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90)
너희들은 변호됐다-90화(90/641)
“차라리 제가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직까지 범인조차 특정하지 못했다.
이쪽에서 준비한 패가 없기에, 고진아 측에 어떻게 대응할지 전략조차 짜지 못했다.
정영준이 직접 출근해서 인사 기록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변호사님은 얼굴이 좀 알려져 있어서 안 됩니다.”
강민재가 잽싸게 말했다.
“만약 기자들이 거기 있다면, 변호사님이 등장하자마자 바로 알아챌 거예요. 정영준 씨가 이혼 소송을 위해 변호사님을 선임했다는 걸.”
“그러는 강 변은?”
“전 변호사님에 비해서 일단 인지도가 훨씬 낮기도 하고, 선글라스 끼고 있을 겁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이 2시……. 아직 여유가 있군요. 일단 정영준 씨는 보안팀에 연락하시고 깨끗하게 씻으세요. 면도도 하시고, 머리도 단정하게 하시고요. 혹시라도 기자들에게 노출될 상황을 고려해야 하니까요. 옷도 단정하게 입으시고……. 드레스룸이 어디죠?”
정영준은 맞은편 방을 가리켰다.
나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정장이 진열된 칸을 확인했다.
정장 한 벌과 셔츠, 그리고 넥타이를 골라 바깥에 내놓았다.
눈에 띄지 않고, 기자들이 옷으로 무언가 기사를 쓸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기자들은 정장의 색깔, 넥타이의 무늬 따위로 당사자의 기분을 추측하려는 경향이 있다.
있지도 않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저런 코디를 선택했다면서.
“향수는 뿌리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기자들이 향수 냄새라도 맡았다간 이런 상황에 향수까지 신경 썼다고 쓴소리를 할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정영준은 보안팀에 연락하여, 자신의 방문 계획을 알렸다.
보안팀은 상부에 보고하고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긴 뒤 전화를 끊었다.
그는 서둘러 샤워를 하러 들어갔고, 강민재는 그가 자살을 시도했던 흔적들을 치웠다.
커튼 봉에 묶인 호스를 쓰레기봉투에 넣고, 식탁 의자는 다시 부엌에 가져다 놓았다.
욕실에서 물줄기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강민재는 어질러진 집 안을 바라보았다.
“부엌이 너무 더럽네요. 이런 환경에서는 멀쩡하던 사람도 정신 망가지겠어요.”
“어차피 본가로 옮기기로 했으니까, 집 비우고 사람 쓰면 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샤워 가운을 입은 정영준이 욕실에서 나왔다.
물기 어린 머리를 털던 그는, 조금 민망했는지 우리를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어, 정영준 씨. 전화 오는데요.”
그때, 거실 협탁에 올려놓았던 그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보안팀에서 다시 연락 주기로 했으니, 그것일까 했는데.
“지, 진아예요.”
휴대폰을 들어 올린 정영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영준은 바로 휴대폰 플립을 열려했으나, 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정영준 씨. 침착하십시오. 동요하지 마시고, 차분하게 대답하셔야 합니다. 전화는 스피커폰으로 받으시고요. 고진아 씨가 뭐라고 하든 울지 마세요. 싸우지 마시고, 이혼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오로지 오늘 본사 방문하는 얘기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전화 녹음하세요.”
빠르게 말을 쏟아내는 나를, 정영준은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휴대폰을 열었다.
“……여보세요.”
-나야.
휴대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고진아의 목소리는 몹시 차분했다.
정영준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어,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잘 지냈겠어?
조진아가 날이 선 목소리로 되묻자, 정영준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의 귓가와 눈 주변이 붉어졌다.
그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당신, 오늘 짐 정리한다고 보안팀에 연락했다길래.
“어, 그랬지. 어쨌든 해임되는 거니까 짐은 챙겨야 하잖아.”
-이제라도 받아들여서 다행이네. 그럼, 이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 해석해도 되는 건가?
정영준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강민재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이면지와 펜을 집어 들었다.
[절대 우시면 안 됩니다. 화제는 오늘 본사 방문으로 돌리세요.]그리고 메모를 적어 정영준에게 보여 주었다.
정영준은 메모를 확인하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 대답이 없어?
“……그건 차차 얘기하자.”
