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89)
너희들은 변호됐다-89화(89/641)
정영준은 내가 내민 종이를 받아들고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바로 알겠다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 반지의 주인이 정영준의 지근거리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반지를 살피던 그는, 곧 종이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습니다. 처음 보는 반지예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도움이 못 되어서…….”
정영준은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강민재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독여 주었다.
“지금 죄송하다고 우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정영준 씨.”
“……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하다는 말도 이제 그만하십시오. 저흰 괜찮습니다.”
냉정해 보일 수 있겠지만, 지금 이 사건에서 울보는 필요 없다.
정영준 비디오에 관련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처음으로 유의미한 단서가 등장했다.
이제 조금씩 진실에 다가가고 있는것이다.
그런 때일수록 더욱 침착해야 한다.
“그럼 주변에 키가 190 이상 되는 체격 좋은 남자가 있습니까. 양진 그룹 경호팀 사람이나, 비서실이나. 뭐든 좋습니다.”
“……190이요?”
정영준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가, 그는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변호사님, 잠깐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키가 크신 것 같아서 비교해 보려고요.”
그의 말에 따라 일어서자, 정영준 역시 따라 일어서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자신과 나의 키 차이를 가늠해 보려는 것 같았다.
“실례지만 변호사님 키가 얼마나 되시죠?”
“187입니다.”
“거의 190에 가깝군요. 변호사님보다 키가 커야 한다는 말인데……. 없는 것 같은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정영준의 주변에는 키가 190인 사람도 없다.
나는 만일 장인, 장모의 소행이라면 양진 그룹 내부 인력을 썼을 거라 생각했다.
절대 자신들이 드러나면 안 되는 사건인 만큼 외부 용역이나 깡패를 동원하면, 그만큼 입막음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영준이 본 적이 없다면, 무엇일까.
정영준은 고상경 회장의 집에서 7년을 살았다.
그런 그조차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은, 양진 그룹 내부인이 아니거나 고상경이 극비리에 부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반지, 체격, 우리가 얻은 세 가지 단서 중 두 가지는 무의미해졌다.
그렇다면 세 번째.
“그렇다면, 혹시 이름이 긴 사람은 주변에 없습니까.”
“이름이 긴 사람이요?”
“지금 보고 계신 그 반지는 말씀드렸듯 맞춤 디자인 커플링인 것으로 추정되고, 저희는 거기에 거뭇거뭇하게 보이는 무늬가 레터링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커플링에는 보통 사랑에 대한 글귀나, 상대방의 이름을 새긴다고 하더군요. 이름이라고 가정한다면 글자가 다소 깁니다. 그래서 이름이 긴 사람이거나 글귀가 아닐까 생각한 겁니다.”
“아, 그렇군요. 이름이 긴 사람이라…….”
정영준은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났는지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있어요. 있습니다!”
“누굽니까?”
“김은하수 씨라고, 장모 수행 비서입니다.”
그 말에 강 변이 반색하며 반지 사진을 뜯어 보았다.
“이름이 김은하수면, KimEunhasoo라고 쓰겠네요. 대충 길이로 보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강민재는 반지 사진 위에, 대충 알파벳 크기를 어림잡아 선을 그어보았다.
화질이 좋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그럼, 정리해 보면……. 회장 부인이 김은하수라는 비서에게 정영준 씨의 동영상을 만들라고 지시했고, 그 비서가 본인의 남자 친구와 함께 일을 꾸몄다……. 그런데, 그 남자친구가 어쩌면 사내 연애 중인 양진 그룹의 직원일 수도 있다. 이건가요?”
“김은하수 씨는 기혼자입니다. 남편일 겁니다, 아마도…….”
정영준은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김은하수 비서 남편이니 외부 유출 걱정 없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일을 맡겼을 수도 있겠군요.”
“장모는 김 비서를 굉장히 신뢰합니다. 모든 일을 김 비서에게 시키기도 하고, 하는 짓이 예쁘다면서 쇼핑하러 갈 때 본인 것을 사면서 김 비서 것도 하나씩 사 주곤 하더군요.”
이제야 알겠다는 듯, 정영준의 목소리는 점점 고조되어 갔다.
“김은하수 비서 남편을 본 적은 없 으십니까?”
“없습니다. 단 한 번도……. 하지만 양진 그룹 사람인 건 확실합니다. 장인 밑에서 일 한다고, 그러니까……. 전략실 사람이고, 장인이 수족처럼 부린다고 들었습니다.”
“전략실이라면,”
“재벌가에서 자행하는 온갖 뒷공작을 담당하는 곳이야.”
정영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반지 사진이 인쇄된 종이를 꽉 움켜쥐있다.
“역시 장인, 장모 짓인 게 틀림없어요. 이걸, 이걸 진아한테 알려야 해요. 진아한테 알려서,”
“아직 이릅니다.”
흥분했던 그는 내 말에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일단 김은하수가 그 반지를 착용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김은하수의 남편이 그 비디오 속 남자와 체격이 일치하는지도 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설령 그게 전부 들어맞는다고 해도, 고상경 회장 부부가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 잡아떼면 사실 방법이 없다.
