그 상황에 임대료까지 올랐는데 어떡해. 그냥 장사 접어야지.”
“그 일 때문에 정영준 씨한테 원한을 품으신 겁니까.”
“배신감 들고 뒤지게 서운하긴 했지만, 그걸로 원한이 생긴 거면 내가 속 좁은 놈이죠. 씨바, 나는 정영준 그 새끼랑 진심으로 친형제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며 살았었다고. 재벌집에 장가갔다고 안면몰수하는 그 좆같은 새끼한테, 그때까지도 나는 좋은 감정이 남아 있었어요.”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며 이마를 짚었다.
“갑자기 사는 세상이 확 달라졌으니까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겠지, 그리고 청탁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으니까 연락처를 급하게 바꿨겠지. 그러다 보니 나한테 바뀐 연락처 알려 주는 것도 잊어버렸겠지. 난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 뒤로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강민재가 착잡한 얼굴의 임형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임형오는 강민재를 흘긋 올려다보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지냈냐고? 아주 지옥에서 지냈습니다. 가게 팔아서 빚 갚고, 남은 목돈 한 오천쯤 되는 걸로 뭘 할까 하고 있을 때였는데. 갑자기 엄마가 병상에 누우셨네? 근데 씨발 보험도 안 되는 아주 좆같은 병이야.”
“아이고…….”
이야기를 몰입해서 듣던 강민재는 짧게 탄식했다.
지금 마주 앉은 저 남자가, 우리의 의뢰인이 찾는 그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잠깐 내려 둔 것 같았다.
“이미 나 장사한다고 밑천 다 털어서 담보 대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집 팔면 당장 거리로 나앉게 생겼거든. 그래서 일단 내 돈 오천은 엄마 병원비로 다 날렸지. 하, 진짜……. 생각하면 멍청한 짓이었어. 어차피 얼마 더 못 살고 가셨는데, 그럴 줄 알았으면 수술한다고, 연명 치료한다고 빚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빚이라면, 어떤 종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묻자, 임형오는 선선히 대답했다.
“신용 대출, 카드론, 현금 서비스,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았죠. 그러다 안 되니까 주변에 꾸러 다니고. 그 와중에 동생 새끼가 사람 패서 감옥에는 보낼 수 없으니까 깽값 물어주러 다니고. 동생이 망나니 새끼라. 씨발, 아주 지옥이었거든, 사는 게. 나는 씨발! 숨만 쉬는데! 자꾸 돈이 빠져나갔다고!”
“정말 고생 많이 하셨겠어요.”
“고생했다 뿐입니까. 하, 더는 말 맙시다. 내 입만 아프니까.”
“그렇다면, 정영준 씨에게 원한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흐흐, 그건……. 내가 임대료 일로 도움 좀 받아 보려고 했다가 장렬하게 씹힌 뒤로 자존심이 상해서 연락을 안 하다가요. 신용 대출이며 카드론이며 하다 보니 막을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나는 돈이 없고. 금세 신용 불량자가 되더라고? 엄마가 숨넘어갈 듯 말 듯하면서 계속 살아 있고, 동생 새끼가 팬 놈은 합의금 오륙백 달라 하고. 씨바, 방법이 없잖아. 그래서 정영준을 찾아갔어요. 양진 F&B 본사로. 연락이 안되니까 직접 간 거지.”
“그랬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1층에서 못 들어가게 하니까, 로비 직원한테 나 정영준 좀 만나게 해 달라고. 급한 일로 찾아왔다고. 임형오라고 하면 누군지 알 거라고. 너무 급한 일이니까 잠깐이라도, 1분이라도 만나 달라고 전하라고 했죠.”
임형오는 그 말을 하며 인상을 크게 찡그렸다.
몹시도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는 듯했다.
“그랬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뭐였는지 알아요?”
“…….”
“상무 이사실에서 모르는 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돌아가라고 합니다.”
임형오는 단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 없었지만, 그것은 정영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정도 사건이라면 정영준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는 정영준에게 직접 물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임형오가 느꼈을 비참함의 크기가 결코 작지만은 않았다는 것만은 알겠다.
“근데 나는 정영준이 도와주지 않으면 사채 말고는 방법이 없었거든. 그렇게 몇 번 더 찾아갔는데, 정영준이 자리에 없다는 개소리만 계속 하더라고요. 없긴 뭐가 없어. 그냥 꺼지라는 소리겠지. 결국, 그때부터다 포기하고 사채에 손 대게 된 거야, 나는. 엄마고 동생이고, 진작 버렸으면 씨발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텐데……. 흐흑.”
임형오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사실, 임형오가 정영준에 맡겨 둔 돈을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다.
호의를 베풀어 주기를 바랐으나 거절당한 것이다.
정영준에게 큰 배신감은 느낄 수 있겠지만, 그 때문에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3자인 내 생각이고, 임형오는 느낀 바가 다를 수도 있다.
“그래서……. 정영준 씨에게 복수하고 싶었습니까?”
“복수? 그래. 복수. 하고 싶었죠. 재벌집 사위 됐다고 그렇게 옛 인연들 개차반 취급하고 멸시하는 그 개새끼, 나중에 똑같이 당하게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지.”
임형오 자신이 받은 멸시만큼, 정영준도 멸시를 받길 바랐다.
그래서, 그 비디오를 찍은 것인가.
그 비디오가 세상에 퍼진 그 시점부터, 정영준은 희대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멸시했다.
임형오가 바라던 대로,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의 결과가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영준 씨에게 마약을 먹이고 강제로 섹스 비디오를 촬영한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