-차차? 지금 내 변호사가 당신한테 이혼 준비하라고 연락한 지 시간이 꽤 지난 걸로 알고 있는데?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고진아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영준은 어떡하냐는 듯 우리를 바라보았고, 나는 강민재가 했듯이 메모를 적어 그에게 보여 주었다.
정영준은 떨리는 눈으로 메모를 읽고는 대답했다.
“진아야. 곧 답을 줄게. 그러니까 그 얘기는 그만하자. 보안팀에 얘기 잘 전달해 줘. 어차피 상무이사실 비워 줘야 하는 거고. 내가 본사에 갔다가 괜히 기자들한테 붙잡히면 당신도 곤란해지잖아.”
-하, 그만하자고? 대체 언제까지 뭉그적거릴 건데? 이미 끝난 문제에 계속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정말. 빨리 마음 정해 줬으면 해. 그래야 나도 소송을 준비할지 말지 정하지.
“……이미 소송 준비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정영준이 물었다.
다소 격앙된 목소리였다.
강민재는 깜짝 놀라 그에게 싸우지 말라는 메모를 보여 주었지만, 정영준은 참지 못했다.
“내가 당신 집에서 나온 뒤로 내 연락은 전부 무시하다가, 내가 본사에 짐 가지러 간다고 하니까 이제서야 연락하는 거 보니까 알겠네. 이미 마음 확고하게 정해 놓고, 변호사 통해서 당신은 소송까지는 가고 싶지 않아 하니까 협의 이혼하라고 나한테 계속 압박 넣는 이유가 뭐야? 당신 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 내가 증거 찾는다고 했잖아.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
-말했잖아, 이미. 나는 확고해. 있지도 않은 증거 찾아보겠다고 시간 낭비하는 거, 정말 지쳐. 나는 그 비디오만 생각하면 당신 같은 인간이랑 7년 동안 살았다는 게 소름이 끼친다고!
“진아야. 나랑 7년이나 살았으니까 알잖아. 내가 그럴 놈으로 보여? 내가 정말 너한테 그런 인간이었어?”
-……그만하자, 정말. 그때 내가 아무 조건 없이 이혼해 달라고 했었지. 당신 잘못으로 이혼하면 돈 한푼도 못 받을까 봐 걱정하는 것 같은데. 그럼 이렇게 해. 당신은 나한테 위자료 천만 원 지급하고, 나는 당신한테 150억 재산 분할해 주고. 그렇게 끝내자.
“뭐? 너 지금 내가 그깟 돈 때문에 이러는 거로 보여?”
-그게 아니면 뭔데. 어차피 다른 여자들이랑 약 먹고 변태처럼 섹스를 즐기는 당신이 날 사랑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럼 돈 말고 뭐가 이혼을 망설이게 하는데? 돈 더 필요하니?
“고진아!”
싸움은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아니라고 했잖아. 나는 당신밖에 없어. 그 비디오는 정말로 누가 나를 음해하려고,”
-그 말도 정말 지겹다. 그만하자. 보안팀엔 잘 얘기해 뒀으니까, 지하 주차장으로 가. 그러면 거기서 보안팀이 당신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 뒤로는 걔들이 시키는 대로 해. 당긴 말대로, 나한테 피해 없게 해. 멍청하게 굴다가 기자들한테 들키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정영준은 끊어진 전화에 대고 고진아의 이름을 몇 번 더 불렀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강민재는 그가 다시 고진아에게 전화하려는 것을 막았다.
휴대폰을 빼앗아 들자, 정영준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붉어진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죄송합니다, 변호사님. 싸우지 말고 하셨는데…….”
“이해합니다. 오랜만에 겨우 직접 대화하신 건데.”
강민재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영준은 머리를 말리고 오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고진아 씨, 제대로 된 증거가 없으면 설득이 힘들어 보이네요.”
강민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린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단호했다.
위자료 천만 원과 재산 분할 150억은 변호사와 상의하여 나온 수치일 것이다.
정영준은 어차피 소송할 생각 아니었냐며 소리쳤지만, 고진아는 협의 이혼을 상상 이상으로 몹시 바라는 것 같았다.
그 비디오로 인하여 자신의 이미지는 이미 훼손되었고, 소송에 들어가면 1심에서 끝나지 않을 경우 최소 1년 이상의 시간을 허비해야 하기 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고진아는 부모가 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는지도 몰라.”
“예? 왜요?”