만일 김은하수 부부가 평소에 정영준과 함께 일탈을 즐겨 왔고, 카메라에 그 상황을 담은 것뿐이라고 증언해 버린다면 어떨까.
내가 만일 고상경 회장 부부라면, 자신의 짓이라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에게는 훗날을 약속하며 일단 그렇게 둘러대라고 말한 뒤, 충분한 포상을 주면 된다.
평소에 장모가 김은하수 비서를 몹시 아꼈다고 하니, 그들의 충성심도 보통이 아닐 것이다.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
‘대중을 움직이는 방법도 있을까.’
비디오 속의 카메라맨이 양진 그룹 전략실 사람이라는 것을 세상에 공개하면, 대중은 순식간에 정영준을 피해자로 인식할 것이다.
그 뒤에 김은하수 부부가 일명 ‘물귀신 작전’으로 정영준과 평소 그런 파티를 함께 즐겨 왔다고 밝힌다고 하더라도, 대중은 그 말을 믿지 않을 공산이 컸다.
하지만 문제는 법적인 영역에서는 인정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카메라맨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고 고진아 역시도, 정영준의 말보다는 부모 말을 더 믿을 것이고.
대중의 인정을 받을지는 몰라도, 고진아의 인정을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정영준은, 대중보다는 고진아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정영준 씨, 김은하수 씨의 남편에 대해서 알아보실 수 있습니까?”
“……해 보겠습니다.”
정영준은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우리가 그쪽을 의심한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됩니다. 확인하실 방법이 있으십니까?”
“저, 아직은 양진 F&B 상무입니다. 다음 주에 저를 해직 처분한다고 했으니까, 아직은 권한이 있을겁니다.”
“전략실은 다른 계열사에 속해 있지 않나요?”
“네. 하지만 제가 직함을 여러 개 갖고 있어서, 양진 그룹 고문이기도 합니다. 인사 조회는 할 수 있어요.”
“회사 바깥에서 데이터를 조회할 수 있습니까?”
“……출근해서 확인해야죠.”
정영준은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직 저녁이 되려면 멀었습니다. 해직은 확실히 정해졌으니까, 오늘 짐 정리를 하겠다고 출근해서 확인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는 한 시간 전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이다.
만일 출근했다가 거기서 고진아를 만나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있을지 나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정영준 씨,”
“그럼 제가 정영준 씨를 수행하겠습니다.”
그를 말리기도 전에 강민재가 나섰다.
내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강민재 역시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가 직접 정영준 씨와 함께 양진 F&B로 가서 확인하겠습니다. 저 그래도, 나름대로 순발력 있는 놈입니다. 변호사님이 뭘 걱정하시는지도 알고요.”
정영준은 탐탁지 않은 내 표정을 보며, 슬쩍 말을 보탰다.
“진아는 이혼 이슈가 생긴 뒤 출근하지 않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진아와 마주칠 일은 없을 겁니다.”
“기자들은요.”
내가 묻자, 정영준은 한숨을 쉬었다.
그 생각은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비디오가 유출된 후, 기자들은 양진 F&B와 고상경 회장 자택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어떻게든 양진 그룹 일가나 정영준의 인터뷰를 따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일전에 정영준은 별거를 선택한 후, 오피스텔로 이사 나오면서도 기자들의 끈질긴 추적을 받았다고 했다.
다행히 고진아가 보안팀에 지시를 내려 정영준의 차를 쫓는 기자들을 따돌려 주었고, 이 오피스텔은 들키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런데 만약 정영준이 오늘 본사에 모습을 드러내면, 또다시 기자들이 그를 알아보고 추적할지도 모른다.
“지하 주차장 같은 곳은 없습니까? 보안팀에 연락해서 짐을 뺄 건데, 기자들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하면 도와줄 것 같은데. 이 오피스텔로 나오실 때도 도움받으셨잖아요.”
강민재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정영준에게 물었다.
“여태까지 정영준 씨가 이혼을 거부해 왔는데, 해직을 받아들이고 짐을 빼겠다고 하면 이혼도 수용할 거라 생각해서 도와줄지도 모릅니다. 고진아 씨한테 직접 연락할 것도 없이, 보안팀에 연락 넣으면 알아서 고진아 씨한테 보고 올라 갈 거고요.”
강민재가 말을 보탰다.
사실, 달리 방법이 없기는 했다.
태식을 이용해서 김은하수 비서의 남편에 대해 알아본다 하더라도 시간이 많이 걸릴 뿐더러, 실패할 가능성도 있었다.
고상경 회장과 한집에 살았던 정영준조차 수족처럼 부렸다던 그를 본적이 없을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이다.
지금의 태식에게는 고난도의 미션이다.
“강 변호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6시 반 정도에 도착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야근하는 사원들도 그쯤에는 저녁을 먹으러 나가니까요.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서, 임원용 엘리베이터를 타면 은밀히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저렇게 확신에 찬 대답을 하니, 나 역시 반대할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