“굉장히 소송을 꺼리는 눈치야. 확실한 건 재산 규모를 봐야 알겠지만, 아직 고진아가 양진 리테일 사장으로 취임하기 전이라 공동으로 획득한 자산 규모가 그 정도는 되지 않을 텐데. 어차피 주식 같은 건 상속이나 증여분이라 분할 대상이 아닐 테고. 그런데 150억씩이나 불렀고, 심지어 부족하면 더 주겠다는 건 이상하지 않아?”
“음, 그렇네요.”
“정말 정영준 씨의 무고함을 믿지 않는다면 본인은 일방적인 피해자고. 그러면 돈 한 푼 주고 싶지 않은 게 일반적이잖아. 아무리 냉정하게 판단해서 재산 분할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걸 안다고 해도 150억이 부족하면 더 준다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 같거든.”
강민재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이혼을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네요. 태광 변호사들이 보기엔 정영준 씨는 그냥 서민 출신 재벌가 사위잖아요. 그러면 무조건 소송으로 가서 재산 분할을 더 받으려 하거나, 소송에서 끝까지 이혼을 거부할 거라고 말해 줬을 거란 말이죠. 시간이 엄청 많이 걸릴 거라고 미리 경고했을 거예요.”
“맞아. 분명히 그걸 알면서 시작했을 텐데. 돈을 더 주면서까지도 협의 이혼을 하겠다는 걸 보면……. 재판이 길어지면 결국 정영준 씨가 그 비디오의 출처를 밝혀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부모한테 피해가 갈 수도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추측이기는 하지만,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듯하다.
“일단 정영준 씨한텐 말하지 말고.”
“넵. 확실해지면 말해야죠.”
한 시간쯤 지났을까.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머리를 손질한 정영준이 거실로 나왔다.
어느 정도 감정은 다스렸는지, 표정 역시 차분했다.
“지금 출발하면 될까요.”
정영준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어느덧 5시 30분이었다.
강민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제 차로 가시죠. 정영준 씨 차량 노출됐을 텐데, 괜히 그거 타고 갔다가 기자들이 알아볼 수도 있으니까…….”
정영준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현관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뒤, 강 변은 지하 1층 버튼을 눌렀다.
“변호사님 사무실로 가지 마시고 댁으로 가시죠. 피곤하실 텐데. 제가 틈틈이 보고 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가는 길에 떨궈 드릴게요.”
아직 6시도 되지 않았건만, 일이 많았기 때문인지 마치 새벽까지 일한 것처럼 온몸이 뻐근했다.
때마침 내 오피스텔이 본사까지 가는 길에 있어서, 크게 시간을 지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집에 맥주가 있었나.”
나는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피로감이 더욱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대충 옷을 벗어 놓고,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에 샤워했다.
지금 시각은 6시 20분.
해가 뉘엿뉘엿 지고 바깥에는 어느덧 어둠이 깔렸다.
나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텔레비전을 켰다.
채널을 돌리다 마침 방송 중인 뉴스에 맞춰 놓았다.
[지명호 민정수석의 성상납 의혹에 관하여, 검찰은 참고인을 소환하여 30시간 동안 강도 높은 수사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뉴스 브리핑을 배경 음악 삼아, 냉장고에 하나 남아 있는 맥주 캔을 뜯었다.
어디 서랍에 마른안주를 넣어 두었던 것 같은데.
맥주를 식탁에 올려놓고, 서랍을 열었다.
[……지명호 민정수석에게 여성 연예인들과의 자리를 알선해 왔던 것으로 알려진 조현석은, 최근 유명 연예인들과 함께 찍은 과거 사진이 드러나면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다 먹었나.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조현석은 사진 속 인물은 본인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검찰은 조현석이 확실하다고 밝혔습니다. 검찰은 그 근거로, 조현석 옆에 서 있는 인물이 배우 유 모 씨이고, 유 모 씨가 공식 프로필에서 공개한 신장이 180cm인데도 불구하고 사진 속 조현석이 그보다 훨씬 크다는 점을 제시했습니다. 조현석의 공인된 신장은 193cm에 달하며, 1999년까지 농구팀 서울 양진 레인저스에 속해있었습니다.]“……193?”
문득 텔레비전 화면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화면 안에 가득 찬 조현석의 모습을 발견했다.
검찰에 출석하며 포토라인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내 눈은 자연스럽게 그의 손으로 향했다.
그의 네 번째 손가락에는, 푸른색 보석이 박힌 레터링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